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639
10월10일[연중 제27주간 화요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https://youtu.be/7psSVS69qJw?si=MlcrqNd6EHoJTl-s
[인천교구 김영인 사도요한 신부님 집전(서운동 본당 보좌)]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평신도가 성화(聖化)되는 곳은 바로 이 세상 안입니다!>
전형적인 마르타 스타일인 저는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살짝 빈정이 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활동가 마르타가 아니라 관상(觀想)에 전념하는 마리아의 손을 들어주시는 듯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라이프스타일 때문에 깊이 있는 기도생활이나 영적 생활에 몰입할 수 없는 평신도들께서 약간 속이 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장담컨대 절대 그럴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의 일생을 돌아보면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공생활 이전, 30년이란 오랜 세월 동안 평범한 평신도로서의 삶을 살아가셨습니다. 30년의 세월은 복음사가조차 별로 쓸 말이 없을 정도로 그저 평범한 청년의 삶을 사셨던 나날이었습니다.
때로 어머니를 도와 설거지도 하셨을 것이고 마당도 청소하셨을 것입니다. 나자렛 사람들 사이에서 희로애락을 나누며 동고동락하셨던 것입니다.
좀 더 나이가 들어가면서 목수였던 양부 요셉의 일을 도와 묵묵히 대패질에 전념하셨을 것입니다. 다 만든 물건을 납품하러 다니기도 하셨을 것입니다. ‘무슨 물건을 이 따위로 물건을 만들었냐’는 주문자의 딱딱거림에 화도 나셨을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30년이란 세월동안 인간의 구체적인 역사 안에서 참 인간으로서 지극히 일상적인 삶을 사시면서 우리에게 ‘일상적 삶의 가치’를 직접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를 통해 평신도들께서 참으로 어떤 자세로 삶을 살아 가야하는 가를 몸소 삶으로서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극히 하찮아 보이는 우리의 이 일상적인 일들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일로 변화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평신도들께서는 매일 마주치게 되는 일상의 삶 안에서 하느님을 찾아 살아가야 할 것이며, 또한 이러한 일상의 삶은 결코 하느님과 분리될 수 없는 하나라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할 것입니다.
세상만사 안에 늘 현존하고 계시는 하느님의 자취를 찾는 노력(Finding God in All Things)을 계속할 때,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은 ‘기도화’될 수 있을 것입니다. ‘관상화’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평신도 영성과 관련해서 한국 천주교회는 참으로 특별한 사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세계 교회사 안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초창기 한국 천주교회 평신도들의 신앙은 그렇게 적극적이었고 자발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현상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토록 능동적이었던 박해시대 평신도들의 역할이 교계제도가 확립되어가면서 점점 수동적으로 변화되어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탁월했던 초기교회의 탁월했던 평신도들의 영성이었는데, 성직자들의 역할이 강화되어가면서 즉시 힘을 잃어갔다는 것입니다.
교회 역사 안에서 평신도의 신원에 대한 불투명한 이해와 불충분한 개념정립은 평신도 자신들에게 뿐 아니라 교회 공동체에 불이익과 손실을 초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평신도 영성의 쇠락은 교회의 퇴보와 늘 직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에 맡겨진 중요한 과제 하나 가운데 하나가 평신도 영성을 활성화시키는 일입니다. 평신도들 안에 활동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주의 깊게 바라보고, 평신도들이 지닌 카리스마와 창의력을 존중하고 교회 쇄신과 발전을 위해 최대한 활용해야 합니다.
평신도들은 교회 안에서 제2중대가 절대로 아닙니다. 장교인 사제들을 맹목적으로 졸졸 따라다니는 졸병 역시 절대로 아닙니다.
평신도들은 사제들의 수가 부족하고 그들의 업무가 과중하기에 이를 보완해주기 위한 존재도 결코 아닙니다.
평신도들 역시 성직자나 수도자와 마찬가지로 복음적 완덕에로 불림을 받은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단 평신도들께서 세상과 격리된 수도원이나 성전 안에서 살지 않지 않고 ‘세상 안에서’ 살아갑니다. 따라서 평신도들의 성화 여정은 당연히 ‘세상 안에서’ 그리고 ‘세상을 통해’ 전개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수도자가 평신도의 삶을 살길 원치 않으시듯이, 평신도가 수도자나 사제의 영성을 살길 바라지 않으십니다. 각기 소명에 성실하며 각자의 카리스마, 달란트에 따라 복음적 삶을 다양하게 표현하도록 마련하셨기 때문입니다.
평신도는 성직자나 수도자 못지않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의 독특한 영성을 지닙니다. 평신도 영성은 세상으로부터 벗어나거나 도피하는 삶의 모습이 아니고 오히려 그 구조들 안에서 육화하여 복음화하며 그 안에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다른 이들을 성화하고 또한 성화되는 삶의 모습입니다.
평신도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봉사하며 성화되는 곳은 바로 이 세상 안입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ssv1eCqB6Fk
++++++++++++++++++
<필요한 것은 하나 뿐: 첫 도미노를 찾아라!>
오늘 복음은 마리아와 마르타의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마르타는 예수님께 봉사하기 위해 밤낮으로 뛰는 신앙인을 의미하고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기도를 제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육체적인 봉사를 열심히 하는 신앙인으로서는 성당에 앉아서 기도만 하는 이들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게으름뱅이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필요한 것은 기도 뿐이라고 하십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선택’일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데도 우선으로 선택하고 집중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기도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칫 그 우선순위를 잊고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운드 오브 뮤직’은 1965년에 개봉한 뮤지컬 영화로,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영화의 주요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주인공 마리아는 오스트리아의 수녀원에서 수녀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고 있지만, 그녀의 자유분방하고 활발한 성격 때문에 수녀원에서의 생활에 적응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녀는 수녀원장의 권유로 트라프 대령의 집에서 아이들의 가정교사로 일을 하게 됩니다.
트라프 대령의 집에는 7명의 아이가 있었지만, 그들은 엄격한 규율 아래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대령은 아내의 죽음으로 아이들을 군인처럼 교육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규율만을 강조하는 트라프 대령에 반기를 든 마리아는 그 아이들에게 사랑과 자유를 전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선택한 것이 음악입니다. 음악의 즐거움을 전해줌으로써, 그들과 깊은 유대감을 형성하게 됩니다. ‘도레미파솔라시도’와 같은 노래를 통해 아이들에게 음악의 기본을 가르치면서, 그녀는 아이들과 함께 자연 속에서 노래를 부르며 즐겁게 지냅니다. 음악은 마리아와 아이들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다리 역할을 합니다. 덕분에 아이들은 다시 웃음을 찾게 되고, 마리아 역시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통해 진정한 자기 삶의 방향을 찾게 됩니다.
마리아의 음악에 대한 열정과 사랑은 트라프 대령에게도 영향을 미치게 되며, 결국 그들 사이에는 사랑이 싹트게 됩니다. 영화는 마리아와 트라프 가족이 나치의 위협으로부터 도망치는 장면으로 클라이막스를 이루며, 결국 그들은 함께 오스트리아를 떠나 스위스로 피신하게 됩니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은 마리아가 음악을 선택하고 그것에 집중함으로써, 트라프 가족의 삶에 변화와 행복을 가져다준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마리아는 아이들 교육을 위해 무엇을 선택하고 집중해야 하는지 알았습니다. 음악을 선택하니 나머지는 저절로 잘 되어갔습니다. 이것을 찾아낼 수 있는 것이 성공의 비결입니다.
성공한 사람들은 모든 일에 다 집중을 잘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집중해야 할 하나를 잘 찾아내는 사람들입니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는 아침에 명상하는 한 시간을 꼭 가졌습니다. 빌 게이츠는 일 년에 두 번, 생각하는 일주일을 가집니다. 마치 우리의 피정처럼 혼자 산속의 작은 집에서 생각에만 몰두합니다. 이런 것들이 위대한 발견을 하게 하는 그들이 선택한 가장 중요한 것들입니다. 그들은 이런 루틴을 절대 다른 것에 빼앗기지 않습니다. 그 중요성을 알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소설가 쏜턴은 “모든 위대한 변화는 차례로 쓰러지는 도미노처럼 시작된다”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복음은 기도가 도미노의 첫 시작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한 물리학 저널에 따르면 한 개의 도미노는 그다음 세워져 있는 도미노가 1.5배에서 많게는 2배까지 커도 넘어뜨릴 수 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1cm 도미노로 시작해서 도미노 17개만 있으면 대한민국 초고층 빌딩 롯데 타워를 넘어뜨릴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원씽』의 저자 게리 켈러는 남다른 성과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의 공통점을 이 도미노 원리에서 찾고 있습니다. “삶은 크고 작은 수많은 문제로 뒤덮여 있습니다. 하지만 우선순위를 세우고 줄을 맞춰 잘 세운다면 최초의 단 하나, 그것만을 움직임으로써 다른 문제들을 저절로 쓰러뜨릴 수 있습니다.” 게리 켈러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일, 그리고 그것이 나머지 모든 일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일을 찾으라고 말합니다. 그것만 찾으면 다른 일은 할 필요가 없거나 쉽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겐 이것이 ‘기도’입니다.
사제라면 첫 도미노를 무엇으로 두어야 할까요? 성경은 오늘 복음에서처럼 친절하게 그 해답을 알려줍니다. 사도들이 여러 일로 바쁘다 보니 정작 첫 번째 도미노를 움직일 힘도 없게 되자 일곱 부제를 뽑아 그들에게 나머지 일을 맡깁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첫 도미노에만 신경 쓰겠다고 합니다. 그것이 이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식탁 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서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찾아내십시오. 그들에게 이 직무를 맡기고,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사도 6,2-4)
사제가 성사를 집전하는 행위를 하는 직무라고 생각하던 저에게 큰 울림을 준 말씀이었습니다. 사제는 사실 성사를 집전하는 일보다 더 중요하게 기도로 말씀을 준비하는 일에 몰두해야 합니다. 그것만 하면 성사 집전도 쉬워집니다. 말씀 준비가 잘 안 되었을 때는 미사가 두려워집니다. 그러면 미사 집전에 게을러지고 회피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그러나 말씀 준비가 잘 되었다면 미사가 기다려집니다. 내가 깨달은 것을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사제에게 첫 번째 도미노는 역시 말씀 묵상과 강론 준비입니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세바시’라는 프로가 있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의 줄임말입니다. 산보 중에 가수 ‘김수철’ 씨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김수철 씨는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라고 합니다. 그것도 꾸준히 하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비록 실패는 있을 수 있지만 언젠가는 좋은 결실을 맺는다고 합니다. 저는 김수철 씨의 노래를 듣고 자란 세대입니다. “못다핀 꽃 한 송이, 일곱 색깔 무지개, 정신 차려, 젊은 그대, 나도야 간다.”와 같은 노래를 들었습니다. 김수철 씨는 우리의 국악을 공부하고 싶었답니다. 그렇게 국악을 40년 넘게 공부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의 국악에 대한 열정은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는 ‘86 아시안 게임, 88 올림픽,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음악 감독을 맡았습니다. 우리에게 국악에 대한 관심을 주었던 영화 ‘서편제’에서도 음악감독을 맡았다고 합니다. 저는 김수철 씨의 노래는 들었지만, 그가 ‘국악’에 그렇게 많은 관심을 가졌는지는 몰랐습니다. 그냥 대중음악을 할 때는 재정적인 걱정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늘 허전함이 있었다고 합니다. 국악을 공부하고, 작곡할 때는 재정적인 걱정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늘 기쁨이 컸다고 합니다. 김수철 씨는 젊은이들에게 이렇게 당부하였습니다. “힘들고 어렵겠지만 좋아하는 일이 있다면 꾸준히 최선을 다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반드시 결실을 볼 것입니다.”
저는 신학교에 입학하면서 관심을 갖고 좋아했던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강론’이었습니다. 사제에게 강론은 교우들과 만나는 소중한 시간입니다. 신자들에게 강론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기쁨의 시간입니다. 좋은 강론은 교우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한 주일을 지낼 수 있는 영적인 양식이 됩니다. 지루한 강론은 교우들의 몸을 움직이게 합니다. 성찬의 전례를 통해서 주님을 모시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말씀의 전례를 통해서 영적인 위로를 받고, 희망을 얻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렇게 강론을 좋아하고, 관심을 갖게 되니 학사논문은 ‘현대인을 위한 설교’를 썼습니다. 석사논문은 ‘설교와 선교’를 썼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하니 힘든 줄도 몰랐습니다. 논문을 쓰면서 강론에 필요한 4가지 요소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강론의 주된 재료는 ‘말씀’입니다. 모든 강론은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서 시작됩니다. 좋은 강론을 하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샘이 깊은 물과 같고, 뿌리 깊은 나무와 같습니다. 좋은 강론은 ‘시대의 징표’를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문헌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현대인의들 슬픔과 기쁨, 희망과 고통이 무엇인지 파악해야 합니다. 좋은 강론은 ‘실천’으로 열매 맺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실천’이 없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위선과 교만을 꾸짖으셨습니다. 김수철 씨는 50년 넘게 자기가 좋아하는 ‘국악’을 한다고 합니다. 저도 언제까지 일지는 모르지만 제가 좋아하는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몸과 마음을 다스리시는 하느님을 따라야 합니다.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몫을 택하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선택한 것이 있다면 그것을 좋아하고, 꾸준히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요나의 말을 들었던 니네베 사람들은 모두 회개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회개한 니네베 사람들을 벌하지 않으시고 용서해 주셨습니다. 나의 몸을 가꾸는 만큼 나의 마음이 하느님께로 향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0,38-42: 마르타와 마리아
예수님을 집으로 모신 마르타는 깊은 애정으로 지극히 거룩하신 분과 그분의 제자들을 위해 음식을 장만하며, 몹시 분주하였다. 그런데 그의 동생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39절) 이것은 무엇을 하였다는 것인가? 주님의 발치에서 시장한 마리아는 바로 이 샘에서 정의의 곳간에서 먹고 마시고 있다. 자기가 귀 기울여 듣고 있는 그분의 진리를 먹고 있었다. 주님은 “나는 진리다.”(요한 14,6)라고 하신 분이시다. 그분은 생명의 빵인 당신을 마리아에게 먹이고 계셨다. 그분은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요한 6,41)라고 하셨다. 그 빵은 사람을 먹여 기르되 절대 줄어들지 않는 빵이다. 마르타와 마리아의 모습에서 보듯이 덕은 한 가지의 모습이 아니다. 한쪽에는 분주한 섬김이 있고, 다른 쪽에는 하느님 말씀에 대한 경청이 있다. 그런데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일이 분주하게 일하는 것보다 우선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42절) 하신다.
시중드는 일로 바빠서 거룩한 말씀에 관한 지식을 놓치는 일이 없도록 하여야 한다. 마르타가 열심히 시중을 들어 책망을 들은 것이 아니다. 다만 더 좋은 몫을 택한 마리아가 인정을 받은 것이다. 복음에서 보면 마르타는 마리아보다 더 뜨겁게 사랑했다. 주님께서 도착하시기 전부터 시중들 준비를 했고, 라자로를 살리시려고 주님께서 오셨을 때도 먼저 달려 나가 그분을 맞이하였다. 마르타는 주님과 그분의 제자들을 위해 시중드는 매우 거룩한 봉사를 하였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 발치에 앉아 그분의 영적 가르침에 모든 주의를 기울였다. 그렇다고 마르타에 대해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지만, 비판하지도 않으셨다. 다만 마리아가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42절) 하심으로써 마르타의 몫은 남에게 빼앗길 수 있는 것이라고 하신다.
육신을 시중드는 일은 섬김을 받는 사람이 그곳에 있는 동안에만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마리아의 영원하신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실천하는 모습은 끝날 수 없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여정에서 일어난 사건을 다룹니다. 특정한 장소와 시간은 언급되지 않습니다. 어떤 마을에 머무르기로 하신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의 초대로 그의 집을 방문하여 마르타와 그녀의 동생 마리아를 만나십니다.
예수님을 맞이하는 마르타와 마리아의 모습은 서로 대조를 이룹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있고, 마르타는 여러 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가 선택한 좋은 몫, 곧 마리아의 모습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십니다. 마리아는 오로지 한 가지에 관심을 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 시선을 향하고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는데, 이는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에게 반드시 요구되는 자세입니다.
반대로 예수님을 시중드는 일, 곧 봉사에 헌신한 마르타는 다른 평가를 받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 마르타의 모습을 지적하십니다. 마르타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면서도 예수님을 자신의 중심에 두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자신이 세워 놓은 계획에 따라 예수님을 모시려고 하였습니다.(10,40 참조) 초대받은 예수님께 집중하였던 마리아와 달리 마르타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초대하였지만 그분의 말씀을 경청하기보다 그분을 그저 ‘손님’으로 모시려는 데만 마음을 쏟았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나와 예수님의 관계를 되돌아보도록 초대합니다. ‘제자’의 삶에서 주님을 중심에 모시고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이 핵심이고, 그 밖의 모든 것은 이차적일 뿐입니다. 마리아는 우리에게 예수님과 이루는 관계 정립을 위한 이정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
[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폭풍우에 죽을 뻔 했던 요나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큰 물고기 덕분에 목숨을 구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일러주시는 니네베로 가서 예언자의 소명을 다합니다.
니네베는 가로지르는 데에만도 사흘이 걸리는 큰 성읍이었습니다. 요나는 성읍 안으로 들어가 하룻길을 걸은 다음 다음과 같이 외칩니다.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요나 예언서 3장 4절) 두려워했던 이방인의 사람들의 반응이었습니다.
그의 예상을 빗나가 그들은 임금으로부터 현실에 이르기까지 요나의 외침을 듣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이 놀라운 광경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니네베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었다. 그들은 단식을 선포하고 가장 높은 사람부터 가장 낮은 사람까지 자루옷을 입었다. 이 소식이 니네베 임금에게 전해지자, 그도 왕좌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자루옷을 걸친 다음 잿더미 위에 앉았다.”(요나 예언서 3장 5절-6절)
어쩐 일인지 이방인 왕과 신하들은 하느님의 선포소식을 즉시 받아들이어 사람은 물론이고 짐승들도 아무것도 맛보지 못하게 합니다. 임금으로부터 신하에 이르기까지 자루옷을 걸치고 하느님께 회개의 기도를 바치라고 합니다.
그리고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다시 마음을 돌리시고 그 타오르는 진노를 거두실지 누가 아느냐? 그러면 우리가 멸망하지 않을 수도 있다.”(열왕기 상권 역사서 3장 9절) 하느님께서 그들이 악한 길에서 선한 일로 돌아서는 모습을 보시고 내리시려던 책벌을 거두십니다.
예수님께서 베타니아를 들르십니다. 그곳은 라자로와 마르타, 그리고 마리아가 사는 동네였습니다. 마르타는 열심히 스승과 그 일행을 위하여 식사준비를 합니다. 마르타는 음식준비에 분주하고 마리아는 주님 발치에 앉아 하시는 말씀을 듣습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서 그분의 말씀을 듣습니다.
마르타의 입장에서 바쁜 사정을 아시면서도 아무 무관심하게 보이시는 주님의 모습이나 말씀에 취해 있는 동생 마리아의 모습은 원망스럽까지 합니다.
마르타는 드디어 자신의 심정을 주님께 드러내며 말씀을 드립니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루카 복음 10장 40절)
자신의 심정을 이해하며 들어주실 줄 알았던 주님께서 마리아를 두둔하시는 말씀만 하십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 복음 10장 41절-42절)
마르타는 바쁜 자신을 전혀 돕지 않는 마리아가 밉살스럽기도 하지만 자신의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시던 주님께서 말씀도 섭섭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님께서 주시는 메시지가 사실 중요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들리신 마르타아와 마리아의 집은 후에 복음에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부담 없으실 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마리아에게 하신 말씀의 내용은 전해지지 않지만 말씀의 선포가 담고 있는 구원에 대한 것이리라 추측합니다. 주님께서 마르타에게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했다고 설명하신 것을 미루어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말씀하셨지만 ‘생명을 구하는 것’ 다시 말해서 ‘구원을 얻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물론 주님과 그 일행이 여행으로 지쳐 있어서 쉬는 것과 식사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주님의 전체 삶을 바라볼 때, 주님께서는 세상 구원을 위해서 아버지로부터 세상에 파견되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먹고사는 일과 사람과의 관계를 갖는 것에 어쩔 수 없이 우리의 마음을 모읍니다.
그러나 세상의 어떤 일보다 구원으로 이어지는 것이 참으로 소중한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니네베 사람들이 예언자의 말을 듣고 임금으로부터 온 백성, 심지어는 짐승들까지도 단식하며 사람들은 잿더미에 앉습니다. 비록 이스라엘 백성은 아니더라고 회개의 모습은 하느님께서 가장 즐겨들으시는 선물입니다.
우리자신도 세상에 살면서 세상 일에 온 힘을 쏟지만 그래도 가장 중요한 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
[서울대교구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실상 필요한 한 가지는 하느님의 선교입니다.>
선교는 하느님의 일(Missio Dei)입니다. 그래서 선교의 소명을 맡은 이들은 하느님께서 그리시는 밑그림을 잘 읽고 있어야 하고 필요한 때에 개입하시어 당신의 현존을 드러내주시는 역할에 대해서도 굳은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 안목과 믿음이 선교의 성패와 수준과 질을 좌우할 것입니다.
요나는 당시 지역 내 패권국가였던 앗시리아 니네베에 파견되었으나, 이 안목과 믿음이 2% 부족했던 선교사였습니다. 신앙심과 애국심을 지니고 있기는 했지만, 정작 그가 지닌 의욕에 비해 용기나 지혜가 모자랐고 인내심도 약했습니다.
그래서 니네베 반대편인 스페인 지역 타르시스로 멀리 도망치려다 도망배 안에서 제물로 뽑혀서 바다에 던져졌는데, 하느님께서 고래에게 그를 집어 삼키라고 시키시는 바람에 그 뱃속에서 사흘 밤낮 동안 고생하다가 고래가 토해내어 어쩔 수 없이 니네베로 가서 원치 않았던 선교사의 본래 임무를 마지못해 수행하고 맙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니네베에 대기근을 일으키시어 정복전쟁에서 끌려 온 포로들로 하여금 두 번의 반란을 일으키게 하셨는가 하면(기원전 765, 759년), 갑자기 대낮에 하늘에 떠 있던 태양이 어두워지는 개기일식을 일으키시어 앗시리아의 정복자들로 하여금 더 큰 재앙을 피해야겠다는 두려운 마음이 들게 하셨습니다.(기원전 763년) 그 덕분에 마지못해 수행했던 요나의 선교가 대성공을 거두었다는 교훈을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요나의 표징을 당신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전조로 설명하신 바 있습니다. 당신의 선교가 성공을 거둘 수밖에 없으리라는 자신감의 발로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선교여행에서 지치실 때마다 절친하게 지내시던 라자로의 집으로 쉬러 가곤 하셨습니다. 그런데 동행한 제자들까지 열 명도 넘는 장정들을 대접하느라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던 마르타는 동생 마리아의 손을 빌리고 싶었지만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드리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요나 시대에도 예수님 당시에도 하느님께서 개입하신 후방 지원 작전은 주효했습니다. 우리 시대, 우리 사회 현실에서도 하느님의 일인 선교를 하자면 하느님께서 주관하시는 전체 상황을 살펴보는 안목은 기본이고 적절할 때에 나타날 하느님의 개입을 기다리는 믿음은 필수입니다.
요나처럼 도망치려 하거나, 마르타처럼 투덜대지 말고 자기 몫에 집중할 일입니다. 실상 필요한 한 가지는 하느님의 선교입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활동에 앞서 기도를!>
구역 반모임을 위해 가정 방문을 하면 먼저 기도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됩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기도를 드리고 말씀 나누기에 마음을 쓰기보다는 손님 대접에 더 관심을 기울입니다. 대접에 소홀함이 없이 하려는 마음은 고맙지만, 선후가 바뀌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주님 안에서의 만남입니다. 나머지는 다음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인간적인 정이 우선되고 있음이 안타깝습니다.
마르타의 집에 예수님을 모셨는데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서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했습니다. 그런데 마르타는 음식을 준비하는 등 갖가지 시중을 드는 일에 분주했습니다. 그러다가 동생이 시중드는 일을 거들어 주게 해 달라고 예수님께 청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10,42).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좋은 몫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알았으면 그것을 관리해야 합니다.
마리아와 마르타의 모습이 서로 다르게 나타났습니다. 두 역할이 다 필요합니다. 그러나 귀한 말씀을 듣는 것이 먼저입니다. 훌륭한 분에게는 어떻게 하든 하나라도 더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 기회를 놓치면 다시 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받기보다 하나라도 더 주고 싶어 하셨습니다. 마르타는 자기 일에 몰두하다가 그만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기회를 잃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를 보고 다소 불편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사실 주님께 음식을 대접해 드리려 했으면 마리아가 도와주든 그렇지 않든 기쁘게 했어야 옳습니다. 자기가 정성으로 준비한 음식을 주님께서 잡수신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좋은 일을 열심히 해 놓고 마음 안에 화를 쌓아놓는다면 그만큼 보람도 없습니다. 차라리 하지 않고 편안한 마음을 지키는 것이 낫습니다. 어떤 일을 하든 그 일이 내 몫이었으면 그것으로 기뻐해야 하겠습니다. 아마도 마르타는 활동적인 여인인 듯합니다. 그러나 자기의 일에만 집착하면 그 활동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맙니다. 억지로 마지못해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사도행전 6장 1절 이하를 보면 사도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자유롭게 전하기 위해 가난한 이들에게 음식을 나눠주던 일을 그만하고 그 일을 부제들에게 맡겼습니다. 말씀의 선포가 그만큼 중요합니다. 모든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음식이 아니라 구원의 말씀을 먼저 듣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곧 기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시중을 드는 일은 활동입니다. 그리고 활동은 기도 안에서 나온 활동이 아니라면 마음 안에 화를 담을 수밖에 없고 바른 활동이 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기도하고 활동하시길 바랍니다. 기도는 주님과의 일치를 이루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식사할 겨를조차 없이 바쁘게 활동하셨지만,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활동할 힘을 기도에서 얻었습니다. 기도 없는 활동은 무의미합니다. 또한 활동 없는 기도는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기도와 활동, 활동과 기도의 조화를 이루되 먼저 기도하시길 희망합니다. 기도하면 할수록 활동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평소에 메모지와 펜을 들고 다닙니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들을 잊어버리지 않고 기록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반짝이는 생각들이 묵상 글 작성하는 데 큰 도움이 되며, 강의할 때도 좋은 소재가 되기 때문입니다.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홀로 여행 중이었는데 너무 추워서 몸이라도 녹이려는 마음과 더불어 따뜻한 커피 한 잔이 생각나서 근처의 카페 들어갔습니다. 커피를 마시던 중, 여러 가지 생각이 나면서 이를 글로 남겨야겠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평소에 항상 들고 다니던 메모지와 펜이 가방에 없는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카페 직원에게 펜을 빌렸고, 테이블에 놓은 냅킨에 글을 적기 시작했습니다. 냅킨 두 장에 빼곡하게 글을 적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했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아졌고, 이 내용을 다음 피정 강의 때 꼭 사용하리라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이때 쓴 글은 그 어디에서도 쓰지 못했습니다. 글쎄 카페에 나올 때, 글을 적었던 냅킨을 테이블 위에 놓고 나온 것입니다. 이 사실을 저녁에 도착한 숙소에 가서야 알 수 있었습니다.
아쉬웠지만 지나간 일을 다시 되돌릴 수는 없지요. 그리고 이렇게 후회할 일은 삶 안에서 계속되었음을 깨닫습니다. 이 후회를 줄여야 행복의 길에 가까워질 것입니다. 따라서 되돌릴 수 있는 일이라면 과감하게 잊어버리고 지금에 충실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구원의 약속을 받은 사람들을 떠올려 봅니다. 그들은 모두 지금에 충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과거의 죄에 매여서 절망 속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회개하고 주님께 향하면서 지금 주님과 함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에 가십니다. 귀한 손님이 오셨다고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저 주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만 듣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 모습에 마르타가 약간 화가 났나 봅니다. 자기만 일하고 동생 마리아는 편하게 말씀만 듣고 있으니 말이지요.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의 몫과 마리아의 몫에 차이가 있다고 하시지 않습니다. 마르타가 시중드는 것도 중요하고,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는 것도 중요했습니다. 단지 이 안에서 어떤 판단이 있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이것도 해야 하고 저것도 해야 한다면서 분주하게만 지낸다면 주님과 함께하는 자리에서도 불평과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자기 자리를 주님과 함께하는 데 집중했다면, 시중을 들면서도 크게 기쁠 수 있고 또 발치에서 말씀을 들으면서도 기쁨을 간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지금에 충실할까요? 혹시 어떤 판단으로 인해서 마르타처럼 불평과 불만으로 지금에 충실하지 못하면서 후회를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의 명언: 기도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신랑에게 말을 건네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습니까? 그것은 당신께 말씀을 건네시는 그분을 경청하는 것입니다(성 예로니모).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오롯한 사랑>
루카 10,38-42 (마르타와 마리아를 방문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다. 그러자 마르타라는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마르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그러나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 다가가,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주님께서 마르타에게 대답하셨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오롯한 사랑>
내가 사랑하는
님 곁에
님을 사랑하는
다른 이 있어도
내 마음 오롯이
그 아닌 님에게
그와 나 함께
님께 사랑을
나를 사랑하시는
님 곁에
님께서 사랑하시는
다른 이 있어도
내 마음 오롯이
그 아닌 님에게
그와 나 함께
님의 사랑을
=====================
[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필요한 것 한 가지..>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오늘 주님께서는 필요한 것이 한 가지뿐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어디 그렇습니까? 살다 보면 필요한 것이 많지요.
가난을 살 때 많이 부닥치는 문제가 필요의 문제입니다. 프란치스코는 회칙에서 가난을 살라고 일껏 얘기하고는 “필요성 앞에는 법이 없기에” 필요한 것을 쓸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필요하다고 하면 그것을 시비할 것이 못 되는데 문제는 어떤 사람은 많은 것을 필요로 하고, 어떤 사람은 최소한의 것을 필요로 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니 필요로 하는 것이 많고 적음에 따라 가난이 갈리는데, 가난을 잘 사는 사람일수록 최소한의 것으로 만족하고 가난을 잘 살지 못하는 사람은 필요한 것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압니다. 필요한 것이 없는 사람이 행복하고 필요한 것이 많은 사람이 불행하다는 것을.
이것으로 충분하고 만족한 사람은 더 필요한 것이 없는 반면 이것으로 충분하지도 만족하지도 못하기에 더 필요로 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는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마르타는 너무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한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여기서 필요한 것 한 가지는 무엇이겠습니까?
돈이 아닐 것입니다. 일이 아닐 것입니다. 명예도 아닐 것입니다. 염려도 아닐 것입니다. 걱정도 아닐 것입니다.
필요한 것 한 가지는 사랑뿐일 것입니다.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된 환대 영성의 원리>
- 회개, 경청, 환대 -
오늘 강론 제목은 “환대의 영성-회개, 경청, 환대-”입니다. 정주서원을 하고 수도가정을 이뤄살아가는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에게 환대영성은 핵심적 영성입니다. 환대의 사랑, 환대의 기쁨, 환대의 행복, 환대의 치유, 환대의 평화, 환대의 아름다움등 끝이 없으며 환대는 영성의 잣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참으로 너그럽고 자비로운 주님 사랑을 닮은 환대의 사랑입니다.
참으로 세상이 불안하고 두려울수록 “늘 거기 그 자리”에서 세상의 오아시스와 같은 정주 요셉 수도원의 환대의 영성은 더욱 빛날 것입니다. 그래서 정주와 환대의 영성을 살아가는 베네딕도회 수도원을 환대의 집으로, 수도자들은 환대의 사람이라 명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 좌우명 기도 한연도 환대를 명시하고 있습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활짝 열린 앞문, 뒷문이 되어 살았습니다.
앞문은 세상에 활짝 열려 있어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환대하여
영혼의 쉼터가 되었고
뒷문은 사막의 고요에 활짝 열려있어
하느님과 깊은 친교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이래서 정주의 삶을 살아가는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의 선교는 환대를 통한 선교라 부르기도 합니다. 이런 환대는 베네딕도 규칙 53장에도 분명히 명시되어 있습니다.
“찾아오는 모든 손님을 그리스도처럼 환대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장차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 너희는 나를 맞아주었다’라고 말씀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이들에게 합당한 공경을 드러낼 것이며 특히 신앙의 가족들과 순례자들에게 그러할 것이다.”
환대 영성의 놀라운 점은 손님들의 환대를 통해 궁극적으로 우리가 맞아들이는 분은 주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을 환대하듯 찾아오는 이들을 환대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환대의 반대는 냉대나 박대입니다. 환대의 치유와 반대로 냉대의 상처와 아픔은 참으로 오래 갈 것입니다. 저는 교회도 수도원도 섬김의 직무로서 학교나 병원, 음식점처럼 서비스업에 속한다고 봅니다. 정말 서비스업에 속하는 분들이라면 친절하고 따뜻한 환대는 기본이어야 할 것입니다. 불친절하고 냉대하는 차거운 분위기의 서비스기관이라면 손님은 절대 다시는 가지 않을 것입니다. 환대하면 오래전 그러니까 23년전 써놓은 시가 생각납니다.
“환대는 꽃처럼 하는 것이다
한 번이라도 찌푸린 적이 있더냐
하루 이틀 몇 날이든
언제나
거기 그 자리에서
활짝 핀 환한 얼굴로
오가는 이들
맞이하고 떠나보내는
주차장 옆 코스모스꽃 무리들
피곤한 모습 전혀 없다.
볼 때마다 환해지는 마음이다
환대는 꽃처럼 하는 것이다.”-2000.9.27.
정말 신기한 얼굴입니다. 활짝 웃는 환대의 얼굴이 꽃같은 사람 얼굴이라면 화로 이그러진 얼굴은 때로 괴물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의식적 의도적 미소나 웃음의 훈련과 습관도 필요함을 배웁니다. 바로 오늘 루카복음의 마르타와 마리아가 환대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평상시 참 편안하게 수시로 찾았던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가 살았던 환대의 집, 베타니아 집같습니다.
여러분도 피곤하고 지쳤을 때 언제든 이렇게 찾을 수 있는 그리운 환대의 집이나 환대의 사람이 있으신지요? 저에겐 언제나 여기 환대의 집인 성전과 환대의 주님이 계십니다. 오늘 복음의 두 자매는 모두 예수님을 극진히 사랑하여 환대한 환대의 사람들이었는데 환대의 방식이 달랐습니다. 전통적인 오늘 복음의 해석은 관상의 마리아와 활동의 마르타로 분류했는데 틀린 것은 아니나 본질적인 관점은 관상과 활동이 아닌 환대에 있음을 봅니다.
환대의 방식에서 마리아가 옳았습니다. 마르타처럼 제 좋을 대로의 음식준비의 환대가 아니라 손님인 예수님의 의중에 따른 환대를 한 마리아가 옳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발치에 다소곳이 앉아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며 환대하는 마리아의 모습은 그대로 꽃처럼 아름답습니다. 분주하게 음식준비하다 화가난, 좀 질투하는 마음도 있었을 마르타가 예수님께 불평을 쏟아 놓습니다. 두분의 주고 받는 대화가 오늘 복음의 절정입니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 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마르타의 내면이 참으로 시끄럽고 산만했음을 봅니다. 화와 짜증이 가득하고 내적평화가 없습니다. 참으로 내적회개와 내적평화의 회복이 화급합니다. 오늘 제1독서는 요나의 회개선포에 니느베 사람들의 거족적, 전격적, 전폭적 회개가 이뤄지는 극적인 장면을 보여줍니다. 이제 기후재앙과 온갖 전쟁을 야기한 전 세계인들이 영적혁명과 같은 생태적 회개가 참으로 절박한 절체절명의 시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죄도 병도 많은 각자도생의 세상이요 흡사 공동의 집인 지구가 불타고 있는듯합니다.
그러나 니느베 백성들과 같은 극적인, 드라마틱한 회개만 있는게 아니라 평범한 일상의 회개도 있습니다. 우리 삶의 여정은 끊임없는 기도의 여정이자 회개의 여정입니다. 기도와 함께 가는 회개이며 바로 활동에 치우친 마르타에게 필요한 것은 관상기도와 회개였음을 봅니다. 예수님의 지적이 정확하며 마르타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이건 차별이 아니라 분별의 지혜입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부드럽고 따뜻한 호칭에 주님의 애정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우선적인 필요한 한 가지는 주님 말씀을 경청하는 것이라는 마르타의 무지를 일깨우는 회개의 촉구이기도 합니다. 사실 정말 잘 경청해야 맹목적인 활동으로 일에 중독되지 않고 깨어 올바로 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의 방향을, 일의 완급을, 일의 우선 순위를 분별하고 절제할 힘은 관상과 경청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이래서 관상과 활동, 기도와 일의 순서인 것입니다.
그러니 참된 환대 영성의 원리가 자명히 드러나니, 회개-경청-환대의 구조입니다. 놀랍게도 우리가 평생 날마다 끊임없이, 한결같이 바치는 미사와 시편성무일도 공동전례가 이런 구조로 이뤄졌음을 봅니다. 미사 시 참회 고백기도 자비송으로 시작하여 말씀 전례에서 마리아처럼 주님 말씀을 경청하고, 이어 성찬 전례에서 성체의 주님을 모시는 환대로 참된 환대 영성의 실현입니다. 회개와 경청, 환대의 정신으로 시편 성무일도를 바치는 우리들은 그대로 주님을 환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평생 날마다 수행하는 공동 전례 기도는 주님을 환대하는 거룩하고 아름다운 환대의 영성 훈련시간인 것입니다. 이런 공동 전례를 통한 주님의 환대는 일상에서의 형제들 환대에로 그대로 전환되어 주님을 환대하듯 형제를 환대하게 될 것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시간, 주님은 우리를 환대하고 우리는 주님을 환대함으로 주님의 환대와 우리의 환대가 만나는 참된 치유와 구원의 복된 시간입니다. 아멘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1)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루카10,42)
<빼앗기지 않아야 할 하느님 사랑!>
오늘 복음(루카10,38-42)은 '예수님께서 마르타와 마리아를 방문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르타와 그의 동생 마리아의 집을 방문하시자, 두 여인이 바쁩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서 그분의 말씀을 듣느라고 바쁘고, 그의 언니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합니다. 마르타는 아마도 자기 집을 방문하신 예수님께 드릴 음식을 준비하느라고 바빴을 것입니다.
마르타가 예수님 발치에 앉아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마리아를 두고 짜증을 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말씀하십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10,41-42)
우리는 어제 복음인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서 '이웃 사랑의 본질'을 보았습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 사랑의 본질'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사랑입니다. 이웃 사랑은 하느님 사랑으로부터 시작되며, 하느님 사랑은 반드시 이웃 사랑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러난 사랑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분리된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분리된 사랑은 공허하고 메마른 사랑으로 전락하기 쉽고, 그런 사랑은 죽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나열(순서)에서도 하느님의 사랑이 먼저이고, 다음이 이웃 사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웃 사랑으로 대변되는 마르타의 모습'보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대변되는 마리아의 모습'을 더 마음에 두고 말씀하셨다고 생각합니다.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아야 할 사랑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 사랑'입니다.
++++++++++++++++++++++
(2)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루카 복음 10장 42절)
<필요한 한가지와 좋은 몫!>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을 때, 마르타라는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셨습니다. 예수님을 모신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부했는데, 아마도 예수님께 드릴 음식 장만하는 일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마르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마르타는 예수님께 자기 동생이 자신을 도우라고 청합니다. 그런 마르타에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 복음 10장 41절-42절)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한 가지, 지금 여기에서의 구원과 하느님 나라 안에 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한 가지는 무엇일까? 그리고 마리아가 선택한 '좋은 몫'은 무엇일까?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첫째 계명이 아닐까?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태오 복음 22장 37절)
마리아처럼, 나의 삶의 첫째 자리에 하느님을 모시고 있는 것! 나를 먼저 사랑하신 하느님의 사랑을 간직하고 있는 것!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사랑하신 그 완전한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것! 이것이 바로, 지금 나에게 필요한 한 가지이며, 내가 선택한 좋은 몫이 아닐까요?
이 필요한 한 가지에 머물러 있고, 이 좋은 몫을 선택한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 참 행복으로부터 모든 것을 이루어 낼 힘이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
요나처럼 회개하고,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한 니네베 사람처럼 회개하여, 오늘 기뻐하고, 오늘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행복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화이팅 합시다!
=====================
[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pfHtmDvylu8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루카 10, 42)
가족은
공동체는
서로의 좋은 몫을
빼앗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그 믿음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가장 좋은 몫을
선택한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에게
오신 주님께
마리아는 기쁘게
머물 줄 아는
좋은 몫을
선택합니다.
주님과
일상을
함께 할
가장 좋은
몫입니다.
아집에서
벗어나는 가장
좋은 몫입니다.
주님의 말씀 따라
사는 가장 좋은
몫입니다.
모두다
이루어주시는
주님께 맡기는
좋은 몫입니다.
더 이상
염려와 걱정에
좌우되지 않는
좋은 몫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가장 좋은
이 순간을 놓치지
않는 좋은 몫입니다.
걱정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시는
주님을 만납니다.
모두의 아픔을
감싸주시는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먼저 주님께서
원하시는
주님의 뜻은
주님의
발치에 앉아
주님의
말씀을 듣는
필요한 마음입니다.
분주한 마음이
서로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기뻐하는
이 순간이길
기도드립니다.
마르타도
마리아도
내가 원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마음을 나누는
오늘입니다.
우리 마음 안으로
모셔들이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도록
우리의
소란스러움을
내려놓습니다.
꼭 필요한
한 가지는
우리를
살게 하시는
주님뿐입니다.
마리아처럼
좋은 몫을 선택하는
가장 좋은 오늘
되십시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