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정고성에서 중대한 발견-당대부터 몽원시대까지 북정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습니다.:北庭故城考古获重大发现——唐代至蒙元时期的北庭面貌慢慢显露
출처: 광명일보 작성자: 王瑟 고고학 중국 소스 : 동북아역사문물연구원
▲ 북정고성 바깥쪽 성벽의 전경은 북정고성 남문을 통과하고 길옆의 거대한 흙더미는 이미 고고학자들에 의해 그 모습을 완전히 드러냈습니다: 겹겹이 쌓인 흙벽돌은 이 높은 기초를 쌓았습니다.
6호 사찰로 표기된 이 유적은 다지기 받침돌 위에 세워진 불전 터로서 동서 24m, 남북 21m, 높이 6.5m의 잔존지이며 받침돌 위에 있는 불전은 흙벽돌로 쌓고 주변에 툇마루가 둘러져 있습니다.
보세요, 이 받침대에는 가운데에도 많은 구멍이 있고 일부는 여전히 관통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우리는 아직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베이팅 고성의 고고학을 담당하는 궈물(郭物) 중국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 책임자의 설명입니다.
▲ 베이팅 고대 도시의 일부 유적지 베이팅 고대 도시의 위치 베이팅 고대 도시 유적은 현재 신장 창지 후이족 자치주 지무싸얼 현에서 북동쪽으로 약 12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사료에 따르면 동한 명제 때 서역도호(西域都護)하에 이기(戊己) 양교위(兩校尉)를 두었는데, 겅공(耿恭)이 무교위(武校尉)가 되어 길목사르현(吉木萨尔縣)의 산 앞 지대에 주둔했던 금만성은 당시 서역의 차사후(車師後) 왕정이 있었던 곳입니다.
당나라 톈산 북쪽 기슭은 정치와 군사의 중심지로 발전하였고 서기 712년에 북정도호부가 설치되어 이곳을 치소로 하여 북방의 광활한 지역을 통괄하여 북정이라 불렀습니다.
송나라의 이 성은 고창왕의 행궁이고, 원나라의 별실팔리수부입니다.슝치천산 북쪽 기슭에서 600년 후, 14세기 중반부터 북정의 옛 성은 점차 쇠퇴하여 15세기 초반에 전쟁으로 파괴되었습니다.
▲ 북정고성 내 성남성벽의 적대인 북정고성유적의 핵심지역은 북정고성과 북정서대사를 포함하여 1.5평방킬로미터의 면적을 차지합니다.외성은 남북으로 길이 약 1.5km, 동서 너비 약 1km로 크게 내외의 이중성으로 구분됩니다.
내외부 성벽에는 해자와 말, 적대와 각루가 있습니다. 당나라 북정도호부치소로서 북정고성은 현재 톈산 북쪽 기슭에 가장 완전하고 큰 고대 도시 유적으로 보존되어 있으며, 톈산 북쪽 기슭의 고대 문명의 발상지이자 고대 실크로드 북쪽을 통과해야 하는 곳으로 당 왕조가 신장에서 효과적으로 통치한 증거입니다.
1988년 북정고성 유적은 국가 핵심 문화재 보호 기관이 되었으며 2013년 12월 북정고성 유적은 국가 고고학 유적 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신장 최초의 국가 고고학 유적 공원입니다.
2014년 6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당나라 때 평야에 건설·증축된 북정성은 정주, 북정도호부, 북정대도호부, 이서북정절도사 등의 주둔지가 되었고, 마침내 천산 북쪽 기슭의 정치·군사·문화의 중심지로 발전하여 고창의 회골·몽원 등을 거쳐 원말·명초까지 800년에 가까운 역사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 북정고성에서 발견된 토기 파편 북정고성의 고고학적 발굴은 수년 동안 계속되어 왔지만 북정고성 유적지 주변에서 발견된 종이문서가 매우 적기 때문에 문서자료는 약간의 비각 파편과 회골시대 불교사원의 제기가 전부입니다.
2016년 5월부터 11월까지 고고학자들이 북정고성 바깥쪽 성벽인 남문유적을 고고학적으로 발굴하던 중 당나라의 개원통보 화폐 1개를 발견하여 기존 고성 밖 성벽의 주체가 당나라 때 축조되었음을 증명하였습니다. 2018년 고고학자들이 내성의 성문과 성벽을 발굴한 결과 내성의 성벽 본체도 당나라에 건설되었을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내성 성벽은 다져진 토질이 순수하고 기본적으로 황무지에 성을 쌓았기 때문에 정주성과 확장 이전의 북정도호부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외성벽의 다지기 층에는 토기, 숯, 동전 등 인간 활동의 흔적이 남아 있어 외성을 확장했을 때 성 밖에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됩니다.인구, 군대, 말이 증가하는 상황에서 외성을 확장한 것은 주로 북정의 수준 향상과 한 해군의 주둔 확대 수요에 부응하기 위한 것으로 당시 중앙 정권의 서역 관할권이 지속적으로 조정되고 개선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 현장에서 발굴된 말뼈는 2018년 중국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와 지무사르현 문물국과 함께 베이팅 고성 내 내성 서문, 내성 북문, 외성 북문, 외성 남문 4개 성문, 사찰 1곳에 5450㎡에 달하는 유적지를 고고학적으로 발굴·탐사했습니다.이번에 발굴된 면적은 지금까지 북정고성에서 가장 크고 신장 고고학 역사상 가장 큰 면적입니다.
▲ 북정고성 서대사 터는 북문동(北門洞)에 서서 문동(門洞)의 줄기를 가리키며 "내성 북문 줄기는 가운데가 수직이고 양쪽이 성벽에 따라 약간씩 분(分)되어 있습니다.문구멍의 두 벽에는 네모난 주춧돌을 사용하여 기둥을 배열하고 서쪽에 7개의 기둥 홈이 있으며 노면이 파괴되었습니다.동쪽 성벽 발굴을 통해 상마도가 확인되었습니다.
도랑탐사를 통해 내성의 북문 바깥쪽에 있는 해자를 청소합니다.이러한 고고학적 발견을 통해 우리는 이 도시의 구조가 기본적으로 150년 이상 동안 정주와 북정도호부로 대표되는 기관을 통해 서역을 통치하여 완성되었음을 초보적으로 증명합니다.
크고 작은 두 세트의 성벽의 변화는 반드시 고성에서 정주에서 북정도호부, 이서북정 절도사의 발전 변천 역사를 반영해야 합니다.고창의 후이와 몽원시대는 기본적으로 당나라의 북정대(北亭大)의 형태를 따랐고 부분적인 보수와 변경만 했습니다."
▲ 고고학자들이 발굴을 진행하고 있는 내성 서성문에서는 문동쪽 노면이 현대 지상보다 1m 정도 높으며, 내성 서문 북쪽 문동에서는 9개의 기둥 홈과 기갱이, 문동쪽에는 후기 흙을 다져 막은 흔적이 보입니다.
곽씨는 "문터 부근의 해부도랑을 발굴해 해자의 위치와 폭, 깊이를 거의 파악했습니다.
내성 서문동 부근의 해자는 성벽에서 20m 가까이 떨어져 있고, 상구의 폭은 9~10m, 깊이는 2.9m입니다.내성의 서문성벽 바깥쪽 남쪽에서 시기별로 흙을 다지고 흙벽돌을 쌓아 만든 장방형의 밀폐된 구역이 발견되었는데, 회골시대 때 증축된 건물유적으로 보이며, 문동 북쪽에도 있을 수 있으나, 다만 훼손되어 성문의 시대와 구조를 이해하는 데 새로운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북정고성 한편에 있는 곽물에 따르면 내성 북문 옆 탐방리에서는 연꽃무늬의 와당을 발견했는데, 이는 북정고성 고고학에서는 보기 드문 모습입니다. 내성 북문 남쪽에서는 연문전(蓮文砖)으로 포장된 바닥도 발견됐습니다.
전체 연문 벽돌은 대략 정사각형이며 네 모서리는 당초문, 가운데는 화심, 연잎은 가운데의 주제문양으로 완전한 연꽃을 형성하고 바깥쪽은 구슬무늬로 둥글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연꽃무늬의 기와와 바닥돌은 당나라 때 성행했고, 특히 황실과 고관귀인 계층에서는 신분적 지위의 상징이었습니다.북정고성에서 연꽃무늬 벽돌을 발견했다는 것은 북정도호부가 북강지역의 최고 통치기관으로서 높은 직급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또한 이곳의 번영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곽물설.
▲북정고성벽화 고고학적 발견으로 외성 북문동 양쪽의 포차기둥은 나무 보자기를 기반으로 했고, 문동 폭은 4m라는 사실도 입증됐습니다.북문은 역사적으로 흙벽돌과 흙으로 막혔습니다.도랑 발굴을 통해 북문 밖에 해자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외성 북문 옹성의 다져진 흙 속에서 개원통보 1점이 발견되었는데, 외성의 성벽에 대한 건축연도의 상한선이 다시 확인되어서 당나라 때 이 개원통보를 주조했던 시기를 넘기지 않을 것임을 확인시켜줍니다.
베이팅 고성의 최신 발견 올해 베이팅 고성의 발굴 면적은 1800제곱미터입니다.4월 18일부터 6월 27일까지 북정 고고학팀은 북정고성 외성 남문 부근의 6호 사찰 유적과 내성 남문 의심 유적의 초기 발굴을 완료했습니다.
발굴을 통해 6호 불사지와 5호 불탑지 시대는 주로 고창 회골시대이며, 북정고성 바깥쪽 성의 남문 안에 있는 비교적 규모가 큰 중요한 불사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 북정고성불사에 남아있는 와불내성 남벽 중단대지 발굴은 이곳이 남벽의 군사지휘와 경계의 중심지였던 하나의 대형 적대유적이었을 가능성이 높고, 내성에 남문이 설치되지 않았을 가능성을 뒷받침해줍니다.
북정고성의 내성은 당나라 때 최초로 건설된 정주성일 수 있으며, 이후 북정도호부, 고창회골하도, 원나라 선위사, 원수부의 중요한 지역이 되었습니다.이 발견은 매우 중요합니다.
"2년간의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당나라에서 몽원(蒙元)까지의 북정(北政)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났습니다.신장 북부 신장 지역의 가장 중요한 군사 정부, 군사 정부의 패턴 및 발전 과정과 몇 가지 구체적인 세부 사항을 볼 수 있습니다.북정 고고학은 한나라와 당나라, 특히 당나라 때 신장에서 중원 왕조의 효과적인 통치를 입증할 것입니다."
▲ 북정고성 국립고고유적공원은 황야성에 남아 있는 성벽과 무너진 성문, 고즈넉한 불사를 거닐며 옛이야기를 전하는 듯합니다.당나라 시인 천삼은 북정절도사 판사로 재직하던 중 '북정작'이라는 시를 썼는데, '안새는 소금에 절이고 용더미는 식초 도랑에 연결됩니다.
외딴 도시의 북쪽 끝, 바다 서쪽 끝."지금 독특한 지리적, 인문학적 풍경을 지닌 이 천년 고성에 직면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역사의 선물을 잘 계승하고 보호 속에서 끊임없이 이 서역의 중요한 도시의 뒷이야기를 찾아내고 진실한 북정을 복원하는 것입니다.
분류:고고학 연구
본문 라벨: 북정고성 고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