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일(수)
* 시작 기도
주님...
어제는 베트남의 독립기념일이었고 오늘은 세계 근로자의 날이어서 연휴입니다.
사람들은 독립기념일이어서라기보다 하루를 쉰다는 의미로 더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국가적인 차원에서의 독립도 그렇고, 개인적으로도 끊임없이 독립을 추구합니다.
다름 아니라 영원하며 완전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는 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 중에 나 또한 그러하였습니다.
매이는 것이 싫었고 나의 자주권이 억압당하는 것이 싫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지극히 연약하고 부정한 자임에도 전능하신 하나님께 절대의존적 존재로 살아야 함을 잊어버린 죄인 중에 괴수였습니다.
내가 바로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처럼 되려했던 제2 제3의 아담이었음을 고백합니다.
이제는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한 존재가 아닌 하나님 절대의존적 존재로 살기 원합니다.
나의 의는 십자가에 못 박고 오직 예수로 부요한 자가 되어 주를 기뻐하는 존재가 되게 하옵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우소서.
주의 성령이 이 하루도 나를 장악하여 주시고 주의 강한 손에 이끌려 따라가는 주님 앞에 선 객체가 되게 하옵소서.
나를 주장하는 나의 주체는 사라지게 하시고 오직 나의 온전한 주체가 되시는 주님만 따르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왕상 12:1-11
제목 : 나는 전갈 채찍으로 너희를 징계하리라.
1 르호보암이 세겜으로 갔으니 이는 온 이스라엘이 그를 왕으로 삼고자 하여 세계에 이러렀음이더라.
2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전에 솔로몬 왕의 얼굴을 피하여 애굽으로 도망하여 있었더니 이제 그 소문을 듣고 여전히 애굽에 있는 중에
3 무리가 사람을 보내 그를 불렀더라. 여로보암과 이스라엘의 온 회중이 와서 르호보암에게 말하여 이르되
4 왕의 아버지가 우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왕은 이제 왕의 아버지가 우리에게 시킨 고역과 메운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왕을 섬기겠나이다.
5 르호보암이 대답하되 갔다가 3일 후에 다시 내게로 오라 하매 백성이 가니라.
6 르호보암 왕이 그의 아버지 솔로몬의 생전에 그 앞에 모셨던 노인들과 의논하여 이르되 너희는 어떻게 충고하여 이 백성에게 대답하게 하겠느냐?
7 대답하여 이르되 왕이 만일 오늘 이 백성을 섬기는 자가 되어 그들을 섬기고 좋은 말로 대답하여 이르시면 그들이 영원히 왕의 종이 되리이다 하나
8 왕이 노인들이 자문하는 것을 버리고 자기 앞에 모셔 있는 자기와 함께 자라난 어린 사람들과 의논하여
9 이르되 너희는 어떻게 자문하여 이 백성에게 대답하게 하겠느냐? 백성이 내게 말하기를 왕의 아버지가 우리에게 메운 멍에를 가볍게 하라 하였느니라.
10 함께 자라난 소년들이 왕께 아뢰어 이르되 이 백성들이 왕께 아뢰기를 왕의 부친이 우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왕은 우리를 위하여 가볍게 하라 하였은즉 왕은 대답하기를 내 새끼손가락이 내 아버지의 허리보다 굵으니
11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무거운 멍에를 메게 하였으나 이제 나는 너희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할지라. 내 아버지는 채찍으로 너희를 징계하였으나 나는 전갈 채찍으로 너희를 징계하리라 하소서.
* 나의 묵상
하나님께서는 아히야 선지자를 통하여 르호보암 시대에 나라를 쪼개어 나누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이제 차근차근 그 일을 이루시고자 밑그림을 그리고 계신다.
하나님이 뜻하신 대로 이루시되 존재이신 하나님께서 일을 만드시고 사람도 붙여서 역사하시면서 그 일이 이루기까지 기다리시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주겠노라고 약속하시고 그 약속을 이루시기 위하여 무조건 가나안 땅에 사는 백성들을 쫓아내시는 것이 아니라 그 백성들의 죄악이 가득 찰 때까지 기다리신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창 15:16)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하나님의 심판의 칼날은 엄중하시다.
솔로몬의 범죄를 심판하시기 위하여 칼을 드셨지만 하나님의 사람 다윗을 생각해서 솔로몬 시대가 아니라 그의 아들의 시대에 심판하시겠다고 하셨고 이 또한 그의 아들을 완전히 멸하는 것이 아니라 다윗을 생각해서 왕이 속한 지파 외에 다른 한 지파, 즉 베냐민 지파를 붙여 주신다.
총 12개 지파 중에서 10지파와 2지파로 나눈다는 것은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2지파를 차지한 다윗의 후손을 진멸하시고자 하는 의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300여년 후에 일어나는 결과는 12개 지파를 차지한 북쪽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완전히 멸망당하지만 2개 지파를 차지한 남쪽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하나 70년 후에 회복되어 그들의 땅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를 볼 때 하나님의 의는 결코 다수의 선을 따르시는 것이 아니라 진리 편에 서 있는 소수를 사용하신다.
하나님께서 제사장 나라로 삼으신 이스라엘도 나라가 크고 백성이 많아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수효가 적기 때문이다.
(신 7:7)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예수님께서도 넓은 길로 가지 말고 좁을 길로 가라고 말씀하셨다.
(마 7:13-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사람은 지혜로운 자와 미련한 자가 있으면 백이면 백 모두 지혜로운 자를 선택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시다.
오히려 미련한 것들, 약한 것들, 천한 것들, 멸시 받는 것들, 없는 것들을 택하셔서 지혜 있는 자들과 강한 자들 그리고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신다.
그 이유는 사람으로 하여금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여 자기 자신을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기 위함이다.
(고전 1:27-29)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비록 솔로몬의 범죄로 인하여 나라가 둘로 쪼개진다.
그것도 10:2라는 비교도 안 되는 비율로 쪼개졌지만, 하나님은 그 작은 자를 들어서 쓰신다.
그것은 바로 창세전 아버지와 아들이 맺었던 언약으로부터 시작하여 아브라함과 맺었던 언약 그리고 다윗과 맺었던 언약을 이루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교회가 중세시대에 극도로 타락하고 지금도 말로 다할 수 없는 패역을 일삼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숨어 있는 의인 한 사람을 통하여 일하시므로 결코 하나님의 언약의 물줄기는 중단되지 않는다.
사람의 의와 하나님의 의는 전혀 다르며 사람이 보는 시각과 하나님의 시각 역시 다르다.
르호보암이 노인의 자문을 따르지 않고 젊은 소년들의 자문을 따라 아버지보다 더 심한 폭압 정치를 하려는 것에, 여로보암을 비롯한 대다수의 백성들은 르호보암을 버리고 새로운 나라를 세운다.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분명 르호보암이 아니라 여로보암 편이 의롭고 옳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모든 상황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언약의 물줄기를 보지 못하는 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당장 의롭게 보이는 것이 맞다고 판단하였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핵심인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다수가 선(善)이라는 핵심가치를 철저하게 따라가는 것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이 원칙은 변할 수 없는 大義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선의 기준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요, 다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지극히 작은 한 사람을 통해서도 이루신다.
이는 왕이신 하나님이 절대 선으로 통치하시는 전제군주제이다.
그런데 지금 교회 안에는 민주주의의 다수결의 원칙이 횡행하고 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보다 다수가 원하면 결정된다.
진리보다 사람의 생각이 우선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지금까지 나도 그 다수에 해당하는 자였다.
그런 행동에 아무런 문제의식도 없이 그저 식물인간처럼 살아 왔던 것이다.
복음과 진리를 통하여 생명의 역사는 나아가게 되어 있다.
사람의 뜻을 따를 때 지금 당장은 뭔가 되는 것 같지만 결국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이 무너지게 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공의이다.
진리가 아닌 것에는 얼마든지 다수결에 따라 결정할 수 있지만 진리에 관한한 이제는 다수의 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한다.
그래야 이 땅에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다.
교회가 교회다워지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룰 때 성취된다.
교회가 진리 편에 서지 못하고 세상의 시류를 따라 감으로써 지금 당장은 세상의 박수를 받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관심에서 멀어지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어 있다.
오늘 나는 다수의 선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좁은 길을 걸어갈 것인가?
삶의 기준을 나로 잡으면 다수의 길을 갈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준이 되면 좁은 길이라도 기쁨으로 갈 수 있을 것이다.
주님의 은혜가 필요하다.
타의식에 매여 살아갈 때 타인의 눈을 의식하는 굴레를 벗어날 수 없듯, 타의식이 아니라 코람데오가 우리의 삶의 기준이 되어 오늘도 주님의 품안에서 연합된 삶을 살기를 원한다.
주님과 함께 죽고 주님과 함께 장사되어 아버지의 영광 안에서 주님과 함께 일으키심을 받는 구속사건의 연합이 나의 삶이 되길 기도한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다수의 길, 다수의 선이 나의 삶의 기준이었고 또한 지금까지 내가 기준 삼는 자였습니다.
그러므로 잘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서 썩은 냄새가 진동하였나이다.
나는 삶의 기준도, 신앙의 기준도 될 수 없음을 깨닫사오니 이 종을 불쌍히 여기사 주의 보혈로 덮어 주시옵소서.
비록 세상을 살아가는 길이 험하고 멀지라도 오직 주님이 내 삶의 절대 기준이 되게 하옵소서.
주님은 좁은 길을 가라고 말씀하셨건만, 그것은 지식으로만 받아들이고 여전히 넓은 길 화려한 길을 걸어가려고 얼마나 애를 쓰며 몸부림쳤는지 모릅니다.
세상의 가치를 따라 살아왔던 지난날의 모든 잘못을 회개하오니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 종은 자녀들도 그렇게 키웠습니다.
세상의 가치를 담아서 많은 것을 구하였고 좋은 것을 원하였으며 더 높은 것을 차지하려고 피 흘리는 투혼을 하였습니다.
제가 어쩜 이리도 청개구리처럼 행했는지요?
심령이 가난해지는 것은 곧 물질의 있고 없음을 떠나서 세상에 대한 욕심을 버리는 것인데 오히려 더 많이 얻으려고만 했나이다.
주님은 약한 것을 통하여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데 나는 강한 것을 부러워했나이다.
이처럼 지극히 세상적이고 정욕적인 가치관을 그대로 자녀들에게 가르쳤나이다.
말로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삶은 세상 사람들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나를 바꿔버렸습니다.
더 이상 세상의 가치가 아니라 주님만이 나의 가치임을 인정하며 살기 원하오니 주의 은혜로 이 종을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주님의 뜻을 따라 참된 언약 백성으로 살게 하옵소서.
오늘도 주님의 기쁨으로 살기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