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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더 큰 바다로 나아가셔야>
오늘 제시된 복음은 무척 짧지만 아주 의미심장한 복음말씀입니다.
3년간의 공생활 가운데 절정기를 보내시던 예수님의 모습은 군중들의 찬탄을 한 몸에 받기에 충분했습니다.
그야말로 탄탄대로였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못할 일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목활동을 통해 하느님 무한하신 권능이 만천하에 낱낱이 드러났습니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감쪽같이 일으켜 세우시는가 하면, 지독하게도 떨어지지 않던 악령들도 예수님의 한 말씀에 하나같이 다들 나가 떨어졌습니다.
기적과 치유의 능력만 갖추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언변도 얼마나 탁월한지 사람들은 넋을 잃고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입을 여셨다 하면, 주옥같은 말씀, 감칠 맛 나는 말씀이 샘물처럼 솟아나왔습니다.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매너 좋지, 인물 좋지, 거기다가 겸손하지...
사람들은 한 마디로 예수님께 ‘뿅’ 갔습니다. 완전히 매료되었습니다.
그분을 칭송하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만 갔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한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큰 목소리로 예수님을 칭찬합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훌륭한 인물 뒤에는 훌륭한 부모가 있음은 분명합니다.
당신 자신으로 인해 모친 마리아까지 덩달아 칭송을 받으시니 예수님 입장에서 아주 기분이 뿌듯한 일입니다.
저 같았으면 그런 상황에서 이렇게 응답하지 않았을까요?
“당연하지! 그걸 말이라고 해?”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전혀 뜻밖의 말씀을 던지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이 무슨 뜻밖의 말씀입니까?
도대체 예수님의 이 말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예수님은 온 세상 만물을 주재하시는 크고 위대하신 하느님 사랑의 결정체입니다.
예수님의 ‘특별한 말씀’은 온 세상 전체를 다스리시고 구원하시려는 하느님 의지의 표현입니다.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은 더 이상 혈육에 연연하셔서는 안 될 분이십니다.
더 이상 나자렛, 이스라엘에 안주하셔서는 안 될 분이십니다.
더 이상 작은 시냇물에서 머물러서는 안 될 분이십니다.
더 이상 육적인 관계에 매달려서는 안 될 분이십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크신 뜻을 성취하기 위해 더 큰 바다로 나아가야만 하는 분이십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부여하신 인류 전체의 구원을 위해 작은 물줄기를 포기해야만 하는 분이십니다.
참 신앙공동체는 폐쇄된 작은 울타리 안에 안주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벽을 무너트립니다.
국경도 넘어섭니다.
민족도 초월합니다.
남녀, 빈부격차, 인종, 이념, 사상...모든 것을 뛰어넘습니다.
언젠가 큰 바다에서 이 세상 단 한 사람도 빠지지 인류 전체가 크고 자비하신 하느님의 얼굴을 대면하는 것, 그것이 예수님의 바람이었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나에겐 주님의 뜻이 행복인가, 괴로움인가?
미국 드라마 프리즌 브레이크는 동생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무기징역자로 수감돼 있는 형을
악명 높기로 소문난 교도소에 들어가 탈출시키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그 교도소는 워낙 경계가 삼엄해서 누구도 탈출을 성공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동생까지 죄인으로 자신을 찾으러 감옥에 들어왔으니 형의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그런데 동생이 온 몸에 새긴 문신이 바로 그 교도소의 지도이고 완벽하게 짜인 탈출 방법임을 알게 되었을 때는 형도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됩니다.
평생을 무기징역자로 감옥에 있어야 하는 형에게 그 감옥을 탈출할 수 있다는 희망은 그 자체로 행복입니다.
그리고 그 동생을 쫓아 감옥을 탈출하여 결국 누명을 벗게 됩니다.
참다운 행복은 우리를 가두고 있는 행복하지 못하게 만드는 환경으로부터 탈출할 때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탈출시키기 위해 우리 불행 안으로
들어오신 분의 뜻이 우리 행복의 시작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어떤 여인이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여인의 행복의 기준은 사랑하는 분과 함께 머무는 것에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행복은 함께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함께 머무르는 분의 뜻을 배우고 실천하는 데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함께 있기만 하면 뭐하냐는 것입니다.
부부가 한 집에 함께 있는 것만으로 평생 행복할 수 있을까요?
그런 행복은 한계가 있습니다.
참 행복은 누군가의 뜻으로 내 뜻을 죽이는데 있습니다.
내 뜻 자체가 나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감옥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뜻을 고통으로 느끼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십일조를 내라고 하는 주님의 뜻이 우리에게 정말 기쁨일까요?
그 뜻이 행복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에 주님과 함께 머물기 위해 성당엔 나오지만 십일조는 내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 따르면 모든 악의 근원이 돈을 좋아함이고(1티모 6,10 참조) 하느님을 사랑하려면 돈은 미워해야 한다고 합니다.
감옥이 행복이라고 믿으면 감옥에 들어와 자신을 탈출시켜 주려고 하는 이를 비웃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뜻이 참 행복임을 먼저 믿어야합니다.
장난감을 사달라고 조르고 결국엔 주저앉아 우는 아이가 있습니다.
그 아이에겐 장난감이 가장 큰 행복입니다.
그러나 이젠 그런 장난감을 가지고 놀 나이가 아닙니다.
이때 어머니는 그 아이에게 컴퓨터를 사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더 이상 장난감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장난감을 갖지 못한 고통스러움은 자연스레 사라집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우리를 괴롭히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세상의 집착으로부터 끊기 위한 선물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있기에 우리는 세상 것을 좋아하는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여 내 뜻을 없애는 것이 오히려 참 행복의 이유인 것입니다.
일반 대학교 다니며 결혼도 하고 돈도 많이 벌어보겠다는 꿈이 있었습니다.
이때 사제가 되고 싶은 마음이 밀물처럼 밀어닥쳤습니다.
하지만 결혼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주님의 뜻을 알면서도 1년간 버텼습니다.
주님의 뜻이 나의 행복을 빼앗는 것처럼 느꼈기 때문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주님의 뜻이 저를 수많은 세상의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게 해 주었음을 압니다.
결혼을 해서 지금보다 더 행복할 수는 없을 것임을 압니다.
주님을 믿고 주님과 함께 머무는 것만이 행복이 아닙니다.
주님의 뜻이 내 안에서 나를 바꾸어 놓아야 행복해집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루카 11,27-28: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고 있던 한 부인이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27절) 한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28절) 하신다. 중요하고 우리가 모두 해야 할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이며, 이런 사람들이 진실로 행복하다. 마리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이미 당신의 신앙으로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이웃 사랑으로 실천한 분이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세상의 구세주로 낳아주실 수 있으셨던 분이기 때문에 복되시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마리아께서는 몸과 마음으로, 즉 신앙으로 예수님을 품으셨기 때문에 복된 분이시다. 예수님의 몸을 잉태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을 믿으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마리아께서 복되신 것을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도 주신다. 마리아께서 복되신 것처럼 이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의 삶 속에서 실천하는 사람들이 계속 누릴 수 있도록 해주셨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면서 하느님을 체험할 수도 있고, 이 체험으로 신앙인의 삶을 갖게 된 것을 감사하기도 할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삶이 끝까지 계속되어야 한다. 우리가 하느님 안에 항상 새로이 태어나는 것을 체험한다면 구원을 항상 체험하며 완성해 가는 것이다. 구원은 궁극적으로 하느님을 뵐 때 완성되겠지만, 이 세상에서부터 구원은 체험되어야 한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말씀에 한순간 감격하고 체험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통해 꾸준히 지키고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면서 바로 예수님을 낳아 젖을 먹이신 성모님이 행복하신 것 같이, 아니 오히려 더 행복할 수 있는 신앙인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이제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항구하게 살아가도록 하여야 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상속 문제로 형제가 서로 원수지간이 되는 경우가 꽤 있는 것 같습니다. 형제들 간의 재산 문제를 중재해달라고 요청하시는 분도 있었고, 상속 다툼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냐면서 방법을 가르쳐달라는 분도 만났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는 사제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더군요. 실제로 가족을 만난 적도 있지만, 첨예한 갈등으로 인해 서로 원수가 되고 맙니다. 이런 갈등이 생각납니다.
큰아들이 제사를 지내줄 것이라면서 전 재산을 큰아들에게만 물려준 것입니다. 안타까운 일은 부모님께서 돌아가셨을 때까지 모셨던 사람은 큰아들이 아니라 막내아들이었는데, 막내아들에게는 어떤 재산도 남기지 않으신 것입니다.
형제들은 공평한 재산 분배를 요구했지만, 큰아들은 부모님의 유언을 그대로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결국 재판까지 가게 되었고, 재판 이후 형제들은 서로 남보다 못한 관계가 되고 말았습니다. 다신 보지 말자고 선언했고, 실제로 재판 이후 만난 적이 전혀 없었습니다.
상대에 대한 희망이 보이지 않으니 만나지 않는 것입니다. 피로 맺어진 혈연관계인데도 말입니다. 이렇게 서로에게 체념한 상태에서 열정을 간직할 수 있을까요? 깊은 슬픔만 그 자리에 남게 됩니다. 재산이, 물질적인 재화가 과연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할까요? 사랑이 사라지고, 체념 속에서 슬픔을 간직하면서 이 세상을 힘차게 살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사람 중에서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을 행복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성모님의 행복이 과연 예수님을 낳고 젖을 먹인 것에서 온 것일까요? 피로 맺어진 혈연관계만으로 행복할 것이라 생각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혈연관계만으로 절대 행복할 수 없습니다. 성모님의 행복도 예수님을 낳고 키운 것에 있지 않습니다. 그보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켰기 때문에 행복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행복을 어디에서 찾고 있는지 떠올려 보았으면 합니다. 지금 많은 것을 가지고 높은 지위를 누리고 있다고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또 세속적으로 성공한 부모를 두었다고 해서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녀가 세속적인 성공을 했다고 해서 행복한 것도 아닙니다.
진정한 행복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면서 참 기쁨과 행복의 삶을 살 때 이루어집니다. 세상의 기준만을 내세우다가는 큰 슬픔 속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 기준을 따르면 분명한 기쁨을 맞이하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새로운 시간 속에서 새로운 마음을 담아야 한다(아우구스티누스).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갈라 3,27)
세례를 받은 이들은
누구나
그리스도라는
옷을 입게 된다네.
세례와 함께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같은 옷을 입은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되므로
그리스도를 입은 이들은
모두가
그리스도와 한 몸이라네.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묵상글 단톡방)
남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남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없는 사람은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남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방법은
대가를 바라지 않는 희생과 봉사입니다.
행여 대가를 바라지 마십시오.
대가를 기대하는 순간 행복은 사라집니다.
행복은 희생과 봉사를 통한 나눔으로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되는 감정입니다.
자선과 희생과 봉사를 통한 나눔이 곧 행복이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행복한 겁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 28)
행복은
하느님께
있습니다.
하느님 안에
행복이 있습니다.
함께 해야 할
행복이며
건강하게 성장할
행복입니다.
행복은
말씀과 실행에
달려있습니다.
말씀으로
채워져야 할
행복이며
실행으로 깊어질
우리의 행복입니다.
말씀으로 끊임없이
하느님의 사랑받는
사람들임을
깨닫게됩니다.
말씀과 실행이
모든 관계의
피와 살이 됩니다.
혈육의 정보다
더 영원한 것이
말씀의 정(情)입니다.
말씀의 모태로
돌아갈 시간입니다.
삶의 방향을
찾아주는
실행의 삶 되십시오.
머물러야 할
말씀이며
어울려야 할
공동체의 진실된
실행입니다.
말씀을 듣고
지키는 행복한
사람 되십시오.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11,28)
'참 행복의 길!'
오늘 복음(루카11,27-28)은 '참 행복'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루카11,27)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르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11,28)
어떤 여자가 행복하다고 지칭한 분은 성모님이십니다. 성모님의 행복은 엘리사벳의 칭송에 드러나 있듯이, 주님의 말씀을 믿고 따랐기 때문입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1,45)
오늘 복음 말씀의 요지는 핏줄로 맺어진 혈연관계보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따라가는 영적인 관계가 더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행복한 이들에 대해 사도 바오로는 오늘 독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도 없고, 남자와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갈라3,26-28)
어제 합천본당에 두 분의 자매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손명숙사비나(90세) 자매님과 한갑순마리아(96세) 자매님이십니다. 두 자매님의 영원한 생명을 위해 기도해 주세요.
믿는 이들에게 죽음은 죽음이 아니고 새로운 삶으로의 옮아감입니다. 새로운 삶은 죽음 저 너머에서 시작되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이 궁극적인 희망과 목적을 이루기 위해 날마다 예수님을 통해서 계시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오늘도 참 행복의 길을 걸어갑시다!
복음말씀
제1독서
<여러분은 모두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갈라티아서 말씀입니다.3,22-29
형제 여러분, 22 성경은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어 놓았습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믿는 이들이 약속을 받게 되었습니다.
23 믿음이 오기 전에는 우리가 율법 아래 갇혀,
믿음이 계시될 때까지 율법의 감시를 받아 왔습니다.
24 그리하여 율법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도록,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의 감시자 노릇을 하였습니다.
25 그러나 믿음이 온 뒤로 우리는 더 이상 감시자 아래 있지 않습니다.
26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27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
28 그래서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
29 여러분이 그리스도께 속한다면,
여러분이야말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약속에 따른 상속자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는 행복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1,27-28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27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하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28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