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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冷房 및 冷藏
Air Conditioning and Refrigeration)
전전반측(輾轉反側) 누워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을 못 이루는 상황을 일컫는 말이다. 한자의 훈(訓)을 적어 보면 옮길 전(輾), 구를 전(轉)에 되돌릴 반(反)과 곁 측(側)이니, 무언가 큰 고민이 있어 잠들지 못하는 그런 상황을 잘 나타내는 말이다. 이 말은 유명한 중국의 고전인 시경(詩經) 에 나오는 것으로, 우리가 잘 아는 요조숙녀 군자호구 (窈窕淑女 君子好逑), 즉 "아리따운 아가씨는 군자의 좋은 짝이다"라는 구절 다음에 나온다. 군자가 자기의 짝이 될 수 있는 아름다운 여인을 그리워하느라 잠 못 이루는 상황을 묘사한 것인데, 요즈음은 번민이나 괴로움 혹은 기대감에 잠 들지 못하는 상황을 나타내는데 일반적으로 쓰이고 있다. 영어에서는 이를 "toss and turn"이라고 표현하는데, 동서양이 어쩌면 그렇게 의미가 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누구에게나 전전반측의 경험은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멋진 연인 생각에 잠 못 이루는 것은 그래도 괜찮은 전전반측이고, 아마도 최악의 것은 우리 모두가 경험했듯 한여름 더위 때문에 잠 못 들고 뒤척이는 것이다. 밤에도 기온이 25℃ 이상이 유지되는 경우 이를 열대야(熱帶夜)라고 부르는데, 이런 밤에는 인생에 대해 아무런 고민도 없는 갓난 아기조차 뒤척이게 마련이다. 그 이유는 이렇게 높은 온도에 처하면 몸 안의 온도 조절 중추 신경이 비상 상태가 되어 몸이 각성 상태로 들어 가기 때문이다. 이런 밤에 우리는 냉장고에서 시원한 냉수를 한 잔 꺼내 들이키거나 혹은 에어컨을 틀게 되는데, 바로 그 순간 우리는 냉방 및 냉장 기술의 위대함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다. 실제로 냉방 및 냉장은 인류가 지난 20세기에 만들어 낸 여러 가지 혁명적인 기술 중에서 그 중요도와 파급 효과의 측면에서 10 번째로 꼽히는 대단한 기술이다. 인류 생존에 가장 중요한 먹거리를 고려할 때, 인류 역사는 냉장고 전(前) 시대와 냉장고 후(後) 시대로 구분할 수도 있을 것이다.
1902년 7월 16일, 뉴-욕의 밤은 열대야였다. 수 많은 사람이 이 더운 밤을 누워서 뒤척이며 괴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지만, 25세의 청년 캐리어 (Willis Carrier)는 더위를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아주 깊이 잠든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만들어 내기 위해 밤을 지새며 그야말로 정신 없이 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덕택에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에는 하나의 설계도가 완성되었는데, 바로 이런 과정을 통해 냉방장치는 인류 역사에 처음 등장하게 된다. 더위를 잊고 일한 사람에 의해 더위가 정복된 셈이다. 당시의 캐리어는 코넬(Cornell) 대학에서 전기공학을 공부하고 기계 제작 회사에 취직 한지 1년밖에 안 된 애송이 엔지니어였다. 그는 졸업과 더불어 General Electric에 취직하고 싶었는데, 뜻을 이루지 못했다. 만약 그가 당시의 꿈을 이루었다면, 오늘 날 매년 약 60억불의 매출을 올리고 있는 세계 제일의 냉방기기 회사인 Carrier Engineering Corp. 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회사는 캐리어가 1915년에 동료 몇 명과 함께 35,000$의 자본금으로 설립한 것이다.
그림 10.1. 냉방장치의 발명자 Willis Carrier (1915년)
1901년 대학을 졸업한 캐리어가 취직한 회사에서 처음 맡은 프로젝트는 인쇄소의 칼러 프린터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당시의 칼라 인쇄란 예를 들어 빨강, 노랑, 파랑 그리고 검정의 4가지 색상을 사용한다면 한 종이 위에 네 번을 각기 별도로 인쇄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실내의 온도나 습도 변화에 따라 종이의 크기가 변화하므로 색상은 번번히 중첩되는 문제가 있었다. 쉽게 짐작할 수 있듯 이런 문제는 특히 여름날에 잘 나타나곤 했다. 캐리어는 인쇄기 자체를 보정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단기적인 방식이 아닌 아주 근본적인 치유책, 즉 실내의 온도와 습도를 항상 균일하게 유지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기로 결심했다. 캐리어는 이 아이디어 구현에 엄청난 열성을 보였고 여기에 이끌려 회사는 별로 가능성이 없어 뵈는 아이디어지만 이를 지원하기로 했다. 그런데 회사가 용납한 것은 주 55시간의 정규 업무는 차질 없이 수행하며 주당10$의 임금도 유지하면서 별도로 냉방기 설계 추진해도 좋다는 그런 조건이었다.
캐리어는 엔지니어링에 천부적인 탤런트와 대단한 열성을 함께 지녔던 사람으로 믿어진다. 그러나 자신의 회고에 의하면 그 모든 것은 그의 어머니로부터 물려 받고 교육 받아 이룬 것이었다. 그가 아홉 살 되던 해 학교에서는 분수(分數)를 가르쳤는데, 캐리어는 아마도 그 개념을 도저히 이해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어느 날 칼과 사과를 들고 아들을 불러 앉혔다. 아들은 아마도 애플 파이를 만들어 주는 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들로 하여금 사과를 반쪽으로 자르게 하고 이를 다시 1/4쪽으로 그리고 1/8로 자르게 하면서 분수의 개념과 덧셈 그리고 뺄셈을 가르쳤다. 캐리어는 그 일로서 무언가 대단히 큰 것을 깨우치는 기쁨을 맛보게 되었고, 이런 기쁨을 다시 맛보기 위해 훗날 그는 주어진 과제에 무섭게 집중하고 또 일을 추진했다. 어느 문제도 어려울 것이 없고 무엇이든지 해 낼 수 있는 자신감을 그 순간 이후 갖게 되었다는 것이 캐리어 스스로의 회고이다. 어려운 문제에 닥치면 사과처럼 잘라보고 이를 또 다시 합쳐보면 모두 해결할 수 있었단다. 교육이란 이렇게 중요한 것임을 새삼 느끼게 된다.
이렇게 자상했던 어머니는 그러나 그의 나이 불과 11살에 세상을 떠나고, 그 후의 캐리어는 그야말로 숱한 고생 속에서 자랐다. 1894년도에 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대학 진학이 2년이나 늦게 된 것도 빈한한 가정 사정 때문이었는데, 그가 고등학교 졸업 때 즉 열 일곱 살에 작성한 에세이는 아직도 많은 미국 사람들이 즐겨 읽고 있다. "인간은 환경에 지배 받지만 그 환경을 만드는 것은 인간이다. 의지력을 지닌 사람이라면, 환경에 관계없이 스스로의 미래를 가꿀 수 있다"라는 어릴 적 주장을 그는 평생 실천하면서 살았다. 코넬 대학에서는 주정부에서 주는 장학금을 받았는데, 당연히 충분한 액수는 아니었기에 캐리어는 온갖 아르바이트를 다 했다. 그 중에는 동료 학생들을 위한 세탁 일도 했는데, 이것이 벌이가 괜찮아서 4학년 졸업 때에는 동료와 더불어 1000$짜리 세탁소를 세우기도 했다. 그의 비상한 사업 능력도 이렇게 일찍이 드러났다.
캐리어는 냉방 장치 설계에 있어 온도 조절, 습도 조절, 공기 순환 그리고 공기 정화의 네 가지 원칙을 고려했는데, 이는 오늘 날의 냉방기 설계에서도 뺄 것도 더할 것도 없는 완벽한 원칙으로 남아있다. 1924년에는 가정용냉방기가 개발되었으며, 1930년대에는 자동차에도 처음으로 냉방기가 도입되었는데, 이것 모두 캐리어의 업적이다. 캐리어는 실용성이 있는 연구에 지극한 가치를 두었다는 점에서 엔지니어의 전형(典型)인 셈이다. "나는 낚시를 해도 먹을 수 있는 물고기만 낚는다. 사냥도 물론이며, 이는 실험실에서도 마찬가지다." 그가 남긴 말은 그가 얼마나 실용에 충실한 엔지니어였가를 잘 보여 준다. 에어컨이 발달하면서 섬유, 제약, 자동차 등 많은 산업 제품의 질적 수준이 크게 올랐으며, 극장, 음식점 등 소비 산업도 계절에 관계 없이 번창을 이루게 된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캐리어가 냉방장치를 발명하던 1902년에 우리 나라 제물포에서는 남자56명, 여자 21명, 아이들 27명 등 모두 104명이 처음으로 이민을 떠났다. 3주간의 항해 후 이들이 내린 곳은 하와이 호놀룰루. 우리나라의 첫 해외 이민은 이렇게 시작됐다.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게 된 이들은 억척스런 우리 민족 특유의 기질을 발휘해 불볕 더위와 장시간 노동, 저임금의 악조건을 헤치고 미국 사회에 뿌리를 내린다. 같은 해 23세의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도 미국으로 떠났다. 그는 훗날 민족 지도자를 양성하고자 흥사단(興士團)을 창립하였으며 삼일운동이 일어나자 상해 임시정부 국무총리 서리로 취임하여 헌법과 법률을 제정하였다. "나는 밥을 먹어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잠을 자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서다. 이것은 내 목숨이 없어질 때까지 변함이 없을 것이다."- 도산(島山) 선생의 말씀이다.
그림 10.2.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선생 미국 유학 시절.
다시 Cool한 이야기로 돌아가자. 냉장은 냉방과 달리 비교적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여름에도 시원한 얼음을 쓰기 위해 사람들은 겨울에 얻어진 천연 얼음을 잘 보관하는 방법을 찾았다. 따라서 그 저장법은 오래 전부터 발달하였는데, 우리나라에서는 6세기 초 신라 시대에 이미 석빙고(石氷庫)라 하여 땅속 깊이 굴을 파고 그 벽을 돌로 쌓은 특수한 얼음 저장 시설이 있었다. 비교적 간단한 원리지만 여기에도 배수, 환기 등 여러 가지를 고려한 엔지니어링 디자인이 필요했음은 두 말 할 것도 없다. 조선 시대에는 한강 하류에 얼음 창고를 두어 얼음을 보관하였는데, 이것을 각기 동빙고(東氷庫)와 서빙고(西氷庫)로 불렀다. 요즈음의 동빙고동과 서빙고동은 물론 여기서 유래한 이름이다.
그림 10.3. 경주 석빙고- 보물 66호.
자연산얼음에만 의존 할 것이 아니라 아예 얼음을 만들어 보자는 시도는 18세기 중반부터 여러 사람에 의해 이루어졌다. 정해진 공간의 온도를 낮추는 방안으로 가장 널리 쓰인 것은 특정한 액체를 기화(氣化)시키는 방법인데, 이는 사람이 땀을 흘려 이를 날려 보냄으로 체온을 낮추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아주 낮은 온도에서도 기화하는 액체, 즉 냉매(冷媒)를 이용해 섭씨 0도 이하의 온도만 얻을 수 있다면 얼음을 얻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닌데 이 아이디어는 1748년 영국 글라스고우 대학의 컬렌(William Cullen)에 의해 처음 발표되었다.
그림 10.4. William Cullen의 첫 냉장고 디자인.
압축된 냉매는 좀 더 빠르게 기화되므로 냉장고에는 압축기가 사용되었는데, 이러한 발전에 공헌한 사람으로는 미국의 엘킨스(Thomas Elkins)가 꼽힌다. 그가 1879년에 획득한 냉장고 특허는 상당히 의미 있는 발전으로 평가되고 있다. 조금 특이한 것은 그의 발명이 시체를 보관하는 냉장고에 초점을 두었다는 점과, 그가 흑인이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상호간에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겠지만, 당시의 미국 사회에 팽배했던 인종차별을 고려할 때 엘킨스의 업적은 대단한 것으로 평가 받아 마땅하다.
1930년까지의 초기 냉장고에는 주로 암모니아(NH3), 염화메틸 (CH3Cl) 그리고 이산화황 (SO2) 같은 독성 냉매가 이용되었는데 몇 번의 가스 누출과 그에 따른 인명 피해 이후에 프레온(Freon)이라 부르는 CCl2F2 가스가 개발되어 폭 넓게 쓰였다. 그러나 이것도 지구 대기권의 오존층을 파괴하는 것으로 밝혀져 요즈음은 그 사용이 규제되고 있다. 여하튼 미국의 General Electric사는 1931년에 이르러 100만대의 냉장고 생산을 돌파하면서, 1가구 1냉장고의 시대를 열기 시작했다. 요즈음 우리나라에서는 김치 냉장고라는 것까지 쓰이고 있는 바 이제는 1가구 2 냉장고 혹은 3냉장고 시대에 이른 것 같다.
그림10.5. 엘킨스의 냉장고 특허 일부.
냉장고의 보급은 인류 식생활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농산품인 식량, 즉 쌀, 보리 같은 곡류나 무, 배추 같은 채소는 항상 계절적으로 일시에 생산되는 것이어서 보관이 생산만큼이나 중요하다. 소고기, 돼지고기 그리고 생선 같은 육류(肉類)들은 사실 여름에는 아예 생각도 못하던 음식이다. 오죽하면 "여름 돼지고기는 잘 해야 본전"이란 말이 생겼을까? 생선은 고등어 자반처럼 소금에 푹 절인 것 아니면 육지 사람들은 여름에는 아예 맛도 볼 수 없는 음식이었다. 요즈음은 이런 음식들이 계절 없이 공급되고 있는데, 이는 당연히 냉방 및 냉장 기술 덕이다.
사실 식량을 장기간 보존하기 위한 노력은 인류 역사에서 끊임없이 경주된 일 중의 하나다. 그 중의 획기적인 성취로는 우리가 보통 깡통 음식으로 이야기하는 통조림을 들 수 있는데, 이는 1795년에 프랑스의 나폴레옹 시대 때 처음 발명되었다. 나폴레옹은 그 당시 엄청난 액수인 12,000프랑의 상금을 내 걸면서, 군대의 장기 원정에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음식물 보존법을 공모했는데, 그 결과 당선작으로 채택된 것이 바로 유리병 조림이다. 이는 그 후 영국에서 금속을 이용한 통조림으로 바뀌었고, 곧 이어 통조림 따개 등도 특허를 얻는다. 요즈음은 아무데서나 흔하게 볼 수 있고, 또 누구나 편하게 사용하는 깡통. 한 잔의 음료수만을 마시고 쉽게 버리기도 하는 것이 깡통이지만, 사실 여기에도 기계 공학, 재료 공학에 관련 된 엄청난 기술이 숨어 있다. 깡통은 본래 음식물을 보관하기 위해 개발 된 것이지만, 최근에 만들어진 두 조각으로 만든 깡통은 오히려 음료수나 맥주의 용기로 훨씬 더 많이 쓰이고 있다. 깡통은 전 세계적으로 약 100억개가 매년 생산되고 있다.
음식물의 장기 보존을 위해 요즈음은 냉동 기술이 폭 넓게 이용되고 있는데, 특히 -15℃ 이하로 저장한 것을 냉동식품이라 부른다. 식품 속의 수분은 -5∼-10℃에서 얼음이 되는데 이 과정에서 식품의 조직을 파괴하게 된다. 육류의 조직이 파괴될 경우에는 영양 손실이 일어나고 맛이 떨어지기 때문에 고기를 얼릴 때에는 가능한 한 이 온도 구역을 빨리 통과해 그 이하의 저온으로 내려가야 한다. 식품이 동결된 상태에서는 미생물에 의한 부패는 거의 없지만 지방질은 느리게 산화되므로 냉동식품도 무한정 저장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냉동식품은 1923년 버즈아이(Clarence Birdseye)가 단돈 7 달러의 투자로 마련한 선풍기, 항아리, 얼음 등을 이용해 처음으로 만들었는데, 이는 북극 지방의 주민들이 물고기나 육류를 항아리에 담가 차가운 바닷물 속에 넣어 냉동시키는 것을 보고 얻은 아이디어이다. 버즈아이는 이 특허를 1929년 무려 2,200만 달러를 받고 General Food Company에 팔았으며, 냉동식품은 그 다음 해인 1930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장에 나오게 된다. 처음에는 요즘과 달리 냉동식품이란 매우 귀하고 값진 음식이었다.
여하튼 캐리어에 의해 더위로 인한 여름 밤의 전전반측(輾轉反側)은 사라졌다. 그래도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설렘 혹은 걱정 때문에 잠을 설치기도 한다. 많은 경우 안 해도 좋은 공연한 걱정들이지만, 그러나 이순신(李舜臣) 장군처럼 나라와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며 잠 못 이루는 전전반측은 기억되어야 한다. "한산(閑山)셤 달 밝은 밤의 수루(戍樓)에 홀로 앉자 큰 칼 옆에 차고 기픈 시름 하는 적의 어듸셔 일성호가(一聲胡歌 )는 남의 애를 긋나니" - 나라 걱정에 잠 못 이루는 장군이 안타깝다. 이순신 장군은 당대 최고의 전함(戰艦)이었던 거북선 제작을 총 지휘한 위대한 엔지니어다. 그는 한마디로 우리나라의 수호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