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 11:36]
딸이 그에게 이르되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여셨으니 아버지 입에서 낸 말씀대로 내게 행하소서 이는 여호와께서 아버지를 위하여 아버지의 대적 암몬 자손에게 원수를 갚으셨음이니이다...."
슬프다 내 딸이여 너는 나로 참담케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이로다 - 입다가 승전하고 집으로 돌와왔을 때에 그의 외딸("무남독녀")이 누구부다도 먼저 나와서 아버지를 영접했다. 이 때에 입다는 그의 서원한 것 때문에 걱정하였다. 여기 이른 바 "슬프다"란 감탄사는 히브리어로 "아하"인데 그저 염려를 나타내는 말이다.
"슬프다"는 말은 너무 심각한 불행을 표현하므로 여기서 적당한 번역이 아닌 것 같다. 그리고 "나로 참담케 하는 자"란 말은 다음과 같이 번역된다. 곧, "너는 나를 당황케 만드는구나"라고. 우리 한역의 "나로 참담케 하는 자"란 번역은 역시 너무 심각한 불행에 대한 표현이다. 35절 상반의 히브리어를 보면 입다의 걱정은 그 딸이 죽임이 될 지경의 불행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닌 것 같다.
입다의 걱정은, 그 딸이 결혼하지 못하고 독신으로 성전 봉사에 평생 바침이 되어 그의 기업이 계승되지 못하게 됨을 그 중점으로 하였을 것이다.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여셨으니 아버지 입에서 낸 말씀대로 내게 행하소서 -입다의 딸은 이 말로써 그 자신의 인격을 보여 주었다.(1) 하나님께 대하여 신실하며, (2) 아버지께 순종함으로 효도를 행하였고, (3) 의리를 위하여는 자신이 희생되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삿 11:37]"아비에게 또 이르되 이 일만 내게 허락하사 나를 두 달만 용납하소서 내가 나의 동무들과 함께 산에 올라가서 나의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 하겠나이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입다의 딸이 죽어 번제물이 되었는가 함이다.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란 말은, 실상 "나의 처녀됨을 인하여"라고 번역되어야 하며, "남자를 알지 못하고 죽으니라"고한 말은, "그녀가 남자를 알지 못하니라"라고 번역되어야한다. 그렇다면 그녀가 하나님께 "올려 바침"이 되었다는 것은, 그녀가 평생도록 결혼하지 못하고 성막에서 수종드는 여인이 된 것을 가리킨다.
중세대(15세기) 이전에는 입다의 서원 실행이 그 딸을 죽여서 번제로 드린 것이라고 해석하였으나, 중세대 이후에는 그렇게 해석하지 않고 다만 그녀로 하여금 평생토록 성막에서 봉사하도록 처녀로 바쳐진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 해석이 옳다고 할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입다의 성격으로 보아 그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서원할 인물이 아닌 까닭이다.
그는 자기를 등용하려고 찾아 온 길르앗 장로들의 청원도 신중히 검토한 후에 받아 들였었다. (2) 입다가 암몬 왕에게 전한 말을 미루어 보아 그는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적도 자세히 알고 있었으니 만큼, 그가 구약 율법에 대하여 무식한 인물이 아니었음이 분명한 까닭이다. 구약 율법에 자녀를 불로 태워 바치는 것은 극악한 죄로 규정되어 있다.
(3) 입다는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신뢰하는 인물이었으니 만큼 그가 하나님이 금하시는 죄악을 범했을 리는 만무하기 때문이다. 만일 입다가 하나님이 엄금하시는 죄를 범하였다면 말씀대로 저주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후에도 이스라엘의 사사로서 6년 간이나 역사하고 죽었다. (4) 무엇보다도 신약 성경이 입다를 신앙 인물로 칭찬하기 때문이다(히 11:32).
우리는 입다의 행적에서 배울 것이 있으니, 그것은 그가 하나님께 서원했던 대로 용감하게 실행한 그의 진실성과 및 그의 신앙 용단이다. 그리고 그의 실행력의 모본을 따라서 그의 딸도 경건의 법에 잘 순종한 사실이다.
[삿 11:38] "이르되 가라하고 두달 위한하고 보내니 그가 그 동무들과 함께 가서 산 위에서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고..."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입다의 딸이 죽어 번제물이 되었는가 함이다.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란 말은, 실상 "나의 처녀됨을 인하여"라고 번역되어야 하며, "남자를 알지 못하고 죽으니라"고한 말은, "그녀가 남자를 알지 못하니라"라고 번역되어야한다. 그렇다면 그녀가 하나님께 "올려 바침"이 되었다는 것은, 그녀가 평생도록 결혼하지 못하고 성막에서 수종드는 여인이 된 것을 가리킨다.
중세 이후에는 그렇게 해석하지 않고 다만 그녀로 하여금 평생토록 성막에서 봉사하도록 처녀로 바쳐진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 해석이 옳다고 할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입다의 성격으로 보아 그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서원할 인물이 아닌 까닭이다. 그는 자기를 등용하려고 찾아 온 길르앗 장로들의 청원도 신중히 검토한 후에 받아 들였었다
(2) 입다가 암몬 왕에게 전한 말을 미루어 보아 그는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적도 자세히 알고 있었으니 만큼, 그가 구약 율법에 대하여 무식한 인물이 아니었음이 분명한 까닭이다. 구약 율법에 자녀를 불로 태워 바치는 것은 극악한 죄로 규정되어 있다. (3) 입다는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신뢰하는 인물이었으니 만큼 그가 하나님이 금하시는 죄악을 범했을 리는 만무하기 때문이다.
만일 입다가 하나님이 엄금하시는 죄를 범하였다면 그는 레 20:2-5의 말씀대로 저주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후에도 이스라엘의 사사로서 6년 간이나 역사하고 죽었다. (4) 무엇보다도 신약 성경이 입다를 신앙 인물로 칭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입다의 행적에서 배울 것이 있으니,
그것은 그가 하나님께 서원했던 대로 용감하게 실행한 그의 진실성과 및 그의 신앙 용단이다. 그리고 그의 실행력의 모본을 따라서 그의 딸도 경건의 법에 잘 순종한 사실이다.
[삿 11:39] "두달만에 그 아비에게로 돌아온지라 아비가 그 서원한대로 딸에게 행하니 딸이 남자를 알지 못하고 죽으니라 이로부터 이스라엘 가운데 규례가 되어..."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입다의 딸이 죽어 번제물이 되었는가 함이다.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란 말은, 실 "나의 처녀됨을 인하여"라고 번역되어야 하며, 또 39절 하반의 "남자를 알지 못하고 죽으니라"고한 말은, "그녀가 남자를 알지 못하니라"라고 번역되어야한다. 그렇다면 그녀가 하나님께 "올려 바침"이 되었다는 것은, 그녀가 평생도록 결혼하지 못하고 성막에서 수종드는 여인이 된 것을 가리킨다.
중세대(15세기) 이전에는 입다의 서원 실행이 그 딸을 죽여서 번제로 드린 것이라고 해석하였으나, 중세대 이후에는 그렇게 해석하지 않고 다만 그녀로 하여금 평생토록 성막에서 봉사하도록 처녀로 바쳐진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 해석이 옳다고 할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입다의 성격으로 보아 그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서원할 인물이 아닌 까닭이다. 그는 자기를 등용하려고 찾아 온 길르앗 장로들의 청원도 신중히 검토한 후에 받아 들였었다..
(2) 입다가 암몬 왕에게 전한 말을 미루어 보아 그는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적도 자세히 알고 있었으니 만큼, 그가 구약 율법에 대하여 무식한 인물이 아니었음이 분명한 까닭이다. 구약 율법에 자녀를 불로 태워 바치는 것은 극악한 죄로 규정되어 있다(레 18:21, 20:2-5). (3) 입다는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신뢰하는 인물이었으니 만큼, 그가 하나님이 금하시는 죄악을 범했을 리는 만무하기 때문이다.
만일 입다가 하나님이 엄금하시는 죄를 범하였다면 그는 레 20:2-5의 말씀대로 저주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후에도 이스라엘의 사사로서 6년 간이나 역사하고 죽었다(12:7). (4) 무엇보다도 신약 성경이 입다를 신앙 인물로 칭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입다의 행적에서 배울 것이 있으니, 그것은 그가 하나님께 서원했던 대로 용감하게 실행한 그의 진실성과 및 그의 신앙 용단이다. 그리고 그의 실행력의 모본을 따라서 그의 딸도 경건의 법에 잘 순종한 사실이다.
[삿 11:40]"이스라엘 여자들이 해마다 가서 길르앗 사람 입다의 딸을 위하여 나흘씩 애곡하더라..."
나흘씩 애곡하더라 - 델리취는 여기 이른 바 "애곡하더라"란 말의 히브리어를 "찬송하더라"라고 번역해야 된다고 하였다. 버네이는, 이스라엘 여자들이 해마다 입다의 딸을 위하여 "나흘씩 애곡"한 것은, 신화적 근거에 의하여 지켜진 축제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견해는 구약 성경의 역사성을 그대로 받지 않는 잘못된 학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