『 사방이 안개로 쌓여 있다. 아무런 삶의 흔적도, 인기척도, 주위에는 고요한 적막과 함께 짙흐린 안개만이 존재한다. 터질 것만 같은 가슴...... 그러나 단발 마의 비명조차 보이지 않는 두려움에 다시 되 삼키고 만다. 순간... 온 몸의 힘이 빠진 듯 주저앉는다. 눈을 뜨고 있는 것인지, 감고 있는 것인지 조차 구분 지을 수 없다. 흐릿한 안개 사이로 의식만 맑게 비추인다.
“휘이잉......”
아무런 미동조차 없는 곳이지만, 바람소리 비슷한 무슨 소리인가가 들려 온다. 작게 소근거리는 들리지 않는 소리들만이 주변에 감싸고, 어딘지 모를 안개 속에서 멍하니 앉아 있다.
“뭘 그렇게 멍하니 보고 있어요?”
누군가 안개 너머에서 나에게 물었다. 소리가 나는 방향을 가늠해보려 했지만 그 후의 소리는 ‘위~잉’ 이라는 멍한 울림만을 남길 뿐이었다.
“킥킥...... 어딜 그렇게 두리번거리는 거여요?”
머리카락이 추픽거리는 공포가 순간... 온 몸을 휘쌓았다. 흐린 시야 사이로 나의 모습을 바라보는 어떤 존재감......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엉거주춤 보호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이후에 닥쳐 올 일을 대비하여, 다시 주변을 경계했다. 보이지 않는 어떤 것에 대해서......
“이봐요. 왜 그렇게 떨어요? 내가 안 보여요?”
세 번째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그 곳을 향해 달려들었다. 주먹을 뻗어 소리의 원흉을 향해 분노를 실어 날려보냈다.
“휘익......”
허공을 가르는 소리에 안개가 잠시 흩어 졌다 이내 제 자리로 뭉게뭉게 모여들었다.
“음...... 아직 내가 보일 때가 아닌가 보군...... 내가 너무 성급했나? 에잇. 아쉽지만 다음을 기다려야겠군......”
이내 모든게 다시 잠잠해졌다. 처음과 같이 흐린 안개터에 낮은 웅성거림...... 어리둥절 고개만 갸웃거리고 흐르는 물처럼 안개의 거친 파도에 모든게 사라져 간다. 』
“띠띠디 띠띠~~~”
카라에는 커피자국이 예쁘게 틀어박히고, 다림질 한번 안 해 본 것처럼 구겨진 와이셔츠에 넥타이가 꾸물꾸물 걸려서 진우의 몸짓에 따라 이리저리 대롱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다.
“네에...... 후아암. 김진우입니다. 음...쩝!”
“강과장님, 뭐하세요? 지금 9시가 넘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는 거예요? 설마 아직도 출발 안 하신 건 아니죠?”
커튼 사이로 얇은 빛 줄기가 빔처럼 퍼져 나왔다. 아직도 잠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진우는 짧은 한마디만을 내 뱉은 채 전화를 끊어 버렸다.
“흠...... 이...따...봐...... 우아암......”
전화기 너머로 다급하게 외쳐대는 소리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진우는 다시금 자리에 드러누워 ‘끙’ 거리며 눈을 감아 버렸다. 만사 귀찮다는 듯......
“과장님...... 과장님! 아~~~ 나 참. 아직도 자나 봐! 이제 50분 남았는데...... 왜 그렇게 속을 섞이는지......”
“놔두세요 이 대리님. 강 과장님 이러는 거 하루 이틀도 아닌데요. 어련히 알아서 오실려구요.”
민경은 그런 과장이 야속한지 핸드폰으로 퍽소리가 나도록 허벅지를 내려쳤다. 회색 정장 바지에 핸드폰 자국이 희미하게 남겨졌지만 민경은 상관없다는 듯 입을 꽉 다물고 준비 된 서류를 낚아채서 약속 장소를 향해 출발했다.
“어휴...... 내가 몬 살아. 항상 사람 가슴을 졸이게 하니......”
그녀의 푸념을 들은 남우식은 알 듯 모를 듯 미소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민경이 저만치 멀어지자 그도 곧 남겨진 가방과 서류를 챙겨들고 그녀를 따라 나섰다. 민경을 쫓아가면서 우식은 항상 반복되는 이 대리와, 강 과장의 허무한 신경전에 허를 내둘렀다. 지치지도 않나? 뭐라 말해도 소용없다는 걸 알기에 가만히 있었지만, 항상 그렇듯 오늘 일도 상당히 빠듯하게 잘(?) 처리 될 것 같아 기대감에 미소를 잃지는 않았다. 그저 그런 결과보다는 긴장감 넘치는 결과가 더 즐겁다고 생각하며 재빨리 민경의 곁에 붙어 걸었다.
“오늘도 재밌겠는데요?”
“재미? 우식씨. 사람 속 타는 게 재밌나 보죠? 또 속탈 생각하면...... 으휴...... 어서 가자구요. 가면서 우리라도 한 번 맞춰 봐야지. 하여튼 도통 이해가 안된 다니깐......”
얼굴을 구기며 투덜거리는 민경이었지만, 우식은 안다는 듯이 가볍게 웃음 지으며 차 문을 열었다.
“이상이 저희의 기획 안입니다.”
영동대교가 바라보이는 리베라호텔 라운지에서 민경은 이번 기획을 설명하는 설명회를 열었다. 낯선 눈빛들의 사내들을 바라보며 자신을 이렇게까지 당혹케 한 강 과장을 증오했다. 원래 이 설명은 그의 몫이었으니깐......
“대충 요지는 알겠소만 켄셉이 너무 약한거 같군요. 대형 할인 매장은 그 곳에도 이미 두군데나 있소. 후발 주자인 우리가 단순히 끼어 든다고 해서 어떻게 될 문제도 아니고, 요충지라고는 하지만 그 역시 2년 후의 일이지 않소. 만일 그들이 가격 경쟁이라도 벌인다면 상대적으로 너무 밀릴게 뻔해요.”
민경은 등줄기의 흐르는 한 줄기 땀방울을 무시하려고 앞에 놓인 잔의 물을 들어 한 모금 들이켰다. 그러면서 눈은 언제 나타날지도 모를 한 남자를 애타게 찾고 있었다. 여기서 막히면 끝이다는 생각이 머리를 사정없이 뒤흔들고 있었다. 회의 시작이 한 시간 가량이나 지났는데 그는 올 생가도 안 하니......
“에. 물론 기존의 업체와 유사한 방법으로 시작한다면 그럴 테지요. 같은 가격에 같은 모습이라면 그건 경쟁이 아니라 나눔일 뿐입니다.”
민경은 자신이 들고 있는 기획만으로는 불안했다. 납득시키지 못 할 것 같다. 이런 생각이 점점 더 그녀의 마음을 졸이게 만들었다. 옆에 앉아 있는 우식도 얼굴에 긴장을 가득 담은 채, 민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때가 가장 중요했다. 자신들의 기획과 계획이 의뢰인에게 얼마만큼의 신뢰도를 얻을 수 있는가가 그들로서는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그래야만 실행에 옮길 수 있으니 말이다.
“나눔은 유지일 뿐이고 경쟁은 발전이지요.”
모두의 시선이 다음의 말을 가다듬는 민경에게로 향해 있을 때, 회의장의 문이 열리며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베이지 색의 양복에 갈색 구두를 신고 한 남자가 웃으며 들어서고 있었다.
“저의 스승이신 케인즈 박사님이 하신 말씀하신 겁니다.”
가벼운 미소로 민경과 우식의 원망어린...... 하지만 반갑기 그지없는 눈길을 받아주며 테이블 주위의 낯선 사내들에게 가볍게 목례를 건넸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Oh․컨셀 C‘ 의 강진우라고 합니다. 이제부터는 제가 말씀드리도록 하죠.”
“어쩐지 안 뵌다고 했죠. 안녕하시오. 난 이응수라고 합니다. 이번 일의 의뢰주죠.”
검은 양복의 신사들은 진우에게 악수를 청하며 반겼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의뢰의 실질적인 실무자가 직접 설명해주길 내심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시겠지만, 그 두 업체는 이미 그 지역을 10여년이나 지켜 왔습니다. 그 동안 지역 시장 점유율마저도 70%나 됩니다. 그 들도 처음에는 가격 경쟁이니 마케팅 전략이니 해서 서로 죽이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죠. 하지만 결국 그들은 타협을 했습니다. 경쟁이 과도하다보니 서로 손해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죠.”
진우는 민경을 바라보고 씨익 미소를 머금었다. 민경은 얄밉다는 듯 그를 흘겨보았다. 하지만 더 이상 초조함은 없는 듯 했다.
“만일 그들과 타협을 하고 뛰어 든다면 지역 점유율 20%정도를 유지 할 수는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유지만으로도 벅찹니다. 이벤트니 사은품이니 하는 것도 반짝 효과만 있을 뿐입니다. 기존과 같은 운영은 힘들다고 보는 게 저희의 의견입니다.”
“그 건, 우리도 동감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인테리어와 같은 부분에 너무 큰 비중을 둘 필요는 없다고 보는데...... 사실 깔끔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생각으로는 인테리어애 그렇게 큰 부담을 줄 필요가 없는거 같습니다. 오히려 마케팅이나 홍보 전략과 같은 매출 부가 가치에 집중 투자를 해야 할 거 같은데 말입니다.”
의뢰주 옆에 한 젊은 이가 입을 열었다.
“단순한 인테리어라면 그렇지요. 하지만 그건 단순한 컨셉이 아닙니다. 바로 이미지화 된 상품이지요.”
“이미지화 된 상품?”
순간 자중은 의구심이 가득했다.
“남계장. 준비해 주세요.”
“네.”
진우의 말에 주위에 모여있던 의뢰주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우식은 곧 진우가 넘기는 서류 뭉치를 받아들고 민경은 진우의 손에 담긴 CD디스켓을 드라이브에 넣었다. 그들은, 알지는 못했지만 그 자료들이 상당한 설득력을 갖춘 자료임에는 분명하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프로그램이 실행되자 곧 벽면의 하얀 모니터에 작은 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미지화 된 상품의 가상 모델입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건 단순한 인테리어가 아닙니다. 쇼핑을 자극하는 테마를 갖춘 이미지 상품입니다. 각층은 여러분이 들고 있는 서류에 나타났듯이, 이 이미지를 극대화 시킬 수 있는 저희의 기획안입니다.”
모니터에 나타나는 영상과 서류를 번갈아 보던 의뢰주들은 고개를 끄덕여대며 서로 이런저런 말을 나누기 시작했다.
“ 점등적 투자 효과를 낼 수 있는 이 이미지화 상품이 저희가 제시하는 경쟁력입니다. 그 외의 기본적 사항은 아까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의뢰주들은 서로 돌아보며 무언가를 상의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의뢰주의 대표인 이응수라는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진우에게 다가와 악수를 건넸다.
“ 음...... 이제야 이해가 되는군요. 상당히 흡족한 경쟁력이였소. 좋소. 내일 중으로 연락을 드리겠소.”
“아. 참. 이런 계획이 있었으면 말을 해 줬었어야 줘. 마냥 사람을 기다리게만하고...... 흘린 식은 땀만해도 얼만지 알아요?”
민경은 진우를 노려보며 한바탕 핀잔을 늘어 놓았지만 목소리는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 우식도 긴장감에서 벗어난 듯 그들 사이에서 히죽 웃고 있었다.
“이젠 익숙해져야지. 내가 이러는 거 한 두 번도 아니잖아. 자자. 그러지 말고 어디 좀 가서 밥 좀 먹자. 어제 이거 제작하느라구 아침도 못 먹었더니...... 아 휴~ 죽것다.”
“익숙해지다니 그게 말이나 되요? 최소한 귀뜸이라도 해 줬어야지요. 하여간 도통 이해가 안된다니깐.”
우식은 킥킥거리며 민경을 바라보았다. 진우도 지겹다는 듯이, 하지만 익숙하게 어깨를 으쓱하며 그 자리를 빠져 나갔다. 티격태격 해 보았자 자신에게 승리의 여신은 돌을 던질 것이므로 현명하게 도망을 택한 것이다.
“어디가요? 아직 내 말은 안 끝났다구요.”
외면하듯 가버리는 진우에게 쏘아대며 민경은 뛰어가기 시작했다.
“애들도 아니고 맨날 싸운단 말야.”
뒤쳐진 우식도 한마디 내 뱉으며 그들을 쫓기 시작했다. 긴장감이 풀어진 탓에 그 들을 쫓는 우식의 발걸음은 그의 표정만큼이나 밝았다.
“우와~아~”
거대한 함성이 메아리 되어 돌아 올 틈도 없이 더욱 커다란 파음에 묻혀버리는 곳. 수 많은 사람들이 몇장의 표를 들고 중앙에 꾸며진 트랙을 달리는 말과 기수에게 환호성을 쳐대고 있다.
“달려. 달려. 우...... 그래 좀만 더......”
3번 말이 7번 말과 나란히 앞서 달리고 있었다. 트랙을 돌 때 서로를 경계하며 마지막 힘을 짜내는 두 마리의 말은 사람들의 괴성을 연료 삼듯 고함 소리에 맞춰 더욱 박자를 가하였다. 트랙을 안으로 끼고 돌던 3번 말이 옆에서 죄여 오는 7번 말과의 부딪힘에 주춤하는 순간 7번 말은 3번 말을 제치고 앞으로 뛰쳐나오기 시작했다. 3번 말이 뒤로 쳐지자 사람들은 애가 타기 시작했다.
“오... 안 돼. 안 돼. 3번. 으 좀만 더...... 달려. 달려.”
하지만 그런 외침의 바램은 7번 말이 골인함에 따라 분노로 바뀔 뿐이었다. 곳곳에서 마권을 내 던지며 내 뱉는 욕지거리가 잠시의 적막을 깨고 경마장을 감싸 버렸다.
“제길. 저거 사기 아니야? 어떻게 만년 꼴지의 말이 1등을 할 수 있지?”
경기가 끝나며 피날레로 뿌려진 마권 꽃 속에서 한 젊은이가 한 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며칠 째 소일로 찾은 경마장에서 수 백만원을 날린 그는 초점 잃은 표정으로 운동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들의 투덜거림도 움직임도 모두 그 와는 다른 세상의 일이었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짧은 머리에 다부진 텩. 빗살지게 꺽인 콧등에 숯덩이 같은 눈섶의 그 젋은이는 멍한 표정에서 깨어나 입고 있던 검은 자켓의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네”
한동안 무슨 소리인가를 듣던 그는 아무말 없이 핸드폰을 다시 집어 넣고, 들고 있던 마권을 내 던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서둘러 사람들을 헤치며 출구를 찾아갔다. 출구를 향하던 그의 눈은 어느새 밝게 빛나고 있었다.
갈색 양복의 중년 남성이 비행기에 앉아있다. 날카로운 턱선이 무엇이든 베어 버릴 기세로 이 곳 저 곳을 향하고 있다.
“잠시 후. 제주도행 항공기가 이륙하겠습니다. 기내에 계신......”
기내 안내 방송이 나오자 조용히 안전 벨트를 매면서도 그의 턱은 주변 곳곳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턱으로는 위협적인 자세를 유지하며 그는 한 손으로 핸드폰을 들었다. 그리고 어디론가로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비행기가 덜컹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소리에 모든 것이 묻혀지는 순간. 남자는 몇마디를 내 뱉고 이륙 직전, 전화를 끊어버렸다.
“피이융~”
“엄마. 무서워. 흑흑...... 엄마.”
남자의 앞 좌석에 앉아 있던 어린 여자아이가 코를 훌적거리며 옆의 엄마에게 손을 내미는 모습이 보였다.
“괜찮단다. 울지 마렴. 엄마가 옆에 있잖아. 곧 괜찮아요......”
어린 여자아이를 달래는 여인의 목소리가 작지만 또렷이 남자에게 들렸다.
날카로운 턱선으로 주변을 압도하던 남자는 순간 멈칫 했다. 한 순간 그의 눈은 그 모녀가 앉아 있으리라 여겨지는 좌석을 향했으나 그의 눈에는 빨간 좌석의 뒷부분만이 보였을 뿐이었다.
“제길......”
갑자기 그 남자의 눈빛이 흔들렸다. 턱선도 멈칫 했으나 이내 다시 그의 눈빛은 날카로운 턱선을 부여잡고 사방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5일이라...... 너무 짧군.”
그 남자의 입에서 나온 한마디였다.
“여...... 그 집 해물탕 끝내주내. 이름이 뭐였드라?”
“바닷 속 생물들의 공중 목욕탕.”
“맞아.‘바닷 속 생물들의 공중목욕탕’. 야. 이름 정말 특이하네. 게다가 메뉴둘도 웃기더라구. ‘고래에 등터진 새우들의 병원’, ‘꽃게 부인 바람났네’, 키키...... 맛도 맛이지만 이름 하나 엽기네......”
진우는 식당을 나선 뒤 내내 감탄사를 연발했다. 티격태격 싸우던 민경도 그 식당에 들어가고 나서는 내내 웃기만 했다. 덕분에 그들은 아무 다툼 없이 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
“다음에 김 계장하고 태호, 영식이 다 데리고 한번 더 오자고. 아! 그래. 아예 회식을 그 곳에서 하지. 맛도 괜찮고 분위기도 그렇싸하니깐 식사하기 딱이겠군.”
회사로 돌아오는 차 속에서도 진우는 식당 얘기를 멈추지 않았다.
“참. 강원도 건은 어떻게 되었데?”
“글쎼요. 김 계장이 직접 가보기는 했지만, 영 탐탁치 않더라구요.”
“그래?”
“네. 아무래도 불안한가 봐요. 처음 투자하는 일이니깐요. 내일 김 계장이 돌아오면 알게 되겠지만 쉽지 않을 거 같아요.”
잠시, 진우의 눈빛에 불안감이 비추어졌다. 우식은 운정을 하느라 진우의 소습을 보지 못 했지만, 민경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진우를 바라보았다.
“걱정마세요. 김 계장이 알아서 잘 할거예요.”
“그렇긴 해도...... 아무래도 내가......”
“아휴~ 그만 좀 해요. 어떻게 모든 일에 다 끼어 들려고 하세요? 그 건은 김 계장 관할이니깐 맞겨두세요. 그 친구도 실력이 있다구요. 뭔 남자가 일뿐이 몰라, 일뿐이...... 그러니 누가 좋다고 하겠어요? 어떻게 사사건건 참견하려고 하세요. 좀 쉬엄쉬엄 해도 되잖아요.”“
“알았어. 알았다구. 우식씨 음악이나 틀자구. 기분전환이나 하게.”
잠잠하던 민경의 잔소리가 다시 시작되자 진우는 움찔거렸다. 차안에는 도망칠 곳고 없으니 그야말로 독안에 든 쥐 꼴이었다. 민경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자 우식도 기다였다는 듯이 카스테레오를 틀었다.
“소리 좀 켜. 응. 야! 노래 좋네.”
우식이 볼륨을 높이자 차안은 금새 오케스트라를 방불케하는 연주장으로 돌변했다.
“강...... 님. 어떻............ 있어여~ 좀...... 좀 해!”
차안에 울려대는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의 연주 소리에 묻혀 민경의 목소리는 사라져 버렸다. 다만 방긋방긋 거리는 민경의 입모양만 보일 뿐이었다. 그런 민경의 모습을 바라보며 진우는 싱긋 웃어보였다.
민경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다가 이내 창 밖으로 시선을 던져 버렸다.
“뚜드두 방팡~”
차안은 온통 울림만이 가득했다. 가슴이 쿵쾅거리는 울렁임......
진우가 사무실에 들어서자 훤하니 비어있는 자리들에서 듬성듬성 고개 숙이고 있던 몇몇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진우 일행을 반겼다.
“강과장님, 어서 오세요.”
“와. 또 한건 터졌던데요. 하여간 1과는 대단해요.”
“아이구! 얼굴 보기 힘듭니다.”
가볍게 손을 흔들며 진우는 빠르게 자신의 사무실로 걸어 갔다. 짧은 소란이 스쳐지나가고 진우는 자신의 책상에 손가방을 던져두고 잠시 서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쳐다보았다.
“아니. 왜 사무실이 비어 있어? 다들 어디 간거야?”
민경은 자신의 의자에 앉아서 가방을 내려 놓으며, 이 무심한 상사에게 한마디 일침을 놓았다.
“‘으이구...... 지금이 몇시인지 보고나 말하세요. 다들 점심식사하러 갔으니깐 사무실이 텅텅 비어있죠. 도대체 시간 관념이 그렇게도 없으세요?”
민경의 타박에 진우는 무안한 듯이 머리를 긁적이며 자신의 뒷 벽에 붙어 있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1시 반을 가르키고 있는 시계를 보고서야 진우는 점심식사 시간을 떠 올릴 수 있었다.
“그렇군......”
진우의 무안섞인 목소리를 들으며 우식은 피식 웃었다. 민경운 한심하다는 듯이 한숨을 쉬며 자신의 책상에 놓인 서류룰 들여다 보았다. 진우는 웃 옷을 벗어 옷 걸이에 걸어 둔 채, 컴퓨텨를 켰다. 우식도 라리에 앉아 못다 처리한 서류둘울 골똘이 들여다 보기 시작 했다.
진우의 책상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다른 사원과 같은 모양의 책상에 의자 역시 똑 같았다. 책상위에는 몇 권의 책과 전화 한 대, 그리고 정리가 깔끔하게 되어 있는 서류철 세 개와 컴퓨터 한 대가 고작이었다. 흔한 달력이나 거울, 하다 못해 휴지조차 없없다. 하지만 작은 공간에는 그 것 만으로도 풍족한 느낌을 주기에는 충분했다.
진우는 자리에 앉아 마우스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모니터를 뚤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민경과 우식도 자신에 일에 빠져 태호와 영식, 그리고 미나가 들어오며 건네는 인사도 받는 둥, 마는 둥 했다.
“강 과장님. 이번 일도 잘 되셨다구여......”
오태호가 육중한 비계를 흔들며 느글거리는 목소리로 진우에게 다가왔다.
“어? 태호씨 아냐. 식사들 잘 했나?”
태호가 진우의 곁으로 오자 진우는 어린 아이와 같이 작아 보였다. 영식과 미나는 진우를 보며 고개를 숙이며 싱긋 웃더니, 자신들의 자리로 돌아갔다.
“아무튼 과장님니 손대면 넘어가지 않는 일이 없나 봐여.”
“뭘...... 아직 결정도 안 난 일인데 뭐.”
“제 직업적인 감각상...... 그 정도로 얘기가 진행되었다면 돼여.”
태호는 진우의 책상에 걸터 앉아 그 느글거리는 얼굴을 들이 밀며 의미 심장한 얘기를 하는 것처럼 말했다.
“으이구...... 자기가 예언가인 줄 알아요.”
민경의 옆에서 나지막한 소리가 들려 왔다. 영식이 자리에 앉으며 나직히 되뇌였다. 진우는 환히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호의 어깨를 툭툭치며 앞에 놓인 서류를 집었다.
“그럼 좋겠지. 난 부장님 뵙고 올 테니깐...... 자자 이제 일들 시작하자구.”
키득거리는 웃음을 등 뒤로 한 채, 진우는 부장의 방으로 향했다. 사무실 곳곳은 어느새 북적거리고 있었다. 복도에도 점심을 마치고 늦었는지 뛰어드는 사람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똑똑......”
“들어오세요.”
진우가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차분한 음성이 들려 왔다. 진우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 자리에 앉아있던 한 여성이 자리에서 일어나 진우를 반겼다.
“아! 강 과장님이군요. 언제 오셨어요?”
“네. 좀 전에 왔습니다. 한 부장님. 이번 의뢰건을 보고 드리려 왔습니다.”
“아. 일단 앉아요.”
진우는 살며시 고개를 숙이며 쇼파에 앉았다. 한 부장이라 불린 여성도 진우를 따라 가운데 쇼파에 몸을 기대었다. 조금 긴 듯한 생머리가 자연스레 그녀의 흔들림에 따라 요동치다 그녀의 가슴 앞에서 멈추었다. 가는 눈 섶에 조금은 올라간 듯한 눈매는 오른편에 앉아 있는 진우를 꿰뚤어 버릴 듯 바라보고 있었고, 그녀의 입술은 살며시 왼편으로 기울어 있었다. 평범하지 않아 보이는, 조금은 도발적인 그녀의 얼굴을 진우는 아무 변화없이 물끄럼이 바라보며 자신의 손에 들린 서류를 펼쳐 보였다. 하지만 한부장의 눈은 진우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진우가 설명하는 내내 한 부장은 진우만을 바라보며 예의 요상한 미소로 그의 설명을 받아 주었다.
“...... 내일 중으로 결과를 전한다고 했습니다.”
진우의 보고가 끝나자 한 부장은 한쪽다리를 꼬며 양손을 무릎위에 올려놓았다. 하지만 그녀의 자세만 바뀌었을 뿐 그녀의 눈길은 변함이 없었다. 진우는 잠시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하얀 얼굴에 담긴 눈동자가 깊다라는 생각을 머금은 때, 그녀가 입을 열었다.
“흥미롭군요...... 대상의 이미지를 부각시키는게 아니라 그 이미지를 상품화 시킨다...... 강 과장은 발상이 참 흥미로워요. 이미지화 된 상품이라. 충분히 시장성이 있군요. 좋아요. 내일 좋은 결과를 기대해도 되겠군요. 호호......”
한 부장은 손을 무릎에 탁탁치며 말했다. 진우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고, 한 부장은 몇마디 실없는 소리를 하다가 전화벨이 울리자 전화를 받느라 말을 그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우는 한 부장이 전화에 신경을 쓸 때, 살며시 부장의 방에서 나와 버렸다. 사무실로 돌아가는 그의 얼굴은 조금은 굳어진 표정이었다.
진우는 한잔하자는 태호의 유혹도 피곤이라는 이름으로 이겨내고 일찍 귀가했다. 혼자 사는 집치고는 상당히 넓은 진우의 맨션은 몇일간 세수 한 번 못해 본 아이의 얼굴마냥 곳곳에 쓰레기 투성이었다.
진우는 일단 침대부터 찾았다. 발길에 채이는 신문이나 맥주캔을 힘없이 밀어내며 진우는 침대로 쓰러지듯 몸을 던졌다. 잠시 후...... 낮은 코고는 소리만이 적막속에 몸을 숨겼다.
『 광풍이 온 몸을 휘감았다.
“아아악......”
온 몸이 돌고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비명조차 어느샌가 회오리 사이에 묻혀 사라져 버렸다. 나의 몸이 어딘가로 맹렬한 기세를 머금은 채 끌려가고 있었다. 미약하게 붙잡던 의식을 놓쳐 버린 순간, 하얀 빛이 내려 쬐는 어느 점인가로 내 몸이 끌려 들어갔다.
“정신이 들어요?”
“어...... 어?”
진우는 흐릿한 시야속에서 의식을 되 찾았다. 눈을 뜨니 너무도 밝은 시야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 이제야 눈을 뜨는군요. 히히.”
가물거리는 시야 사이로 나풀거리는 작은 물체가 희미하게 보였다. 진우는 몸을 일으키며 눈을 비비기 위해 팔을 들었다. 하지만 몸이 천근인지 만근인지 그 동작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누구...... 시죠?”
눈을 비비며 진우는 희미한 존재에게 물었다.
“어떻개 된거죠?”
“사념(思念)에 세계(世界)로 들어오신걸 환영해요. 제 이름은 민민(Min min)이라고 해요. 저번에도 한번 뵈었는데, 절 못 보시더라구요. 환념의 안개가 너무 짙어서 말예요.”
서서히 눈의 시력이 돌아오자 진우는 눈 비비던 손을 띄고 자신을 민민이라 밝힌 여인을 바라보던 진우......
“허걱!”
진우는 눈 앞에서 하얀 빛을 발하는 노란 머리의 작은 날개를 지닌 귀여운(?) 손다닥보다 조금 큰 여인(?)이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진우는 짧은 신음성을 내 뱉으며 다시금 의식을 잃고 말았다.
“어? 또 기절한거야?”
민민은 다시금 기절하는 진우를 어이없이 바라보며 한 숨을 지었다. 민민은 하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내둘리다가 조용히 사라졌다. 하얏던 빛에 둘려 쌓인 민민의 존재가 희미해지며 진우 주위의 모습도 희미해져갔다.
“다시 찾아 올께요. 아직은 때가 아닌가 봐요...... 휴~”
하얀 빛이 어둠속으로 빨려 들어가자 곧 모든 것이 무(無)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
“으으윽...... ”
낮은 신음 소리를 내뱉으며 진우는 띄이지 않는 눈을 뜨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어...... 억.”
진우는 온 몸이 부셔지는 느낌을 얼굴에 그대로 드러냈다. 단순한 피곤이라기엔 너무나 엉망이었다. 진우는 이해가 괴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침대에서 미끄러지듯 내려왔다.
침대의 옆면에 등을 기대며 진우는 왼팔을 들어 오른팔을 매만졌다.
“으윽......”
근육통이 진우의 왼팔을 타고 온 몸에 찌르르 전류를 흘려 보냈다. 진우는 움찔하며 고개를 들어 왼팔에 있는 시계를 보았다. 두시 반인지, 여섯시 10분인지 명확하게 구분 할 수는 없었지만, 아직 이른 새벽이었다. 진우는 멍하니 앉아 있다 되뇌였다.
“민민...... 이라고?”
진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다가 이내 자신이 어제 밤에 옷을 갈아입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서서히 일어났다. 휘청거리는 그의 몸처럼 그는 인상을 찌푸린 채, 옷을 벗기 시작했다.
“뭔가 꿈을 꾼거 같은데...... 제길. 기억이 가물거리는군.”
진우는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더니, 고개를 한번 주억거리고는 다시금 침대로 다이빙을 해 버렸다.
잠시 후...... 진우의 주변은 낮은 진동의 코고는 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수줍은 듯 얼굴을 붉히며 저 회색 물결의 바다가 아침의 얼둘을 내 밀고 있었다.
넓은 모래사장은 아직 어둠의 장막에 가리어 꼭꼭 숨어 있고, 회색 물결 사이로 작은 배 몇 척만이 이 공간의 유동성을 나타내주고 있었다.
작은 언덕. 모래사장과 바다를 한 눈에 바라 볼 수 있는 둔텩위에 한 남자가 서 있다.
그는 날카로운 턱선을 수줍음타는 여린 정렬의 소녀에게 고정시키고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배들이 지나며 남겨진 파문이 하얏게 반사되며 그의 눈에 담긴 어둠을 잠시 밝혀주고 있다.
서서히 부끄럼을 참고 고개를 내미는 모습을 한 없이 바라보던 그의 눈에 붉은 회색의 바닷물이 보였다. 사라져간 배들의 파문이 묻히고 새롭게 보이기 시작한 배들에 의해 새로운 무늬가 바다게 아로 새겨졌다. 붉은 일렁임......
저 멀리 모래사장을 달려가는 사람도 어둠속에서 몸을 일으키고 모든 붉음과 회색 빛은 곧 사라져 버린다. 칼날같은 턱을 모아 세운 채, 붉은 소녀의 모습을 쏘아보던 그는 자신의 존재가 느껴질 쯤, 살며시 그 자리를 떴다.
“강 과장님. 부장님이 찾으세요.”
“알았어요.”
진우는 인상을 찌푸린 채 한 부장을 찾아갔다. 자신의 몸이 왜 그렇게 찌뿌둥한지 의아해한 채, 복도를 지나갔다.
“이거 죽겠군...... 피곤하다고 이렇게까지 아플리는 없는데......”
한 부장은 진우를 보며 방긋 미소지었다. 진우는 고개 숙이며 한 부장에게 다가갔다.
“어서 와요. 강 과장......”
그녀의 손짓에 따라 진우는 쇼파에 앉았다. 그녀는 잠시 책상위에서 무엇인가를 찾더니 이내 쇼파의 중앙에 앉았다. 진우는 물끄럼이 그녀가 하는 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얀 정장바지에 흰 블라우스를 입은 그녀의 머리카락이 살랑거릴 때마다 진우는 야릇한 내음을 느낄 수 있었다.
“강 과장을 보자고 한 것은 이번에 부탁 할 일이 있어서예요.”
그녀는 조금 올라간 눈매를 더욱 치켜 올리며 진우에게 말을 했다. 진우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고, 그런 그를 보는 그녀의 표정은 미소로 물들어갔다.
“부탁 할 일이라니요?”
그녀는 대답 대신 씽긋 웃으며 자신의 손안에 있던 서류를 진우에게 넘겼다. 진우는 서류를 받아보며 그 내용을 살펴보았다. 그것은 의뢰 서류였다.
“이건...... 의뢰 서류가 아닙니까?”
“그래요. 의뢰 서류죠. 이번에 새로 들어 온 의뢰인데, 그걸 강 과장이 맡아 주었으면 해서요.”
진우는 서류를 덮었다. 그리고 무표정한 모습으로 단호하게 말했다.
“이미 제게는 다른 일이 있습니다. 그 일을 처리하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바쁩니다.”
한 부장은 진우의 얼굴을 뚤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왼쪽 다리를 들어 오른쪽 다리위에 올려 놓으며 그 위에 양손을 얹어 놓았다.
“네. 강 과장의 말은 충분히 알거 같아요. 뭐...... 당장 얘기하라는 건 아니에요. 이번에 처리하는 일이 해결되면 그 때 결정하도록 하죠.”
한 부장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을 했다.
“더 하실 말씀이 없다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진우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발을 떼려는 진우에게 차분하지만 은근함이 베어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류는 가져 가세요. 보류를 하더라도 일단 검토는 해 봐야죠.”
잔우는 주츔거리다 멈추어서는 그녀와 서류 뭉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서류 뭉치를 들어 올리고 자리를 떴다. 마치 도망이라도 치듯이......
부장실을 나오면서 진우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의 이마에는 잘 여문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몸을 떠는 순간, 그의 의연하던 표정은 스르르 무너지듯 징그러졌다. 싸움터를 헤매이던 패잔병처럼, 그는 절뚝거리며 걸어갔다.
“제길...... 이상하게 저 여자만보면 적의가 느껴진단 말야.”
진우는 자리에 앉아서 호된 꾸중을 들은 아이마냥 투덜거렸다.
“네?”
이상스레 어그적거리는 진우를 불안하게 바라보던 민경은 진우의 목소리가 들려오자마자 받아쳤다.
“아...... 아냐.”
민경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진우를 바라보자 태호가 고개를 쑥 내민 채 물었다.
“어머. 이 대리님은 아직도 과장님을 모르시나 보져? 저렇게 인상 구기고 투덜대는 모습을 보면 딱이잖아여. 강 과장님. 변비져?”
능글거림으로 얼굴을 가린 채 태호가 물었다.
“킬킬......”
어디서인지 모르는 웃음이 터져나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책상 곳곳에서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으헤헤헤.”
진우는 살며시 미소지으며 태호에게 손가락을 갸웃거렸다.
“태호씨. 헛다리 잘 집네.....”
“어. 어? 그럼 치질이에여?”
“태호씨!”
“우히히히히.”
사무실에 웃움 소리가 가득했다. 태호는 한쪽 눈을 싱긋 감더니 고개를 쏙 넣어버렸다. 진우도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어버렸다. 우식과 민경도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해 눈물까지 찔금거렸다. 영식은 들고 있던 서류로 얼굴을 가린 채 자신의 호흡에 서류가 펄럭거리는 것도 의식하지 못하며 웃어대고 있었다. 다만 전화를 하고 있던 미나만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바라보다 황급히 전화기의 누군가에게 사과를 하고 있었다.
진우는 앞에 놓인 서류로 책상을 몇 번 치고는 통제 불능에 빠진 부하직원들에게 엄숙히 한마디 했다.
“자자. 실없는 소리 그만들하고 일들 합시다.”
그제서야 사무실의 소동은 가라 앉았다. 그러나 곧 곧에서 신음소리만큼은 끊이지 않고 터져 나오고 있었다. 진우는 한숨을 내 쉬며 들고 있던 서류를 책상 구석에 놔두고 컴퓨터를 키며 되뇌였다.
“내 참...... 치질이라구?”
직사각형 도형의 세계. 강한 자부심이 넘쳐 흐르는 32층 빌딩이 딱 벌어진 어깨를 꼿꼿이 세운 채 밑바닥을 내리보고 있다. 햇살이 가려진 빌딩의 등부분에 한 사람이 메달려 있다. 얇은 줄 하나에 달린 의자에서 그는 길다란 막대걸레를 들고 유리창을 닦고 있었다.
짧은 머리카락에 빗살진 코. 하얀 목장갑을 낀 채, 왼손으로는 의자를 잡고 오른 손으로는 긴 막대걸레를 흔들어대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유리를 닦으며 밑으로 밑으로 내려 왔다. 빌딩의 유리는 외관상 검게 코팅이 되어 있었지만, 어두운 그늘 아래서는 선명하게 안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의 손은 유리를 닦고 있었지만, 눈만은 빛을 발하며 무언가를 쫒고 있었다. 천천히 줄을 당기고 유리를 닦고 있던 그의 눈이 순간 멈추었다. 그러나 그의 손은 여전히 유리를 닦고 있었다.
눈 앞에는 한 여성이 책상에 앉아 전화를 하고 있었다. 작은 방의 출입문과 유리벽 넘어의 그 사이에 그녀는 앉아 있었다. 그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휘이잉~”
바람이 몰아쳤다. 잠시 줄이 흔들렸으나 그는 여전히 유리벽 넘어의 그녀를 뚤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목과 어깨 사이에 수화기를 끼운 채로 책상위의 서류들을 뒤적이고 있었다. 그녀는 조급한지 허둥거리다가 왼편의 시계를 바라보았다. 순간...... 그의 눈에 불이 일었다. 그는 천천히 왼손을 들었다. 그의 손에는 둥근 원형의 물건이 들려 있었다. 그는 그 물건을 유리벽에 대었다. 둥근 고무마개처럼 생긴 물건의 작은 단추를 누르자 문어의 빨판마냥 그 것은 유리벽에 달라붙었다. 그는 조심스레 그 것을 돌렸다. 아무 소리도 없이 돌아가던 물체가 멈추자 그는 긴 막대걸레를 그 물건에 갖다 대었다.
“휴우우웅~”
갑작스레 돌풍이 몰아쳤다. 그는 흔들렸으나 왼손은 놓지 않았다.
“......”
긴장을 했는지 그의 이마에 땀방울이 베어 들었다. 그는 다시금 자세를 바로 잡고 왼손을 살며시 띄웠다. 그리고는 검은 자켓의 주머니를 뒤졌다. 오른손의 걸레는 그 물건에 걸려 있었다. 그가 왼손을 다시 빼자 그의 왼손에는 소음기가 달린 총이 한자루 쥐여져 있었다. 걸려 있는 막대걸레를 향해 왼손을 뻗고 그와 동시에 오른손을 내리쳤다.
“틱.”
“픽.”
두 소리와 동시에 전화기를 목에 낀 채 무언가를 찾던 그녀는 며리로 책상을 향해 세차게 들이 밀었다. 잠시 부들부들 떨던 그녀의 몸은 움직임을 멈추었고, 그와 동시에 그는 막대걸레를 놓고 줄을 당겼다. 잠깐의 사이 유리벽 넘어의 그는 사라져 버렸다. 조그만 유리구멍 하나만이 책상에 머리를 들이 댄 채 시뻘건 울음을 토하는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녀의 주위에 있던 서류들은 빨간 염색을 했고, 수화기에서는 낮은 소리만이 들려 올 뿐이었다.
빌딩은 태양을 향한 채 꼿꼿히 서있었다. 작은 구멍이 그의 등에 뚤리었지만, 어둠은 그 모든 것을 가린 채 침묵하고만 있었다.
제주 해변이 가득 보이는 발코니에서 담배 한 대를 문 남자가 바다를 쏘아보고 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담배만을 피워대고 있다.
제주도에 온지 이틀이 지났지만 그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첫날 찾은 해변 언덕의 아침을 제외하고는 유명한 한라산도, 용담로도 그는 찾아가지 않았다.
붉은 담배 불꽃 사이로 안개가 피어 올랐다. 그의 눈은 한없는 풍만을 상징하는 바다에 어느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챔피언에게 도전하는 눈빛...... 칼날같은 그의 턱선은 그의 눈빛만큼이나 써늘했다.
“픽......”
그의 휴대폰에서 메새지를 알리는 소리가 들리자 그는 담배를 털고 핸드폰을 열었다. 핸드폰의 문자를 바라보던 그는 한마디를 내 던지며 발코니에서 몸을 돌렸다.
“끝났군......”
안으로 들어가는 그의 손에 있던 담배 꽁초가 힘없이 떨어져 내렸고 강렬했던 그의 눈빛은 한순간 짙은 아픔을 머금다 이내 뿌옇게 사라져 버렸다. 그의 손에 들려 있던 핸드폰에 있던 글은 삭제 버튼을 누르는 그의 손에 따라 곧 지워졌다. 지워지는 글귀는 단 한줄이었다.
《 상희. 지하로 보냈다. 》
“자. 우리 특영부 1과를 위하여!”
“위하여!”
“건배.”
“건배.”
지글지글 비계가 타들어가며 주변의 유혹의 안개를 뿌리는 삼겹살 집에서 진우를 비롯한 특영 1과 직원들이 모여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퇴근 전, 의뢰주 이응수로부터 오너를 받고 태호의 제안으로 강원도 출장을 간 김계장과 다른 한명을 제외한 모든 과원들이 즉석 축하 회식을 갖게 되었다.
“우리 과장님. 변비 때문에 볼 일은 잘 못보시지만, 일 하나는 타의 추종을 불허 한다니깐......”
“킥킥...... 태호씨! 변비가 아니라 치질이라구. 치질. 킥킥킥......”
“여여. 이 대리까지 그러기야? 그나저나 김계장하고 경희씨가 없으니 좀 아쉽네...... 아무튼 다들 수고 했어요. 오늘 하루는 신나게 한 잔들 하고, 내일부터는 더 열심히들 일 합시다.”
“예~”
진우를 위시로 모두들 잔을 높이 들었다. 태호는 자신의 세상을 만났듯, 이 곳 저곳을 기웃거리며 잔을 부어대었다.
“여...... 영식씨. 분위기만 잡지 말고 한 잔 걸죽히 하자구, 히히......”
거대한 태호의 몸이 옮겨 갈 때마다 테이블이 들썩거렸다.
술자리가 파 할 때까지 태호는 가만히 한 곳에 앉아 있질 못 했다. 하지만 그런 태호 덕에 모두들 즐거운 한 때를 보낼 수 있었다.
2차를 가자며 생 때를 쓰는 태호를 겨우겨우 달래 놓고 진우는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으휴...... 아저씨. 사당동이요.”
진우가 횡하니 택시를 타고 가버리자 태호는 남아 있는 사람들을 이끌고 주먹을 치켜들며 어디론가 끌고 갔다. 민경은 누군가를 만난다며 진우보다 한 발 앞서 떠난 뒤여서 자연 남은 사람들은 태호의 돌격을 저지 할 수 없게 되었다. 진우는 자리에 기대어 고개를 내둘르며 끌려간 사람들을 동정하듯 내 뱉었다.
“내일 또 비리비리 하겠군......”
진우는 피곤한 듯 차에 기대인 채, 그대로 눈을 감았다.
『 거대한 나무들이 늘어선 숲속. 진우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길게 도열하듯 늘어선 관목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이건 뭐야?”
진우는 당황한 얼굴로 주위를 살폈다. 어두스름한, 그렇지만 모든게 선명한 숲속 길...... 잠시 진우는 생각에 잠겼다. 의뢰가 성사 되어서 작은 회식을 했고, 물고 늘어지는 태호를 뿌리친 채 택시를 탔던 것 까진 기억을 했지만 그 뒤의 기억은 아무것도 없었다. 택시에서 내린 기억도 나지 않았다. 불현 듯 진우는 두려움에 휘싸였다. 혹시 택시강도?
“제길...... 어. 어? 있네?”
주머니를 뒤져보니 그의 지갑은 그대로였다. 지갑의 안도 예전 그대로였다.
진우는 다시 고민에 휘싸였다.
“휘리리릭.”
숲속에서 이상스런 소리가 들렸다. 섬뜩한 기분에 진우는 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나무로 빽빽이 들어 찬 곳에는 어둠만이 있을 뿐 이상스런 것은 보이지 않았다. 진우는 서서히 앞을 향해 걸어갔다. 자신이 서있던 방향의 정면으로 일단 걸어갔다. 조금 어둡긴 했지만 선명하기에 걷는데 문제는 없었다.
“휘리리릭.”
다시금 예의 이상스런 괴음이 들려왔다. 진우는 머리뒤가 뻣뻣해짐을 느꼈다. 걸음을 멈추고 다시 소리가 들리는 곳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그 곳에는 나무들만이 있을 뿐이었다. 나무와 작은 어둠...... 작은 어둠?
작은 어둠이 선명하게 보였다. 둥근 모양에 길쭉한 네 다리. 어둠속에 선명한 두 개의 옅은 어둠. 똑같은 크기의 작은 어둠들이 다섯이나 보였다. 진우는 하얏게 쐰 얼굴빛으로 그들을 바라보다, 드 어둠속에 선명한 두 개의 옅은 어둠이 눈이라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정신없이 앞을 향해 뛰었다.
“으~ 으아~ 아악~”
단발마의 비명을 뒤로 한 채, 진우는 정신없이 길을 따라 달렸다. 작은 어둠속의 그 것들은 날카로운 소리를 내지르며 숲에서 뛰쳐나와 진우를 뒤쫓았다.
“끼이야아.”
그 것들은 순식간에 진우를 따라잡았다. 진우는 식은 땀을 희날리며 눈이빠져라 달렸지만, 그 것들은 너무나 빨랐다.
“헉, 헉, 허어억."
가장 앞장서 달리던 작은 어둠이 두 다리를 들어 진우를 내리쳤다. 진우는 신음을 내 뱉으며 길가에 꼬꾸라졌다. 진우를 내리친 작은 어둠의 뒤에서 따라오던 작은 어둠들이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진우는 눈을 질끔 감았다.
“광(光).”
갑작스레 빛줄기가 진우를 향하는 작은 어둠들에게 뿌리어졌다.
“크극.”
진우를 향하던 작은 어둠들은 빛줄기에 휩싸여 사라져 버렸다. 혼자 남겨진 작은 어둠은 일갈이 터져 나온 곳을 바라보다 잠시 주춤하더니 크게 울부짖으며 재빨리 숲속으로 뛰쳐 들어갔다.
“크으아아~”
진우는 찟어진 등줄기의 상쳐와 넘어질 때 생긴 상처로인해 정신이 없었지만, 고개를 들어 빛이 뿜어져 온 곳을 바라보았다. 그 곳엔 노란 빛으로 둘러 쌓인 작은 소녀가 땅위에 뜬 채 진우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도대체...... 뭐.. 뭐야?”
진우는 힘없이 그러나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향해 웃으며 다가오는 그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진우의 입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한마디가 뛰쳐 나왔다.
“민민(min min)?"
싱긋 웃으며 그 소녀는 두 손을 진우에게 향한 채 빛을 쏘아댔다. 진우는 눈이 부신 듯 인상을 찡그렸지만, 그 빛은 진우를 감싸고 포근하게 안아주었다. 빛이 사라지자 등과 팔 다리의 통증도 함께 사라져 버렸다. 어안이 벙벙한 채, 자신의 상처를 만져보더니 곧 경악하는 표정으로 자신의 눈앞에 떠있는 노란 머리의 소녀를 바라보았다.
“괜찮아요? 몽마(夢魔) 녀석들이 갑작히 나타나서 놀랬죠?”
“저...... 민민...... 맞지?”
“히히. 예. 제가 민민이에요. 이제야 저를 기억하시나 봐요? 키키.”
수줍게 손벽을 치며 소녀는 웃었다. 진우는 무언가 기억이 날 듯도 할 그 소녀를 바라보고 눈을 크게 뜬 채, 앉아 있을뿐이었다.
“제 집으로 가서 얘기해요. 여기는 몽마 녀석들이 언제 뛰쳐 나올지 모르니깐요.”
“너희...... 집?”
“예. 예전에 몇 번 왔었잖아요. 히히...... 아! 하기사 올 때마다 ‘처음인데...’라는 표정이긴 했지만 어쨌든 오늘은 내 이름까지 기억하는 거 보니깐 그 동안의 고생이 헛 고생은 아니였네요. 키키......”
진우는 민민을 따라 걸었다. 걸어가는 동안 민민은 계속 떠들어 댔지만, 진우는 신경쓰지 않았다. 머릿속에 수 많은 의문들만이 질서를 찾지 못한 채 떠돌고 있을 뿐이었다.
한동안 걸음을 계속하다보니 저 멀리 노란 불빛들이 보였다. 점점 다가 갈수록 그 빛은 선명함으로 각인되어졌다.
“저기가 제 집이에요. 이쁘죠? 히히...”
민민은 자신의 집을 자랑스레 진우에게 선 보였다. 진우는 노란 빛에 넋을 잃은 채 뚤어져라 바라보았다. 육안으로 식별이 가능해지자 진우는 다시금 놀라게 되었다. 그 곳은 빛이 나는 곳이 아니였다.녹색 어둠에 숨쉬고 있는 또 다른 어둠이었다. 다만 노란 어둠이었을 뿐이었다.
통나무로 지어진 집은 무척 소담한 느낌이었다. 문에서 지붕에 이르기까지 모든게 노란 물감으로 색칠 한 듯 샛 노랬다. 진우는 눈을 둥글게 뜬 채, 집 주위를 살펴보았다. 집 오른 편에는 텃밭처럼 보이는 작은 밭이 노란 어둠속에 선명하게 들어나 있었고, 그 옆에는 작은 샘이 있었다. 집 외편에는 작은 창고 같은 것이 있었다. 그 역시 노란 옷을 입고 있었다.
민민이 문을 열고 진우를 이끌었다. 진우는 정신을 다시 차리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허걱. 분명히...... 조금한...... 집이었는데?”
민민은 피식 웃으며 집안으로 날아 들어가며 말했다.
“여기는 사념의 세계에요. 히히... 이 곳에는 공간이라는 개념이 다변화 되기 때문에 크기나 부피는 별 의미가 없어요. 아까 저 문을 넘어서는 순간. 1원색의 세계에서 지금 보고 계시는 다원색의 세계로 차원이동을 한거죠. 히히. 사념이기 때문에 가능한거예요.”
민민은 자세히 설명해 주었지만, 진우로서는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말들이었다. 흡사 유치원생에게 3차 함수를 가르쳐 주는 것처럼, 지금 진우에게는 이게 무슨 헛 소리인가 하는 의문만을 가득 담아 줄 뿐이었다.
“저...... 아까... 몽마라 하던데......”
“예. 히히... 몽마에요. 환념의 세계에서 온 괴물들이죠. 키키... 이 곳을 돌아다니다보면 심심치 않게 만나곤 해요. 히히... 하지만 별 놈들은 아녜요. 히히... 아까도 보셨듯이 그런 것들은 한 순간이면 짠! 하고 없엘 수 있죠. 히히......”
진우의 표정은 차디차게 굳어졌다. 민민의 설명을 들을수록 그의 표정은 더욱 굳건해졌다. 하지만 곧이은 민민의 말에 굳어있던 표정이 변화를 일으키게 되었다.
“히히... 여기는 꿈이거든요. 키키...”
진우의 표정은 경악으로 뒤범벅이 되었다.』
“그러니까...... 이 곳은...... 사념의 세계라는 것이고... 사념의 세계는... 내 꿈이라는 거야?”
진우는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입에서 침을 튀겨가며 민민에게 되물었다.
“아뇨, 아뇨. 사념의 세계이기는한데, 당신의 꿈은 아니예요. 히히. 꿈은 일종의 통로죠. 꿈을 통해서 이 곳에 올 수 있기는 하지만, 이 곳 자체가 당신의 꿈은 아니예요. 아까도 말했듯이 여기는 사념의 세계예요. 그리고 이 곳은 당신과 이 세계를 연결 해주는 통로. 즉 꿈인거구요. 히히.”
진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내 주저 앉아 버렸다. 왼손을 들어 볼을 꼬집어 보자 살가죽의 통증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망연자실...... 진우는 할 말을 잃은 채, 멍하니 앉아만 있었다.
“어... 어떻게 돌아가지?”
한 참을 멍하던 진우가 민민에게 물었다. 민민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진우의 호통소리에 놀라듯 대답했다.
“어떻게 돌아가냐구?”
“아 예. 예? 예. 그건 별로 어렵지 않아요. 그냥 가고 싶을 때. 가야 할 때 돌아 갈 수 있어요.”
“지금... 지금 보내죠. 지금 당장 보내달란 말야!”
악을 쓰는 진우를 바라보던 민민은 귀여운 표정으로 이해 할 수 없다는 듯 진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애기처럼 때 쓰지 말아요. 돌아 간다니... 어디로 돌아가겠다는 거지요? 사당동을 향하는 택시속으로? 아니면 어린 시절 울며 불며 고함치던 그 시절? 그 것도 아니면 몽마들이 기웃기웃거리는 1원색의 세계? 정신 좀 차려요. 매번 이 곳으로 오다가 환념의 마에 쫒기고 놀라고, 울고 때쓰고...... 부끄럽지 않아요? 궁금하지 않아요? 모든 세계는 존재의 의지가 있어요. 하다 못해 몽마조차도 자신의 존재 의지가 있다구요. 얼마나 더 헤맬거예요? 이번에 또 돌아가면 언제 앞으로 나갈 거냐구요! 이 세계. 이 의지. 모든 걸 이렇게 머물러 둘거예요? 그래서 다시 시작하게요? 되풀이 되는 바보 짓을?”
진지한 표정으로 하지만 슬프게도 민민은 말했다. 달래다 못해 푸념하듯... 진우는 잠시동안 민민을 바라 봤다. 그리고 차분히 생각에 잠겼다. 꿈... 사념... 몽마... 1원색과 다원색의 세계...... 수 많은 의문의 단어들이 진우의 머릿속을 정처없이 떠돌다가 이내 사라졌다. 두려움에 떨던 그의 눈이 안정되면서 진우의 표정은 곧 편안해졌다. 그리고 다정스레 민민을 바라보았다. 민민 역시 표정을 밝게하고 진우를 따스히 마주했다.
“받아 들이세요. 여기는 의지를 담아낼 수 있는 사념의 세계에요. 그냥 흐르듯 지워지는 단순한 꿈이 아니라구요. 당신이 저를 불러냈듯이 이젠 당신이 저의 부름에 답을 해 주셔야 할 때에요. 마음을 가라 앉히고 받아 들이세요. 또 다른 과오를 이젠 되풀이 하지는 않아야 하니까요......”
진지한 민민의 표정에 진우는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거역 할 수 없는 존재의 거룩함에 진우는 고개를 숙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