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휴 스님의 禪으로 읽는 마찌마니까야] 46. 無明에서 본 것은 사실이 없다
46. 짱끼의 경 1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결정적으로 말하는 것은 봉사들이 줄을 선 것과 같이, 앞선 자도 보지 못하고, 가운데 선 자도 보지 못하고, 뒤에 선 자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처음 시작되었다는 것은 무엇일까? 초기 그리스의 우주론처럼 만물이 생겨나기 이전의 시원적 공허 또는 지하세계인 타르타로스의 심연을 가리키는 ‘카오스(Chaos)’일까? 아니면 요즘 과학에서 말하는 무정형의 빈 공간으로서, 원자보다 훨씬 작은 물질의 거품이 1조의 1조의 1조분의 1초보다 더 짧은 순간에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되풀이하는 ‘양자 거품(Quantum foam)’일까?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무명(無明)이라 말씀하셨고, 육조스님은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라고 하셨다. 그렇지만 지금 누군가의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을 피할 길 없으니,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할 수밖에 없다.
“만법이 하나로 돌아간다고 하니,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갑니까?” 어느 날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에게 물었다. 조주 스님의 대답이야 무엇이 중요하겠는가. 묻는 스님의 답답함이 중요하다. 밖으로 보이는 만물이야 자신도 보고 있지만, 그 만물이 생기기 전을 아느냐고 물은 것이다. 즉, “진리는 무엇입니까?”를 바로 여쭈었다. 스님은 이 질문을 던지기까지 아마도 나름의 사유체계로 열심히 수행하였음이 분명하다. 핵심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다는 것은 깊이 있는 통찰을 하는 것이며, 마지막 의식의 정점에 와 있는 것이므로 익은 과일의 꼭지를 따는 일만을 남겨두었다 할 수 있다.
옛 선사들은 언어를 언어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은 왜 그런가? 의식으로 헤아릴 수 없는 것을 헤아릴 수 없게 만들어, 남아 있는 모든 거짓을 그 즉시 버리게 하려 함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밝지 않음[無明]’에서 본 것이 무엇이고 누구인지를 알아 그곳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하는 것이 선사의 역할이다. 지금 여기에서 살아가는 방식을 잘 말해주는 것이 아니다. 무엇을 잘 피해 재앙이 생기지 않게 하는 것도 아니다. 참으로 오랜 세월 동안 연결되어 있는 한 생각을 끊어 버리게 하는 것이다. 그 한 생각은 옳음도 없고, 옳지 않음도 없고, 그저 한 생각일 뿐이었다는 것을 통렬하게 통찰하여, 있지도 않은 것은 버릴 필요조차 없다는 것을 자각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첫 말’이다. 분명히 사대오온은 여기서 “그 ‘다음’은 뭐지?”라고 지나가듯이 혼잣말을 할 것이다. 수행자들이 여기에 대부분 걸려들고 만다. 그리고 뭔가에 대한 찜찜함을 가져 버린다. 이때 선사의 일갈(一喝) 혹은 스스로의 일갈이 필요하다. 이 일갈로 지금까지 불필요하게 걸어온 모든 사변적인 말과 행동이 버려지고 모양과 소리가 아닌 것만 유일하게 남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긴 여정의 마침표를 찍는다. 그리고 말한다. “수행은 진리를 찾아 나서는 순간, 모든 것을 망친다. 진리는 숨어 있지 않다. 진리는 누군가에 의해 정의되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에 의해 찾아지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아는 자가 있는 한, 그 진리로 보일 수가 없다. 왜냐하면 지금 아는 그 자신을 가장 진리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 아는 자를 무명으로 바로 보게 되면,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그대로, 보여주고 들려주는 진리를 알게 된다. 하지만 이 말을 바르게 듣기까지는 다시 의심하고 두려워한다.
누가 누구의 말을 믿고 따르겠는가. 일러주는 자는 일러주는 가르침을 믿으라고 말할 뿐이다. 일러주는 자를 대상으로 삼아 믿는 것은 깨진 독에 물을 부으면서 채워지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아무리 애써 붓는다 해도 채워지지 못한다. 누구에게나 당면의 문제인 태어났다는 한 생각, 늙었다는 한 생각, 병들었다는 한 생각, 죽는다는 한 생각을 일으키고 그것을 알았다고 말하는 자를 바르게 보게 하려는 것이다. 그 생각은 단지 물질, 느낌, 지각, 의도, 의식의 두려움에서 일어나는 물결 같은 것이지 사실적인 흔들림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를 온전히 알아 마지막 여행의 즐거움을 갖는다면 더할 나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