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부안 내소사. 부안 능가산 내소사 일주문.
부안 내소사는 백제 무왕 34년(633년) 혜구선사가 창건하였다. 당초엔 소래사(蘇來寺, 다시 태어나기 위해 찾아온다는 뜻)라고 하였으나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킬때 소정방이 들러 시주한 후, 내소사(來蘇寺)로 바뀌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내소사 대웅보전은 우리나라 꽃살문 중 가장 빼어나다고 한다. 연꽃, 국화, 모란꽃으로 조각한 꽃살문이다. 조선 중기 이후에 유행했던 다포식 건축물로서 공포의 짜임은 외 3출목과 내 5출목으로서 기둥위에는 물론 주간에도 공간포를 놓은 다포식 양식이다. 법당 내부의 제공 뒤뿌리에는 모두 연꽃 봉우리를 새겨 우물반자를 댄 천장에 꽃무늬 단청이다. 내소사 대웅보전 건물(보물 제291호)은 못을 하나도 쓰지 않고 나무토막들을 깎아 끼워 맞춘 건물로 유명하다. 조선시대 성종때 북두칠성을 따라 여행하는 목수가 있었는데 이곳을 방문했을때 비바람에 훼소된 절을 다시 짓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내소사를 중창할 당시 대웅보전을 지은 이 목수는 삼년 동안 나무를 목침덩이만 하게 토막 내어 다듬기만 했다고 한다. 나무 깎기를 마친 목수는 그 나무를 헤아리다가 하나가 모자라자 자신의 실력이 법당을 짓기에 부족하다며 법당 짓기를 포기하고자 하였다. 그러자 사미승(심부름 하던 어린 승려)은 감추었던 나무토막 하나를 내놓았지만 목수는 부정한 나무토막은 쓸 수 없다며 끝내 그 토막을 빼놓고 대웅보전을 완성했다. 그 연유로 지금도 대웅보전 오른쪽 안 천장은 왼쪽에 비해 나무토막 한 개가 부족하다고 한다.
※ 백제의 멸망 :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황산벌에서 패한 계백장군은 전사했으며, 결국 사비성은 함락되었으며, 의자왕이 피해 있는 웅진성까지 함락한 뒤 소정방은 의자왕에게 항복의 표시로 술을 따르게 한다. 의자왕을 비롯한 신하들 88명과 백성 12,000여명이 당나라로 끌려갔으며, 의자왕이 당나라에서 병사하면서 700년 백제의 역사는 막을 내린다.
내소사 석포리 당산제. 당산나무 노거수 느티나무 할아버지나무. 당산나무(할아버지 당산나무로 수령이 700년 된다고 한다).
부안 내소사 전나무숲길.
내소사 천왕문,
내소사 1,000년 노거수 느티나무. 부안 석포리 당산제 할머니나무로 불린다.
내소사 보종각. 고려시대 동종으로 모조품을 전시하고 있다.
내소사 범종각. 범종, 법고, 운판, 목어.
내소사 연래루(蓮來樓).
내소사 설선당.
내소사 설선당 현판.
내소사 설선당 무쇠솥.
내소사 법당 대웅보전. 현판은 조선후기 서예가 "원교 이광사"가 쓴 글씨다.
부안 내소사 대웅보전 꽃살문.
내소사 지장전.
내소사 지장전에는 안나푸르나에 잠들어 있는 산악인 박영석, 신동민, 강기석을 기리기 위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내소사 대웅보전. 대웅보전은 조선시대 1633년(인조 11년) "청민대사"가 건립한 것인데 호랑이가 변한 "대호선사"가 지었다는 전설이 있다.
내소사 삼층석탑. 전체적으로는 신라시대 석탑양식을 보이지만 가늘고 규모가 작은 고려시대 양식도 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