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십이처계十二處界와 무정설법無情說法
무정설법은 부사의한 해탈경계이며, 일체 공안의 귀결처歸結處이다. 그래서 “조백대사와 혜충국사의 무정설법” 편에 연이어서 “십이처계와 무정설법”이란 제명으로 또다시 글을 쓴다. 6근과 6진을 12처라 말하고, 6근과 6진 6식을 18계라 말한다. 6근과 6진은 처와 계를 공유하기 때문에 제명에서 12처계라 명명한 것이다. 무정설법의 주체가 바로 12처계이다.
1. 다계경多界經의 18계와 12처
아함부에 다계경이 있다. 전체가 계법界法과 처법處法 연생법緣生法 처비처법處非處法 등 사품四品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사품법문경四品法門經이라 말하고, 또는 법경경法鏡經 감로고경甘露鼓經이라 말하기도 한다. 이 4품의 법문을 알면 지혜로운 사람이라 말하고, 이를 알지 못하면 어리석은 사람이라 말한다.
이 경에 의하면, 안계眼界와 색계色界 안식계眼識界, 이계耳界와 성계聲界 이식계耳識界, 비계鼻界와 향계香界 비식계鼻識界, 설계舌界와 미계味界 설식계舌識界, 신계身界와 촉계觸界 신촉계身觸界, 의계意界와 법계法界 의식계意識界를 18계라 말한다. 이 밖에 지계地界와 수계水界 화계火界 풍계風界 공계空界 식계識界 등 6계가 있고, 욕계欲界와 에계恚界 해계害界 무욕계無欲界 무에계無恚界 무해계無害界 등 6계가 있으며, 낙계와樂界 고계苦界 희계喜界 우계憂界 사계捨界 무명계無明界 등 6계가 있고, 각계覺界와 상계想界 행계行界 식계識界 등 4계가 있으며, 욕계欲界와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 등 3계가 있고, 색계色界와 무색계無色界 멸계滅界 등 3계가 있으며, 과거계過去界와 미래계未來界 현재계現在界 등 3계가 있고, 묘계妙界와 불묘계不妙界 중계中界 등 3계가 있으며, 선계善界와 불선계不善界 무기계無記界 등 3계가 있고, 학계學界와 무학계無學界 비학비무학계非學非無學界 등 3계가 있으며, 유루계有漏界와 무루계無漏界 등 2계가 있고, 유위계有爲界와 무위계無爲界 등 2계가 있다. 그래서 세존께서 이 계품界品의 끝에 이르시기를, “아란아, 이 62계를 보면 여여한 진여를 알 것이니라. 아란아, 이와 같이 비구는 계를 알아야 하느니라.”(阿難 見此六十二界 知如眞 阿難 如是比丘知界)라고 하신 것이다. 또 안처眼處와 색처色處, 이처耳處와 성처聲處, 비처鼻處와 향처香處, 설처舌處와 미처味處, 신처身處와 촉처觸處, 의처意處와 법처法處 등을 12처라 말한다.
반야심경에 이르기를, “이 때문에 공 가운데는 색상이 없고, 수상행식도 없으며, 안이비설신의도 없고, 색성향미촉법도 없으며, 안계도 없고, 내지 의식계도 없느니라.”(是故空中無色 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乃至無意識界)라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안계는 안식계眼識界를 의미하고, 이식계耳識界와 비식계鼻識界 설식계舌識界 신촉계身觸界 등은 내지를 써서 생략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다계경에 의하면, 안계는 6근 중에 안근 곧 눈을 표방하는데, 반야심경은 어째서 안식계를 안계라 표기했을까? 6근 또는 계界 중에 첫째가 안계인데, 이 안계부터 의식계까지 6근 6진 6식 등 18계가 모두 없다는 것이며, 또는 62계 중에 첫째 안계부터 의식계까지 일체 계를 총괄하여 모두 없다고 말한 것이다.
2. 견문見聞과 관세음觀世音
범어 아바로케테스바라Avalokiteśvara를 구역은 관세음觀世音이라 번역하고, 신역은 관자재觀自在라 번역했다. 일체 보살은 자비와 지혜를 주반으로 삼는다. 관세음은 자비가 주체가 되고 지혜는 보좌가 되며, 관자재는 지혜가 주체가 되고 자비는 보좌가 된다. 반야심경은 반야를 위주하기 때문에 관자재라 번역할 수 있고, 아미타경은 구세대비救世大悲를 위주하기 때문에 관세음이라 번역할 수 있다. 다만 여기서는 보고 듣는 견문과 연계하여 관세음을 취한다.
대혜보각大慧普覺 선사의 어록 12권에 관음보살을 찬탄한 게송이 있다. 제명이 관음대사觀音大士와 입정관음入定觀音인데, 후자는 따로 해설문이 있다. 세 편의 글에서 관음의 뜻을 상세히 구명했다. 대사大士는 보살을 의미하며, 최고의 경칭이다.
관음대사觀音大士
과거에는 정법명여래이고,
지금은 관자재보살이라.
눈으로 모든 소리를 보고,
귀로 일체 미묘한 색상을 들으시니라.
過去正法明 現前觀自在 眼觀諸音聲 耳聽衆妙色
해설: 눈으로 색상을 보고, 귀로 소리를 듣는다. 그런데 어째서 눈으로 소리를 보고, 귀로 색상을 듣는다고 했을까?
두 가지 뜻이 모두 적멸하니,
누가 이러한 말을 듣는 자인가?
이 말이 또한 적멸하다면,
누가 이렇게 말하는 자인가?
二義俱寂滅 誰受此說者 是說亦寂滅 誰爲此說者
해설: 열반涅槃은 범어 니르바나nirvāṇa를 음사한 것이고, 적멸寂滅 멸도滅度 무생無生 등으로 번역하며, 적멸寂滅은 범어 뷰빠사마vyupaśama를 번역한 것이고, 작멸作滅 또는 도탈생사度脫生死로 번역되기도 하는 것 같다. 그래서 적멸은 니르바나의 역어譯語도 되고, 뷰빠사마의 역어도 된다.
“두 가지 뜻이 모두 적멸하다.”는 무슨 뜻인가? 눈으로 소리를 보고 귀로 색상을 듣는 그 두 가지 뜻이 모두 적멸하다. 소리를 보는 눈이 적멸하고, 색상을 듣는 귀 곧 6근이 적멸하면, “누가 이러한 말을 듣는 자인가?”라고 반문한 것이다. 또 “이 말이 또한 적멸하다면, 누가 이렇게 말하는 자인가?” 눈으로 보는 소리가 적멸하고, 귀로 듣는 색상 곧 6진이 적멸하다. 소리와 색상이 모두 적멸상이다. 그렇다면 “누가 이렇게 말하는 자인가?”라고 재차 반문한 것이다. 적멸한 색상을 누가 볼 수 있고, 적멸한 소리를 누가 들을 수 있으랴. 제법이 무시無始로 좇아오면서 항상 그대로 적멸상이다.(諸法從本來 常自寂滅相)
볼 수 있는 이와 보아야하는 색상,
들을 수 있는 이와 들어야하는 소리,
보거나 들을 수 있는 것을 돌이켜 보니,
여기에는 또한 어떤 것도 없느니라.
能觀及所觀 能聽洎所聽 返觀觀聽者 是亦無所有
해설: 관음보살의 이근원통耳根圓通에 반문문성反聞聞性이 있다. 위 반관관청자返觀觀聽者는 자를 성性으로 바꾸면 반관관성返觀觀性과 반관청성返觀觀聽性으로 나눌 수 있다. 이 셋이 모두 결과는 동일하다.
“귀를 통해서 소리를 듣는다. 듣는 그 자성을 돌이켜 들을 수 있느냐?”
“여기에는 또한 어떤 것도 없느니라.”
“눈을 의거하여 색상을 본다. 보는 그 자성을 돌이켜 볼 수 있느냐?”
“여기에는 또한 어떤 것도 없느니라.”
“관음보살은 눈으로 소리를 본다. 듣는 그 자성을 돌이켜 볼 수 있느냐?”
“여기에는 또한 어떤 것도 없느니라.”
보거나 들을 수 있는 그 자성을 돌이켜 보니, 여기에는 또한 어떤 것도 없느니라. 그 자재한 묘용이 입정관음이고, 출정관음出定觀音이다.
위대하도다 관세음이여,
이와 같은 법을 시원스럽게 말씀하시니라.
이 법은 사의할 수 없고,
듣는 이도 또한 희유하기 짝이 없으시다.
大哉觀世音 快說如是法 是法不思議 聽者亦希有
해설: 명실상부名實相符란 말이 있다. 세간의 사람들과 그 이름, 그리고 출세간의 불보살과 그 명호는 불가분不可分의 관계가 있다. 관세음보살은 그 명호만 가지고도 청량한 법문을 보여주신다. 그러나 보살설법이고 무정설법이라 또한 부사의한 해탈경계이기도 하다. 정식을 가지고서 누가 들을 수 있으랴.
내가 지금 터럭 하나로
두루 법계 허공계의 양을 재고,
이를 요술과 같은 말로 만들어,
이 진실상을 찬탄하노라.
我今以一毛 遍量法界空 作此如幻言 讚是眞實相
해설: 법계 허공계는 끝이 없다. 터럭 하나로 재어나가면 어느 세월에 끝이 나겠는가? 요술과 같은 말은 무궁무진한 변재를 말한다. 모든 부처님의 변재 지혜를 빌려서 무수겁 동안 그 진실상을 찬탄해도 다할 날이 없다. 장한가를 빌리자면, “천지가 장구해도 또한 다할 때가 있겠지만, 나의 한은 면면하여 끊어질 때가 없으리라.”(天長地久有時盡 此恨綿綿無絶期)
입정관음入定觀音
제명이 입정관음이다. 입정하면 출정出定 또는 기정起定한다. 소리는 귀로 듣고, 색상은 눈으로 본다. 그런데 관음보살은 소리를 눈으로 본다.
어떻게 그러할 수 있는가? 입정과 출정이 자재하기 때문이다. 안근에서 입정하여 안진으로 출정하고, 안진에서 입정하여 안근으로 출정하며, 안근에서 입정하여 이근으로 출정하고, 이근에서 입정하여 안근으로 출정하며, 안근에서 입정하여 이진으로 출정하고, 이진에서 입정하여 안근으로 출정하며, 또 이근에서 입정하여 이진으로 출정하고, 이진에서 입정하여 이근으로 출정하며, 이근에서 입정하여 안진으로 출정하고, 안진에서 입정하여 이근으로 출정하며, 안진에서 입정하여 이진으로 출정하고, 이진에서 입정하여 안진으로 출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입정관음에 대한 해설은 대혜어록 18권에 있다. 게송에 상응하는 해설을 바로 밑에 붙인다. 아래와 같다.
세간의 갖가지 음성상音聲相이여,
사람들은 귀로 소리를 듣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더라.
오직 이 관음보살만 눈으로 소리를 볼 수 있도다.
눈을 감고 자세히 소리를 관하며 불사를 하시느니라.
世間種種音聲相 衆以耳聽非目覩 唯此大士眼能觀 瞑目諦觀爲佛事
대혜 해설: “세간의 갖가지 음성상音聲相이여, 사람들이 귀로 소리를 듣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더라.”라고 하니, 일체 음성은 반드시 귀로 듣는데, 관음보살은 도리어 눈으로 본다. 이 때문에 “오직 이 관음보살만 눈으로 소리를 볼 수 있도다.”라고 말한 것이다. 어떻게 볼 수 있는가? 이에 “눈을 감고 자세히 소리를 관하며 불사를 하시느니라.”라고 말했다.(曰世間種種音聲相 衆以耳聽非目覩 一切音聲須以耳聽 觀音却以眼觀 故曰唯此大士眼能觀 如何見得 曰瞑目諦觀爲佛事)
해설: 입정관음의 게송이 세간의 시와 같다면 해설문은 마치 산문과 같다. 상호 관계가 중언부언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해설로 보기도 어렵고, 또한 주석으로 보기에도 충분하지 않다. 인내심을 갖고 읽어야 한다. 마땅한 구성체계가 보이지 않아서 ‘대혜 해설’이라 명명했다.
안경계眼境界에서 취할 바가 없으니,
귀나 코 혀 몸과 뜻도 또한 그러하니라.
선재라, 마음으로 시방이 공적함을 통달하니,
6근이 이와 같은 뜻을 서로 드러내도다.
於眼境界無所取 耳鼻舌身意亦然 善哉心洞十方空 六根互顯如是義
대혜 해설: 여기에 이르러 곧 전신해야 하니, “안경계眼境界에서 취할 바가 없으니,”라고 말한 것이다. 안경계에서 이미 취할 수 없다면 곧 안계眼界가 적멸하고, 안계가 이미 적멸하면 이계耳界도 적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귀나 코 혀 몸과 뜻도 또한 그러하니라. 선재라, 마음으로 시방이 공적함을 통달하니, 6근이 이와 같은 뜻을 서로 드러내도다.”라고 한 것이다.(到這裏便轉了 曰於眼境界無所取 眼境界既取不得 即眼界寂滅 眼界既寂滅 不可耳界不寂滅 所以云 耳鼻舌身意亦然 善哉心洞十方空 六根互顯如是義)
해설: 안경계眼境界는 안계를 말하고, 6경 6진과 같은 색계色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안계에서 취할 바는 통상 색계를 말하지만 관음보살은 소리 곧 성계聲界를 말한다. 눈을 감고 자세히 성계를 관함에 성계가 공적하여 취할 바가 없는 것이다. “마음으로 시방이 공적함을 통달하니,”는 시방세계의 일체 두두물물이 그대로 적멸상인 줄을 사무치게 알았다는 뜻이다. “6근이 이와 같은 뜻을 서로 드러내도다.”는 눈으로 성계聲界를 보고, 귀로 향계香界를 보며, 코로 미계味界를 보고, 혀로 촉계觸界를 보며, 몸으로 법계法界를 보고, 뜻으로 색계色界를 보는 것을 말한다. 이를 호현지의互顯之義라 한다.
대혜 해설: 관음보살은 눈으로 듣고, 보현보살은 마음으로 듣는 것이니, 바로 이것이 호현지의이다. 이른바 호현互顯이란 것은 안처眼處에서 이처耳處의 불사를 하고, 이처에서 비처鼻處의 불사를 하며, 비처에서 설처舌處의 불사를 하고, 설처에서 신처身處의 불사를 하며, 신처에서 의처意處의 불사를 하고, 의계意界 중에서 무량무변하고 광대한 불사를 하며, 이와 같은 수용자재受用自在를 얻었다. 눈은 여전히 색상을 보고, 귀는 예전대로 소리를 들으며, 더 나아가서 코와 혀 몸 뜻이 낱낱이 본분을 의거한다.(觀音菩薩以眼聞 而普賢菩薩以心聞 即此是互顯之義 所謂互顯者 眼處作耳處佛事 耳處作鼻處佛事 鼻處作舌處佛事 舌處作身處佛事 身處作意處佛事 於意界中作無量無邊廣大佛事 得恁麼受用自在了 眼依舊觀色 耳依舊聽聲 乃至鼻舌身意 一一依本分)
해설: “보현보살은 마음으로 듣는다.”(普賢菩薩以心聞)라고 한 것은 능엄경의 원통법문을 말한다. 아래와 같다.
보현보살이 자리에서 일어나 이마를 부처님의 발에 대고 절하며 부처님께 사뢰었다. “저는 진작 항하사 여래의 법왕자가 되었고, 시방의 여래께서 그 제자 중에 보살의 근기가 있는 이들로 하여금 보현행을 닦게 하시니, 저로 좇아서 그 이름을 세웠습니다. 세존이시어, 저는 마음으로 보고 중생의 모든 지견을 분별합니다. 만일 타방의 항하사 세계 밖에 한 중생의 마음속에 보현행을 발명하려는 이가 있다면, 저는 그때 육아상六牙象을 타고, 분신한 백천 개의 화신이 모두 그 처소에 이릅니다. 비록 그의 업장이 깊어서 응당 저를 보지 못하더라도, 저는 그 사람한테 은밀히 이마를 만져주고 옹호하여 위안하며, 그로 하여금 보현행을 성취하게 합니다. 부처님께서 저에게 원통을 물으시고 본인本因을 말하라고 하시니, 마음으로 듣고 발명하여 자유자재로 분별하는지라, 이 심문心聞이 제일인가 합니다.”(普賢菩薩即從座起 頂禮佛足而白佛言 我已曾與恒沙如來爲法王子 十方如來教其弟子菩薩根者 修普賢行 從我立名 世尊 我用心聞 分別衆生所有知見 若於他方恒沙界外 有一衆生心中發明普賢行者 我於爾時乘六牙象 分身百千皆至其處 縱彼障深未合見我 我與其人暗中摩頂 擁護安慰令其成就 佛問圓通我說本因 心聞發明分別自在 斯爲第一)
문수보살은 보현보살의 심문원통을 장원으로 선택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아래와 같다.
심문心聞으로 시방의 일체가 명백하니,
이는 큰 인연의 힘으로 생겼느니라.
초심자는 들어갈 수 없는 바,
어찌 첫째 원통을 얻을 수 있으리까?
心聞洞十方 生于大因力 初心不能入 云何獲圓通
눈의 색상과 귀의 소리 코의 향냄새,
몸의 촉감과 뜻의 생각이 차별이 없도다.
응당 이 관으로 이와 같이 관할지니라.
이 관을 취하여 실법으로 삼으면 망상을 이루느니라.
眼色耳聲鼻嗅香 身觸意思無差別 當以此觀如是觀 取此爲實成妄想
대혜 해설: 이 때문에 “눈의 색상과 귀의 소리 코의 향냄새, 몸의 촉감과 뜻의 생각이 차별이 없이 왕래한다.”라고 한 것이다. 이른바 “이 법이 법위에 머무르니, 세간의 상이 상주한다.”라고 함이 이것이다. “응당 이 관으로 이와 같이 관할지니라. 이 관을 취하여 실법으로 삼으면 망상을 이루느니라.”라고 하니, 여기에 이르러 또 전신해야 한다.(故曰眼色耳聲鼻嗅香 身觸意思無差別適來 所謂是法住法位 世間相常住是也 當以此觀如是觀 取此爲實成妄想 到這裏又轉了)
해설: 사구게 중에 일구와 이구는 6근과 6진이 차별이 없이 왕래하며 호현함을 밝혔다. “이 법이 법위에 머무르니, 세간의 상이 상주한다.”라는 송구는 “제법이 무시無始로 좇아오면서 항상 그대로 적멸상이다.”(諸法從本來 常自寂滅相)라는 게송과 그 취지가 동일하다. 이 게송의 관으로 12처계의 호현지의互顯之義를 관하는 것은 지극히 옳다. 그러나 “이 관을 취하여 실법으로 삼으면 망상을 이루느니라.”라고 하니, 어디에 병통이 있는가? “이 관을 취하여 실법으로 삼는 것”이 병통이다. 아래 12각시十二覺詩는 예전에 쓴 글이다. 이 병통과 관련이 있어서 인용한다.
진각은 깨닫거나 깨닫지 않을 바가 아니며,
깨달을 바가 없는 각을 깨닫는 것이 진각이다.
깨달음도 진각이요 깨닫지 않음도 진각이거니,
어찌 홀로 진각이라 이름할 바가 있으랴.
覺非覺非覺 覺無覺覺覺 覺覺非覺覺 豈獨名眞覺
원각경에 이르기를, “선남자야, 일체 여래의 묘원각심妙圓覺心은 본래 보리와 열반이 없고, 또한 성불하고 성불하지 못함이 없으며, 윤회하거나 윤회하지 않는 일도 없느니라.”라고 하셨다. 번뇌에 상대하여 보리라는 이름을 세웠고, 생사에 상대하여 열반이란 이름을 얻은 것이다. 이 미묘한 원각심圓覺心은 본래 진망眞妄이 없고, 또한 미오迷悟도 없다. 부처님이 범부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고, 범부라 하더라도 부처님보다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이 원각의 경계에 나아가 위의 게송을 해석해 보겠다.
진각은 깨닫거나 깨닫지 않을 바가 아니다. 이 게송의 결구結句에 진각이란 이름이 나오기 때문에 원각을 진각이란 말로 대체하여 사용했다. 이 원각은 깨달은 부처님만 수용하고 깨닫지 못한 범부는 가까이 어리대지도 못하는 그런 경계는 아니다. 진각이 깨닫거나 깨닫지 않을 바가(覺非覺) 아니라고 한 것은 위의 경문 가운데 성불하고 성불하지 못함도 없다고 하신 바와 같아서, 곧 범부와 부처, 생사와 열반, 번뇌와 보리 등 일체 대대待對가 끊어진 평등한 각성을 바로 드러낸 바이다.
깨달을 바가 없는 각(無覺覺)을 깨닫는 것이 진각이다. 수행의 문에 의거하면 시각始覺이 있고 구경각이 있을 터이다. 그러나 본분의 문에 나아가면 부처님과 범부가 본래 구족하여 평등한 각성이 곧 깨달을 바가 없는 근본각인 바, 이 근본각(無覺覺)을 깨닫는 것이 참으로 진각이다. 깨달았다고 하면 깨달은 각견覺見이 있을 것이지만, 이 근본각에는 각견도 없고 중생견衆生見도 없어서 능소能所가 다 끊어졌다.
깨달음도 진각이요 깨닫지 않음도 진각이다. 깨달은 이도 진각이요 깨닫지 않은 자도 진각이다. 각覺은 부처를 비각非覺은 중생을 뜻하는 말로서, 이 진각이 깨달은 부처에게만 있고 깨닫지 못한 범부에게는 없는 것이 아니다. 수행의 문에서는 범부와 부처님의 경계가 다르지만, 본분의 문에서는 부처님과 범부가 모두 그대로 원각대지圓覺大智가 낭연하게 밝아 조금도 차이가 없다. 깨달은 부처님도 원각을 수용하고 있으며, 깨닫지 않은 범부도 또한 이와 같다.
어찌 홀로 진각이라 이름할 바가 있으랴. 노자의 도덕경에 이르기를, “도道에서 하나가 나오고, 하나에서 둘이 나오며, 둘에서 셋이 나오고, 셋에서 만물이 나왔느니라.”라고 하셨다. 또한 금강경 오가해 가운데 야보송에 이르기를, “하나여, 하나로 둘을 나누고, 셋을 이루느니라.(一一破二成三)”라고 하셨다. 둘이 나오고 셋이 나오는 것은 하나로 말미암기 때문이고, 둘로 나뉘어지고 셋을 이루는 것도 하나가 있기 때문이다. 본분의 문에 나아가면 일체 대대가 끊어져서 모든 차별 경계가 없기 때문에 둘로 나눌 수가 없다. 둘을 세우지 못하는데 어찌 하나인들 설 곳이 있으랴.
만일 망상을 여의고 실법을 취하며,
전전할수록 혹란하여 본심을 잃느니라.
본심을 이미 잃고 전도를 따른다면,
관음보살의 미묘한 색신을 보지 못하도다.
若離妄想取實法 展轉惑亂失本心 本心既失隨顚倒 不見大士妙色身
대혜 해설: 이에 “만일 망상을 여의고 실법을 취하며, 전전할수록 혹란하여 본심을 잃느니라. 본심을 이미 잃고 전도를 따른다면, 관음보살의 미묘한 색신을 보지 못하도다.”라고 말한 것이다. 어떻게 전도하는가? 눈으로 색상을 보면 색상을 따라 전도하고, 귀로 소리를 들으면 소리를 따라 전도하니, 이는 중생이 전도하여 자기를 미혹하고 외물外物을 추구하며, 외물을 추구하기 때문에 관음보살의 미묘한 색신을 보지 못한다.(曰若離妄想取實法 展轉惑亂失本心 本心既失隨顚倒 不見大士妙色身 云何顚倒 眼見色隨色轉 耳聞聲隨聲轉 是謂衆生顚倒迷己逐物 以逐物故不見大士妙色身)
해설: 32상은 인간이 볼 수 있고, 80종호는 천인이 볼 수 있으며, 묘색신妙色身은 신통이 있어야 볼 수 있다. 어찌 전도된 안목으로 묘색신을 볼 수 있겠는가.
눈이나 귀 코 혀 몸 뜻도 없고,
서로 드러내는 뜻도 또한 적멸하도다.
또한 관음보살의 미묘한 색신도 없고,
또한 갖가지 음성상도 없느니라.
불자가 이와 같은 관을 지을 수 있다면,
영원히 세간의 생사고를 여읠 수 있느니라.
無眼耳鼻舌身意 互顯之義亦寂滅 亦無大士妙色身 亦無種種音聲相
佛子能作如是觀 永離世間生死苦
대혜 해설: “눈이나 귀 코 혀 몸과 뜻도 없다.”라고 하니, 이는 바로 경교에 명문明文이 있다. 눈이나 귀 코 등은 이미 그러한 실체가 없다면, 호현지의는 어디에 의거하여 세울 것인가? 이 때문에 “서로 드러내는 뜻도 또한 적멸하도다. 또한 관음보살의 미묘한 색신도 없고, 또한 갖가지 음성상도 없느니라. 불자가 이와 같은 관을 지을 수 있다면, 영원히 세간의 생사고를 여읠 수 있느니라.”라고 말한 것이다.(無眼耳鼻舌身意 此乃教有明文 眼耳鼻等既無其體 互顯之義依何而立 故曰 互顯之義亦寂滅 亦無大士妙色身 亦無種種音聲相 佛子能作如是觀 永離世間生死苦)
해설: 금강경에 이르기를, “만일 색상으로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 나를 구하면, 이 사람은 사도를 행하나니, 여래를 볼 수 없느니라.”(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라고 한다. “또한 관음보살의 미묘한 색신도 없고, 또한 갖가지 음성상도 없느니라. 불자가 이와 같은 관을 지을 수 있다면, 영원히 세간의 생사고를 여읠 수 있느니라.”라고 하니, 이는 관자재보살의 지신智身 또는 출세지出世智의 분상이라면 또한 옳다. 그러나 관세음보살이 세간에 상주하며 출세심出世心이 없는 대비신大悲身의 분상에는 전혀 수용할 수 없다.
3. 십이처계의 회호回互
이전에 쓴 “석두희천石頭希遷 스님의 참동계參同契” 중에 “회호回互와 불회호不回互”의 글이 이 글의 제명 “십이처계十二處界와 무정설법無情說法”과 연관이 있어서 소제목을 “십이처계의 회호回互”라 개정하고 일부를 인용한다.
여러 가지 문과 일체 경계는 회호하거나 회호하지 않기도 한다. 회호하면 다시 서로 섭입하지만, 회호하지 않으면 본위에 의지하여 머문다.(門門一切境 回互不回互 回而更相涉 不爾依位住)
해설: 위 게송은 석두희천 대사의 참동계에 있는 글이다. 회호回互는 회환回環과 상호교착相互交錯의 합성어이다. 우유나 물, 또는 뜨거운 물에 커피와 설탕을 넣고 숟가락으로 빙빙 휘저어 서로 뒤섞이게 하면, 우유와 물을 따로 구별할 수 없고, 커피와 설탕도 또한 구별할 수 없다. 이를 회호라 한다. 만일 물에 금가루를 넣고 빙빙 휘저어 서로 뒤섞이게 해도 잠시만 지나면 금가루는 가라앉아서 물과 금가루가 뚜렷이 구별된다. 이를 불회호不回互라 한다. 이 회호와 불회호의 주반主伴을 6근 6식 6진의 상호작용에 결합하면 수많은 변화가 있다.
아미타불은 어느 세상에 계실까?
아미타불을 마음에 붙여놓고 부디 잊지 마시라.
일념에 생각이 다하여 생각이 없는 곳에 이르면,
여섯 문에서 항상 자금색의 광명을 놓을 것이니라.
阿彌陀佛在何方 着得心頭切莫忘 念到念窮無念處 六門常放紫金光
문은 6문六門이니 눈 귀 코 혀 몸 뜻이고, 경境은 6경六境 또는 6진六塵이니 색상 소리 냄새 맛 감촉 법이다. 이 6근과 6경은 회호하기도 하고 회호하지 않기도 하는 주체이다. 상섭상입相涉相入을 회호라 하고, 별위각주別位各住를 불회호라 한다.
[원주] 문은 6근이고 경은 6진이다. 모든 6근과 6경은 회호하거나 회호하지 않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회호한다고 말한 것은 모든 6근과 6경이 상호간에 섭입하니, 마치 제망의 구슬과 같다. 회호하지 않는다고 한 것은 모든 6근과 6경이 각기 본위에 머무르니, 일찍이 혼잡한 적이 없다. 비록 상호간에 섭입하지만 실로 각기 본위에 머무르고, 비록 각기 본위에 머무르지만 실로 상호간에 섭입한다. 이는 의식의 경계가 아니다.(門根也 境塵也 諸根境有回互不回互二義 言回互者 謂諸根境互相涉入 如帝網珠也 不回互者 謂諸根境各住本位 未嘗混雜也 雖互相涉入 而實各住本位 雖各住本位 而實互相涉入 此非意識之境)
이상은 영각원현永覺元賢 스님의 참동계주參同契註이다. 반야심경에서 많이 외우는 구절이 있다.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 무색성향미촉법無色聲香味觸法, 이를 불자라면 모두 알고 있다. 전자는 6근 6문 또는 6처六處라 하고, 후자는 6진 또는 6경이라 한다. 6근이 6진을 인식하는 작용 견문후미촉지見聞嗅味觸知를 6식이라 말한다.
여러 가지 문과 일체 경계는 회호하거나 회호하지 않기도 한다.(門門一切境 回互不回互) 회호하면 다시 서로 섭입하지만, 회호하지 않으면 본위에 의지하여 머문다.(回而更相涉 不爾依位住) 여러 가지 문은 6문 곧 6근이고, 일체 경계는 6경 또는 6진이다.
일구와 이구 중(門門一切境 回互不回互)에 문과 경을 6근과 6진으로 대체하고 보면,(根根一切塵) “6근과 6진이 회호하기도 하고 회호하지 않기도 한다.”라고 환언할 수도 있는데, 이는 무슨 뜻인가? 눈으로 색깔을 보고(眼見色), 귀로 소리를 들으며(耳聞聲), 코로 냄새를 맡고(鼻嗅香), 혀로 맛을 맛보며(舌嘗味), 몸으로 촉감을 느끼고(身覺觸), 의식으로 법을 안다(意知法). 이것이 회호하지 않으면 본위에 의지하여 머문다는 것이다.
4. 동산양개洞山良价의 무정설법無情說法
동산스님(807~869)은 8세에 하루는 반야심경을 독송하는 중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에 이르러 갑자기 손으로 얼굴을 만지며 스님께 질문했다.
“저는 눈과 귀 코 혀 등이 있는데, 어째서 반야심경에는 도리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까?”
스님이 매우 놀라고 의아해하며 말했다.
“나는 너의 사부가 될 수 없구나.”
즉시 양개 행자를 데리고 오설산 영묵靈默(747~818) 선사에게 인사를 시키고 스승으로 모시게 했다. 그 후 스승의 지도 아래 불학을 정밀하게 연구했다.
21세에 숭산에 가서 구족계를 받고, 행각 중에 먼저 남전南泉(748∼834) 스님을 찾아뵈었다. 마조馬祖(709∼788) 스님의 제삿날이 되어서 재齋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남전스님이 대중에게 물었다.
“내일 마조스님의 재를 올리는데 마조스님이 오실까 미심쩍구나.”(來日設馬祖齋 未審馬祖還來否)
대중이 모두 대꾸가 없자 동산스님이 나와서 대답했다.
“기다리는 도반이 있으면 바로 오시겠습니다.”(待有伴即來)
“이 납자가 비록 후생이지만 진실로 탁마할 만하구나.”(此子雖後生 甚堪雕琢)
“큰스님께서는 양민을 억압하여 천민으로 만들지 마소서.”(和尚莫壓良爲賤)
해설: 세간에서 가렴주구苛斂誅求하는 위정자들이 강압적으로 평민의 자녀를 노비로 팔아넘기는 일을 압량위천壓良爲賤이라 말하는데, 그 출처가 바로 여기에 있다.
다음 위산潙山(771∼853)스님을 참알參謁하고 물었다.
“근래 남양혜충국사南陽慧忠國師(675∼775)의 무정이 설법한다는 화두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아직 그 미묘한 곳을 궁구하지 못했습니다.”(頃聞南陽忠國師 有無情說法話 某甲未究其微)
위산스님이 말하였다. “사리는 기억하지 못하는가?”(闍黎莫記得麼)
“기억할 수 있습니다.”(記得)
“그대가 시험 삼아 한번 사례를 들어보게.”(汝試舉一遍看)
동산스님이 국사의 무정설법을 전부 말씀드리자, 위산스님이 말씀하셨다.
“나도 이 흉중에 또한 무정설법이 있다네. 단지 그 사람을 만나기가 어렵다네.”(我這裏亦有 祇是罕遇其人)
“저는 아직 발명하지 못했습니다. 청컨대 스님께서 가리켜 보여주소서.”(某甲未明 乞師指示)
위산스님이 불자를 곧추세우고 말씀하셨다. “알겠는가?”(山竪起拂子云 會麼)
해설: 위산스님이 국사의 무정설법을 듣고 “나도 이 흉중에 또한 있다.”(我這裏亦有)라고 말씀하시니, 무엇이 있는가? 어찌 국사만 무정설법이 있겠는가? 만일 영운스님이나 향엄스님이 면전에 있었다면 바로 흉중에 있는 무정설법을 드러내서 보여주었을 것이다. 동산스님이 거듭 무정설법을 듣기를 요청하자, 위산스님이 불자拂子를 곧추세웠다. 이것은 위산스님이 설법한 것인가? 아니면 불자가 설법한 것인가?
영운스님은 도화를 보고 깨달았고, 향엄스님은 조약돌이 대나무에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대오했다. 이도 또한 무정설법이 아닌가. 법주가 법상에 앉아서 상당법문을 무엇으로 시작하는가? 주장자를 추켜세운다. 도화나 조약돌 불자 주장자 등이 하나라도 무정이 아님이 없다. 그 무정설법을 어떻게 해야 들을 수 있는가? 필요충분조건이 하나가 있다. 당관시절인연當觀時節因緣해야 하니, 당두일구當頭一句라야 한다.
“모르겠습니다. 청컨대 스님께서 설명하여 주소서.”(不會 請和尚說)
“부모로부터 생긴 이 입으로는 끝내 그대를 위하여 말하지 못한다네.”(父母所生口 終不爲子說)
“또한 스님과 더불어 동시대인에 도를 흠모할 만한 분이 있습니까?”(還有與師同時慕道者否)
“여기서 예릉 유현으로 가면 석실石室이 서로 잇닿아 있는데 운암도인雲岩道人이 있다네. 만일 발초첨풍撥草瞻風할 수 있다면 반드시 그대에게 소중한 분이 되어줄 것이네.”(此去澧陵攸縣 石室相連 有雲巖道人 若能撥草瞻風 必爲子之所重)
“이 분이 어떠한지 미심쩍습니다.”(未審此人如何)
“그이가 때마침 노승한테 질문했다. ‘학인이 스승을 시봉하고자 하면 어찌해야 합니까?’
노승이 그에게 대꾸하여 말했다. ‘즉시 참루滲漏를 끊어야만 비로소 옳다네.’
그이가 말했다. ‘오히려 스승의 말씀에 어긋나지 않겠습니까?’
노승이 말했다. ‘첫째 노승이 여기에 있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네.’”(老僧對他道 直須絕滲漏始得 他道 還得不違師旨也無 老僧道 第一不得道老僧在這裏)
해설: 위산스님(771~853)과 운암스님(781~841, 782~841)은 함께 백장스님(720~814) 회상에서 도를 닦았다. 운암스님이 시자로 있기 전의 문답이다. 운암스님이 20년 동안 백장스님을 시봉하고서도 도를 깨치지 못했다고 하는 것을 보면, 794년 경 운암스님의 나이가 열네 살 무렵이다.
참루滲漏의 참滲은 안으로 스며든다는 뜻이고, 누漏는 밖으로 세어나간다는 것이니, 이는 내외로 대대하고, 적시며 올라가고 흘러서 내려가니, 이는 상하로 대응한다. 세간의 일체 법은 상호 대립한다. 그래서 참루는 즉리卽離와 같고, 또 상견 단견과 같다. 일체 세간의 차별상을 참루라 한다.
동산스님은 드디어 위산스님께 작별인사를 올리고 지름길로 운암스님께 달려가서 앞의 인연을 들어서 마치고, 바로 물었다.(師遂辭潙山 徑造雲巖 舉前因緣了 便問)
“무정의 설법을 어떤 사람이 들을 수 있습니까?”(無情說法 甚麼人得聞)
운암스님이 대답하셨다. “무정이 들을 수 있느니라.”(雲巖云 無情得聞)
“스님께서도 듣습니까?”(師云 和尚聞否)
“내가 만일 듣는다면 자네는 바로 나의 설법을 듣지 못한다네.”(雲巖云 我若聞 汝即不聞吾說法也)
“저는 무엇 때문에 듣지를 못합니까?”(師云 某甲爲甚麼不聞)
운암스님이 불자를 곧추세우고 말씀하셨다. “또한 듣는가?”(雲巖竪起拂子云 還聞麼)
“듣지 못합니다.”(師云不聞)
“내가 설법해도 그대는 오히려 알아듣지 못하는데, 더군다나 무정설법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雲巖云 我說法 汝尚不聞 豈況無情說法乎)
“무정이 설법하니, 이는 어떤 경의 가르침입니까?”(師云 無情說法 該何典教)
“어찌 보지를 못했는가? 아미타경에, ‘물과 새와 숲에 나무들이 다 함께 부처님을 생각하고 법을 생각한다.’라고 했느니라.”(雲巖云 豈不見 彌陀經云 水鳥樹林悉皆念佛念法)
동산스님이 여기에서 깨달은 바가 있었다. 곧바로 게송을 지어서 올렸다.(師於此有省 乃述偈云)
매우 기이하고 매우 기이하도다.
무정설법이여, 사의하지 못하겠구나.
만일 귀로 들으려고 하면 끝내 알기 어렵나니,
안근眼根으로 소리를 들어야 비로소 알 수가 있느니라.
也太奇 也太奇 無情說法不思議 若將耳聽終難會 眼處聞聲方得知
해설: 무정은 정식이 없고, 유정은 정식이 있다. 정식이 있는 유정이 정식이 없는 무정의 설법을 듣고자 하면, 오정五情 또는 육정六情의 정식으로 들어서는 안 되고, 정식이 없는 6근으로 들어야 한다. 이 때문에 혜충국사는 “중생이 만일 무정설법을 듣는다면 곧 중생이 아니니라.”(師曰 “衆生若聞, 卽非衆生.”)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동산스님이 “만일 귀로 들으려고 하면 끝내 알기 어렵나니, 안근眼根으로 소리를 들어야 비로소 알 수가 있느니라.”라는 게송이 그러하다. 무정설법은 이식耳識이 있는 이근으로 들을 수 없고, 안식眼識이 없는 안근이라야 들을 수 있다. 만일 이식이 없는 이근이라면 어찌 무정설법을 듣지 못하랴. 또한 이것이 어찌 관음보살의 이근원통이 아니랴. 비설신의도 또한 그러하다. 무정설법을, 비식鼻識이 없는 비근으로 들을 수 있고, 설식舌識이 없는 설근으로 들을 수 있으며, 신식身識이 없는 신근으로 들을 수 있고, 의식이 없는 의근으로 들을 수 있는 것이다.
5. 십이처계十二處界의 입정入定과 기정起定
화엄경 현수품은 십신품 중에 백미이다. 화엄경은 대부분 당해 보살이 삼매 속에서 말씀하셨는데, 가장 낮은 십신 6품과 최고로 높은 입법계품은 당해 보살이 삼매에 들지 않고 말씀하셨다. 이에 이 부류의 품은 범부에게도 들어갈 수 있는 분이 있다. 현수품에서 바로 십신만심을 이루고, 찰나제삼매로 초발심주에 들어가 입법계에 자재할 수 있다. 고인이 현수품을 극찬한 이유이다.
안근 중에서 정정에 들어갔다가,
색진色塵 중에서 정으로부터 나오네.
색성色性의 부사의함을 시현하시니,
일체 천중과 사람들은 알 수가 없도다.
於眼根中入正定 於色塵中從定出 示現色性不思議 一切天人莫能知
색진 중에서 정정에 들어갔다가,
안근에서 기정起定해도 마음은 산란하지 않네.
안성眼性은 무생하여 기정할 것도 없고,
안성은 공허 적멸하여 할 일도 없다고 설법하도다.
於色塵中入正定 於眼起定心不亂 說眼無生無有起 性空寂滅無所作
이근 중에서 정정에 들어갔다가,
성진聲塵 중에서 정으로부터 나오네.
일체 말과 소리를 분별하시니,
제천과 세상 사람들은 알 수가 없도다.
於耳根中入正定 於聲塵中從定出 分別一切語言音 諸天世人莫能知
성진 중에서 정정에 들어갔다가,
이근에서 기정해도 마음은 산란하지 않네.
이성耳性은 무생하여 기정할 것도 없고,
이성은 공허 적멸하여 할 일도 없다고 설법하도다.
於聲塵中入正定 於耳起定心不亂 說耳無生無有起 性空寂滅無所作
비근 중에서 정정에 들어갔다가,
향진香塵 중에서 정으로부터 나오네.
일체 극묘한 향을 두루 얻으시니,
제천과 세상의 사람들은 알 수가 없도다.
於鼻根中入正定 於香塵中從定出 普得一切上妙香 諸天世人莫能知
향진 중에서 정정에 들어갔다가,
비근에서 기정해도 마음은 산란하지 않네.
비성鼻性은 무생하여 기정할 것도 없고,
비성은 공허 적멸하여 할 일도 없다고 설법하도다.
於香塵中入正定 於鼻起定心不亂 說鼻無生無有起 性空寂滅無所作
설근 중에서 정정에 들어갔다가,
미진味塵 중에서 정으로부터 나오네.
일체 최상의 맛을 두루 얻으시니,
제천과 세상의 사람들은 알 수가 없도다.
於舌根中入正定 於味塵中從定出 普得一切諸上味 諸天世人莫能知
미진 중에서 정정에 들어갔다가,
설근에서 기정해도 마음은 산란하지 않네.
설성舌性은 무생하여 기정할 것도 없고,
설성은 공허 적멸하여 할 일도 없다고 설법하도다.
於味塵中入正定 於舌起定心不亂 說舌無生無有起 性空寂滅無所作
신근 중에서 정정에 들어갔다가,
촉진觸塵 중에서 정으로부터 나오네.
일체 감촉을 잘 분별할 수 있으시니,
제천과 세상 사람들은 알 수가 없도다.
於身根中入正定 於觸塵中從定出 善能分別一切觸 諸天世人莫能知
촉진 중에서 정정에 들어갔다가,
신근에서 기정해도 마음은 산란하지 않네.
신성身性은 무생하여 기정할 것도 없고,
신성은 공허 적멸하여 할 일도 없다고 설법하도다.
於觸塵中入正定 於身起定心不亂 說身無生無有起 性空寂滅無所作
의근 중에서 정정에 들어갔다가,
법진法塵 중에서 정으로부터 나오네.
일체 모든 법상을 분별하시니,
제천과 세상 사람들은 알 수가 없도다.
於意根中入正定 於法塵中從定出 分別一切諸法相 諸天世人莫能知
법진 중에서 정정에 들어갔다가,
의근에서 기정해도 마음은 산란하지 않네.
의성意性은 무생하여 기정할 것도 없고,
의성은 공허 적멸하여 할 일도 없다고 설법하도다.
於法塵中入正定 從意起定心不亂 說意無生無有起 性空寂滅無所作
해설: 6근과 6진마다 하나의 7언 사구게가 있어서 12편의 게송을 이루었으나, 맨 위의 안근과 안진을 주제로 쓴 2편의 게송이면 전체의 대의를 남음이 없이 이해할 수 있다. 그 양식과 취지가 동일하기 때문이다. 중언하면 다음과 같다.
안근 중에서 정정에 들어갔다가, 색진色塵 중에서 정으로부터 나오네. 색성色性의 부사의함을 시현하시니, 일체 천중과 사람들은 알 수가 없도다.(於眼根中入正定 於色塵中從定出 示現色性不思議 一切天人莫能知) 색진 중에서 정정에 들어갔다가, 안근에서 기정起定해도 마음은 산란하지 않네. 안성眼性은 무생하여 기정할 것도 없고, 안성은 공허 적멸하여 할 일도 없다고 설법하도다.(於色塵中入正定 於眼起定心不亂 說眼無生無有起 性空寂滅無所作)
연수스님은 종경록에서 위 게송과 청량소를 함께 인용하면서 안심법문安心法門이라 명명했다. 게송 중에 심불란心不亂을 중시한 듯하다. 세간에서도 지극히 불안한 사람들은 전문 상담사를 찾아가기도 한다. 부처님의 일대시교도 넓게 보면 안심법문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안심법문은 세출세간을 일관한다. 이를 상담사가 쓰면 세간법이 되고, 도인이나 부처님이 쓰면 출세간법이 된다. 세간 만사가 다 그러하다.
위 12편의 게송은 6근과 6진 12처계 중에 안근과 안진 등과 같이 각기 근과 진 상호간의 입정과 기정만 한정하여 서술했다. 그러나 안근에서 입정하여 이근으로 기정할 수도 있고, 비근에서 입정하여 설진으로 기정할 수도 있으며, 신진에서 입정하여 의진으로 기정할 수도 있다. 또 안근에서 입정하여 이근과 비근 설근 신근 의근 등으로 동시에 기정할 수도 있고, 이근과 비근 설근 신근 의근 등에서 동시에 입정하여 안근으로 기정할 수도 있으며, 색진과 성진에서 입정하여 향진과 미진 촉진 법진으로 기정할 수도 있다. 이와 같은 사례를 청량국사는 소초에서 많은 게송으로 표출하고 있다. 아래와 같다.
안근 중에서 정정에 들어갔다가,
색진에서 기정해도 마음은 산란하지 않네.
색진은 무생하여 기정할 것도 없고,
색성은 공허 적멸하여 할 일도 없음을 알았도다.
於眼根中入正定 於色起定心不亂 了色無生無有起 性空寂滅無所作
색진 중에서 정정에 들어갔다가,
안근 중에서 삼매로부터 나오네.
안성의 부사의함을 분별하시니,
제천과 세간의 사람들은 알 수가 없도다.
於色塵中入正定 於眼根中三昧起 分別眼性不思議 諸天世人莫能知
안근 중에서 정정에 들어갔다가,
색진 중의 사관事觀에서 일어나네.
색진은 무생하여 기정할 것도 없고,
색성은 공허 적멸하여 할 일도 없다고 설법하도다.
於眼根中入正定 於色塵中事觀起 說色無生無有起 性空寂滅無所作
색진 중에서 정정에 들어갔다가,
안근 중의 이관理觀에서 일어나네.
일체 극묘한 안목을 분별하시니,
제천과 세상의 사람들은 알 수가 없도다.
於色塵中入正定 於眼根中理觀起 分別一切上妙眼 諸天世人莫能知
안근 중에서 정정에 들어갔다가,
이근 중에서 정으로부터 일어나네.
이성耳性의 부사의함을 시현하시니,
제천과 세상의 사람들은 알 수가 없도다.
於眼根中入正定 於耳根中從定起 示現耳性不思議 諸天世人莫能知
이근 중에서 정정에 들어갔다가,
안근으로부터 기정해도 마음은 산란하지 않네.
안성은 무생하여 기정할 것도 없고,
안성은 공허 적멸하여 할 일도 없다고 설법하도다.
於耳根中入正定 從眼起定心不亂 說眼無生無有起 性空寂滅無所作
색진 중에서 정정에 들어갔다가,
6근 중에서 정으로부터 일어나네.
6근의 부사의함을 시현하시니,
제천과 세상의 사람들은 알 수가 없도다.
於色塵中入正定 於六根中從定起 示現六根不思議 諸天世人莫能知
6근 중에서 정정에 들어갔다가,
색진에서 기정해도 마음은 산란하지 않네.
색진은 무생하여 기정할 것도 없고,
색성은 공허 적멸하여 할 일도 없다고 설법하도다.
於六根中入正定 於色起定心不亂 說色無生無有起 性空寂滅無所作
안근 중에서 정정에 들어갔다가,
6진 중에서 삼매로부터 일어나네.
6경의 부사의함을 분별하시니,
제천과 세간의 사람들은 알 수가 없도다.
於眼根中入正定 於六塵中三昧起 分別六境不思議 諸天世人莫能知
6경 중에서 정정에 들어갔다가,
안근에서 기정해도 마음은 산란하지 않네.
안근은 무생하여 기정할 것도 없고,
안성은 공허 적멸하여 할 일도 없다고 설법하도다.
於六境中入正定 眼根起定心不亂 說眼無生無有起 性空寂滅無所作
6. 황화취죽黃花翠竹
법안가풍法眼家風에, “바람에 나뭇가지와 물가에 달은 진심을 드러내고, 청죽과 국화는 미묘한 법을 선양하도다.”(風柯月渚 顯露眞心 翠竹黃花 宣明妙法)라는 구절이 있다.
전강스님이 범어사 조실로 주석하실 때, 일본 평화사 주지 성지신成智信 스님이 상량기념으로 불법대의를 물었다. 하교한 법문은 아래와 같다.
평화사 상량에 부치는 법어
국화와 청죽은 미묘한 법을 선양하고,
바람에 나뭇가지와 물가에 달은 진심을 드러내도다.
꾀꼬리는 울고 제비가 지저귀며 항상 실상을 설법하고,일체 유정은 비로자나이고 모든 무정이 화장세계로다. 애달프다, 알겠는가? 머리를 돌이켜 산을 바라보며 유하주에 취하고, 나무를 의지하여 졸고 나니 날은 이미 저물었도다.
寄平和寺上樑法語黃花翠竹宣明妙法 風柯月渚顯露眞心鶯吟燕語常談實相 頭頭毘盧物物華藏咄 會麽回首看山醉流霞 倚樹沈眠日已斜
무정도 불성이 있다는 무정설법의 최초 근거는 아마도 도생道生(355~434) 법사가 아닌가 한다. 조정사원祖庭事苑의 취죽황화翠竹黃花 편에 있다.
도생법사가 말씀하시기를, “무정도 또한 불성이 있다.”라고 하고, 다시 주장하시기를, “푸릇푸릇한 취죽翠竹은 모두 진여이고, 빽빽하게 우거진 국화는 반야가 아님이 없다.”라고 하시니, 세상에서 믿어주는 극소수가 이르기를, “부처님의 말씀으로 증명할 수도 없구나.”라고 했다. 법사가 이에 10년 동안 단정히 앉아 경이 와서 증명해주기를 기다렸다. 뒤에 담무참曇無讖 삼장이 열반후분경涅槃後分經을 지니고 왔는데, 과연 이 설說이 있었다. 법사가 열람해 마치고 불자拂子가 바닥에 떨어지자, 안석案席에 기대어 열반에 들었다.(道生法師說 無情亦有佛性 尸云 靑靑翠竹盡是眞如 鬱鬱黃花無非般若 世少信者 謂無佛語所證 法師乃端坐十年 待經而證 後三藏帶涅槃後分經至 果有斯說 法師覽畢 麈尾墜地 隱几入滅)
해설: 도생법사의 저술이 있다고 하지만 단행본으로 확인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래서 황화취죽의 직접근거는 알 수 없다. 조정사원은 송대에 편찬된 것이다.
열반경은 소승부와 대승부를 합하여 15종이 있는데, 대승부 3종을 많이 말한다. 법현(340~418,423; 출국 60세 399, 귀국 74세 413) 스님의 대반니원경大般泥洹經 6권과 담무참曇無讖(385~433) 삼장의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40권, 그리고 혜엄慧嚴 혜관慧觀 사령운謝靈運 등이 두 본을 대조하여 남본열반경南本涅槃經 36권으로 다시 탄생시켰다.
도생법사는 먼저 6권 본을 보았다. 경에 이르기를, “일천제를 제외하고 모두 불성이 있다.”라고 하였는데, 법사가 이르기를, “무릇 천성의 선악이 모두 열반이 있다. 정인천제正因闡提도 중생의 부류인데, 어찌 홀로 불성이 없을 수 있는가? 어쩌면 경의 전래傳來가 미진할 따름이다.”라고 했다.(經云 除一闡提 皆有佛性 師云 夫稟質二儀 皆有涅槃 正因闡提含生之類 何得獨無佛性 盖是經來未盡耳) 이에 대중의 공분을 사고 쫓겨났으며, 10년을 기다린 이후에 40권 본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성행품에 이르기를, “일천제인一闡提人이 비록 다시 선근을 끊어도 또한 불성이 있다.”라고 하니, 이때에 스님들이 모두 탄복했다.(聖行品云 一闡提人 雖復斷善 猶有佛性 於是諸師皆爲媿服) 정인천제正因闡提는 정인불성正因佛性과 대비되는 말이다. 천제는 불성이 없어서 절대 성불하지 못한다는 뜻으로 보면 된다.
불자와 관련하여 이설이 있다. 법사가 원가11년(434) 11월 경자일 여산정사에서 법좌에 올라 설법을 마치고, 중인이 보는 앞에서 불자拂子가 어지럽게 바닥에 떨어지자, 법상에 기대어 열반에 들었다.(元嘉十一年十一月庚子于廬山升座說法將畢 衆見麈尾紛然墜地隱几而化) 이상 해설은 동림십팔고현전東林十八高賢傳에 의거한 것이다.
이 무정불성론이 하택신회荷澤神會(684∼758) 스님과 혜충국사(675~775)에 이르러 다시 등장한다. 도생(355~434) 법사 이후 3백여 년 동안 치열한 찬반 논쟁이 있었던 듯하다. 이를 반박한 대표주자 중에 하나가 신회스님과 마조스님의 제자 대주스님이고, 긍정하는 이의 선봉이 또한 혜충국사이다. 차례로 들어보겠다.
먼저 하택신회선사어록荷澤神會禪師語錄에 있는 글을 인용하겠다. 우두산 원선사가 질문하고 신회스님이 대답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다음과 같다.
우두산 원선사가 질문했다. “불성이 일체 처소에 두루 미칩니까?”(牛頭山袁禪師問 佛性遍一切處否)
신회스님이 대답했다. “불성은 일체 유정에 두루 미치고, 일체 무정에는 두루 미치지 않습니다.”(答曰 佛性遍一切有情 不遍一切無情)
“선배 대덕스님들이 모두 이야기하기를, ‘푸릇푸릇한 취죽은 모두 진여이고, 빽빽하게 우거진 국화는 반야가 아님이 없다.’라고 하시는데, 지금 선사는 어떤 연고로 ‘불성은 단지 일체 유정에만 두루 미치고, 일체 무정에는 두루 미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십니까?”(問曰 先輩大德皆言道 青青翠竹盡是法 鬱鬱黃花無非般若 今禪師何故言道 佛性獨遍一切有情 不遍一切無情)
“어찌 푸릇푸릇한 취죽이 공덕법신功德法身과 동일하며, 어찌 빽빽하게 우거진 국화가 반야의 지덕智德과 동등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청죽과 국화가 법신 반야와 동일한 것이라면 이는 곧 외도의 설입니다. 여래가 어느 경에서 청죽과 국화가 정각을 이룬다는 수기를 받았다고 설했습니까? 열반경에 구체적으로 명문이 있는 바, ‘불성이 없다는 것은 이른바 무정물이다.’라고 한 것이 이것입니다.”(答曰 豈將青青翠竹同於功德法身 豈將鬱鬱黃花等般若之智 若青竹黃花同於法身般若者 如來於何經中 說與青竹黃花授菩提記 若是將青竹黃花同於法身般若者 此即外道說也 何以故 涅槃經云 具有明文 無佛性者 所渭無情物是也)
해설: “어찌 푸릇푸릇한 취죽이 공덕법신功德法身과 동일하며, 어찌 빽빽하게 우거진 국화가 반야의 지덕智德과 동등할 수 있겠습니까?” 공덕법신功德法身은 다섯 가지 불신佛身 중에 하나로, 만행의 공덕으로 성취한 불신이니, 보신이다.
신회스님이 열반경에서 인용한, “불성이 없다는 것은 이른바 무정물이다.”(無佛性者 所渭無情物)라는 말은 대반열반경 37권 가섭보살품迦葉菩薩品에 나오니, 곧 “불성이 아닌 것은 이른바 일체 장벽의 기와와 조약돌 등 무정물이며, 이와 같은 등 무정물을 여의면 이를 불성이라 일컫는다.”(非佛性者 所謂一切牆壁瓦石無情之物 離如是等無情之物 是名佛性)라는 구절과 같다. 열반경에 무정 또는 무정지물이란 말이 여기에 나올 뿐이고, 다른 곳에는 없다.
대주혜회大珠慧海 스님은 마조스님의 제자인데 생몰연대는 알지 못한다. 먼저 온광대덕과 문답이 있고, 다음 화엄좌주와 문답이 있다. 아래와 같다.
온광대덕韞光大德이 물었다. “선사는 자신이 태어난 곳을 아십니까?”(有韞光大德問 禪師自知生處否)
대주대사가 대답했다. “일찍이 죽은 적이 없는데 어찌 출생을 상론할 필요가 있습니까? 생멸을 안다면 생법生法도 없고, 이생법離生法도 없는데, 말하기를 생사가 있다 없다고들 합니다. 마조대사가 이르시기를, ‘당래 하생해도 곧 불생不生이다’(心地隨時說 菩提亦只寧 事理俱無礙 當生即不生)라고 하셨습니다.”(師曰 未曾死何用論生 知生即是無生法 無離生法 說有無生 祖師云 當生即不生)
“자성을 보지 못한 이도 또한 이와 같을 수 있습니까?”(曰不見性人亦得如此否)
“스스로 자성을 보지 못한 것이고, 자성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어째서 그러한가? 보는 것이 곧 자성이라 자성이 없으면 볼 수 없고, 아는 것이 바로 자성이기 때문에 자성을 안다고 말하며, 깨닫는 것이 곧 자성이라 자성을 통달한다고 이르고, 만법을 출생할 수 있어서 법성이라 부르며, 또한 법신이라 일컫기도 합니다. 마명조사가 이르시기를, ‘이른바 법이란 것은 중생심을 말한다.’라고 하시니, 만일 마음이 생기면 이 때문에 일체 법이 생기고, 만일 마음이 생기지 않으면 일체 법도 생기는 곳이 없으며, 또한 명칭도 없습니다. 미인迷人은 법신은 형상이 없어서 사물에 응하여 형상을 이루는 줄을 알지 못하고, 마침내 ‘푸릇푸릇한 취죽은 모두 법신이고, 빽빽하게 우거진 국화는 반야가 아님이 없다.’라고 큰소리칩니다. 국화가 만일 반야이면 반야가 바로 무정과 같고, 취죽이 만일 법신이면 법신이 곧 초목과 같습니다. 만일 사람이 죽순을 먹는다면 응당 모든 사람이 법신을 먹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말을 어찌 수록할 만하겠습니까? 미불迷佛을 대면하고 장겁을 희구하며, 전체가 법 가운데서 미혹하여 밖에서 찾습니다. 그러므로 도를 아는 이는 행주좌와行住坐臥가 도가 아님이 없고, 법을 깨달은 이는 종횡으로 자재해도 법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師曰 自不見性不是無性 何以故 見即是性無性不能見 識即是性故名識性 了即是性喚作了性 能生萬法喚作法性 亦名法身 馬鳴祖師云 所言法者 謂衆生心 若心生故一切法生 若心無生法無從生 亦無名字 迷人不知法身無象應物現形 遂喚青青翠竹總是法身欝欝黃華無非般若 黃華若是般若 般若即同無情 翠竹若是法身 法身即同草木 如人喫筍 應總喫法身也 如此之言寧堪齒錄 對面迷佛長劫希求 全體法中迷而外覓 是以解道者行住坐臥無非是道 悟法者縱橫自在無非是法)
해설: 온광스님이 생사의 근원을 묻는다. 대주스님은 생사가 본래 없다고 답한다. 생로병사나 생주이멸이 다르지 않다. 생사가 생멸이다. 생을 안다 또는 생멸을 안다는 것은 생멸을 멀리 여의었다는 생멸멸이生滅滅已를 말한다. 생멸은 일체 세간의 대대경계待對境界이다. 이에 반하여 무생무멸無生無滅의 열반적정涅槃寂靜은 절대경계이다. 이 세계는 생법生法도 없고, 이생법離生法도 없다. 이 도리를 모르는 이들이 설왕설래하며 생사의 유무를 가지고 힐난한다.
마조대사의 4구게 중에 결구만 인용한 바, 전체를 이른다면, “심지법문을 시의에 부합하게 설하시니, 보리법문도 또한 이와 같도다. 사사와 이사가 모두 무애하니, 당래 하생해도 바로 불생이니라.”(心地隨時說 菩提亦只寧 事理俱無礙 當生即不生)라고 할 것이다. 수시隨時는 세 가지 뜻이 있다. 첫째, 시세에 순응하다, 시의에 부합하다, 둘째, 어느 때나, 하시를 불문하고, 셋째, 시속을 따라, 등이다. 만일 심지법문이 화엄법문이라면 상설常說이 될 것이다.
만일 사람이 죽순을 먹는다면 응당 모든 사람이 법신을 먹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말을 어찌 수록할 만하겠습니까? - 대주스님의 견해
선객이 사뢰었다. “일체 대지가 이미 불신이라면 일체 중생이 불신 위에서 생활하며 대소변으로 불신을 더럽히고, 또 구멍을 뚫으며 불신을 짓밟으니, 어찌 죄가 없겠습니까?” 국사가 말씀하셨다. “일체 중생은 전체가 불신인데, 누가 죄가 되겠느냐?”(客曰 “一切大地旣是佛身, 一切衆生居佛身上, 便利穢汙佛身, 穿鑿踐踏佛身, 豈無罪乎?” 師曰 “一切衆生全是佛身, 誰爲罪乎?”) - 혜충국사의 견해
사람이 죽순법신을 먹는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중생불신이 대지불신 위에서 대소변으로 불신을 더럽힌들 무슨 죄가 되느냐? 대주스님과 혜충국사의 견해는 명확히 엇갈린다. 천지현격이다.
화엄경을 강의하던 지좌주志座主가 질문했다. “선사는 무슨 연고로 ‘푸릇푸릇한 취죽은 모두 법신이고, 빽빽하게 우거진 국화는 반야가 아님이 없다.’라는 구절을 수긍하지 않습니까?”(講華嚴志座主問 禪師何故不許 青青翠竹盡是法身 欝欝黃華無非般若)
대주화상이 대답했다. “법신은 무형무상無形無象하니 취죽에 응하여 형상을 이루는 것이고, 반야는 무지무상無知無相하니 국화에 대응하여 형상을 드러낸 것이며, 저 국화와 취죽은 반야나 법신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때문에 경에 이르기를, ‘부처의 진법신眞法身이 마치 허공과 같고, 중생에 수응하여 형상을 나투심이 물속에 달과 같다.’라고 한 것입니다. 국화가 만일 반야이면 반야가 바로 무정과 같고, 취죽이 만일 법신이면 취죽도 또한 응용할 수 있습니다. 좌주는 알겠습니까?”(師曰 法身無象應翠竹以成形 般若無知對黃華而顯相 非彼黃華翠竹而有般若法身 故經云 佛眞法身猶若虛空 應物現形如水中月 黃華若是般若 般若即同無情 翠竹若是法身 翠竹還能應用 座主會麼)
“이 뜻을 알지 못하겠습니다.”(曰不了此意)
“만일 견성한 사람이라면 이것이라 말해도 또한 옳고, 이것이 아니라고 말해도 또한 옳습니다. 용처를 따라 말하므로 시비에 걸리지 않습니다. 만일 견성하지 못한 사람이 취죽을 말하면 취죽에 집착하고, 국화를 말하면 국화에 집착하며, 법신을 말하면 법신에 집착하고, 반야를 말하면 반야를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모두 논쟁을 이룰 뿐입니다.”(師曰 若見性人 道是亦得 道不是亦得 隨用而說 不滯是非 若不見性人說翠竹著翠竹 說黃華著黃華 說法身滯法身 說般若不識般若 所以皆成爭論)
지좌주가 사례하고 떠났다.(志禮謝而去)
해설: “만일 견성한 사람이라면 이것이라 말해도 또한 옳고, 이것이 아니라고 말해도 또한 옳습니다. 용처를 따라 말하므로 시비에 걸리지 않습니다.” 이는 이사가 맞지 않는 말이다. 왜냐하면 “취죽은 모두 법신이고, 국화는 반야가 아님이 없다.”라는 명언이 견성하지 못한 사람의 말이 되기 때문이다. 이로써 대주스님의 견해가 투철하지 못함을 알 수 있다.
신회스님과 대주스님은 모두 황화나 취죽 같은 무정은 불성이 있다는 견해를 부정한다. 그러나 법안종은 “바람에 나뭇가지와 물가에 달은 진심을 드러내고, 청죽과 국화는 미묘한 법을 선양하도다.”(風柯月渚 顯露眞心 翠竹黃花 宣明妙法)라는 구절로 법안가풍을 삼는다. 또 전강스님은 “국화와 청죽은 미묘한 법을 선양하고, 바람에 나뭇가지와 물가에 달은 진심을 드러내도다. 꾀꼬리는 울고 제비가 지저귀며 항상 실상을 설법하고, 일체 유정은 비로자나이고 모든 무정이 화장세계로다.”(黃花翠竹宣明妙法 風柯月渚顯露眞心 鶯吟燕語常談實相 頭頭毘盧物物華藏)라고 읊으며, 두두와 물물을 비로자나와 연화장세계로 확장하고 있다. 후대 선가는 혜충국사의 견해를 지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국사의 견해는 아래와 같다.
선객이 또 물었다. “고덕이 말씀하시기를, ‘푸르고 푸른 청죽은 모두 진여이고, 울울창창한 국화는 반야가 아님이 없다.’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칭찬하지 않고 삿된 말이라 하고, 또 어떤 사람은 확신하며 불가사의하다고 말합니다.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又問: “古德曰 ‘靑靑翠竹, 盡是眞如; 鬱鬱黃花, 無非般若.’ 有人不許, 是邪說; 亦有人信, 言不可思議. 不知若爲?”)
국사가 말씀하셨다. “이는 어쩌면 보현이나 문수와 같은 대인의 경계이며, 모든 범부나 소인이 믿고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모두는 대승요의경의 뜻과 부합하나니, 그러므로 화엄경에 말씀하시기를, ‘불신이 법계에 충만하여 두루 일체 중생 앞에 나타나도다. 인연 따라 감응하여 두루 이르지 않음이 없지만 항상 여기 보리좌에 안좌하셨느니라.’라고 하셨다. 청죽이 이미 법계를 벗어나지 않으니 어찌 법신이 아니겠는가? 또 마하반야경에 말씀하시기를, ‘색이 갓이 없기 때문에 반야도 갓이 없느니라.’라고 하였다. 국화도 이미 색상을 벗어나지 않으니 어찌 반야가 아니겠는가? 이는 심원한 말씀이다. 성찰하지 못하는 이는 염두에 두기가 어렵도다.”(師曰 “此蓋是普賢文殊大人之境界, 非諸凡小而能信受. 皆與大乘了義經意合. 故華嚴經云 ‘佛身充滿於法界, 普現一切群生前, 隨緣赴感靡不周, 而恒處此菩提座.’ 翠竹旣不出於法界, 豈非法身乎? 又摩訶般若經曰 ‘色無邊, 故般若無邊.’ 黃花旣不越於色, 豈非般若乎? 此深遠之言, 不省者難爲措意.”)
제불이 한 왜소한 중생의 몸 안에서 성도하고 한량없는 중생을 교화하지만, 그 왜소한 중생은 알지 못하고 알아차리지 못한다. 다만 범부와 성인이 동체가 되어 전이하는 형상이 없으며, 섬진의 안에서 나와 남이 동체가 된다.(諸佛成道 在一小衆生身中 化無量衆 其彼小衆生不知不覺 只爲凡聖同體 無移轉相 纖塵之內 自他同體)
이 세계는 세계성취품에 의하면 일체세계해一切世界海와 일체중생해一切衆生海 일체제불해一切諸佛海 일체법계해一切法界海 등 무량세계해無量世界海가 있고, 또 인허隣虛와 같은 극미한 세계가 있다. 이 인허는 안이 없기 때문에 밖이 없고, 무량세계해는 밖에 없기 때문에 안이 없다. 이를 의거하면 개미나 매미도 안과 밖이 없으며, 이 때문에 그 왜소한 몸 안에서도 일체 제불이 팔상으로 성도할 수 있다. 하물며 육척장신인 나의 몸 안에서야 다시 말할 것이 있겠느냐. 나의 이 일신一身이 바로 일체제불해이고, 일체법계해이며, 청정한 불국토이다. 만일 이 정토를 청정하게 주지住持하지 못한다면 어찌 모든 부처님께 부끄럽지 않으랴.
7. 청량국사의 민동평등泯同平等과 즉경즉불卽境卽佛
제명 중에 민동평등이나 즉경즉불은 일상으로 듣기는 매우 어려운 용어이다. 이 글의 주제는 제명 그대로 민동평등과 즉경즉불 그리고 시경작불是境作佛이다. 즉경즉불과 시경작불은 곧 즉심즉불卽心卽佛과 시심작불是心作佛을 뒤집어놓은 것이다. 출처는 어디에 있는가?
청량국사는 화엄경을 해석하는 화엄경소의 장석경의將釋經義 중에서 10개 문을 펼쳐놓았다. 곧 첫째 교기인연教起因緣이고, 둘째 장교소섭藏教所攝이며, 셋째 의리분제義理分齊이고, 넷째 교소피기教所被機이며, 다섯째 교체천심教體淺深이고, 여섯째 종취통국宗趣通局이며, 일곱째 부류품회部類品會이고, 여덟째 전역감통傳譯感通이며, 아홉째 총석경제總釋經題이고, 열째 별해문의別解文義이다. 다시 아홉째 총석경제를 10개 문으로 분별하였다. 하나는 통현득명通顯得名이고, 둘은 대변개합對辯開合이며, 셋은 구창의류具彰義類이고, 넷은 별석득명別釋得名이며, 다섯은 전연무궁展演無窮이고, 여섯은 권섭상진卷攝相盡이며, 일곱은 전권무애展卷無礙이고, 여덟은 이의원수以義圓收이며, 아홉은 섭귀일심攝歸一心이고, 열은 민동평등泯同平等이다.
열째 별해문의는 세주묘엄품부터 입법계품까지 경문에 대한 해석이고 보면, 아홉째 총석경제 중에 마지막 민동평등은 장석경의 전체의 귀결점歸結點이다. 그렇다면 제명 민동평등을 어떻게 해석해야 옳을까? 이아爾雅의 석고釋詁에 의하면 민泯은 진야盡也라 한다. 제불찰토諸佛刹土 진동허공盡同虛空이란 말도 있다. 곧 민동평등을 진동평등盡同平等으로 바꾸면 “다 함께 평등하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원각경을 원용하면 “정념과 망념이 해탈이 아님이 없고, 성법과 파법이 모두 열반을 일컬으며, 지혜와 우치가 죄다 반야가 되고, 보살과 외도가 성취한 법이 함께 보리이며, 무명과 진여가 다른 경계가 없고, 모든 계정혜와 음로치가 함께 범행이며, 중생과 국토가 한가지로 법성이고, 지옥과 천궁이 모두 정토가 되며, 유성과 무성이 가지런히 불도를 이룬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 즉경즉불과 시경작불은 아래에서 해석하고자 한다.
화엄경소1 : 열째 민동평등泯同平等이라는 것은 아직 깨닫지 못한 자를 위하여 자기 마음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만일 접촉하는 사물마다 모두 마음인 줄을 안다면 바야흐로 심성을 명백히 알 것이다. 이 때문에 범행품에 이르기를, “일체법이 바로 심자성心自性인 줄을 알면 혜신慧身을 성취하되 타인으로 인하여 깨달은 것이 아니다.”라고 하시니라. 그러나 지금 불법을 배우는 자는 다분히 내관內觀을 버리고 밖에서 치구하며, 참선을 익히는 자는 즐거이 외연外緣을 없애고 안으로 관조하니, 모두 한편으로 집착하여 함께 양변에 막혔다. 이미 마음과 경계가 如如하다면 바로 평등하여 걸림이 없다.
내가 일찍이 양쪽의 거울을 깨끗하게 닦고, 하나의 잔등盞燈을 비춰주며, 하나의 존용尊容을 놓아두었는데, 중중으로 거울에 등광燈光이 교차하고, 불상과 불상도 끝없이 나타났다.
무릇 마음과 경계가 서로 비춰주고, 근본지가 양쪽 거울에 들어감에, 마음 안에서는 끝없는 경계를 깨닫고, 경계 위에서는 난사한 마음을 명백히 알고 있으며, 마음과 경계가 중중무진한데 근본지가 이를 비춰주고 있다.(第十泯同平等者 爲未了者令了自心 若知觸物皆心 方了心性 故梵行品云 知一切法即心自性 則成就慧身不由他悟 然今學法之者 多棄內而外求 習禪之者 好亡緣而內照 並爲偏執 俱滯二邊 既心境如如則平等無礙 余曾瑩兩面鏡 鑑一盞燈 置一尊容 而重重交光 佛佛無盡見 夫心境互照 本智雙入 心中悟無盡之境 境上了難思之心 心境重重智照斯在)
해설: 화엄경소의 민동평등 전체 문장을 수소연의초에서 네 개 문단으로 나누었다. 위 글에서 민동평등을 “이미 마음과 경계가 여여하다면 바로 평등하여 걸림이 없다.”라고 해석했다. 마음과 경계가 다 함께 평등하다. 어째서 그러한가? 마음도 여여하고 경계도 여여하기 때문이다.
민동평등에는 어떤 신통이 있어서 아직 깨닫지 못한 자로 하여금 자기 마음을 깨닫게 할 수 있을까? 반야심경의 핵심이 “오온이 공적함을 비춰본다.”라고 한다면, 위 소문疏文의 핵심은 “만일 접촉하는 사물마다 모두 마음인 줄을 안다면” 또는 “일체법이 바로 심자성인 줄을 알면”이 될 것이다. 접촉하는 사물 곧 촉물觸物은 무엇인가? 문맥상 일체법과 같다. 청량국사는 이 촉물을 범행품을 인용하여 일체법으로 확대하여 정의한다. 6근六根은 눈과 귀 코 혀 몸 뜻이고, 6경六境은 빛깔과 소리 냄새 맛 감촉 법이며, 6식六識은 견문후상각지見聞嗅嘗覺知이다. 18계 중에 6근이 견문각지見聞覺知하는 6경이 곧 촉물이고 일체법이다. 전제조건이 충족하면 결과는 저절로 명백하다. 심성을 명백히 알고, 혜신을 성취한다.
“만일 모든 보살이 이와 같은 관행과 상응하고, 모든 법 가운데서 두 가지 견해를 내지 아니하면, 일체 불법이 즉시 현전할 수 있고, 초발심시에 곧바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수 있다. 일체법이 바로 심자성인 줄을 알면, 혜신을 성취하되 타인으로 인하여 깨달은 것이 아니다.”(若諸菩薩能與如是觀行相應 於諸法中不生二解 一切佛法疾得現前 初發心時即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知一切法即心自性 成就慧身 不由他悟) 모든 법 가운데서 두 가지 견해를 내지 않는 것이 민동평등이고, 일체법이 심자성인 줄을 아는 것이 바로 민동평등이다.
대심범부가 처음 발심하고 찰나제삼매에 들어가서 무상정각을 성취할 때, 삼세를 보지 않고 구세 십세를 평등세로 수용하며, 이 때문에 과거 불가설겁의 부처님과 함께 일시에 성불하고, 또한 미래 불가설겁의 부처님과 더불어 동시에 성불한다. 이것이 바로 민동평등의 구경처이다. 화엄세계는 부사의한 해탈경계이다. 민동평등도 또한 부사의하다.
수소연의초: 소문 중에 제10문 민동평등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 문은 앞의 9개 문을 총결하여 원융圓融한 것이니, 제8문 이의원수以義圓收는 바로 법사가 아는 바이고, 제9문 섭귀일심攝歸一心은 곧 선사가 숭상하는 바이다. 이 때문에 지금 이를 회통한다. 그 중에 삼분하니, 첫째는 법을 설한 것이고, 둘째 “내가 일찍이 양쪽의 거울을 깨끗하게 닦고” 이하는 비유로 설명說明한 것이니, 곧 제망의 비유를 빌려서 마음과 경계를 비유한 것이며, 셋째 “무릇 마음과 경계가 서로 비춰주고” 이하는 비유로 계합한 것이다. 그 뜻은 오직 한가지이나, 소문에 4개 절목이 있다. 처음에 양쪽의 거울과 잔등을 취합함에, 한 거울은 경계를 비유하고, 한 거울은 마음을 비유하며, 잔등은 근본지를 비유하니, 다만 명료한 뜻을 취한 것이다. “근본지가 양쪽 거울에 들어갔다.”라고 말한 것은 지성智性과 색성色性이 본래 둘이 없기 때문이며, 근본지는 일체법이 곧 심자성인 줄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지성이 마음에 들어가고 경계에 들어간다. “마음과 경계가 중중무진하다.”라고 말한 것은 양쪽의 거울이 하나가 되어 서로 비춰주는 것이고, “근본지가 이를 비춰주고 있다.”라는 것은 곧 하나의 잔등과 합쳐서 양쪽 거울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는 곧 근본지를 능조能照로 삼고, 마음과 경계 이법二法을 모두 소조所照로 삼는 것이니, 이 근본지를 말미암아 마음과 경계로 하여금 서로 원융하게 한다.(疏 第十泯同平等者 此門總融前九 八是法師所知 九即禪師所尚 故今會之 於中三 初法說 二余曾瑩兩面鏡下喻明 即借帝網之喻 以喻心境 三夫心境互照下 合喻 意唯一而文有四節 初取兩鏡及燈合之 一鏡喻境 一鏡喻心 燈喻本智 但取明了之義 言本智雙入者 智性色性本無二故 智知一切法 即心自性故 故此智性入心入境 言心境重重者 合兩面鏡互照 智照斯在 即合一燈雙入 是則以本智爲能照 心境二法皆爲所照 由斯本智令心境互融)
화엄경소2 : 또한 곧 마음이 경계의 부처를 명백히 알고, 바로 경계는 유심의 여래를 철견徹見하니, 마음과 부처가 중중무진하지만 본지의 각성은 하나이다.(又即心了境界之佛 即境見唯心如來 心佛重重而本覺性一)
수소연의초: 소문 중에 “또한 곧 마음이 경계의 부처를 명백히 알고” 이하는 둘째 양쪽 거울과 하나의 존용을 취하니, 취합한 존용을 진불眞佛에 비유한 것이다. 고금의 학인이 다만 즉심즉불卽心卽佛과 시심작불是心作佛만 알고, 즉경즉불卽境卽佛과 시경작불是境作佛은 알지 못한다. 이제 밝히노니, 여여를 부처로 삼으면, 마음과 경계가 모두 여여하다. 마음이 여여하여 곧 부처이면, 경계도 여여한데 어찌 부처가 아니겠는가. 또 마음에 심성이 있어서 마음이 부처를 지을 수 있다면, 경계도 심성心性이 있는데 어찌 부처를 짓지 못하랴. 마음으로 경계를 거두면 곧 마음 가운데 나타난 부처가 경계의 부처이고, 경계로 마음을 거두면 바로 경계 가운데 나타난 부처가 유심의 여래이다. “마음과 부처가 중중무진하다.”라고 한 것은 곧 양쪽 거울이 중중무진한 것이고, “본지의 각성은 하나이다.”라고 한 것은 바로 존용이 양쪽 거울에 들어간 것이다.(疏 又即心了境界之佛下 第二取兩鏡及一尊容 以合尊容喻眞佛 故今學人 只解即心即佛是心作佛 不知即境即佛是境作佛 今明以如爲佛 心境皆如 心如即佛 境如焉非 又心有心性 心能作佛 境有心性 安不作佛 以心收境 則心中見佛是境界之佛 以境收心 則境中見佛是唯心如來 心佛重重者 即兩鏡之重重 而本覺性一者 即尊容之雙入)
해설: 즉심즉불은 선가의 통용어이다. 출처는 부대사傅大士의 심왕명心王銘이고, 육조대사와 마대사에 이르러 널리 유통되었다. 화엄경 중에 “마음과 부처 그리고 중생이여, 이 셋에 차별이 없도다.”(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라는 구절과 그 의미가 상통한다. 즉심즉불의 즉即은 바로 그것이다. 즉심즉불即心即佛은 바로 그 마음이 바로 그 부처이다. 즉경즉불即境即佛은 바로 그 경계가 바로 그 부처이다. 시심작불是心作佛은 이 마음이 부처가 된다. 시경작불是境作佛은 이 경계가 부처가 된다.
만법은 하나로 돌아가는데,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느냐?(萬法歸一 一歸何處) 만법이나 제법 일체법은 동의어이다. 화엄경은 삼세간을 유정세간 기세간 지정각세간으로 본다. 일체법은 삼세간을 포괄하고, 유정과 무정을 포함한다. 6경을 위시하여 일체 경계가 바로 촉물이고, 또한 일체법이다. 유정과 무정이 모두 불성이 있어서 유정과 무정이 함께 성불하고 설법하며, 유성有性과 무성無性도 가지런히 불도를 이룬다. 무정과 무성은 경계이고 촉물이며 일체법이다. 만일 마음 또는 심자성이 있다면 어찌 불성이 없으랴.
“여여를 부처로 삼으면, 마음과 경계가 모두 여여하다. 마음이 여여하여 곧 부처이면, 경계도 여여한데 어찌 부처가 아니겠는가.” 어째서 여여를 부처로 보는가? 불생불멸不生不滅하고 불래불거不來不去하며 불변부동不變不動하니, 이를 여여라 한다. “부처님의 몸이 법계에 충만하시어, 널리 일체 중생의 앞에 나투시니라. 인연을 따라 감응하여 두루하지 않음이 없지만, 언제나 이 보리좌를 떠나지 않으셨느니라.”(佛身充滿於法界 普現一切衆生前 隨緣赴感靡不周 而恒處此菩提座)라고 하시니, 이도 또한 여여하다. 일체법도 또한 여여하여 가고 오는 행위가 없다. 나의 마음과 중생심이 불성과 차별이 없는 것은 본래 여여하기 때문이다.
고인이 이르기를, “나귀가 우물을 쳐다보는 것과 같다.”(如驢覻井) “우물이 나귀를 쳐다보는 것과 같다.”(如井覻驢)라고 하시니, 여기에 지견을 붙이면 그 경계가 같지 않지만, 지해知解을 붙이지 않으면 그 도리가 다르지 않다. 다시 여기에 “또한 곧 마음이 경계의 부처를 명백히 알고, 바로 경계는 유심의 여래를 철견한다.”라는 구절을 대입하면, “나귀가 우물의 부처를 쳐다보고, 우물이 나귀의 여래를 쳐다본다.” 또는 “나귀가 우물의 부처를 명백히 알고, 우물이 나귀의 여래를 철견한다.”라고 변용할 수 있다. 이것도 또한 민동평등이다.
“우물이 나귀를 쳐다보는 것과 같다.”라는 문구는 한참 격이 떨어진다. 천지현격이다.
“어떻게 일러야 허물이 없겠느냐?”
“나귀가 우물을 쳐다본다.”
“우물이 나귀를 쳐다본다.”
달이 우물을 쳐다보고, 우물이 달을 쳐다본다. 허공의 달이 정중월井中月을 쳐다보고, 정중월이 허공의 달을 쳐다본다. 비로자나불의 진법신眞法身을 허공의 달에 비유한 것이다.
화엄경소3 : 모두 이를 취하려 해도 얻을 수 없음에 곧 마음과 경계가 다 없어지고, 이를 비춰주어도 구경에 이를 수 없음에 바로 이체와 지혜가 서로 사무친다.(皆取之不可得 則心境兩亡 照之不可窮 則理智交徹)
수소연의초: 소문 중에 “모두 이를 취하려 해도 얻을 수 없다.” 이하는 셋째 쌍으로 앞의 첫째와 둘째를 원융하여 지관을 성취한다. 심경양망心境兩亡은 곧 지止이고, 이지교철理智交徹은 바로 관觀이다.(疏 皆取之不可得下 第三雙融前二 以成止觀 心境兩亡即止 理智交徹即觀)
화엄경소4 : 마음과 경계가 이미 이와 같으니, 경계와 경계가 서로 바라보고, 마음과 마음이 상호 연마硏磨하며, 천변만화하는 갖가지 양상이 모두 하나에 이르는 것이다. 단지 증득하여 상응하기만 하면 이를 불화엄이라고 일컫는다.(心境既爾 境境相望 心心互研 萬化紛綸皆一致也 唯證相應名佛華嚴矣)
수소연의초: 소문 중에 “마음과 경계가 이미 이와 같으니” 이하는 넷째 총결하여 일체를 예시한 것이다. 경계에도 많은 경계가 있고, 마음에도 많은 마음이 있으니, 각기 스스로 상대함에 낱낱이 서로 원융하다. 만화萬化가 모두 그러한 것은 곧 사례를 총결한 것이며, 단지 증득하여 상응하기만 하면 바로 마음과 경계가 다 과해果海와 동일하다. 모두 십문十門을 제명題名하고 분별하여 마치노라.(疏 心境既爾下 第四結例一切 境有多境 心有多心 各自相對一一互相融也 萬化皆然即總結例 唯證相應 則泯同果海也 總題十門分別竟)
8. 원각경의 무정성불
원각경 유통분 현선수보살장에 “선남자야, 이 경은 오직 여래의 경계만을 드러내고, 오로지 제불여래만이 끝까지 펼쳐서 말할 수 있느니라.(善男子 是經唯顯 如來境界 唯佛如來 能盡宣說)”라고 하시니, 원각경에서 선설한 법문은 여래경계 곧 청정원각이다.
서분에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바가바께서 신통대광명장삼매정정에 드시니, 일체 여래께서 광명으로 장엄하여 주지하시고, 모든 중생의 청정한 근본각지이며, 몸과 마음이 적멸하여 평등한 본제이다. 시방세계에 원만하여 불이를 수순하시며, 불이의 경계에서 일체 정토를 나투시니라.(如是我聞 一時婆伽婆 入於神通 大光明藏 三昧正受 一切如來 光嚴住持 是諸衆生 清淨覺地 身心寂滅 平等本際 圓滿十方 不二隨順 於不二境 現諸淨土)”라고 하시니, 이는 청정한 원각의 각체이다.
청정혜보살장에서 “선남자야, 일체 장애가 곧 구경각이니, 정념과 망념이 해탈이 아님이 없고, 성법과 파법이 모두 열반을 일컬으며, 지혜와 우치가 죄다 반야가 되고, 보살과 외도가 성취한 법이 함께 보리이며, 무명과 진여가 다른 경계가 없고, 모든 계정혜와 음로치가 함께 범행이며, 중생과 국토가 한가지로 법성이고, 지옥과 천궁이 모두 정토가 되며, 유성과 무성이 가지런히 불도를 이루니, 일체 번뇌가 구경의 해탈이다. 법계해의 지혜로 조견하면 모든 형상이 마치 허공과 같다. 이를 여래의 수순각성이라 일컫느니라.(善男子 一切障礙 即究竟覺 得念失念 無非解脫 成法破法 皆名涅槃 智慧愚癡 通爲般若 菩薩外道 所成就法 同是菩提 無明眞如 無異境界 諸戒定慧 及婬怒癡 俱是梵行 衆生國土 同一法性 地獄天宮 皆爲淨土 有性無性 齊成佛道 一切煩惱 畢竟解脫 法界海慧 照了諸相 猶如虛空 此名如來 隨順覺性)”라고 하시니, 이는 청정한 원각의 덕용이다.
법계해의 지혜로 모든 형상을 조견하면, 모든 형상이 마치 허공과 같다. 이는 총상이고, 나머지는 모두 별상이다. 이 총상으로 인하여 별상이 성립한다. 별상 중에 첫째 일체 장애가 곧 구경각이고, 마지막 일체 번뇌가 구경의 해탈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일체 장애와 해탈이 곧 구경각이고, 일체 번뇌와 보리도 구경의 해탈이다. 장애와 번뇌가 같고, 구경각과 구경 해탈이 동의어이다. 그래서 중간의 9개 대구도 또한 모두 구경각이 되고 구경 해탈이 된다.
중생과 국토가 한가지로 법성이라 한다. 중생은 유정이고 국토는 무정이다. 원각경은 법성이란 말은 있으나 불성이란 말은 나오지 않는다. 이를 의거하면 유성 무성은 법성이 있고 법성이 없는 것이라 해석해야 옳을 것이다. 그런데 일체 만법 중에 법성이 없는 법도 있는가? 없다. 그래서 유성 무성의 성은 불성 또는 각성覺性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유성 무성은 유정 무정과 같고, 유성무성 제성불도는 유정무정 개유불성皆有佛性과 같으며, 중생과 국토가 동일한 법성이란 언구도 또한 이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9. 십이처계十二處界 무정설법도無情說法圖
정식이 있으면 유정이라 하고, 정식이 없으면 무정이라 한다. 정식이 작용하면, 눈으로 색상을 보고, 귀로 소리를 들으며, 코로 냄새를 맡고, 혀로 맛을 보며, 몸으로 감촉을 느끼고, 뜻으로 법을 안다. 정식이 작용하지 않으면 어떠한가?
관세음보살의 관세음觀世音은 무슨 뜻인가? 세간의 음성을 본다. 소리를 귀로 볼까? 아니면 눈으로 볼까? 6식과 6진의 용어를 차용하면 견성見聲이 된다. 눈으로 소리를 보고(眼見聲), 귀로 소리를 보며(耳見聲), 코로 소리를 보고(鼻見聲), 혀로 소리를 보며(舌見聲), 몸으로 소리를 보고(身見聲), 의식으로 소리를 본다(意見聲). 이것이 회호하면 다시 서로 섭입한다는 것이다. 이 경우는 무한하게 많다.
6근이 6진을 인식하는 작용 견문후미촉지見聞嗅味觸知를 6식이라 말한다. 그런데 6진과 6식 중에 미와 촉이 겹친다. 이에 미를 상嘗으로, 촉을 각覺으로 대체했다. 견문각지見聞覺知의 각이 그러하다. 견문각지는 견문후상각지見聞嗅嘗覺知의 약어이며, 각은 촉의 뜻과 동일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고인도 이미 대체해서 썼다. 십이처계十二處界 무정설법도無情說法圖는 아래와 같다. 6식의 견見과 문聞, 후嗅와 상嘗, 각覺과 지知 등을 입정入定과 출정出定, 또는 출정과 입정으로 대체하여 읽으면 화엄경 현수품을 독송하는 것과 같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眼見色 耳聞聲 鼻嗅香 舌嘗味 身覺觸 意知法
眼根入定色塵 耳根出定聲塵, 鼻根入定香塵 舌根出定味塵, 身根入定觸塵 意根出定法塵
6근과 6진을 서로 바꾸어도 좋다. 다음과 같다.
色塵入定眼根 聲塵出定耳根, 香塵入定鼻根 味塵出定舌根, 觸塵入定身根 法塵出定意根
眼見色 耳聞聲 鼻嗅香 舌嘗味 身覺觸 意知法
耳見色 鼻聞聲 舌嗅香 身嘗味 意覺觸 眼知法
鼻見色 舌聞聲 身嗅香 意嘗味 眼覺觸 耳知法
舌見色 身聞聲 意嗅香 眼嘗味 耳覺觸 鼻知法
身見色 意聞聲 眼嗅香 耳嘗味 鼻覺觸 舌知法
意見色 眼聞聲 耳嗅香 鼻嘗味 舌覺觸 身知法
眼見法 耳聞色 鼻嗅聲 舌嘗香 身覺味 意知觸
耳見法 鼻聞色 舌嗅聲 身嘗香 意覺味 眼知觸
鼻見法 舌聞色 身嗅聲 意嘗香 眼覺味 耳知觸
舌見法 身聞色 意嗅聲 眼嘗香 耳覺味 鼻知觸
身見法 意聞色 眼嗅聲 耳嘗香 鼻覺味 舌知觸
意見法 眼聞色 耳嗅聲 鼻嘗香 舌覺味 身知觸
眼見觸 耳聞法 鼻嗅色 舌嘗聲 身覺香 意知味
耳見觸 鼻聞法 舌嗅色 身嘗聲 意覺香 眼知味
鼻見觸 舌聞法 身嗅色 意嘗聲 眼覺香 耳知味
舌見觸 身聞法 意嗅色 眼嘗聲 耳覺香 鼻知味
身見觸 意聞法 眼嗅色 耳嘗聲 鼻覺香 舌知味
意見觸 眼聞法 耳嗅色 鼻嘗聲 舌覺香 身知味
眼見味 耳聞觸 鼻嗅法 舌嘗色 身覺聲 意知香
耳見味 鼻聞觸 舌嗅法 身嘗色 意覺聲 眼知香
鼻見味 舌聞觸 身嗅法 意嘗色 眼覺聲 耳知香
舌見味 身聞觸 意嗅法 眼嘗色 耳覺聲 鼻知香
身見味 意聞觸 眼嗅法 耳嘗色 鼻覺聲 舌知香
意見味 眼聞觸 耳嗅法 鼻嘗色 舌覺聲 身知香
眼見香 耳聞味 鼻嗅觸 舌嘗法 身覺色 意知聲
耳見香 鼻聞味 舌嗅觸 身嘗法 意覺色 眼知聲
鼻見香 舌聞味 身嗅觸 意嘗法 眼覺色 耳知聲
舌見香 身聞味 意嗅觸 眼嘗法 耳覺色 鼻知聲
身見香 意聞味 眼嗅觸 耳嘗法 鼻覺色 舌知聲
意見香 眼聞味 耳嗅觸 鼻嘗法 舌覺色 身知聲
眼見聲 耳聞香 鼻嗅味 舌嘗觸 身覺法 意知色
耳見聲 鼻聞香 舌嗅味 身嘗觸 意覺法 眼知色
鼻見聲 舌聞香 身嗅味 意嘗觸 眼覺法 耳知色
舌見聲 身聞香 意嗅味 眼嘗觸 耳覺法 鼻知色
身見聲 意聞香 眼嗅味 耳嘗觸 鼻覺法 舌知色
意見聲 眼聞香 耳嗅味 鼻嘗觸 舌覺法 身知色
眼見色․聲․香․味․觸․法, 眼聞色․聲․香․味․觸․法, 眼嗅色․聲․香․味․觸․法, 眼嘗色․聲․香․味․觸․法, 眼覺色․聲․香․味․觸․法, 眼知色․聲․香․味․觸․法.
耳見色․聲․香․味․觸․法, 耳聞色․聲․香․味․觸․法, 耳嗅色․聲․香․味․觸․法, 耳嘗色․聲․香․味․觸․法, 耳覺色․聲․香․味․觸․法, 耳知色․聲․香․味․觸․法.
鼻見色․聲․香․味․觸․法, 鼻聞色․聲․香․味․觸․法, 鼻嗅色․聲․香․味․觸․法, 鼻嘗色․聲․香․味․觸․法, 鼻覺色․聲․香․味․觸․法, 鼻知色․聲․香․味․觸․法.
舌見色․聲․香․味․觸․法, 舌聞色․聲․香․味․觸․法, 舌嗅色․聲․香․味․觸․法, 舌嘗色․聲․香․味․觸․法, 舌覺色․聲․香․味․觸․法, 舌知色․聲․香․味․觸․法.
身見色․聲․香․味․觸․法, 身聞色․聲․香․味․觸․法, 身嗅色․聲․香․味․觸․法, 身嘗色․聲․香․味․觸․法, 身覺色․聲․香․味․觸․法, 身知色․聲․香․味․觸․法.
意見色․聲․香․味․觸․法, 意聞色․聲․香․味․觸․法, 意嗅色․聲․香․味․觸․法, 意嘗色․聲․香․味․觸․法, 意覺色․聲․香․味․觸․法, 意知色․聲․香․味․觸․法.
2021년 9월 8일 길상묘덕 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