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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백대사와 혜충국사의 무정설법無情說法
글을 번역하는 일은 바둑을 두는 것과 같다. 바둑은 상호 접전과 살활에 맥이 있다. 말이나 글에도 맥이 있다. 이를 이로理路 또는 어로語路라 한다. 호수나 묘수를 찾아서 난국을 타개하면 환희용약歡喜踊躍한다. 정확한 어휘를 찾아서 앞뒤 문맥이 훤하게 뚫리면 마음이 상쾌하기 그지없다. 요즈음 나오는 한문서적은 대부분 구두점이 찍혀 있는데, 문맥이 불통한 이유를 찾아보면 모두 이 구두점에 있다.
나는 십여 년 전에 사이버오로나 타이젬에서 아마5단 행세를 했다. 아마도 글을 번역하는 실력도 바둑으로 환산하면 아마5단 정도는 될 듯싶다. 프로9단과 3~4점 접어야 하고, 기신碁神 또는 기선碁僊이라면 3점을 더 추가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조백대사 이통현 장자는 96세(635~730), 육조대사는 76세(638~713), 현수국사는 70세(643~712)를 사셨고, 혜충국사는 101세(675~775)를 사셨다. 혜충국사는 한 연배 늦고, 세 분은 동시대인임을 알 수 있다.
조백대사의 화엄경론 중 선재동자의 선지식 대광왕 편에 “무의주지는 중생과 같은 마음에 들어가면 중생과 동체라 다른 성정이 없음을 밝혔다.”(以明無依之智 入等衆生心 與之同體 無有別性)라는 구절이 있다. 나는 이 ‘입등중생심入等衆生心’을 해석하며 고심했다. 이 등等 자를 어떻게 새겨야 할까? 조백대사는 바둑으로 치면 프로15단 정도는 된다. 나는 여기에 손을 놓았다. 다만 연수스님(904∼976)이 종경록에서 그 글을 인용할 때 등자를 일체로 환치하여 ‘입일체중생심入一切衆生心’이라 정리했다. 그러면, “무의주지는 일체중생의 마음에 들어가면 중생과 동체라 다른 성정이 없음을 밝혔다.”(以明無依之智 入一切衆生心 與之同體 無有別性)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로나 어로가 전자는 없지만 후자는 명백하다. 이로와 어로는 세상의 글에서는 명문의 표준이 되지만, 부사의 해탈경계를 펼쳐놓은 일승법문은 반드시 그러한 것은 아니다. 모르는 것은 모른 채 놓아두는 것이 또한 옳다.
1. 유정과 무정
선가에는 무정설법이 있다. 중생과 부처가 대응한다면 유정과 무정이 상응한다. 이 세상은 생물과 무생물이 있다. 이 세간은 이세간이 있고 삼세간이 있다. 기세간과 유정세간 둘을 이세간이라 하고, 지정각세간을 추가하여 삼세간이라 한다. 무생물은 무정이고, 생물은 동물과 식물인데, 동물은 유정이고 식물은 무정이라 한다. 현대인의 의식구조로 보면 풀이나 나무 등 식물은 생명이 있어서 유정에 해당될 터인데, 어째서 식물을 무정에 배당했을까?
이를 알고자 하면 먼저 의정이보依正二報를 알아야 한다. 정보는 과거 전생에 선악의 업인業因에 의하여 금생에 감응하는 과보의 정체正體를 말한다. 가령 사람으로 태어나면 사지四肢와 오관五官을 갖추고 사람의 과보를 받으며, 축생으로 태어나면 깃털이나 이빨 가죽 등을 갖추고 축생의 과보를 받는다. 의보는 정보에 의하여 상응하게 머물러 사는 처소를 받는 과보를 말한다. 가령 사람의 정보를 받는 이는 반드시 그와 상응하는 집이나 가구 등의 의보가 있고, 축생의 정보를 받은 자는 반드시 축생과 상응하는 굴이나 둥지 등의 의보가 있다. 중생은 업을 따라 몸을 받는다. 업을 짓는 주체 곧 마음이 정보이면 업으로 받은 이 몸은 의보이고, 부모로부터 받은 이 몸이 정보이면 내가 살고 있는 마을이나 나라 세계는 의보이며, 비로자나불이 정보이면 연화장 사바세계는 의보이고, 유정세간이 정보이면 기세간이나 지정각세간도 또한 의보이다.
의보는 기세간 또는 국토세간으로 유정이 의탁하는 처소이고, 정보는 유정세간으로 능히 의탁하는 유정이다. 기세간이나 유정세간이 모두 지수화풍 사대로 구성되었으나, 색수상행식 오온이 잠시 취합하여 정식情識이 있는 것을 유정세간이라 한다. 대지에 물이 흐르면 주변에 이끼가 끼고 풀이 자라며 나무가 큰다. 불가에서는 이 풀과 나무도 또한 산이나 강 흙 돌 집 국토 등의 의보와 함께 정식이 없는 기세간 곧 무정으로 보며, 비정 또는 무정은 산하대지 토석초목 등 정식이 없는 것을 말한다. 대체로 산하대지 등은 유정의 공업으로 초치하여 감응하고, 일체 유정이 공용하는 것이며, 유정이 각자 별업으로 초치하여 감응하는 것은 아니다. 이 풀과 나무를 세간은 생물 중에 식물로 분류하지만, 출세간은 정보가 아닌 의보로 보기 때문에 유정이 아닌 무정으로 분류하는 것이다.
2. 불성과 법성, 그리고 무정성불
유정은 무정과 대비되어 유정세간에 국한하지만, 중생은 유정과 동의어이면서 기세간뿐만 아니라 또한 지정각세간을 포함하기도 한다. 그래서 일체중생이 모두 불성이 있다고 말할 때, 일체중생은 천제를 포함한 유정일 수도 있고, 무정과 부처를 포함한 중생일 수도 있다.
원시불교와 부파불교 등은 부처와 보살 밖에 중생이 성불한다고 말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또한 일체중생이 모두 불성이 있다는 취지도 말하지 않았다. 다만 세친보살의 불성론 1권에 의거하면, 유부등부파는 중생이 선천의 성득불성性得佛性은 없지만, 후천의 수행에 의거하여 얻는 수득불성修得佛性은 있다고 주장했다. 이를 의거하여 결정코 불성이 없고[決定無佛性], 불성의 유무가 일정하지 않으며[有無不定], 결정코 불성이 있다[決定有佛性]는 등의 세 종류 중생으로 나누어진다. 이와 맞서서 분별설부는 공을 불성으로 삼고, 일체중생은 모두 공을 근본으로 삼으며, 공으로부터 생긴 것이다. 이 때문에 본성이 모두 불성을 갖추고 있다고 주장한다. 동서同書 2권에 다시 불성을 삼위로 나눈다.(삼위불성三位佛性 삼불성三佛性이라 호칭한다.) 곧 첫째 자성에 머무르는 불성[住自性佛性]은 중생이 선천적으로 갖추고 있는 불성이고, 둘째 인출하는 불성[引出佛性]은 불교의 수행을 통과하여 인발하는 불성이며, 셋째 과위에 이를 수 있는 불성[至得果佛性]은 불과에 이르러 비로소 원만하게 현발하는 것이다.(原始部派佛敎等 不說佛菩薩以外者之成佛 故亦不說一切衆生悉有佛性之旨 但據世親之佛性論卷一 有部等部派主張衆生無先天之性得佛性 但有後天依修行而得之修得佛性 依此 分決定無佛性 有無不定 決定有佛性 三類衆生 對此 分別說部以空爲佛性 一切衆生悉以空爲本 從空所生 故主張本性皆具佛性 同書卷二 復將佛性分爲三位(稱三位佛性․三佛性) 卽一住自性佛性 衆生先天具有之佛性 二引出佛性 通過佛敎修行所引發之佛性 三至得果佛性 至佛果始圓滿顯發者)
유정에 불성이 있다면, 제법에는 법성이 있다. 제법은 또 만법이라 하며, 현대어로 이를 일컬으면 존재 또는 일체 현상 등이 된다. 그 뜻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일체 유위나 무위 등 만법을 가리키고, 특별히 지칭하는 유위법의 제행과는 함의가 동일하지 않다. 이 계통은 비교적 광의의 용법이다. 둘은 일체 현상계의 제법을 가리킨다. 마음이나 색상 위의 일체 만법을 포함하지만, 열반 등과 같은 무위법은 그 안에 포함하지 않는다.(諸法又作萬法 現代語稱之爲存在 一切現象等 其義有二 一指一切有爲無爲等萬法 而與特指有爲法之諸行 含義不同 此係較爲廣義之用法 二指一切現象界之諸法 包含心色上之一切萬法 然如涅槃等無爲法 則不包含在內)
법성은 제법의 진실한 체성을 가리키고, 또한 바로 우주의 일체 현상이 갖추고 있는 진실하여 불변하는 본성이며, 또 진여법성이나 진법성 진성이라 하고, 다시 진여의 이칭을 삼는다. 법성은 곧 만법의 근본이며, 이 때문에 또 법본法本이라 한다. 대지도론 32권에 의하면, 바로 일체법의 총상과 별상이 함께 법성으로 돌아가며, 제법은 각각상各各相(곧 현상의 차별상이다.)과 실상이 있다고 말한다. 이른바 각각상이란 예컨대 밀랍을 불에 구워서 녹이면 이전의 모양을 급작스레 잃어버리고, 그 밀랍을 고정하지 않는 것으로 여기는 것과 같다. 이 때문에 분별하여 이를 찾아도 얻을 수 없고, 얻을 수 없기 때문에 공하며,(자성이 없다.) 바로 공을 제법의 실상이라 말한다.(法性指諸法之眞實體性 亦卽宇宙一切現象所具有之眞實不變之本性 又作眞如法性․眞法性․眞性 又爲眞如之異稱 法性乃萬法之本 故又作法本 大智度論卷三十二卽以一切法之總相․別相同歸於法性 謂諸法有各各相(卽現象之差別相)與實相 所謂各各相 例如蠟炙火溶 頓失以前之相 以其爲不固定者 故分別求之而不可得 不可得故空(無自性) 卽說空爲諸法之實相)
일체 차별상에 대하여 말하면, 그 차별상으로 인하여 자성이 확실히 공하고, 이 때문에 모두 동일하며, 이를 일컬어 여여라 한다. 일체상이 함께 공으로 돌아가며, 이 때문에 공을 일컬어 법성이라 한다. 또 예를 들면 황석黃石 중에 금의 성질을 갖추고 있는 것과 같이, 일체 세간법 중에 모두 열반의 법성을 갖추고 있다. 이 때문에 이 제법의 본연한 실성을 법성이라 말하는 것이다. 이는 원각경에서 이른바 “중생과 국토가 동일한 법성이다.”라고 한 것과 뜻이 같다.(對一切差別相而言 因其自性是空 故皆爲同一 稱之爲如 一切相同歸於空 故稱空爲法性 又如黃石之中 具有金之性質 一切世間法中 皆具涅槃之法性 故說此諸法本然之實性爲法性 此與圓覺經所謂衆生國土同一法性同義)
무정성불은 비정성불非情成佛 초목성불草木成佛 또는 무정유성無情有性이라 말하기도 하며, 길게는 초목국토실개성불草木國土悉皆成佛이라 말하기도 한다. 풀이나 나무 기와 조약돌 국토 등 비정이나 무정도 또한 성불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이론이 소승교에는 없고, 일승교 중에 천태 밀종 등에 있다. 화엄에도 있지만, 있다고 강조하지는 않는다.
3. 대광왕의 삼매와 무정물의 예경
부처님의 교설敎說은 법주가 삼신불 중에 어떤 부처인가에 따라 다르다. 화신불인가? 보신불인가? 아니면 법신불인가? 이를 분간하고 법문을 들을 줄 알아야 한다. 화신불의 교설은 총림의 풀이나 나무 등 무정물이 움직일 수 없다. 그러나 법신불의 교설은 이와 다르다. 무정물의 기본 정의를 벗어난다.
화엄경 이세간품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보살마하살이 도량에 안좌할 때 일체 세계의 풀이나 나무와 총림의 온갖 무정물이 모두 몸을 구부리고 그림자를 낮추며 도량을 향하여 돌아간다.”(菩薩摩訶薩坐道場時 一切世界草木叢林諸無情物 皆曲身低影歸向道場 是爲第四未曾有事) 80권 화엄경에 무정 또는 무정물이라는 말이 여기에 딱 한번 나온다. 비정非情이란 표현은 없다. 다만 유정有情이란 말은 32차례나 나온다.
또 입법계품 중에 선재동자의 선지식 대광왕이 “보살이 대자를 수위로 삼고 세간을 수순하는 삼매문”(菩薩大慈爲首隨順世間三昧之門)에 들어감에 대지와 담장 누각 섬돌 창문 등 무정물이 또한 감응하며 예경한다. 아래와 같다.
이때에 대광왕이 바로 이 삼매에 들어가니, 그 성의 안과 밖이 여섯 가지로 진동하고, 갖가지 보배로 장엄한 대지와 담장 당우 대전 망루 누각 섬돌 창문 등 이와 같은 모든 것들이 미묘한 소리를 내며, 모두 왕을 향하여 허리를 구부리고 경례한다. 묘광성 안에 거주하는 사람들도 동시에 환희용약하지 않은 이가 없고, 일제히 왕의 처소를 향하여 오체투지하며, 촌영이나 성읍의 모든 사람들도 함께 와서 왕을 친견하고 환희하여 경례한다. 왕의 부근에 깃들고 있는 새나 짐승의 무리도 서로 쳐다보고 자비심을 일으키고, 다함께 왕의 앞을 향하여 경례하며, 모든 산과 들 그리고 온갖 풀이나 나무들도 돌아가며 왕을 향하여 경례하고, 연못이나 박우물 그리고 강이나 바다도 모두 용솟음치며 넘쳐흘러서 왕의 앞으로 흘러 들어왔다.(時大光王即入此定 其城內外六種震動 諸寶地寶牆寶堂寶殿臺觀樓閣階砌戶牖 如是一切咸出妙音 悉向於王曲躬敬禮 妙光城內所有居人 靡不同時歡喜踊躍 俱向王所舉身投地 村營城邑一切人衆 咸來見王歡喜敬禮 近王所住鳥獸之屬 互相瞻視起慈悲心 咸向王前恭敬禮拜 一切山原及諸草樹 莫不迴轉向王敬禮 陂池泉井及以河海 悉皆騰溢流注王前)
위와 같은 부사의 해탈경계에 대하여 조백대사는 아래와 같이 해설하고 있다.
그 대광왕은 보살이 대자대비를 수위로 삼는 삼매에 들고, 자비심을 쓰는 업용을 드러내어 요익행에 자재하니, 후학자로 하여금 이를 본받게 한 것이다. 이는 무의주지는 중생과 같은 마음에 들어가면 중생과 동체라 다른 성정이 없으며, 유정과 무정이 모두 동체로 이 삼매에 들어갔음을 밝힌 것이다. 정업에 감응한 것이기 때문에 일체중생과 수림 용솟는 샘물이 모두 흘러서 돌아오게 하고, 모두 가지를 드리우게 하며, 모두 머리를 조아리게 하고, 야차나 나찰도 모두 악행을 그치게 하였다.(其大光王 入菩薩大慈爲首三昧 顯所行慈心業用 饒益自在 令後學者倣之 以明無依之智 入等衆生心 與之同體 無有別性 有情無情 皆悉同體 入此三昧 所感業故 令一切衆生 及以樹林涌泉 悉皆歸流 悉皆低枝 悉皆稽首 夜叉羅刹 悉皆息惡)
이는 지혜는 일체중생이 모두 그 업용業用과 상동相同함에 따라 똑같은 성정이라 다른 성정이 없음을 밝힌 것이다. 마치 세간의 제왕이 백성에게 자비심이 있으면, 용과 귀신도 순종하고 봉황이 모이며 기린이 배회하는 것과 같다. 하물며 사람이랴 어찌 귀앙歸仰하지 않겠는가. 더구나 이 대광왕은 지혜가 진원眞源에 사무치고 덕행이 법계와 가지런함에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以明智隨一切衆生 皆與同其業用 一性無二 如世間帝王 有慈悲於人 龍神順伏 鳳集麟翔 何況人焉而不歸仰 況此大光王 智徹眞源 行齊法界)
자비심을 수위로 삼고, 신이 모여서 영지靈智를 머금으며, 만물과 빛을 함께하고, 만유의 근본이 된다. 비유하면 마니보주가 대물對物과 동색이 되어 본색과 다르지 않음과 같고, 마치 성지聖智가 무심하여 만물로 성심聖心을 삼음으로 만물과 다르지 않음과 같다. 이는 동체 대자대비의 마음을 만물과 함께 씀을 밝힌 것이니, 색신을 상대방에 나투고 발명하게 하기 때문이다.(慈心爲首 神會含靈 與衆物而同光 爲萬有之根本 如摩尼寶與物同色 而本色不違 如聖智無心 以萬物爲心 而物無違也 明同體大慈悲心 與物同用 對現色身 而令發明故)
산과 들 그리고 온갖 풀이나 나무들도 돌아가며 왕을 향하여 경례하지 않음이 없고, 연못이나 박우물 그리고 강이나 바다도 모두 용솟음치며 넘쳐흘러서 왕의 앞으로 흘러 들어온 것은 지혜경계의 대자대비한 법으로 인하여 이와 같이 부합한다. 만일 중생의 정식이 전변한 경계이면 중생이 할 수 없는 것이니, 마치 연화장세계 중에 경계가 줄곧 불사를 하는 것과 같으며, 이로 인하여 지혜의 경계는 비정의 소행이다. 이 때문에 성자 대광왕은 지혜를 써서 유정을 돌아오게 하고, 유정중생으로 하여금 보답할 수 있게 하며, 무정인 풀이나 나무 산 샘물 강 바다 등이 다 함께 지혜를 따라서 돌아오게 한 것이니, 지말을 근본으로 삼기 때문이다. 마치 세간에 지극한 효성이 흉중에 있으면, 얼음이 언 연못에 고기가 솟아오르고, 삼동 대밭에 죽순이 솟아오르는 것과 같다. 이와 같기까지 하거늘, 하물며 진지眞智가 대자대비로 좇아온 이랴.(山原及諸草樹 無不迴轉向王敬禮 陂池泉井及以河海 悉皆騰溢流注王前者 以智境大慈法合如此 若衆生情識所變之境 即衆生不能爲之 如蓮華藏世界中 境界盡作佛事 以是智境非情所爲 故聖者以智歸情 令有情衆生報得 無情草木山泉河海 悉皆隨智迴轉 以末爲本故 如世間有至孝於心 泳池涌魚 冬竹抽筍 尚自如斯 況眞智從慈者歟)
4. 조백대사의 무정설법
화엄경은 유정과 무정으로 나누고, 유정은 불성이 있어서 성불하고, 무정은 불성이 없어서 성불하지 못한다는 두 가지 견해가 없다. 그래서 헤충국사의 무정설법이란 말은 선가에 널리 회자되지만, 조백대사의 무정설법이라는 말은 전혀 없다. 그러나 아래 혜충국사의 무정설법과 대응하여 여기에서 조백대사의 무정설법이라 소제목을 쓴다. 그리고 조백대사는 유정과 대응하는 말로 무정보다 비정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 정여무정情與無情보다 정여비정情與非情이 더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다. 특히 초목은 무정보다 비정이 훨씬 더 좋다.
시설施設한 법문의 이사가 다르다고 한 것은, 예컨대 화불의 권교 중에 설하기를, “유정은 불성이 있고, 무정은 불성이 없으며, 일체 초목은 성도하여 법륜 등을 굴릴 수 없다.”라고 한 것과 같고, 예를 들면 화엄경은 곧 정여비정情與非情을 초월하는 실교이고, 바로 저 화불의 권종權宗이 범부를 준거한 화교化教와 같지 않음과 같으며, 비유하면 공덕림보살 등 십림보살十林菩薩이 좇아온 국토는 국토도 또한 혜慧라 일컬으며, 일체 경계를 통칭하여 혜체慧體라 하는 것과 같다. 어째서 그러한가? 유정도 없고, 무정도 없기 때문이다. 어째서 그러한가? 두 가지 견해가 없기 때문이며, 일진一眞 지경계智境界는 성불하는 이도 없고, 성불하지 않은 이도 없기 때문이다.(第八 所施法門理事別者 如化佛權教中說 有情有佛性 無情無佛性 一切草木 不能成道轉法輪等 如華嚴經即是越情實教 即不如彼化佛權宗約凡化教 如功德林菩薩等十林菩薩 所從來國 國亦名慧 一切境界總名慧體 何以然者 無有情 無無情故 所以然者 無二見故 爲一眞智境界 無成佛者 無不成者故)
해설: 이 글은 화엄론 회석 편에 있다. 화엄경 전체를 십문十門으로 나누고, 셋째 교의의 차별을 밝히는 문[明教義差別] 중에 여덟째 시설한 법문의 이사가 다름을 밝히는 문[明所施法門理事別]에 상당한 글 전문이다. 먼저 화신불이 설한 삼승의 권교와 법신불이 설한 일승 화엄경은 유정과 무정의 성불론에 명백한 차별이 있음을 밝혔다. 첫째, 무정은 성불할 수 없다. 둘째, 무정도 성불할 수 있다. 셋째, 일체 경계를 혜체慧體로 보는 화엄의 분상에는 유정도 없고 무정도 없다. 두 견해가 없는 진지경계는 성불하는 이도 없고, 성불하지 않은 이도 없다. 이 자리에서 돈오점수가 옳고 돈오돈수가 옳다고 시비를 붙일 수 있겠는가? 선문이 교문보다 더 높다는 주장은 삼승 권교에 한정한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실교법문을 선문으로 삼고, 선문이 교문보다 더 높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무릇 유정이나 무정이란, 이는 업을 의탁한 교설이고, 대저 성불을 논하는 것은 업에 예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업에 예속하지 않는 것이면 곧 유정이 아니고 무정도 아니기 때문이다. 어찌 정식을 벗어난 법에 성불하거나 성불하지 못함이 있다고 계탁하여 말할 수 있겠는가. 저기 유정과 여기 무정이란 업으로 거두어들이는 것이니, 부처의 해탈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찌 자기 정업情業의 계량計量을 이처럼 소량으로 만들려 하는가? 유정과 비정 성불과 불성불은 경에서 설한 바와 같다.(夫有情無情者 此是依業說 夫論成佛者 非屬業故 若非屬業者 即非有情 非無情故 何得於出情法上 計言有成佛不成佛耶 彼有情此無情者是業收 非佛解脫故 豈將自己情業之計 作如是小量 情與非情成與不成 如經所說)
해설: 명리에 장남 선생의 병약설病藥說이 있다. 병이 있으면 그에 상응하는 약이 있다는 설이다. 동안상찰 스님의 십현담에도, “용궁의 만장은 약방문이다.”[龍宮滿藏醫方義]라는 명문이 있다. 중생의 업장이 8만4천 가지나 되기 때문에 그 처방전으로 8만4천 법문이 있다. 병이 없으면 약이 필요 없다. 정식의 유무로 유정 무정을 논하는데, 정식을 벗어난 일승의 해탈경계는 유정은 성불하고 무정은 성불하지 못한다는 시비를 붙일 곳이 없다.
이 제법의 공상空相은 불생불멸하고, 불구부정하며, 세간의 만상이 상주하고, 제법이 법위에 상주한다. 이와 같은 도가 유정과 비정이 되겠는가? 이와 같이 화엄경 중의 대의는 본래 범부나 성인, 유정이나 비정이 없다. 전진법체全眞法體는 일불一佛의 지경계智境界가 되며, 다시는 다른 일이 없다. 범부의 정량을 가지고 망령되게 짐작하지 마라. 만일 정계情計를 남겨두는 이는 유정은 성불한다고 보고 무정은 성불하지 않는다고 볼 것이다. 이는 자신의 업에 집착하는 것이며, 이와 같이 아는 이는 끝내 성불하지 못한다.(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世間相常住 諸法住法位 如是之道 爲有情及非情耶 如此華嚴經中大意 本無凡聖 情與非情 全眞法體 爲一佛智境界 更無餘事 莫將凡夫情量 妄作斟量 若存情計者 見有情成佛 見無情不成佛 此爲自身業執 如是解者 終不成佛)
해설: 반야심경과 법화경을 인용하고 나서 화엄경의 대의를 개진했다. 근래 생명공학이 급속도로 발전하여 사람의 체세포를 떼어내어 배양하면 사람이 되고, 개의 세포를 배양하면 개가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80권 화엄경 중에 한 구절이나 한 용어를 명백하게 통달하면 화엄의 전체 대의를 알 수 있다. 위 문장 중에 전진법체나 불지경계를 명백히 알면 또한 그러하다. 전진법체가 불교의 상용어는 아니다. 당송팔대가 중에 으뜸인 퇴지 한문공이 쓴 글이 모두 사자성어가 되는 것처럼, 보현보살의 후신이라 칭송받는 조백대사가 쓴 글이면 또한 불교용어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제불이 성도하고 한 왜소한 중생의 몸 안에서 한량없는 중생을 교화하지만, 그 왜소한 중생은 알지 못하고 알아차리지 못한다. 다만 범부와 성인이 동체가 되어 전이하는 형상이 없으며, 섬진의 안에서 나와 남이 동체가 된다.”(諸佛成道 在一小衆生身中 化無量衆 其彼小衆生不知不覺 只爲凡聖同體 無移轉相 纖塵之內 自他同體) 왜소한 몸 안에서도 일체 제불이 팔상성도하시는데, 하물며 팔척장신의 내 몸 안에서야 다시 말할 것이 있겠느냐. 내 몸이 곧 불국정토이다. 정토를 더럽힌다면 어찌 모든 부처님께 부끄럽지 않으랴.
“이 화엄경은 이 근본 법계의 문이고, 일체 제불이 본래 큰집에 머무시며, 일체 불자가 구경에 돌아갈 곳이고, 화신의 권승은 모두 그 밖에 있다. 만일 법계문法界門에 들어간 이가 있다면 한꺼번에 전진에 들어갈 것이다.”(此華嚴經 是本法界門 一切諸佛 本住大宅 一切佛子 究竟所歸 化身權乘 總居其外 若有入者 一入全眞) 수궁가에 보면, “삼산三山은 반락청천외半落靑天外요. 이수중분백로주二水中分白鷺洲는 이태백이 노던데요.”라는 구절이 있다.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면 이미 7언 절구도 평상어가 된다. 일입전진一入全眞은 초발심시변정각 또는 일초직입여래지와 동의어가 되며, 이미 뜻을 알고 나면 굳이 그 뜻을 펼쳐놓을 필요가 없다.
나의 별호別號 중에 하나가 삼산노주三山鷺洲이다. 노주는 스승이 하사하신 것이고 삼산은 내가 붙여서 사자명호四字名號로 만들었다. 사자명호 중에 만공월면滿空月面을 으뜸으로 친다. 나의 몸 안에서 제불이 한량없는 중생을 교화하고 보면 삼산노주도 또한 선경仙境일새가 분명쿠나.
무릇 이성이 비정에 변만遍滿한 것이라 유정의 성불과는 동일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이는 여전히 법공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며, 실혜實慧를 의지하지 못하여 여전히 세간의 제상이 본래 상주함을 알 수 없다. 다만 정식을 따라 전변하며 생멸하는 형상만 보고, 망령되게 짐작하여 비정은 오로지 그 이성이 변만하기 때문이라 말한 것이다. 그러나 성불이 어찌 이성 밖에 따로 부처가 있을 수 있겠는가. 만일 이성이 곧 부처라면, 이 이성 중에는 유정과 비정이 본래 다른 형상이 없거늘, 어찌 망견을 좇아서 유정과 비정을 세우랴.(夫言理性遍非情者 而不同有情成佛者 此由未見法空 不依實慧 未了得世間諸相本來常住 但見隨情識變生滅之相 而妄斟酌 言非情但有其理遍故 只如成佛 豈可理外別有佛耶 若理即是佛者 於此理中 情與非情 本無異相 豈從妄見立情非情耶)
해설: 이 문단의 주제어는 것 자者가 두 개이다. 놈 자者를 위에서 것이라 번역하여 것 자라 말한 것이다. 불교는 놈 자를 천하게 여기지 않고, 상놈의 상은 더구나 열반사덕 상락아정 중에 으뜸이라 최고로 존귀하다. 부처라 존귀한 것이 아니고, 중생이라 비천한 것이 아니다.
위 글의 핵심은 두루 미치다, 또는 널리 퍼져있다는 뜻을 가진 변遍 자에 있다. 국어사전에 두루하다는 형용사는 없지만, 불가에서는 통상 두루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또 세간은 편이라 독음하는데, 불가는 변이라 읽는다. 비로자나를 광명변조光明遍照라 하는 것과 같다. 가득할 만 자를 추가하여 변만遍滿이라 번역했다.
뜻이 통하지 않는 것은 문장이 어려워서가 아니고 단어가 어렵기 때문이다. 마하지관에 이르기를, “실성이 바로 이성이다.”(摩訶止觀卷五上, 則以實性卽爲理性.)라고 한다. 일단 이성을 실성이라 정의하고, 실성의 뜻을 구명해보자. 실성은 원성실성圓成實性 또는 진여실성眞如實性이라 한다. 바로 진여이다. 법상종에 삼성설三性說이 있는데, 셋째 원성실성은 또 제일의상 진실상이라 하며, 의타기성의 진실한 체가 바로 일체 법에 변만하고, 불생불멸하며, 체성이 진실한 것이니, 이 때문에 원성실성이라 한다.
“이성이 비정에 변만遍滿한 것이라 유정의 성불과는 동일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이는 권승 법상종의 견해이다. 의타기성의 진실한 체가 바로 일체 법에 변만하고, 불생불멸한다. “의타기성의 진실한 체”를 이성에 대비하고, “일체 법”을 비정에 대응한다. 유정 곧 중생심은 이성과 감정(육식의 작용)의 결합체라면, 육식을 청정하게 하여 성불할 수 있는데, 비정은 육식의 작용은 전혀 없고, 이성 달리 말하면 실성이나 법성만 100% 두루 충만하며, 이 때문에 유정의 성불과 동일하지 않다는 견해를 갖게 되는 것이다. 이 견해를 통박한 것이 그 아래 글이다. 법상종은 일체 사물의 본질과 상태의 차이점을 성상격별性相隔別의 입장에서 삼성설을 세운 것이고, 화엄종은 성상원융性相圓融의 입장에서 삼성을 논하고 있는 점이 다르다.
법공은 위에서 말한 제법공상諸法空相이다. 세간의 제상이 본래 상주한다는 말은 법화경의 “이 법이 법위에 머물러 세간의 제상이 상주한다.”(是法住法位 世間相常住)라는 구절과 같다. 이는 진실혜眞實慧로 알 수 있는 경지이고, 범부의 정식으로는 알 수 없다.
본문 중에 이理를 이성이라 번역했는데, 이성을 실성 또는 법성으로 환치하고 읽으면 그 뜻이 명백해진다. 환치하면 다음과 같다. “그러나 성불이 어찌 법성 밖에 따로 부처가 있을 수 있겠는가. 만일 법성이 곧 부처라면, 이 법성 중에는 유정과 비정이 본래 다른 형상이 없거늘, 어찌 망견을 좇아서 유정과 비정을 세우랴.” 법성은 위에서 밝혔다. 어째서 이理를 실성 또는 법성이라 번역하지 않고 이성이라 했는가? 근본을 중시하기 때문이고, 작자의 견해를 존중하기 때문이다.
가령 부처는 비정이면 응당 성불할 수 없고, 만일 대각을 성취한 이가 있다면, 이 두 가지 견해를 의탁하지 않을 것이다. 이 때문에 법화경은 권승權乘을 회통하여 일실제一實諦로 돌아갔다. 경에 이르기를, “갖가지 성상性相의 뜻은 나와 시방의 부처님이 곧 이 일을 알 수 있고, 성문과 벽지불 불퇴제보살不退諸菩薩 이와 같은 등 3승의 권학權學은 다 함께 알 수 없다.”라고 한다. 광설廣說은 저 경과 같다.(如佛是非情 應不得成佛 若有成大菩提者 不依此二見 是故法華經 會權歸一實 經云種種性相義 我及十方佛 乃能知是事 聲聞辟支佛 不退諸菩薩 如是等三乘權學 總皆不能了 廣如彼經)
해설: 두 가지 견해는 무엇인가? 가령 유정이면 성불할 수 있고, 비정이면 성불할 수 없다는 상단이변常斷二邊을 말한다. 상견과 단견을 여의어야 대각을 성취할 수 있다.
갖가지 성상이란 제법실성諸法實性이나 제밥실상諸法實相을 말한다. 또 만상의 성상 상호관계로 법성종과 법상종으로 분파되었다. 그 종초지말從初至末을 다 말하자면 끝이 없을 것이다.
예컨대 화엄경 중에는 유정과 비정이 없고, 정여비정情與非情이 모두 일체지지경계一切智智境界이며, 일체 산하와 수목이 모두 불보살의 몸을 나투고 설법할 수 있고, 정여비정은 불체佛體와 동일하여 능동능별能同能別에 자재하고 무애하다. 각기 부처가 세계 중에 주지하고 안립安立하며 자재로 장엄하는데, 그 경계가 동일하지 않고 장엄도 각기 다르다. 그 묘찰국토妙刹國士의 장엄에 낱낱 경계 중 섬진纖塵의 안에서 불신이 출현하고, 찰해가 중중하며, 불신이 무진하고, 불신의 모공도 또한 다시 이와 같다. 경계도 중중하고, 불신도 무진하며, 서로 사무치게 들어가는데, 능동능별하고 전동전이全同全異하며, 정토와 예토도 무장무애하니, 이와 같은 정여비정을 논하지 않으며, 이 때문에 지금 시설한 교문이 다르다고 말한 것이다.(如華嚴經中 無有情與非情 俱爲智智境界 一切山河樹木 皆能現佛菩薩身及說法 與佛體同 能同能別自在無礙 佛於世界中住持 安立自在莊嚴 境界差殊 莊嚴各異 於其妙刹國土莊嚴 一一境中 纖塵之內 佛身出現 刹海重重 佛身無盡 佛身毛孔亦復如是 境界重重 佛身無盡 互相徹入 能同能別 全同全異 淨穢國土 無障無礙 不論如是情與非情 是故今言所施教門別)
해설: 화엄경에 일체지지경계一切智智境界라는 용어가 세 번 나오고, 화엄론에는 위 논문과 같이 지지경계智智境界가 딱 한 번만 나온다. 다음과 같다. “광대한 지혜의 힘으로 일체지지 경계를 알고,”(以廣大智慧力 了知一切智智境界) “일념경에 무공용지로 일체지지 경계에 들어가며,”(於一念頃以無功用智 入一切智智境界) “일체지지 경계 중에 안주할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能令安住一切智智境界中故) 일체지지는 일체지 중에 최고 수승한 지혜이고, 지혜 중에 지혜이며, 구경실제究竟實際의 실지實智라 말할 수 있다. 일체 산하와 수목이 이하는 모두 일체지지의 경계이다.
범어梵語 sarvajna를 살바야薩婆若라 음사하고 일체지一切智라 번역하며, sarvathā-jnāna를 일체종지一切種智라 번역하며, sarvajna-jnāna를 살바야나薩婆若那라 음사하고 일체지지一切智智라 번역했다. sarvathā를 살박타薩縛他라 음사하고 일체처一切處라 번역하므로, sarvathā-jnāna를 살박타나薩縛他那라 음사하고 일체처지一切處智라 번역할 수도 있을 터인데, 확인하지는 못했다. 위 셋은 모두 불지佛智를 말한다. 일체지를 평등지로 보고, 일체종지나 일체지지를 차별지로 보기도 한다. 아래는 청량국사의 견해이다.
부처에 세 가지 해석이 있다. 첫째 본경에 의거하고, 둘째 불지론을 인용하며, 셋째 진실론을 인용한다.(佛有三解 一依本經 二引佛地論 三引眞實論) 여기서는 둘째 불지론의 글만 인용하고자 한다.
또 불지론 제일권에 이르기를 부처는 또한 열 가지 뜻을 갖추었다고 한다. 이른바 일체지와 일체종지를 갖추었고, 번뇌장과 소지장을 여의었으며, 일체법과 일체종상에서 스스로 개각할 수 있고, 또한 일체 유정을 개각시킬 수 있다. 비유하면 잠을 자다가 꿈을 깬 것과 같고, 예컨대 연꽃이 피어난 것과 같으며, 이 때문에 명호를 부처라 한다.(又佛地論第一 說佛亦具十義 謂具一切智一切種智 離煩惱障及所知障 於一切法一切種相 能自開覺 亦能開覺一切有情 如睡夢覺 如蓮華開 故名爲佛)
둘째 불지론을 인용했는데, 논에 별석이 없으니, 이제 응당 간략히 판별하겠다. 이 십구十句를 빌려서 오대五對를 삼고자 한다. 첫째는 증득하는 지혜[能證智]이고, 둘째는 절단할 장애[所斷障]이며, 셋째는 증득할 이법[所證理]이고, 넷째는 성취할 이익[所成益]이며, 다섯째는 각상을 드러내는 것[顯覺相]이다. 앞의 넷은 법을 말하는 것이고, 뒤의 하나는 비유를 밝힌 것이다. 그러나 이 오대가 낱낱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二引佛地論 論無別釋 今當略辨 攝此十句以爲五對 一能證智 二所斷障 三所證理 四所成益 五顯覺相 前四法說後一喻明 然此五對一一相屬)
첫째 증득하는 지혜[能證智]란 것은 곧 일체지를 갖추었으니 근본지이고, 일체종지는 후득지이다.(一能證智者 即具一切智是根本智 一切種智是後得智)
둘째 절단할 장애[所斷障] 중에 일체지로 번뇌장을 끊고, 일체종지로 소지장을 끊는 것이니, 종류별種類別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二所斷障中 以一切智斷煩惱障 一切種智斷所知障 種類而知故)
셋째 증득할 이법[所證理] 중에 일체법이란 것은 곧 진제법이고, 일체종상이란 것은 속제법이다. 일체지의 총상으로 법의 실성을 관하고, 일체종지의 별상으로 법의 실상을 관한다. 법성을 증득함으로 인하여 번뇌장을 제거하고, 법상을 통달함으로 말미암아 소지장을 절단하는 것이다.(三所證理中 一切法者 即眞諦法也 一切種相者 俗諦法也 以一切智總相觀法之性 以一切種智別相觀法之相 由證法性除煩惱障 由達法相斷所知障)
넷째 성취할 이익[所成益]이란 것은 첫째 자리이고, 둘째 이타이다. 위 삼대는 모두 자리와 이타에 상통한다. 만일 별의를 취하면, 일체지로 법성을 자증하니 곧 자각이고, 일체종지로 법의 실상을 깨닫기 때문에 각타할 수 있다.(四所成益者 一則自利 二者利他 上之三對俱通二利 若取別義 以一切智自證法性 便是自覺 以一切種智覺法之相 故能覺他)
다섯째 각상을 드러내는 것[顯覺相] 중에 비유하면 잠을 자다가 꿈을 깬 것은 일체지로 제법의 실성을 깨달아 무명번뇌의 수면을 갑작스레 깬 것과 같고, 예컨대 연꽃이 피어나는 것은 일체종지에서 법의 실상을 깨닫고 법문을 개통開通하는 것과 같으며, 이는 마치 꽃이 피어나는 곳에서 연실蓮實을 볼 수 있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전자는 곧 알아차리는 것이고, 후자는 바로 깨닫는 것이며, 또한 전자는 깨닫는 것이고, 후자는 알아채는 것이라 해도 좋다. 이 다섯 가지는 완전무결해야 비로소 각만覺滿이라 일컫고 명호를 묘각이라 호칭하는 것이니, 능각과 소각을 여의어 이각二覺이 다하기 때문이다. 이상의 해석이 아직 경론에는 보이지 않지만, 이치상 반드시 그러함에 수응隨應하리라.(五顯覺相中 如睡夢覺者 以一切智覺諸法之性 頓破無明煩惱睡眠故 如蓮華開者 以於種智覺法之相開悟法門 如於華開得見蓮故 前即覺察 後即覺悟 亦可前是覺悟 後爲查覺 此五無缺方稱覺滿名曰妙覺 離覺所覺而盡覺故 上之解釋未見經論 理必應然)
또 권교 중에 제행이 앞에 있고, 불과는 십지 이후에 있는데, 이 일승교 중에 불과의 근본지를 먼저 증득하고, 차별지를 써서 서로 자량이 되며, 인과의 행상行相이 일시에 돈철頓徹하여 전제前際도 없고 후제後際도 없다. 하나가 이루어지면 일체가 이루어지고, 하나가 무너지면 일체가 무너지니, 여교餘教에서 일지一地에 일지를 닦는 것과는 동일하지 않다. 이성이 가지런하고, 때가 가지런하며, 인행因行이 가지런하고, 지혜가 가지런하다. 이 때문에 정혜를 닦고 지혜로 이를 관하라. 정여비정으로 알지를 말지니라.(又權教之中 諸行爲先 佛果在十地之後 此教之中 佛果根本智爲先證 以差別智而互爲資 因果行相 一時頓徹 無前無後際 一成一切成 一壞一切壞 不同餘教 一地修一地 以爲性齊時齊行齊智齊故 以修定慧 用智觀之 莫將情解)
해설: 삼승 권교와 일승 화엄은 견도위와 가행위가 다르다. 권교의 불과는 십지 이후에 있으니, 십주 십행 십회향 십지 40위를 가행위로 삼고 십지 이후에 견도한다. 그러나 화엄경은 십주초위 초발심주에 견도하고, 십행 십회향 십지 십일지를 가행위로 삼는다. 십신만심 초발심주에 이르러 선정의 관력觀力으로 법신과 계합하니, 불과가 십주초위에 먼저 드러나고, 여래의 근본 보광명지가 먼저 드러나기 때문에 시종과 본말이 모두 연촉延促 곧 장단長短이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무시무종無始無終하고 무성무괴無成無壞한다.
일념에 발심하면 몰록 능소가 없고, 삼세의 실성을 알면 그 실성에 고금이 끊어지며, 삼세가 일념이고, 일념이 삼세 내지 십세이며, 자기 마음이 본래 부처인 줄을 자각하면 정각을 이룰 것도 없고 보리를 증득할 일도 없다. 그래서 이성이 가지런하고, 때가 가지런하며, 인행因行이 가지런하고, 지혜가 가지런하다고 말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당부한다. 정혜를 닦고 지혜로 이를 관하라. 정여비정으로 알지를 말지니라. 막장정해莫將情解를 직역하면 “정으로 알지 말라.”가 되는데, 정을 정여비정으로 본 것이다.
5. 제법부동적정문諸法不動寂靜門과 안심법문安心法門
달마대사의 이입사행론에 제법부동적정문諸法不動寂靜門이 있다. 유정 무정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이에 인용한다. 대지도론에 이르기를, “만일 차遮자를 들으면 즉시에 일체 제행이 모두 비행인 줄을 안다.”(大智度論卷四十八 若聞遮字 卽時知一切諸行皆非行)라고 한다. 행行에는 변천하여 머무르지 않는다는 뜻이 있으니, 비행非行은 곧 부동 또는 상주한다는 뜻이다.(行有變遷不住之義 非行卽不動常住之義) 또 “만일 차자를 들으면 바로 일체 법의 부동상을 안다.”(若聞遮字 卽知一切法不動相)라고 한다. 부동과 부동상의 출처를 드러냈다.
제법이 부동하여 적정한 문[諸法不動寂靜門]
묻는다. “어째서 여래의 혜일이 유지에 잠겨 들어간다고 말씀하십니까?”(問 云何名如來慧日 潛沒於有地)
해설: 여래의 지혜가 마치 일광이 비추어주는 것과 같이 밝고 밝아서 여래 혜일이라 하고, 유지는 유정으로 일체 중생을 말한다. 일체 중생이 모두 여래의 지혜덕상智慧德相을 원만히 구족했는데, 어째서 여래 혜일처럼 밝게 비추지 못하고 유정 속에 잠겨 있느냐? 어째서 여래장如來藏의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 또는 청정한 본각이 번뇌 망상 속에 감추어져 있느냐? 이 의문을 사뢴 것이다.
답한다. “유정이 아닌데 유정으로 보니 혜일이 유정에 잠겨 들어가느니라. 색상이 없는데 색상으로 보니 이것도 또한 그러하다.”(答曰 非有見有 慧日沒於有地 無相見相亦然)
해설: 유정이 아닌데 유정으로 보고, 색상이 없는데 색상으로 본다. 이 때문에 여래 혜일이 유정에 잠겨 들어간 것이다. 모든 병통이 여기에 있다. 어째서 유정을 부처로 보지 못하느냐? 어째서 색상을 법신으로 보지 못하느냐? 영가대사의 증도가에 이르기를, “무명 실성이 곧 불성이고, 환화 공신이 바로 법신이다.”(無明實性卽佛性 幻化空身卽法身)라고 하지 않았는가? 무학대사가 이르기를, “부처님 눈으로 보면 모두 부처이고, 돼지 눈으로 보면 모두 돼지이다.”라고 하시니, 그 말씀이 진실로 옳다. 불지견佛知見을 갖추고자 하면 시공관時空觀을 올바르게 확립해야 한다.
시방의 제불은 고금古今이 없는 법성으로 대각을 이루시니, 일념에 견도하면 고금의 견해가 멸진하여 거래금去來今의 삼세가 모두 없다. 일찍이 과거 억천겁 부처님, 불가설겁 부처님과 함께 일시에 성불하고, 또한 미래의 불가설겁 부처님과 더불어 일시에 성불하니, 스스로 증득하여 삼세에 시제時際가 없음을 보았기 때문이며, 시제가 없기 때문에 곧 과거와 미래가 없다. 설령 중생이 자기 신심身心이 본래 정각인 줄을 스스로 보고 알지 못할지라도, 자기 몸과 마음의 정각전덕正覺全德은 본래 없어짐이 없으며, 설령 어떤 중생이 만일 자기의 몸과 마음이 본래 정각인 줄을 스스로 보고 알지라도, 자기 정각에는 본래 생겨남이 없는 것이니, 본래 이와 같기 때문이고, 본래 능각能覺과 소각所覺이란 것이 없기 때문이며, 만일 깨달은 자가 있더라도 또한 이와 같은 본각은 본래 능각이나 소각이란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본각불本覺佛의 경계는 범부도 없고 성인도 없으며, 선정도 없고, 산란도 없으며, 닦는 것도 아니고 증득하는 것도 아니며, 지혜도 아니고 어리석음도 아니며,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없어지는 것도 아닌 것이다.(十方諸佛 以無古今性 成大菩提 一念見道 古今見盡 新故總無 還同已前億千劫佛不可說劫佛 一時成佛 亦與未來不可說劫佛 一時成佛 以自證見三世無時故 以無時即無去來 設使衆生 不自見知自己身心 本來正覺 自己身心正覺全德 本無有滅 設有衆生 若自見知自己身心 本來正覺 於自正覺 本來無生 本如是故 本無能覺所覺者故 若有覺者 還如是覺 本無能覺及所覺者故 如是本覺佛之境界 無凡無聖 無定無亂 不修不證 不智不愚 不生不滅)
묻는다. “어째서 부동상이라 말씀하십니까?”(問曰 云何名不動相)
해설: 달마대사의 이입사행론 중에 소제목의 하나가 제법부동적정문[諸法不動寂靜門]이다. 제법의 형상形相은 동상動相이고, 제법의 실상은 부동상不動相이라 말해야 옳을 터인데, 어째서 제법의 형상이 부동상이라 말씀하십니까?
답한다. “유정에서 유정을 얻을 수 없으니 유정이 동할 만한 것이 없고, 무정에서 무정을 얻을 수 없으니 무정도 동할 만한 것이 없다. 마음을 찾아도 마음이 없으니 마음이 동할 만한 것이 없고, 형상을 찾아도 형상이 없으니 형상도 동할 만한 것이 없다. 이 때문에 부동상이라 일컫는 것이다. 만일 이와 같이 바로잡았다고 여기는 이가 있다면, 이는 스스로 미혹하여 헷갈리게 한다고 말할 것이다. 상고上古 이래以來로 아직까지 해결하지 못하고 있으며, 이를 해결하려 해도 해결할 만한 방법이 없다.(答曰 不得於有有 有無有可動 不得於無無 無無有可動 卽心無心 心無有可動 卽相無相 相無有可動 故名不動相 若作如是訂者 是名自誑惑 上來未解 解是無法可解)
해설: 위에서 부동과 부동상의 출처를 설명했다. “비행非行은 곧 부동 또는 상주한다는 뜻이다.”(非行卽不動常住之義) 또 “아자阿字로부터 일체 자륜字輪을 출생할 수 있고, 그래서 아자는 ‘본래 생기지 않고’ ‘얻을 수 없다’는 뜻이며, 그 본신은 본래 상주하여 부동하니, 이 때문에 자륜이 부동의 뜻을 포함하고 있다.”(又從阿字能生出一切之字輪 然阿字爲本不生不可得之義 其本身爲本來常住不動 故字輪含有不動之義) 부동상주不動常住는 상주부동常住不動과 같고, 또 상주는 부동과 같으며, 그 근원이 불가득不可得이고 본불생本不生이니, 아자본불생阿字本不生이다.
“유정에서 유정을 얻을 수 없으니 유정이 동할 만한 것이 없고,”는 좀 이해하기가 어렵다. “마음을 찾아도 마음이 없으니 마음이 동할 만한 것이 없고,”는 좀 쉽다. 왜 그러한가? 친근하기 때문이다. 금강경에 “과거의 마음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을 얻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라는 명문이 있고, 달마대사의 안심법문도 있으며, 덕산스님과 관련한 “삼세의 마음을 얻을 수 없는데, 어느 마음에 요기療飢하시렵니까?”(三世心不可得 點麽何心)라는 공안도 있다.
“제자의 마음이 아직 안락하지 못합니다. 청컨대 스님께서 마음을 안락하게 하여 주소서.”(弟子心未安 乞師安心)
“마음을 가져오너라. 그대에게 안락함을 주겠노라.”(將心來 與汝安)
“마음을 찾아도 전혀 얻을 수 없습니다.”(覓心 了不可得)
“그대를 위한 안심법문을 마쳤느니라.”(爲汝安心竟)
마음을 찾아도 마음이 없으니 안락하지 못한 마음이 어디에 있느냐? 안락하지 못한 마음이 없으니 동할 만한 마음인들 어디에 있으랴.
유정에서 유정의 실체를 찾을 수 있느냐? 또 무정에서 무정의 실체를 찾을 수 있느냐? 다시 제상에서 제상의 살상을 찾을 수 있느냐? 없다. 어째서 그러한가? 이 모든 것이 본불생이고 불가득이기 때문이며, 또한 부동상이기 때문이다.
“만일 이와 같이 바로잡았다고 여기는 이가 있다면,”은 무슨 뜻인가? 정訂 자는 정정訂正 또는 수정修訂 등으로 쓰이니 ‘바로잡아 정하다’는 뜻이다. “만일 일체 사견을 바로잡아 제법적정부동상과 같은 정견을 세웠다고 여기는 이가 있다면,” 이는 시방세계를 좌단坐斷해도 오히려 이마에 점을 찍는 것과 같다. 그래서 “스스로 미혹하여 헷갈리게 한다고 말할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상고上古 이래以來로 아직까지 해결하지 못하고 있으며,” 상래上來를 상고 이래로 해석했다. 상고는 최초 위음왕불이 정각을 이루기 이전을 말한다. 삼세 부처님이 모두 이 일을 해결하지 못한다. 옳다고 내놓으면 그르치느니라. 그래서 “이를 해결하려 해도 해결할 만한 방법이 없다.”라고 끝맺은 것이다.
6. 혜충국사의 무정설법
달마대사의 후손이 창립한 종파를 선종이라 한다. 능가사자기는 능가종의 초조를 능가아발다라보경 4권을 번역한 구나발타라 삼장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달마대사를 능가종의 2조로 본다. 능가종의 역대조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선종의 특색이 전혀 없다. 경교를 매우 중시한다. 이를 정통으로 이은 조사가 바로 혜충국사이고, 육조스님의 진전을 사자상승한 분이 곧 혜충국사이다. 직지인심 견성성불 불립문자 교외별전이란 슬로건이 필요 없다. 사향처럼 자연향이 있다면 바람 앞에 설 필요가 없다. 일승 요의경이면 자각과 각타에 부족함이 없기 때문이다.
혜충국사께서 무정설법을 자주 말씀하신 듯하나, 문헌상 장분 행자 그리고 남방의 선객과 문답이 남아있다. 일부는 해설하고, 일부는 해설을 생략하고자 한다.
남양의 장분이 사뢰었다. “제가 무정설법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 일을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스님께서 가리켜 보여주시기를 간청합니다.”(南陽張濆問: “某甲聞有無情說法, 未諦其事, 乞師指示.”)
국사가 말씀하셨다. “무정설법을 그대가 이와 같이 들을 때 바야흐로 무정설법을 듣는다. 그 무정을 반연해야 비로소 나의 무정설법을 들을 수 있다. 그대는 오직 무정설법을 묻기만 할 뿐이다.”(師曰 “無情說法汝若聞時, 方聞無情說法, 緣他無情, 始得聞我說法, 汝但問取無情說法去.”)
해설: 문답이 떨어져 있지 않는다. 언제나 질문에 답이 있다. “제가 무정설법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대가 이와 같이 들었다면, 지금 들은 것이냐? 아닙니다. 과거에 들은 것이냐? 지금 들었다고 말했으니 과거에 들은 것도 아닙니다. 지금 들은 것도 아니고, 과거에 들은 것도 아니다. 과거와 지금이 없는 마음으로 들은 것이다. “무정설법을 그대가 이와 같이 삼세심이 없는 마음으로 들을 때 바야흐로 무정설법을 듣는다.”
유정은 유정의 설법을 들을 수 있고, 무정은 무정의 설법을 들을 수 있다. 유정은 무정의 설법을 들을 수 없다. 국사의 무정설법을 어떻게 해야 들을 수 있는가? 그 무정을 반연해야 한다. 어떻게 무정을 반연하는가? 바로 무심을 반연한다. 무정은 삼세심이 없다. 네가 무정이 되면 비로소 나의 무정설법을 들을 수 있다. 그래서 유정인 너는 무정설법을 묻기만 할 뿐이고, 들을 수는 없다.
장분이 사뢰었다. “다만 지금 유정의 방편 중에 의거할 수밖에 없다면, 어떤 것이 무정의 인연입니까?”(張濆曰 “只如今約有情方便之中, 如何是無情因緣?”)
해설: 장분은 남양의 행자行者이다. 출가하지는 않은 듯하다. 일승법문은 듣기도 어렵지만 묻기도 또한 어렵다. 유정의 방편과 무정의 인연이란 유무의 쌍검을 들고 나온다.
국사가 말씀하셨다. “단지 지금 갖가지로 움직여 쓰고 있는 그 안에서 시전施展하면, 오로지 범정과 성해 두 견해가 모두 조그만큼도 기멸하는 마음이 없다면, 바로 6식에서 벗어나 유정에 예속하지 않으며, 불꽃처럼 일어나는 견문각지라도 다만 그렇게 연계시키는 집착은 없다. 그래서 6근이 6경을 상대하는 분별도 6식은 아니니라.”(師曰 “但如今於一切動用之中施爲, 但凡聖兩流都無小分起滅, 便是出識, 不屬有情. 熾然見覺只是無其繫執. 所以六根對色分別非識.”)
해설: 유정의 방편을 “단지 지금 갖가지로 움직여 쓰고 있는 그 안에서 시전施展하면,”으로 한정하고, 무정의 인연을 “오로지 범정과 성해 두 견해가 모두 조그만큼도 기멸하는 마음이 없다면,”으로 정의한다. 단진범정但盡凡情 별무성해別無聖解이다. 이는 유정의 경계를 벗어난다. 유정은 6근이 6경을 상대하여 불꽃처럼 일어나는 분별이 모두 번뇌 망상을 벗어나지 못하지만, 무정은 그러하지 않고, 법신도 또한 이와 같다. 그래서 이하의 문장은 전등록에 육조스님의 말씀이라 나오지만, 단경에서 이 문구를 검색했지만 확인하지는 못했다. 우두산 법융스님의 심명에 나온다. 모두 해탈경계이다.(牛頭山初祖法融禪師心銘: 菩提本有不須用守 煩惱本無不須用除 靈知自照萬法歸如 無歸無受絕觀忘守 四德不生三身本有 六根對境分別非識 一心無妄萬緣調直 心性本齊同居不携)
혜충국사의 이 법문이 조당집과 경덕전등록은 약간 다르다. 위는 조당집에서 인용한 것이고, 아래는 전등록이다. 참고하시라 남겨둔다.(南陽張濆行者問 伏承和尚說無情說法 某甲未體其事 乞和尚垂示 師曰 汝若問無情說法 解他無情方得聞我說法 汝但聞取無情說法去 濆曰 只約如今有情方便之中 如何是無情因緣 師曰 如今一切動用之中 但凡聖兩流都無少分起滅 便是出識不屬有無 熾然見覺 只聞無其情識繫執 所以六祖云 六根對境分別非識)
어떤 남방의 선객이 사뢰었다. “어떤 것이 옛 부처의 마음입니까?”(有南方禪客問: “如何是古佛心?”)
해설: 조당집이나 전등록을 보면 고불심을 많이 묻고 답한다. 아마도 선객과 혜충국사의 문답이 시효일 것이다. 시간을 삼세로 나누어 보면 고불이 있고 금불今佛이 있으며 내불來佛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삼세불의 그 마음은 다르지 않다.
불심, 곧 부처님의 마음은 어떠할까? 길을 걷다가 만나는 보통 사람들한테 물으면 대자대비하다고 말할 것이다. 돈오입도요문론은 일체 처소에 머무르지 않는 마음을 불심이라 정의했다. 무의주지無依住智와 다를 바가 없다. 화엄경의 보현보살 게송은 이러하다. “모든 부처님의 마음을 알고자 하느냐? 마땅히 부처님의 지혜를 관하라. 부처님의 지혜는 의지하는 곳이 없으니, 허공이 의지하는 바가 없는 것과 같다.”(欲知諸佛心. 當觀佛智慧. 佛智無依處. 如空無所依) 이 게송을 의거하여 불심을 관할 수 있다. “만일 부처님의 경계를 알고자 하면, 응당 그 마음을 허공처럼 청정하게 하라.”(若有欲知佛境界. 當淨其意如虛空) 이 게송을 의거하여 또한 부처님의 경계를 관할 수 있다.
우물 안의 개구리는 바다의 고래를 알 수 없는 것과 같이, 유정은 무정의 세계를 알 수 없고, 중생심으로 불심 또는 불경계를 알 수 없다. 불심을 알고자 하느냐? 불지를 관하라. 부사의한 변재를 가지고 있는 부처님도 중생한테 불지를 직설할 수 없다. 이에 비유를 쓴다. 부처님의 지혜 또는 지바라밀이 허공과 동일한 것은 아니지만, 의지하는 바가 없는 허공을 비유하여 불지를 알게 한다. 일승의 묘법을 설명하는 일체 비유 중에 이 허공이 가장 가깝다. 그래서 허공의 비유가 제일 많다. 원각경에도 무변허공 각소현발이라 하지 않는가?
국사가 말씀하셨다. “장벽의 기와나 조약돌 등 무정물이 똑같이 고불의 마음이니라.”(師曰 “廧壁瓦礫, 無情之物, 並是古佛心.”)
해설: 경에 무수한 부처님의 명호가 나온다. 금불은 서가모니불이고, 내불은 미륵불이며, 과거칠불을 위시하여 다른 부처님은 모두 고불이다. 서가모니불은 금불이라 말해도 옳고 고불이라 해도 또한 옳다. 그래서 고불의 마음을 금불의 마음이라 해도 좋다. 조당집에 나오는 문답은 아래와 같다.
“어떤 것이 고불의 마음입니까?”(如何是古佛心)
수룡睡龍 스님이 말씀하셨다. “나는 그대에게 맡겼는데, 고불의 마음을 묻지 않는구나.”(我委你 不問古佛心)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얼굴을 맞대고 서로 주는 것은 알지 못하기 때문인데, 부처를 묻는 사람한테 어찌 맡길 수 있을까?”(覿面相呈由不識 問佛之人焉能委)
“어떤 것이 고불의 마음입니까?”
보봉寶峰 스님이 말씀하셨다. “마침내 흙과 나무 기와 조약돌이라 말씀하지 않았던가?”(終不道土木瓦礫是)
또 자복資福 스님은 말씀하셨다. “산하대지니라.”(山河大地)
“어떤 것이 고불의 마음입니까?”
흥평興平 스님이 말씀하셨다. “바로 너의 마음이니라.”(卽汝心是)
“비록 이와 같지만, 또한 제가 묻는 곳이 아닙니다.”(雖然如此 猶未是某甲問處)
“만일 그러하다면 목인에게 물어보라.”(若與摩 問取木人去)
국사의 말씀처럼 장벽의 기와나 조약돌 등 무정물도 고불의 마음이고, 질문하는 선객의 마음도 또한 고불의 마음이다. 그러고 보면 모든 사람의 마음 가운데 본래 구족한 청정진여심淸淨眞如心도 또한 고불의 마음일 것이다.
선객이 사뢰었다. “경과 매우 서로 어긋납니다. 원래 열반경에 말씀하시기를, ‘장벽의 기와나 조약돌 등 무정물을 여의었기 때문에 불성이라 말한다.’라고 했는데, 지금은 온갖 무정이 모두 부처의 마음이라 이르시니, 마음과 성품이 다른지 다르지 않는지 미심쩍습니다.”(禪客曰 “與經太相違. 故涅槃經曰 ‘離牆壁瓦礫, 無情之物, 故名佛性.’ 今云一切無情皆是佛心. 未審心與性爲別不別.”)
해설: 장벽의 기와나 조약돌[牆壁瓦礫]의 출처가 열반경인 듯하다. 그대로 갖다 쓰거나 뒤집어서 쓰거나를 막론하고, 옛날의 학불자學佛者는 경에 나오지 않는 말은 쓰지 않았다.
국사가 말씀하셨다. “미혹한 사람은 곧 다르지만, 깨달은 사람은 바로 다르지 않느니라.”(師曰 “迷人卽別, 悟人卽不別.”)
해설: 이 미인迷人을 속인 호도인糊塗人 미혹인迷惑人 등으로 해석한다. 어리석은 사람 또는 판단력을 잃은 사람을 말한다. 불교는 깨달은 사람을 현성이라 호칭하고 보면, 미인은 범부로 보면 적당할 것 같다. 미인과 오인의 대구는 부지기수이다.
선가구감 언해본에 있다. “깨달은 사람은 대번에 보는데, 미혹한 사람은 아득한 세월만 기약한다.”(悟人卽頓見 迷人期遠劫)
육조단경에 있다. “미혹한 사람은 점차 계합하고, 대오한 사람은 단번에 닦는다.”(迷人漸契 悟人頓修) “미인은 염불하여 피안에 연화탁생蓮花托生을 구하고, 오인은 스스로 그 마음을 청정하게 한다.”(迷人念佛 求生於彼 悟人自淨其心)
대주혜해大珠慧海 스님의 말씀이다. “미인은 인을 닦고 과를 기다리지만, 오인은 마음이 본래 공적함을 아느니라.”(迷人修因待果 悟人了心本空) 또는 “오인은 마음이 형상이 없는 줄을 아느니라.”(迷人修因待果 悟人了心無相)
선객이 사뢰었다. “또다시 경과 서로 어긋납니다. 원래 경에 말씀하시기를, ‘선남자야, 중생심은 불성이 아니니, 불성은 상주하고, 중생심은 무상하다.’라고 했는데, 오늘은 다르지 않다고 하시니, 이 대의는 어떠한지 미심쩍습니다.”(禪客曰 “又與經相違, 故經曰 ‘善男子, 心非佛性, 佛性是常, 心是無常.’ 今日不別, 未審此義如何.”)
국사가 말씀하셨다. “그대는 말에 의지하고, 뜻에는 의지하지 않는구나. 비유하면 한랭한 겨울에는 물을 얼려서 얼음이 되었는데, 따뜻한 시절에 이르면 얼음을 녹여서 물이 되는 것과 같다. 중생이 미혹할 때는 불성을 엉기게 하여 마음을 이루고, 중생이 깨달을 때는 마음을 풀리게 하여 불성을 이룬다. 그대가 만일 무정은 불성이 없는 것이라고 단정한다면, 경에서도 응당 ‘삼계는 유심이고 만법은 유식이다.’라고 말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화엄경에 말씀하시기를, ‘삼계의 모든 법, 일체를 오직 마음이 만들었다.’라고 하였느니라. 이제 다시금 그대에게 묻노라. ‘무정물은 삼계의 안에 있는가, 삼계의 밖에 있는가? 무정물은 혹은 마음인가, 그렇지 않으면 마음도 아닌가?’ 만일 마음이 아닌 것이라면 경에서 응당 ‘삼계는 오직 마음뿐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았어야 하고, 만일 마음인 것이라면 응당 ‘무정은 불성이 없다.’라고 말씀하지 않았어야 할 것이니라. 그대가 스스로 경을 어겼고, 내가 어기지 않았느니라.”(師曰 “汝依語而不依義. 譬如寒月, 結水爲冰, 及至暖時, 釋冰爲水. 衆生迷時, 結性成心, 衆生悟時, 釋心成性. 汝若定執無情無佛性者, 經不應言: ‘三界唯心, 萬法唯識.’ 故華嚴經曰 ‘三界所有法, 一切唯心造.’ 今且問汝: 無情之物, 爲在三界內, 爲在三界外? 爲復是心, 爲復不是心? 若非心者, 經不應言: ‘三界唯心.’ 若是心者, 不應言: ‘無情無佛性.’ 汝自違經, 吾不違也.”)
해설: “중생심은 불성이 아니니, 불성은 상주하고, 중생심은 무상하다.”(心非佛性 佛性是常 心是無常) 모든 부처님은 일승만 말씀하신다. 부득이한 경우 방편이 필요하면 권승을 말씀하시기도 한다. 근기가 하열한 이는 삼승 설법이 마음에 칭합한다. 유정은 불성이 있어서 성불할 수 있고, 무정은 불성이 없어서 성불할 수 없다는 견해도 또한 그러하다. 이에 혜충국사는 여러 경전을 인용하여 무정에도 불성이 있음을 고구정녕하게 밝혀준다.
선객이 사뢰었다. “무정도 이미 마음이 있다면 또한 설법도 알아듣습니까? 알아듣지 못합니까?”(禪客曰 “無情旣有心, 還解說法也無?”)
해설: 유정은 무정과 대응하고, 범부는 부처와 대응한다. 부처님도 화엄을 상설常說하고, 무정도 설법을 상설한다.
앙산스님이 누워계시는데 한 스님이 물었다.(師臥次 僧問云)
“법신도 설법할 줄 압니까? 알지 못합니까?”(法身還解說法也無)
“나는 말할 수 없다. 다른 어떤 사람은 말할 수 있다.”(我說不得 別有一人說得)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어느 곳에 있습니까?”(說得底人在甚麼處)
스님은 목침을 내밀었다.(師推出枕子)
국사가 말씀하셨다. “그들은 치열하게 설하고, 영원히 설하며, 늘 설하되, 잠시도 쉬는 때가 없느니라.”(師曰 “他熾然說, 恒說常說, 無有間歇.”)
해설: 무정불성과 무정성불 또는 무정설법은 인과와 체용을 이룬다. 위 ‘조백대사의 무정설법’에, “예컨대 화엄경 중에는 유정과 비정이 없고, 정여비정이 모두 일체지지경계이며, 일체 산하와 수목이 모두 불보살의 몸을 나투고 설법할 수 있다.”라는 문장이 있고, 또 위에서, “비정성불 초목성불 또는 무정유성이라 말하기도 하며, 길게는 초목국토실개성불이라 말하기도 한다.”라는 글도 있다. 이를 의거하면 무정설법도 그 유래가 자못 길다.
선객이 사뢰었다. “저는 무엇 때문에 듣지 못합니까?”(禪客曰 “某甲爲什摩不聞?”)
국사가 말씀하셨다. “그대가 스스로 듣지 못하니, 그들이 무정설법을 들으시는 것을 방애妨碍할 수 없느니라.”(師曰 “汝自不聞, 不可妨他有聞者.”)
해설: 이 본은 조당집을 의거했는데, 다른 본은 대부분 유有자가 없다. “그들이 무정설법을 듣는 것을 방애할 수 없다.”(不可妨他聞者) 경덕전등록에는 전자만 있고 후자는 없다. 이 유有자의 용법에는 ‘일부 동사의 앞에 쓰여 존경 또는 겸양을 나타낸다.’ 그래서 유자가 있으면 더 고품격의 언사가 된다.
방해하다(헤살을 놓아 일이 제대로 되지 못하게 하다)와 방애하다(짓궂게 훼방을 놓아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하게 만들다)에는 그 뜻에 차이가 없다. 여기에서 방妨자는 ‘지장이 있다’는 뜻으로 쓰였다. 불방不妨은 무방無妨과 같다. 중간에 가可자가 들어가서 해석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전체 대의는 “그대가 스스로 듣지 못한다고 하여 그들도 또한 듣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그들이 무정설법을 들으시는 것을 지장이 있게 할 수 없다, 또는 방애할 수 없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선객이 올려서 사뢰었다. “어떤 사람이 들을 수 있습니까?”(進曰 “誰人得聞?”)
국사가 말씀하셨다. “모든 성인이 들을 수 있느니라.”(師曰 “諸聖得聞.”)
해설: 경덕전등록에는 성聖자가 불佛자로 바뀌어 제불득문諸佛得聞이라 되어 있다. 청문할 수 있는 자격이 십지보살에서 불지로 격상된 것이다. 좀 심한 듯하다.
선객이 사뢰었다. “이와 같다면 중생은 응당 들을 자격이 없겠습니다.”(禪客曰 “與摩卽衆生應無分也.”)
국사가 말씀하셨다. “나는 중생을 위하여 설하지, 그러한 모든 성인을 위해서 설할 수는 없느니라.”(師曰 “我爲衆生說, 不可爲他諸聖說.”)
선객이 사뢰었다. “저는 귀머거리나 소경처럼 우매하여 무정물의 설법을 듣지 못합니다. 화상께서는 인간과 하늘의 스승이시라 반야바라밀다를 설하시니, 무정설법을 들으실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禪客曰 “某甲愚昧聾瞽, 不聞無情說法; 和尙是爲人天師, 說般若波羅蜜多, 得聞無情說法不?”)
국사가 말씀하셨다. “나도 또한 듣지 못하느니라.”(師曰 “我亦不聞.”)
해설: 겸사이다.
선객이 올려서 사뢰었다. “화상께서는 무엇 때문에 듣지 못하십니까?”(進曰 “和尙爲什摩不聞?”)
국사가 말씀하셨다. “다행하게도 내가 무정설법을 듣지 못하는구나. 내가 만일 무정설법을 듣는다면 내가 바로 모든 성인과 동등할 것이다. 그대가 어떻게 나를 볼 수 있으며, 틈타서 나의 설법을 듣겠느냐?”(師曰 “賴我不聞無情說法. 我若聞無情說法, 我則同於諸聖. 汝若爲得見我, 及聞我說法乎?”)
선객이 사뢰었다. “모든 중생은 구경에 이르러도 또한 무정설법을 들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禪客曰 “一切衆生, 畢竟還得聞無情說法不?”)
국사가 말씀하셨다. “중생이 만일 듣는다면 곧 중생이 아니니라.”(師曰 “衆生若聞, 卽非衆生.”)
선객이 사뢰었다. “무정설법은 또한 전거가 있습니까? 없습니까?”(禪客曰 “無情說法, 還有典據也無?”)
국사가 말씀하셨다. “말이 전고典故와 연관되지 않으면 군자가 말한 것이 아니니라. 그대는 어찌 보지 못했는가? 아미타경에 말씀하시기를, ‘물이나 새와 수풀도 모두 부처님을 생각하고, 법을 생각하며, 스님들을 생각한다.’라고 하였느니라. 새는 유정이지만 물과 나무는 어찌 유정이겠는가? 또 화엄경에 말씀하시기를, ‘찰토가 설법하고, 중생이 설법하며, 삼세의 일체가 설법한다.’라고 하였느니라. 중생은 유정이지만 찰토가 어찌 유정이겠는가?”(師曰 “言不關典, 非君子之所談. 汝豈不見彌陀經云 ‘水鳥樹林, 皆是念佛念法念僧.’ 鳥是有情, 水及樹豈是有情乎? 又華嚴經云 刹說衆生說, 三世一切說. 衆生是有情, 刹豈是有情乎?”)
해설: “말이 전고典故와 연관되지 않으면 군자가 부끄러워해야 할 바이다.”(言不關典 君子所慚)라는 명구가 있다. “찰토가 설법하고” 이하는 60권 화엄경에 있다. 부처님이 설법하고 보살이 설법하며, 찰토가 설법하고 중생이 설법하며, 삼세 일체가 설법하는데, 보살이 분별하여 아느니라.(佛說菩薩說 刹說衆生說 三世一切說 菩薩分別知)
선객이 사뢰었다. “이미 무정도 불성이 있다면야 유정은 또 어떠한지 미심쩍습니다.”(客曰 “旣是無情有佛性, 未審有情又如何?”)
국사가 말씀하셨다. “무정도 오히려 이러한데, 어찌 하물며 유정이랴.”(師曰 “無情尙爾, 豈況有情乎?”)
선객이 사뢰었다. “만일 유정과 무정이 모두 불성이 있다면, 유정을 죽여서 그 몸의 일부분을 먹으면 곧 원죄怨罪를 결성하여 앙갚음할 것이지만, 무정을 손상시켜서 오곡이나 채소 과일 밤 따위 물건을 먹으면 죄가 되어 상호간에 보복한다고 듣지는 못했습니다.”(禪客曰 “若有情無情俱有佛性, 殺有情而食噉其身分, 卽結於罪怨相報. 損害無情, 食噉五穀菜蔬果栗等物, 不聞有罪互相讎報也.”)
국사가 말씀하셨다. “유정은 정보인지라 비롯함이 없는 겁으로부터 내려오면서 허망과 전도로 나와 나의 것으로 계산하여 마음속에 품고 있어서 원한이 맺히면 곧 원한의 보응이 있느니라. 무정은 의보인지라 전도되어 원한을 맺는 마음이 없으며, 그래서 보복이 있다고 말하지는 않느니라.”(師曰 “有情是正報, 從無始劫來, 虛妄顚倒, 計我我所而懷, 結恨卽有怨報. 無情是依報, 無顚倒結恨心, 所以不言有報.”)
해설: 위에서 정보와 의보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했다.
선객이 사뢰었다. “경교經敎 중에 단지 유정만은 정각을 이룬다는 수기를 받고 미래세에 부처가 되면 아무개 등이라 호칭한다는 것은 보았을 뿐이고, 무정이 정각을 이룬다는 수기를 받고 부처가 된다는 국토를 보지 못했습니다. 예를 들면 현겁의 1천 부처님 중에 어느 분이 무정으로 성불하셨는지를 청컨대 제시하여주시기 바랍니다.”(客曰 “經敎中但見有情授三菩提記, 於未來世, 而得作佛. 號曰某等, 不見無情授菩提記, 作佛之處, 只如賢劫千佛中, 阿那個是無情成佛, 請爲示之.”)
국사가 말씀하셨다. “내가 이제 그대에게 묻노라. 비유하면 황태자가 왕위를 물려받을 때에 혹은 태자 일신만 왕위를 받게 되는가? 그렇지 않으면 국경선 안에 하나하나를 다 받게 되는가?”(師曰 “我今問汝: 譬如皇太子受王位時, 爲復太子一身受於王位, 爲復國界一一受也?”)
선객이 대응하여 사뢰었다. “단지 태자로 하여금 왕위를 받게 하면 국토 안의 모든 것은 저절로 왕에게 예속합니다. 어찌 따로 받는다고 생각하겠습니까?”(對曰 “但令太子受得王位, 國土一切自屬於王, 寧當別受乎?”)
국사가 말씀하셨다. “지금의 이것도 또한 그러하니라. 다만 유정으로 하여금 부처가 된다는 수기를 받게 하는 때에는 삼천대천세계의 일체 국토가 모두 비로자나불의 불신佛身에 예속한다. 불신 밖에 어찌 다시 무정이 있어서 수기를 받는다고 할 수 있으랴.”(師曰 “今此亦爾. 但令有情授記作佛之時, 三千大千世界, 一切國土, 盡屬毗盧遮那佛身. 佛身之外, 那得更有無情而得授記耶?”)
선객이 사뢰었다. “일체 대지가 이미 불신이라면 일체 중생이 불신 위에서 생활하며 대소변으로 불신을 더럽히고, 또 구멍을 뚫으며 불신을 짓밟으니, 어찌 죄가 없겠습니까?”(客曰 “一切大地旣是佛身, 一切衆生居佛身上, 便利穢汙佛身, 穿鑿踐踏佛身, 豈無罪乎?”)
국사가 말씀하셨다. “일체 중생은 전체가 불신인데, 누가 죄가 되겠느냐?”(師曰 “一切衆生全是佛身, 誰爲罪乎?”)
선객이 사뢰었다. “불신은 함이 없고 걸릴 것이 없습니다. 이제 함이 있고 장애가 있는 것으로 불신을 삼는다면, 어찌 성지와 어긋나지 않겠습니까?”(客曰 “佛身無爲, 無所罣礙. 今以有爲質礙之物而作佛身, 豈不乖於聖旨乎?”)
국사가 말씀하셨다. “그대는 지금 보지 못하는가? 대품경에 말씀하시기를, ‘유위를 떠나서 무위를 말하지 말라. 또 무위를 떠나서 유위를 말하지도 말라.’라고 하셨느니라. 그대는 색이 바로 공인 줄을 믿지 않는가?”(師曰 “汝今不見大品經曰 ‘不可離有爲而說無爲, 又不可離無爲而說有爲.’ 汝信色是空不?”)
선객이 대응하여 사뢰었다. “부처님의 진실한 말씀을 어찌 감히 믿지 않겠습니까?”(對曰 “佛之誠言, 那敢不信?”)
국사가 말씀하셨다. “색이 이미 공이라면 어찌 걸림이 있겠는가?”(師曰 “色旣是空, 寧有罣礙?”)
선객이 또 물었다. “중생이 부처와 이미 동일한 자라면 단지 한 부처님만 수행해도 일체 중생은 응당 일시에 해탈할 것인데, 지금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동일하다는 뜻이 어디에 있겠습니까?”(又問: “衆生與佛旣同者, 只用一佛修行, 一切衆生應一時解脫. 今見不爾, 同義何在?”)
국사가 말씀하셨다. “그대는 화엄경 가운데 육상의를 보지 못했는가? 동상 가운데 이상이 있고, 이상 가운데 동상이 있으며, 성상 가운데 괴상이 있고, 괴상 가운데 성상이 있으며, 총상 가운데 별상이 있고, 별상 가운데 총상이 있다. 중생과 부처가 비록 동일한 불성이지만, 제각기 스스로 수행해서 스스로 증득하는 것도 무방하다. 남이 밥을 먹는 것을 보아도 끝내 자기가 배부르지는 않느니라.”(師曰 “汝不見華嚴經中六相義, 同中有異, 異中有同; 成中有壞, 壞中有成; 總中有別, 別中有總. 衆生與佛雖同一性, 不妨各各自修自得. 看他人食, 終自不飽.”)
선객이 또 물었다. “고덕이 말씀하시기를, ‘푸르고 푸른 청죽은 모두 진여이고, 울울창창한 국화는 반야가 아님이 없다.’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칭찬하지 않고 삿된 말이라 하고, 또 어떤 사람은 확신하며 불가사의하다고 말합니다.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又問: “古德曰 ‘靑靑翠竹, 盡是眞如; 鬱鬱黃花, 無非般若.’ 有人不許, 是邪說; 亦有人信, 言不可思議. 不知若爲?”)
국사가 말씀하셨다. “이는 어쩌면 보현이나 문수와 같은 대인의 경계이며, 모든 범부나 소인이 믿고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모두는 대승요의경의 뜻과 부합하나니, 그러므로 화엄경에 말씀하시기를, ‘불신이 법계에 충만하여 두루 일체 중생 앞에 나타나도다. 인연 따라 감응하여 두루 이르지 않음이 없지만 항상 여기 보리좌에 안좌하셨느니라.’라고 하셨다. 청죽이 이미 법계를 벗어나지 않으니 어찌 법신이 아니겠는가? 또 마하반야경에 말씀하시기를, ‘색이 갓이 없기 때문에 반야도 갓이 없느니라.’라고 하였다. 국화도 이미 색상을 벗어나지 않으니 어찌 반야가 아니겠는가? 이는 심원한 말씀이다. 성찰하지 못하는 이는 염두에 두기가 어렵도다.”(師曰 “此蓋是普賢文殊大人之境界, 非諸凡小而能信受. 皆與大乘了義經意合. 故華嚴經云 ‘佛身充滿於法界, 普現一切群生前, 隨緣赴感靡不周, 而恒處此菩提座.’ 翠竹旣不出於法界, 豈非法身乎? 又摩訶般若經曰 ‘色無邊, 故般若無邊.’ 黃花旣不越於色, 豈非般若乎? 此深遠之言, 不省者難爲措意.”)
선객이 또 물었다. “어떤 선지식이 말씀하시기를, ‘도를 배우는 사람은 다만 본심을 알기만 하면 죽음이 닥쳐왔을 때에 한쪽으로 껍질을 훌쩍 벗어 던지고, 영대의 각성이 현저하게 떠나는 것을 일컬어 해탈이라 한다.’라고 합니다. 이것은 또 어떠합니까?”(又問: “有善知識言, 學道人但識得本心了, 無常來時, 拋却殼漏子一邊著. 靈臺覺性, 迥然而去, 名爲解脫, 此復若爲?”)
국사가 말씀하셨다. “이것은 오히려 이승이나 외도의 양지量知를 여의지 못했다. 이승의 수행인은 모두 유위 생사를 싫어하여 여의려 하고 무여열반을 기뻐하고 좋아한다. 노자도 또한 말하기를, ‘나에게 큰 걱정이 있으니, 내가 몸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고, 명제冥諦를 좋아하여 지도라 여기고 마침내 명제에 나아갔다. 수다원 행인은 8만 겁, 사다함 행인行人은 6만 겁, 아나함 행인은 4만 겁, 아라한 행인은 2만 겁, 벽지불 행인은 1만 겁을 선정에 머무르고, 외도도 또한 8만 대겁을 비상비비상천에 머문다. 이승은 그 겁이 차면 오히려 회심하여 대승으로 회향하는데, 외도는 그 겁이 차도 생사윤회를 면치 못하느니라.”(師曰 “此猶未離二乘外道之量. 二乘之人, 皆猒離有爲生死, 忻樂無餘涅槃. 老子亦曰 ‘吾有大患, 爲吾有身.’ 忻樂冥諦, 而爲至道, 乃趣冥諦. 須陀洹人八萬劫, 斯陀含人六萬劫, 阿那含人四萬劫, 阿羅漢人二萬劫, 辟支佛十千劫, 住於定中. 外道亦八萬大劫. 住非想非非想天, 二乘劫滿, 猶迴心向大, 外道劫滿, 不免輪迴生死.”)
해설: 노자도 명제를 좋아하여 지도라 여기고 마침내 명제에 나아갔다. 명언이다. 명언 중에 명언이다. 제자백가의 위상을 정확히 짚어주었다. 초모랑마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인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히말라야 산군에 있기 때문이다. 내가 초모랑마를 올라가지는 못했지만 바로 앞에서 보기는 했다. 안나푸르나는 멀리서도 보이지만 초모랑마는 가까이 다가서야 비로소 얼굴을 드러낸다. 마치 수줍은 새색시 같다. 암산이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부처님 당시 96종 외도들의 경지는 제자백가의 사상보다 훨씬 높다. 그 위에 불교가 있다. 마치 초모랑마처럼. 유불선儒彿仙은 같지 않다. 삼교논형三敎論衡의 역사도 유구하고 강론도 치열했다. 한퇴지의 논불골표論佛骨表와 장상영의 호법론護法論이 특히 유명하지만, 한퇴지도 결국은 태전화상에 귀의했다. 불교와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없다.
선객이 또 물었다. “모든 사람의 불성은 혹은 한 종류가 됩니까? 그렇지 않으면 다른 종류도 있습니까?”(又問: “一切人佛性, 爲復一種, 爲復有別?”)
국사가 말씀하셨다. “한 종류일 수는 없느니라.”(師曰 “不得一種.”)
선객이 올려서 사뢰었다. “어째서 다른 종류가 있습니까?”(進曰 “云何有別.”)
국사가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의 불성은 전혀 생멸하지 않고, 어떤 사람의 불성은 반은 생멸하되 반은 생멸하지 않느니라.”(師曰 “有人佛性, 全不生滅, 有人佛性, 半生滅半不生滅.”)
선객이 올려서 사뢰었다. “어떤 사람의 불성은 전부 생멸하지 않고, 어떤 사람의 불성은 반은 생멸하고 반은 생멸하지 않습니까?”(進曰 “誰人佛性, 全不生滅? 誰人佛性, 半生滅半不生滅耶?”)
국사가 말씀하셨다. “내가 있는 여기 불성은 전혀 생멸하지 않지만, 저기 남방의 불성은 반은 생멸하고 반은 생멸하지 않느니라.”(師曰 “我此間佛性, 全不生滅, 彼南方佛性, 半生滅半不生滅.”)
선객이 올려서 사뢰었다. “화상의 불성은 어찌하여 전혀 생멸하지 않고, 남방의 불성은 어찌하여 반은 생멸하고 반은 생멸하지 않습니까?”(進曰 “和尙佛性, 若爲全不生滅? 南方佛性, 若爲半生滅半不生滅?”)
국사가 말씀하셨다. “나의 불성은 몸과 마음이 한결같아서 몸 밖에 다른 것이 없나니, 그래서 전혀 생멸하지 않느니라. 남방의 불성은 몸이 무상하고 심성은 상주한다고 하니, 그래서 반은 생멸하고 반은 생멸하지 않는다고 하느니라.”(師曰 “我之佛性, 身心一如, 身外無餘, 所以全不生滅. 南方佛性, 身是無常, 心性是常, 所以半生滅半不生滅也.”)
해설: 이 문단과 관련한 해설은 여기서 생략한다. 아래 ‘7. 보조국사의 육조법보단경 발문’을 보시라.
선객이 올려서 사뢰었다. “화상의 몸은 색신인데 어찌 법신과 동일하게 생멸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進曰 “和尙身是色身, 豈得便同法身不生滅耶?”)
국사가 말씀하셨다. “그대는 지금 어찌하여 사도에 들어가려고 하느냐?”(師曰 “汝今那得入邪道乎?”)
선객이 사뢰었다. “제가 조만간에 사도에 들어가겠습니까?”(禪客曰 “某甲早晚入於邪道也?”)
국사가 말씀하셨다. “금강경에 말씀하시기를, ‘만일 색으로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 나를 구하면, 이 사람은 사도를 행하나니, 여래를 보지 못하느니라.’라고 하셨다. 그대가 이미 안색顔色을 바꾸고 나를 보니, 어찌 사도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냐?”(師曰 “金剛經曰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汝旣作色見我, 豈非入邪道乎?”)
그리하여 선객이 절을 올리고 찬탄하며 사뢰었다. “화상의 이러한 설법은 사법으로도 극진에 이르지 않음이 없고, 이법으로도 주도면밀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제가 만일 화상을 뵙지 못했다면 일생을 헛되이 보낼 뻔했습니다.”(於是禪客作禮而嘆曰 “和尙此說, 事無不盡, 理無不周. 某甲若不遇和尙, 空過一生矣.”)
해설: 세간에서 말을 잘하는 것에는 시비가 있다. 그러나 출세간에서 말을 잘하는 것은 좋게 본다. 지혜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을 제외하면 문수보살이 으뜸이다. 물론 묘각보살의 지위에 있는 분들이야 우열을 가릴 수 없기는 하다. 어떻든 변재로 말하면 유마거사도 빼어놓을 수는 없다. 말을 잘한다는 것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탄복하게 하는 것이고, 입을 더 이상 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를 결석結舌이라 말하기도 한다. 혜충국사도 또한 변재가 빼어나다. 그 명백한 지혜에 탄복을 금치 못한다.
7. 보조국사의 육조법보단경 발문
이 글은 혜충국사의 말씀 중에, “남방의 불성은 몸이 무상하고 심성은 상주한다고 하니, 그래서 반은 생멸하고 반은 생멸하지 않는다고 하느니라.”라는 글에 대하여 해설문으로 쓴 것이다. 보조국사의 발문에 의하면 최초 법보단경에는, “몸은 무상하고 심성은 상주한다.”라는 구절이 있었는데 이후 수정 또는 보완 본에는 사라졌던 것 같기도 하다. 발문은 아래와 같다.
육조 법보단경 발문
해동 조계산 사문 지눌이 찬술하다(六祖法寶壇經跋 海東曺溪山沙門 知訥撰)
태화 7년(1207년, 고려 희종 3년) 12월 어느 날 수선사 안에 도인 담묵이 한권의 글을 가지고 조실祖室 방에 들어와서 말한다. “요즈음 법보기단경을 얻었습니다. 거듭 판각하여 널리 전하고자 하오니, 스님께서는 응당 발문을 써주셔야겠습니다.”(泰和七年十二月日 社內道人湛默持一卷文 到室中曰 近得法寶記壇經 將重刻之 以廣其傳 師其跋之)
내가 흔연히 대꾸하여 말했다. “이는 내가 평생 신봉하며 수학하는 귀감이다. 자네가 조판하고 인쇄하여 넓게 펼치며, 후세까지 유통시키겠다고 하니, 노승의 마음이 매우 흐뭇하도다. 그러나 여기에 일단의 의혹이 있다. 남양혜충 국사께서 선객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있는 여기는 몸과 마음이 일여하여 마음 밖에는 다른 것이 없나니, 그래서 전혀 생멸하지 않느니라. 너희 남방은 몸은 무상하고 신성은 상주한다고 하니, 그래서 절반은 생멸하고 절반은 생멸하지 않는다.’라고 하셨다.”(予欣然對曰 此予平生宗承修學之龜鑑也 子其彫印流行 以壽後世 甚愜老僧意 然此有一段疑焉 南陽忠國師謂禪客曰 我此間身心一如 心外無餘 所以全不生滅 汝南方 身是無常 神性是常 所以半生半滅 半不生滅)
“또 말씀하시기를, ‘내가 행각할 때와 비교하면 이러한 정경을 자주 보는데, 근래 더욱 치성하구나.’라고 하시며, 저 단경을 들고 말씀하시기를, ‘이 남방의 종지에 조잡粗雜한 담론談論을 보태서 섞어버리고, 성인의 뜻을 깎아 내며, 후학을 혹란하게 하였느니라.’라고 하셨다.”(又曰 吾比遊方 多見此色 近尤盛矣 把他壇經云 是南方宗旨 添糅鄙談 削除聖意 惑亂後徒)
“자네가 지금 얻은 본은 바로 원문이고, 그렇게 경망하게 쓴 것이 아니니, 국사의 책망은 면할 수 있겠다. 그러나 본문을 세밀하게 설명하자면 또한 몸은 생멸하지만 마음은 생멸하지 않는다는 뜻이 있다. 예컨대 ‘진여자성은 생각을 일으키지만, 눈이나 귀 코 혀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 것과 같으니, 바로 이것이 국사께서 책망할 만한 뜻이다. 수심하는 이는 여기에 이르러 의념疑念이 없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화해해야 그들로 하여금 깊이 믿게 하며, 또한 성교聖敎를 유통시킬 수 있겠는가?”(子今所得 正是本文 非其沾記 可免國師所訶 然細詳本文 亦有身生滅心不生滅之義 如云眞如性自起念 非眼耳鼻舌能念等 正是國師所訶之義 修心者到此 不無疑念 如何逍遣 令其深信 亦令聖敎流通耶)
해설: 단경에는 진여성자기념眞如性自起念 중에 성자性自가 자성自性으로 되어 있다. 뜻은 크게 차이가 없다. 몸은 생멸한다는 것은 몸이 무상하다는 뜻이고, 마음은 생멸하지 않는다는 것은 마음이 상주하여 불멸한다는 뜻이다. “진여자성은 생각을 일으키지만,”(眞如性自起念)은 생각의 주체가 진여자성 곧 마음이고, “눈이나 귀 코 혀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非眼耳鼻舌能念)는 육근 곧 몸은 생각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능소가 분명하여 대대가 끊어지지 못했다. 이 때문에 혜충국사의 책망을 들을 만하다고 보조국사께서 점검하신 것이다. 단경의 관련 문헌은 아래와 같다.
선지식이여, 어찌 무념을 세워 종취로 삼았는가? 다만 입으로만 견성했다고 말하기 때문에 미혹한 사람은 경계 상에서 망념이 있고, 망념에서 문득 사견을 일으키니, 일체 번뇌 망상이 이로부터 생긴다. 자성은 본래 한 법도 얻을 수 없지만, 만일 얻을 것이 있다고 하며 망령되게 화복을 말하면, 곧 이것이 번뇌의 사견이다. 이 때문에 이 법문은 무념을 세워 종취로 삼는다. 선지식이여, 무념의 무無 자는 어떤 일이 없는가? 무념의 념念 자는 어떤 것을 생각하는가? 없을 무자는 두 가지 상이 없으니 모든 번뇌의 마음이 없는 것이고, 생각 념자는 진여본성을 생각하는 것이다. 진여는 곧 생각의 본체이고, 생각은 바로 진여의 묘용이다. 진여자성은 생각을 일으키는데, 눈이나 귀 코 혀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진여는 자성이 있기 때문에 생각을 일으키는데, 진여가 만일 자성이 없다면 눈과 귀에 색상과 소리는 바로 그때 곧 없어질 것이다. 선지식이여, 진여자성이 생각을 일으키니, 육근이 비록 견문각지하는 육식이 있어도 일만 경계에 물들지 않고 진성이 항상 자재한다. 이 때문에 경에 이르시기를, “법왕은 모든 법상을 잘 분별할 수 있지만, 제일의에는 부동하시니라.”라고 한 것이다.(善知識 云何立無念爲宗 只緣口說見性 迷人於境上有念 念上便起邪見 一切塵勞妄想從此而生 自性本無一法可得 若有所得 妄說禍福 即是塵勞邪見 故此法門立無念爲宗 善知識 無者無何事 念者念何物 無者無二相 無諸塵勞之心 念者念眞如本性 眞如即是念之體 念即是眞如之用 眞如自性起念 非眼耳鼻舌能念 眞如有性 所以起念 眞如若無 眼耳色聲當時即壞 善知識 眞如自性起念 六根雖有見聞覺知 不染萬境 而眞性常自在 故經云 能善分別諸法相 於第一義而不動)
담묵이 말했다. “그러하다면 회통시킬 수 있는 말씀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默曰 然則會通之義 可得聞乎)
내가 말했다. “노승이 지난날 이 경을 의지하고 마음으로 완미翫味하며 싫어함이 없었으며, 이 때문에 훌륭한 방편을 쓴 조사의 마음을 얻었다. 무엇인가? 조사는 회양이나 행사 등을 위하여 심인을 밀전하시고, 따로 위거 등 도속道俗 천여 명을 위하여 상이 없는 심지계心地戒를 설하셨다. 이 때문에 과감하게 진여만 담론하여 세속을 거슬러서도 안 되고, 또 줄기차게 세속을 수순하여 진여를 위배해서도 안 되며, 이 때문에 절반은 타인의 뜻을 따르고 절반은 자신의 증득을 따라서, ‘진여는 생각을 일으키지만, 눈이나 귀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등의 말을 한 것이다. 모름지기 도속 등으로 하여금 먼저 반드시 신체 가운데 보고 듣는 자성을 반관하여 진여를 깨닫게 하며, 연후에 바야흐로 조사의 몸과 마음이 일여한 밀의密意를 볼 수 있게 하셨을 따름이다.”(予曰 老僧曩者依此經 心翫味忘斁 故得祖師善權之意 何者 祖師爲懷讓行思等 密傳心印 外爲韋據等道俗千餘人 說無相心地戒 故不可以一往談眞而逆俗 又不可一往順俗而違眞 故半隨他意 半稱自證 說眞如起念 非眼耳能念等語 要令道俗等 先須返觀身中見聞之性 了達眞如 然後方見 祖師身心一如之密意耳)
“만일 이와 같은 훌륭한 방편이 없이 곧바로 몸과 마음이 일여하다고 말한다면, 눈을 반연하여 몸의 생멸만 보기 때문에 출가 수도자도 오히려 의혹이 생기거늘, 하물며 천여 명의 속사俗士들이야 어떻게 믿고 받아들이겠는가? 이것이 바로 조사께서 근기를 따라 유인하는 말씀이시다.”(若無如是善權 直說身心一如 則緣目覩身生滅故 出家修道者 尙生疑惑 況千人俗士 如何信受 是乃祖師隨機誘引之說也)
“혜충국사의 책망으로 남방 불법의 병통을 혁파하시니, 무너진 기강을 재정비하고, 성인의 뜻을 드러나게 하며, 감히 갚지 못할 은혜를 갚았다고 말할 만하다. 우리들 후손은 이미 밀전을 몸소 이어받지 못하였으니, 마땅히 이와 같은 현전문顯傳門의 성실한 말씀에 의지하고, 자기의 마음이 본래 부처임을 반조하며, 단견 상견에 떨어지지 않으면 허물을 여의었다고 할 만하다.”(忠國師訶破南方佛法之病 可謂再整頹綱 扶現聖意 堪報不報之恩 我等雲孫 旣未親承密傳 當依如此 顯傳門誠實之語 返照自心本來是佛 不落斷常 可爲離過矣)
“만일 마음은 생멸하지 않는다고 보고 몸은 생멸이 있다고 보면, 곧 법에서 두 가지 소견을 내는 것이니, 성상을 융회한 이가 아니니라. 이러므로 알아라. 이 한 권의 영문靈文을 의지하여 뜻을 알고 참상叅詳하면, 아승지겁을 지내지 않고 신속하게 보리를 증득할 것이다. 조판 인쇄하여 넓게 펼쳐서 큰 이익을 짓겠느냐?”(若觀心不生滅 而見身有生滅 則於法上 以生二見 非性相融會者也 是知依此一卷靈文 得意叅詳 則不歷僧祇速證菩提 可不彫印流行 作大利益耶)
담묵이 말했다. “예, 그러하겠습니다.”(默曰唯唯)
이에 글을 썼느니라.(於是乎書)
해설: 부처님은 신통과 설통이 자재하여 불교의 진면목을 한 글자로 설파할 수도 있고, 두 글자, 또는 세 글자 내지 열 글자로 적나라하게 드러낼 수도 있다. 보조국사는 불지 중에 차별지 양설신공兩舌神功을 얻으셨다. 양설은 십악중죄 중에 하나이지만, 이 양설신공 어느 곳에 티끌만큼이라도 허물이 있는가? 상하 치간齒間 중에서 한없는 광명을 놓는구나.
8. 결론
무정성불이나 무정설법은 다르지 않다. 성불이 체가 되면 설법은 용이 된다. 체는 본체 또는 주체를 말하고, 용은 작용을 말하는데, 성불의 그 본체가 미묘난사微妙難思하게 설법으로 작용하여 묘용이라 말하기도 한다.
일불승一佛乘 화엄경은 부사의한 해탈경계이다. 중생의 지견知見은 전도되었다고 한다. 이 전도된 지견을 다시 뒤집으면 불지견이 된다. 지견을 견문각지見聞覺知로 볼 수도 있다. 중생의 견문각지를 뒤집으면 불견佛見이 되고, 불문佛聞 불각佛覺 그리고 불지佛知가 된다.
범부는 만사가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고 보며, 과거가 있고 현재가 있다고 인식하며, 몸은 생사가 있고 마음은 생사가 없을 수도 있다고 믿는다. 화엄의 보살은 십신만심十信滿心과 경계선인 초발심주初發心住에 견도한다. 초발심시변정각이다. 견도가 바로 정각이다. 견도하면 무엇을 보는가? 정각하면 무엇을 깨닫는가? 나와 남, 그리고 유정과 무정 등 일체 정여비정情與非情이 시종始終이 없고, 고금古今이 없으며, 본래 그대로 부처인 줄을 보고 또 깨닫는 것이니, 신심身心 성상性相이 본래 부처이기 때문이다.
화엄보살은 초주가 곧 십지이고, 초주가 바로 불지이다. 어째서 그러한가? 세간의 신하는 최초 구품에서 계위階位가 일품에 이르러도 단지 신하가 될 뿐이고, 왕이란 칭호를 얻지 못한다. 만일 왕이라 호칭하지 못하면 응당 권교인 줄 알아야 한다. 권교보살은 오위의 모든 지위를 차제로 안립하고, 낱낱 지위를 올라가는데, 삼아승지 겁을 가득 채워도 여전히 보살이라 불승이란 명칭을 쓰지 못한다. 원교일승보살은 그러하지 않다. 태자가 왕위에 올라가는 것처럼, 십신만심의 범부 지위에서 단박에 불지에 올라간다.
이 글은 “조백대사와 혜충국사의 무정설법無情說法”이라 제명했다. 또 제명에 상응하는 여러 편의 글을 인용했다. 달마대사를 비조로 삼아 선종이라 말하는데, 선종도 시대에 따라 법을 쓰는 양상이 다른 듯하다. 시대를 딱 잡아서 단정할 수는 없지만, 나는 삼분하고자 한다. 초조부터 7대까지를 초기로 보고, 석두 마조를 위시한 8대부터 오종이 형성되기 이전을 중기로 보며, 오종 성립 이후를 말기로 보고자 한다. 선종의 황금기는 마조 남전 조주 삼대의 시대이다. 그 이후는 쇠퇴기이다. 초기 조사의 법문을 보면 일불승 원교와 다른 점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나는 화엄의 문수 보현 양사를 스승으로 삼고 있지만, 굳이 정법 상법 말법 시대의 조사 중에서 스승을 찾자면 선종의 초기 조사를 스승으로 삼고자 한다.
2021년 8월 24일 길상묘덕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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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내용감사합니다.
중생의 업장이
8만4천가지나 되기 때문에
그 처방전으로
8만4천가지 법문이 있다...
그 법문의 행방이 묘연해보이지만,
영가대사 중도가에 이르기를
무멸실성이 곧 불성이고
활화공신이 바로법신이다.
무학대사가 이르기를
부처눈으로 보면 모두 부처이고
돼지눈으로 보면 모두 돼지이다.
나귀가 우물의 부처를 처다보고
우물이 나귀의 여래를 처다본다.
달이 우물을 처다보고
우물이 달을 처다본다.
허공의 달이 井中月을 처다보고
井中月이 허공의 달을 처다본다.
비로자나불 진법신을
허공에 비유한 것이다.
ㆍ나의 견해ㆍ
부처의 법을
허공에 비유하고
서로 처다본다고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사람의 마음이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나타난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말씀하신 것인데
부처님 법문중에
간접적인 말씀이 필요할때는 비유적으로
인연이 닿은 사람에게는
거울에 비친모습대로
생대에게 맞게 직접적인 화술을
쓰십니다.
금강경에 이르기를
"모든 相이 相이 아님을 알고
유란것이 유가 아님을 알면
바로 즉견 여래이다."
인연있는 분들은
여래를 만나게되리라.
여래는 부처중의 부처라고합니다. 좋은 내용읽고 나의견해도
올려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