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모와 제비 꽃
백산은 언제나
사람들로 넘쳐났었죠
5일마다 장이 섰는데
장이 서는 날이면
사방팔방에서
구름처럼
사람들이 몰려왔지요
보부상과 등짐장수
장돌뱅이들
백산은 윤기가 났었죠
추수가 끝난
어느 해
풍요로운 우리 고장에
난장이 터졌는데
전국 각지의
한가락 한다는 씨름꾼부터
소리꾼 풍각쟁이
사당패
환쟁이 악극단
어중이 떠중이
모든 사람들이 모여들어
작은 고장은
북새통을 이루었죠
酒幕(주막)의 주모들은
신이난 엉덩이 춤을
보란듯 추었고
타관에서 모여든
사내들의 눈썰미를
붙잡기에 충분했었죠
뚝배기에 돼지 머릿고기를
뚝뚝 베어 썰어 놓고
푸짐하게 상을 내어
고장에 풍요를 자랑하던
국밥집 아주머니
그 시절 추수가 끝난
우리 고장의 모습이었죠.
나는
고모에게 손을 잡혀
난장 구경을 갔었는데요
아무리 어렸데도
사내인 나는
고모의 보디가드
마을 고모들과
이곳 저곳을 구경했는데요
우리 민족이 낼수있는
모든 소리
모든 재주
모든 힘들이
우리고장 용광로에 담겨
녹아있었지요.
그 시절
어른들은
지금처럼 먹고 살기위해
아등바등 하지않고
모든것을 운명에 맡기고
먹고 마시고 즐기며 살아갔었죠
삶을 운명에 맡기고
서로가
믿고 의지하며 살았죠
사촌이 논사면 배 아프다는
속담이 있지만
부자로 사는 사람들에게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는 福이 많아서
가난뱅이는 복이 없어서 라며
운명에 순종하며 살았지요
뱃 사람은 고기잡이
농삿꾼은 농삿일을
장삿꾼은 장사를
소리꾼은 소리를
씨름꾼은 씨름을
업으로 삼고
먹고사는 것은
늘 뒷전이고
쟁이들은 갈고닦은 실력을
최고의 명예로 삼고
겨루었다고해요.
나랏 구석구석을
다니면서요
國劇團(국극단)
국악인들의 樂劇(악극)
심청전은
고장의 모든 사람들을
기쁨과 슬픔으로 얼룩지게 하였고
시집 안 간
고모들의 눈 시울도
붉어지는 것을
보았으니까요.
오죽하면
技藝(기예)를 파는 그들을
풍각쟁이라고 불렀겠어요?
사당패라 불렀겠어요?
바람처럼 역마처럼
떠돌아 다니며
그들의 혼을 팔고
사랑을 팔면서
조선팔도 헤메며
한을 심었겠어요?
그 때 국악인이
지금에 와서는
명창이되었고
대학 강단에 서
후학을 위하여
헌신하고 있음을 알았을 때
고된 인생의
등짐을 벗어버리고
한국에 멋이 아닌
조선의
아름다운 소리와 線(선)이
빛을 발하는걸
알았답니다.
근동의 사방팔방
외지 남정네들까지 찾아 와
새끼줄로 쳐 놓은
금줄(禁線) 앞은 인산인해
구경꾼들로 꽉 들어 찬
시름판은
매끄럽고 깨끗한
실내 체육관에서
티비가 촬영 방영하는
지금의 시름판 모습보다
땀 한 방울
가뿐 숨소리
온 몸의 근육과
살 떨림
관중들이 토해내는
함성속에 섞인
막걸리 내음 진동하는
사람들의 열기에 달궈진
모래판
희 노 애 락을
그때
고향의 씨름판 보다
더 리얼하게 표현 할 순 없죠.
예닐곱
솜털도 가시기 전
고모와 함께 한
이맘 적
우리고장 난장판 모습이었죠.
그 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며는
학교에 들어가는
나이가 되는데요
어머니의 傳言(전언)에
의하며는요
마을에서 가장적고
체격도 왜소하여
저것이 어떻게
학교에 다닐수있을까
어머니는 걱정을 했는데
아버지가 또래와 같이
다녀야 한다면서
입학을 시켰데요
그 때 까지도
오줌도 가리지 못한
덜 떨어진 녀석을...
가끔씩
이불이나 방 바닥에
찌를 했다는 말에
난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아요.
어머니 말씀을
거짓이라 여길수도 없고요
하지만
기억나는 일이 있는데요
한 겨울 이른 아침
이웃집에
곡식의 異物(이물)을 가르는
키를 뒤집어 쓰고
문 앞에서
오줌 쌌어요 라고 외치면
그 집 할머니 아니면
아주머니가 나오셔서
부지깽이로 키를 두들기며
너 오줌 쌌구나
또 쌀래? 또 쌀래?하시며
혼낸 기억이 나는 걸 보면
오줌싸개인 것이 분명해요.
ㅎㅎㅎㅎㅎ
이처럼
철없는 나에게
학교는 감당할수 없었지요.
지금이야
수 삼년 유치원에서
모든 걸 갈고 닦아
학교에 입학하는 것은
지금 병아리들에겐
여반장이지만
난장이 섰던 옆에
학교가 있었으니
난장판의 모습을 본
나에겐 학교는
어지러움의 대상이었지요.
그래도 할수없죠
나이가 찼으니
학교를 가야죠.
혼기가 찬 우리 고모도
정월에 시집을 가버려
의지할곳도 없었답니다.
전봇대 죽 늘어선
신작로를 따라
학교에 입학을 했답니다.
입학식 날
어머니와 같이 갔는데요
왜 그리 모든것이
어설프고 낯이 설은지.....
왼쪽 가슴에 하얀 손수건을
단정하게 접어 핀으로 고정하고
그 위 큼지막하게
배정받은
번호와 이름을 쓰고
우리들 병아리는
엉성하게 두줄로 서서
하나 둘 구령에 맞춰
선생님을 따라
운동장을 돌았는데요
어쩌죠? 우리들이
배정받은 교실은 없었어요.
교실이 없어
운동장에서 공부를 시작했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봄 바람이 어디 장난인가요?
시샘 많고 변덕스러운
봄 바람과
공부를 같이 하면서
기억 니은 철수와 영희
어미 닭과
병아리와 개나리
풍금을
은사시나무 밑에 가져와
선생님의 반주에 맞춰
목청이 터지도록 불렀던
학교 종 노래
일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주 영님(주 영숙의 큰 언니)
선생님이셨는데요.
전주 사법학교를
막 졸업하고
우리 학교에
부임하였답니다.
정월에 시집 간
우리 고모와
보통학교 동창이었는데요
고모는 시집을 가고
선생님은 학교로 오고
이런것이
인생인가요?
책상도 의자도 없었지요.
어쩔 땐 맨 바닥에서
종이로 만들어 온 깔판에서
공부를 했는데요
나는요 공부가
뭔지도 몰랐지요.
글자도 숫자도
나에겐 넘 생경하여
도무지 알수가 없었지요.
행여 선생님이 일어나
책을 읽으라고 하지않나
하는 걱정이 앞 섰고
시험을 보면
완전 빵점이었죠.
모든 과목에서요.
그래서 숙제를 내 주면
온 종일
불안에 떨어야했고
아침엔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떼를 쓰다가
아버지에게 회초리로
종아리를 엄청 맞았죠.
난장판과 학교와
선생님과 고모
콧물과 눈물이
뒤 범벅이된 체
무조건
내 편이 되어주었던
고모의 얼굴이 살아나
더 섧히 울었던
유년에 시절
고모는 양지 쪽
토담 아래
보라색 제비꽃이 피면
온다고 하던
할머니의 말처럼
우리집에 왔는데요
예전에 나를 바라보던
눈빛이 아닌 것을 알고
이불을 뒤집어 쓰고
눈 시울을 붉힌
기억이 잔잔하네요.
유년에 시절
식구들이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
고모가
얼마나 좋았는지
어른이 되면
알수있지요
어른이되면....
...................................
자네가 보내온 이 문세의
사랑이 지나가면의
노래는 유~튜브를 통하여
듣고 또 들었다네
잊고 싶지만 캐내지 못하는
사랑의 뿌렁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지나간 사랑을
아무리 외면한데도
막걸리잔 안에
쇠주잔 안에
차고 넘치는데
억지로 모른다고?
잊는다고
잊어지는게 아니지
문세 쪼다 ㅎㅎㅎ...
난 자네에게
존 덴버 형을 호출하여
통키타와 함께
컨츄리~송으로
더운 하루를 식혀볼까 한다네
높은 산을 품은 록키산맥
고향으로 가는 길
애니의 ~ 노래
그의 많은 노래들이 있어
조금은 여름을
시원하게 보낸다네
1943년 생이니 만 81세
컨츄리~송의 개척자
자연을 노래한
위대한 싱어~송라이터
뜻밖의 비행기 사고로
불귀의 객이 된 존 ~덴버
우리들에게 고향을 노래한
영원한 청년이었지
자신의 아내를 위하여 작곡했다는
애니의 노래
결국 이혼을 해서
씁쓸한 뒷맛을 남겼지만...
참 좋은 노래를 여러곡 남긴
존~ 덴버 형을 그리며
가끔씩 나는
그를 찾는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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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1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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