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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타나식과 나 그리고 가상인간
눈 덮인 들길을 지나가는데
내키는 대로 걸어가서는 안 된다네.
오늘 아침 내가 지나간 자취는
마침내 뒷사람이 자나갈 길이 되니까.
不須胡亂行 今朝我行跡 遂作後人程
이 시는 조선시대 후기 임연당臨淵堂 이양연李亮淵(1771~1853)의 천설야穿雪野란 시이다. 넓은 들판에 눈이 수북이 쌓이면 옛길을 정확하게 찾아서 밟아나가기가 매우 어렵다. 주변의 경관에 밝은 사람이라야 비로소 옳게 길을 찾아나갈 수 있다.
불교는 어렵다. 공부를 하지 않은 사람도 어렵고, 공부한 사람도 또한 어렵다. 10년 20년 또는 60년을 공부한 사람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이다. 불교는 특히 용어가 어렵다. 해심밀경의 아타나식도 그 의미를 정확하게 아는 이가 매우 드물다. 만일 통현장자가 그 진면목을 밝게 드러내지 않았다면 여전히 눈 덮인 고로古路의 신세를 면치 못했을 수도 있다.
제명을 “아타나식과 나 그리고 가상인간”이라 명명했다. 이 세간은 모두 대대가 있다. 출세간은 대대가 끊어져서 없지만, 세간을 위하여 버리지 않는다. 묘각위나 불지의 부처님을 제외하면 등각위의 보살을 위시하여 나머지 일체를 중생이라 한다. 이 부처와 중생의 대대를 원각과 환화幻化 또는 정식淨識과 염식染識, 진식眞識과 망식妄識 등으로 나눌 수 있고, 이를 아타나와 가상인간의 대대로 볼 수도 있다. 그러면 나는 어디에 위치하는가?
1. 나는 무엇인가?
세상 사람들에게 묻는다.
나는 무엇인가?
몸과 마음의 합체이다.
몸은 무엇이고, 마음은 또 무엇인가?
원각경에 의하면, “무턱대고 사대를 자기 몸의 형상이라 인식하고, 육진과 반연한 환영幻影을 자기 마음의 모습이라 한다.”(妄認四大 爲自身相 六塵緣影 爲自心相)라고 정의한다.
또 몸을 “이 몸은 필경 실체가 없지만, 화합하여 형상이 이루어진 것이라 진실로 허깨비와 같으며, 네 가지 반연이 임시로 화합하여 거짓으로 육근이 있다.”(此身畢竟無體 和合爲相 實同幻化 四緣假合 妄有六根)라고 말하고, 마음을 “육근과 사대가 안과 밖에서 합하여 이루어지면 거짓으로 반연한 기운이 있고, 그 가운데 쌓여서 모이면 반연한 형상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가명으로 마음이라 한다.”(六根四大 中外合成 妄有緣氣 於中積聚 似有緣相 假名爲心)라고 정의하기도 한다.
다시 연이어, “선남자야, 이 허망한 마음은 만일 육진이 없으면 남아 있을 수 없고, 사대를 나누고 쪼개도 육진을 얻을 수 없다. 이 가운데 반연한 육진이 제각기 흩어져 없어지게 되면 필경에는 반연한 마음도 찾아볼 수 없다.”(善男子 此虛妄心 若無六塵 則不能有 四大分解 無塵可得 於中緣塵 各歸散滅 畢竟無有 緣心可見)라고 부연한다.
감산덕청 선사는 그의 원각경직해圓覺經直解에서 아래와 같이 해설하고 있다. 단지 사대가 임시로 합성한 환신을 자기 몸이라 인식하고, 육진을 반연한 그림자인 망상 연려심을 무턱대고 진심이라 인식한다.(但認四大假合之幻身爲己身 妄認攀緣六塵影子妄想緣慮之心爲眞心)
“육근과 사대가 안과 밖에서 합하여 이루어지면” 이하는, 관심의 방편을 보인 것이다. 육근은 안이 되고 사대는 밖이 되어 육진을 조성하는 것이고, 육근과 육진이 화합하여 식이 그 가운데서 생기기 때문에 합하여 이루어졌다고 말한 것이다. “거짓으로 반연한 기운이 있고” 이하는 마음이 가상임을 보인 것이다. 이른바 앞에 나타난 마음은 바로 망상일 따름이고 진심이 아니다.(此示觀心之方便也 六根爲內 四大爲外 即所造六塵 以根塵和合 識生其中 故云合成 妄有下 示心假也 謂現前之心 乃妄想耳 非眞心也)
어떻게 이를 아는가? 이 육식은 전오진을 반연하여 소멸하는 잔영이고, 그 반연한 기운이 모이고 쌓이면 임시로 가상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바로 망상의 그림자이며, 가명으로 마음이라 한다. 중생이 나날이 쓰지만, 단지 이 가상의 잔영을 마음이라 알고 있을 따름이다. 이제 이 마음을 살펴보건대 육진을 여의면 실체가 없다. 만일 가상을 진심이라 여기지 않기만 하면 곧 망상이 저절로 소멸하고, 바로 망상이 소멸하는 곳에 진심을 구하지 않아도 진심이 저절로 돌아온다. 이 때문에 가관假觀의 방편이 되는 것이다.(何以知之 以是六識攀緣前五塵 落謝影子 以緣氣聚積 似有假相 乃是妄想影子 假名爲心 以衆生日用 但認此假影爲心耳 今觀此心 離塵無體 苟不認假爲眞 則妄想自消 即妄想消處 不求眞而眞自復 故爲假觀之方便也)
원각경의 전칭은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이고, 화엄경은 대방광불화엄경이다. 이를 비교하면, 대방광원각과 대방광불이 본체가 되어 완벽하게 일치하고, 요의와 화엄은 작용이 되는데, 요의는 핵심만 간추려 1권으로도 충분하지만, 화엄은 갖가지 미묘한 꽃으로 장엄하여 그 분량을 헤아릴 수 없다. 현수국사의 화엄경탐현기에 의하면 항본恒本과 대본大本 그리고 상본上本 중본中本 하본下本 약본略本이 있다고 한다. 화엄경 60권 또는 80권은 약본에 상당한다. 원각경을 소화엄경小華嚴經이라 한다. 원각경을 의거하여 몸과 마음을 해석해 보고자 한다.
보안보살장 게송에 이르기를, “일체 중생의 몸과 마음은 모두 허깨비와 같다. 몸의 형상은 사대에 속하고, 마음은 육진에 의탁한다.”(一切諸衆生 身心皆如幻 身相屬四大 心性歸六塵)라고 했다. 인도와 서양은 만물의 구성요소로 지수화풍 사대를 주장하고, 우리나라나 중국 일본은 목화토금수 오행을 주장한다.
이 몸의 구성요소를 사대로 보는 이유는 무엇인가? 털과 가죽 살 뼈는 모두 땅으로 돌아가고, 땀과 침 피 오줌은 모두 물로 돌아가며, 따뜻한 기운은 불로 돌아가고, 호흡은 바람으로 돌아간다. 이 때문에 이 몸은 실체가 없어서 허깨비와 같다고 한 것이다. 다만 사대가 화합하여 육근이 있는 것을 몸이라 한다.
마음과 식은 같다. 육근이 몸이라면 육식은 마음이다. 어째서 “마음은 육진에 의탁한다.”라고 말했을까? 눈으로 색깔을 보고(眼見色), 귀로 소리를 들으며(耳聞聲), 코로 냄새를 맡고(鼻嗅香), 혀로 오미를 맛보며(舌嘗味), 몸으로 촉감을 느끼고(身覺觸), 의식으로 법을 안다(意知法). 색깔이 없으면 눈이 있어도 볼 수 없고, 소리가 없으면 귀가 있어도 들을 수 없다. 육식은 반드시 육진이 있어야 육근을 의거하여 작용할 수 있다. 경계가 없으면 마음도 없다는 말이 이와 같다.
감산 선사의 해설 중에 낙사落謝란 말이 나온다. 사謝에는 꽃이나 잎이 떨어지다, 또는 죽다 서거하다는 뜻이 있다. 낙사는 현존하는 육진이 그 작용을 다하고 과거 가운데로 사라져가는 것을 말한다.(落謝 謂現在之法 滅其作用 於過去中謝去) 세간법은 무상하여 상주하는 법이 없다. 매 찰나마다 없어지거나 사라진다. 이는 생주이멸 중 이멸移滅에 상당한다. 낙사 사멸謝滅 등이 이멸의 동의어이다.
“이 육식은 전오진을 반연하여 소멸하는 잔영이고,”(以是六識攀緣前五塵 落謝影子) 낙사영자를 소멸하는 잔영이라 번역했다. 색법色法이 11종이 있는데, 오근과 오진 그리고 무표색無表色이다. 이 오진을 취하여 전오진이라 말한 것이다. 육진과 통용한다. 육근이 육진을 반연하여 육식이 생긴다. 생명은 생로병사가 있고, 물질은 성주괴공이 있으며, 생각은 생주이멸이 있다. 가령 텔레비전에서 가수가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면, 눈으로 그 동작을 보고 귀로 그 소리를 듣는데, 찰나마다 바뀌며 사라져간다. 이멸의 사이가 바로 낙사영자이다. 그래서 소멸하는 잔영이라 번역한 것이다.
“그 반연한 기운이 모이고 쌓이면 임시로 가상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바로 망상의 그림자이며, 가명으로 마음이라 한다.”(以緣氣聚積 似有假相 乃是妄想影子 假名爲心) 반연한 기운은 소멸하는 잔영을 말하며, 망상의 그림자도 또한 그 의미가 같다. 나머지는 상하를 반복하여 읽으면 뜻이 저절로 통할 것이다. 이에 해설을 생략한다.
2. 원각圓覺과 환화幻化
천상천하에 유아독존唯我獨尊이란 말이 있다. 이를 유불독존唯佛獨尊이라 말할 수도 있다. 하늘 위와 하늘 아래, 욕계와 색계 무색계의 삼계 중에 오로지 나 홀로 높다. 이를 사방면事方面으로 보면 삼천대천세계 1대천세계 곧 10억 소세계가 한 부처님의 교화영역이기 때문이다. 이방면理方面으로 보면 유정과 무정이 모두 부처와 다르지 않다. 그래서 모든 생명체나 우리가 비생명체非生命體라 인식하는 무생물도 각 개체가 모두 유아독존인 것은 동일하다.
유식唯識의 유자도 유아독존과 동일한 양태를 갖고 있다. 곧 유식무경唯識無境 또는 유식무진唯識無塵이 그러하다. 오로지 식뿐이고 다른 경계는 없다. 18경계는 6근 6식 6진을 말한다. 유식무경과 유식무진은 동의어이다. 화엄경에서 말하는 유심소조唯心所造도 그 뜻이 다르지 않다. 일심一心을 세분화한 것이 팔식八識이기 때문이다.
원각경은 환화로 장엄한 경이다. 이 때문에 환화를 바로 알면 원각의 대의는 저절로 드러난다. 낮이 지나가면 밤이 오고, 밤이 지나가면 낮이 온다. 밤과 낮이 떨어져 있지 않다. 원각과 환화의 관계가 그러하다.
환화의 원의는 환술사가 변화시켜 실체가 없는 사물을 보여주는 것을 말한다. 입보리행론入菩提行論 지혜품에 이르기를, “예를 들면 고대의 환사가 주술로 나무나 돌 등 물질에 가지加持하면 사람이나 코끼리 말 등 환화 물이 환현幻現하여 나옴과 같이, 다만 나타나는 환상의 인연이 없어지지 않으면 이 같은 환상도 멸함 없이 존재하나, 일단 인연이 흩어지면 환상도 곧 없어진다.”라고 이른 것과 같다. 해심밀경에도 이와 같은 비유가 있다.
원각경에 의거하여 원각과 환화의 관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선남자야, 무상법왕은 큰 다라니문이 있으니 이름이 원각이며, 일체 청정한 진여와 보리 열반과 바라밀을 내보내서 보살을 가르쳐 주시니라. 일체 여래께서 본래 일으킨 인지는 모두 청정각상을 원조함에 의하여 영원히 무명을 끊고 바야흐로 불도를 이루셨느니라.”(善男子 無上法王 有大陀羅尼門 名爲圓覺 流出一切 清淨眞如 菩提涅槃 及波羅密 教授菩薩 一切如來 本起因地 皆依圓照 清淨覺相 永斷無明 方成佛道)
“선남자야, 일체 중생의 갖가지 환화는 모두 여래 원각의 묘심에서 나오느니라. 비유하면 허공꽃이 허공을 좇아서 있지만, 허깨비와 같은 허공꽃은 비록 사라질지라도 허공의 체성은 무너지지 않는 것과 같이, 중생의 환심도 또한 환화에 의해 사라지지만, 모든 환화가 남음이 없이 사라질지라도 원각의 묘심은 요동하지 않느니라.”(善男子 一切衆生 種種幻化 皆生如來 圓覺妙心 猶如空花 從空而有 幻花雖滅 空性不壞 衆生幻心 還依幻滅 諸幻盡滅 覺心不動)
이상에서 확인하는 바와 같이, 원각은 진여와 보리 열반 바라밀 등을 내보내기도 하고, 중생의 갖가지 환화가 원각의 묘심에서 나오기도 한다. 범성凡聖과 염정染淨에 인연 따라 자재하며 일체 사법事法을 성취하니, 이는 원각의 묘용을 밝힌 것이다. 원각은 한 마음이다. 이 일심一心을 인위를 취하여 말하면 여래장如來藏이라 이르고, 과위를 취하여 말하면 원각이라 일컫는다. 이를 대원만각大圓滿覺 또는 묘각명심妙覺明心 일진법계一眞法界 여래장청정진심如來藏清淨眞心 원각묘심圓覺妙心이라 호칭하기도 한다.
“사의할 수 없기 때문에 묘심이라 호칭한다. 천태종의 교판에 의거하면, 별교 계통은 여래의 진심을 묘심이라 하고, 원교는 바로 범부의 망심을 묘심이라 한다.”(不可思議 故稱妙心 依天台宗之判敎 別敎係以如來之眞心爲妙心 圓敎則直以凡夫之妄心爲妙心) 여기서는 교판을 취하지 않고 묘심의 뜻만 취한 것이다.
선문에 언하대오言下大悟라는 말이 있다. 교문도 또한 그러하다. 그 사례는 부지기수이다. 부처님의 제자들은 대부분 설법을 듣고 대오했다. 49년 동안 설하신 일체 법문은 모두 각체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원각경의 사례만 들면 아래와 같다.
원각경 유통분 현선수보살장에 “선남자야, 이 경은 오직 여래의 경계만을 드러내고, 오로지 제불여래만이 끝까지 펼쳐서 말할 수 있느니라.(善男子 是經唯顯 如來境界 唯佛如來 能盡宣說)”라고 하시니, 원각경에서 선설한 법문은 여래경계 곧 청정원각이다. 이를 문수보살장과 보현보살장에서 상세히 밝혀놓았다.
“일체 여래께서 본래 일으킨 인지는 모두 청정각상을 원조함에 의하여 영원히 무명을 끊고 바야흐로 불도를 이루셨느니라.”(一切如來 本起因地 皆依圓照 清淨覺相 永斷無明 方成佛道)
인지因地와 과지果地를 인위因位와 과위果位라 말하기도 한다. 후자가 불지위佛地位 또는 불과위佛果位이고 보면, 인지나 인위는 십신 이후부터 묘각위에 이르기 이전까지 보살의 전체 수행 계위階位를 말한다. 일체 여래의 성불 이전 보살위의 인행은 모두 원각 묘심의 광명을 의거하여 다시 청정 적멸한 각체를 조견照見함으로써 영원히 무명을 끊고 법신을 증득하신 것이다.
“선남자야, 여래는 인지에서 원각을 닦는 분이다. 이 몸과 마음이 공화인 줄 알면 곧 윤전이 없으며, 또한 몸과 마음이 그러한 생사를 받을 일도 없으리니, 조작하기 때문에 없는 것이 아니고 본래 자성이 없기 때문이니라.”(善男子 如來因地 修圓覺者 知是空花 即無輪轉 亦無身心 受彼生死 非作故無 本性無故) 이 글에 대한 감산스님의 해설은 아래와 같다.
“이것은 돈오묘문을 분명히 보이고 청정각상을 원조한 공을 드러낸 것이니, 오로지 지시공화知是空花의 알 지知자 하나뿐이다. 이른바 모든 부처님의 인지 수행은 오직 원각자성의 광명으로 자기 마음의 적멸한 각체를 원조하는 것뿐이다. 일념에 몸과 마음의 세계가 허공 가운데 환화와 같아서 본래 있지 않은 줄을 분명히 알면 바로 생사가 그 자리에서 당장 끊어진다. 몸과 마음이 본래 공적하기 때문에 생사를 받을 만한 어떤 것도 없다. 이것은 조작한 이후에 없는 것이 아니고, 단지 본래 자성이 애초에 없기 때문이다.”(此的示頓悟妙門 以顯圓照之功 唯一知字也 謂諸佛因地修行 唯以圓覺自性光明 圓照自心寂滅之體 一念了知身心世界 如空中華 本來不有 則生死當下頓斷 以身心本空故 無可受生死者 此非造作而後無 特以本來自性元無故也)
“선남자야, 환화인 줄 알면 곧 여의므로 방편을 쓰지 않으며, 환화를 여의면 바로 정각이라 또한 점차도 없느니라.”(善男子 知幻即離 不作方便 離幻即覺 亦無漸次)
이 보현보살장의 지환즉리 이환즉각은 문수보살장의 지시공화知是空華 즉무윤전即無輪轉과 함께 원각경의 백호광명이다. 이는 바로 일심을 돈오하고 찰나도 옮기지 않고 그 자리에서 돈증한다. 원각경의 육계정상은 무엇인가? 본기인지本起因地 원조각상圓照覺相이다.
원조각상은 삼매경계라 그만 두자. 지환은 지시공화와 동의어이다. 이 몸과 마음이 공화인 줄을 아는 것은 범부의 정식으로도 그다지 어렵지 않다. 그런데 어째서 아는 찰나에 돈오하고 돈증하지 못하느냐?
망념이 일어남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로지 알아차림이 느림을 두려워할지니라.(不怕念起 唯恐覺遲) 보조국사의 수심결에 있는 말이다. 알아보다 알아듣다 알아차리다 등은 견문각지의 각이다. 일체 망념은 알아차림을 두려워한다. 망상하는 줄을 알기만 하면 찰나에 사라진다. 망념이 암흑이라면 각지는 광염이기 때문이다.
무명이나 망념 번뇌 정계情計 정집情執 그리고 환화는 크게 보면 동일한 개념이다. 환화를 번뇌로 대치하고 살펴보자. 번뇌를 거칠고 미세한 관점에서 추번뇌와 세번뇌로 양분한다. 거친 번뇌는 육근으로 견문각지할 수 있다. 견문각지하는 찰나에 소멸한다. 미세한 번뇌는 선정에 들어가지 않으면 각지할 수 없다. 예를 들면 먼지가 그러하다. 이전 글에서 먼지의 최극소 개념인 인허 또는 총상진의 크기를 규명한 바 있다.
“원자가 1만분의1mm이고, 원자핵은 1조분의1mm이며, 소립자는 1만조분의1mm라고 한다. 대략 17조분의1mm인 총상진은 원자핵보다는 작고 소립자보다는 더 크다. 명목상 그러하다.” 최초 번뇌의 크기가 소립자 또는 총상진과 같다면, 그 최초 번뇌를 각지하는 찰나가 돈오돈증이며, 곧바로 그 자리에서 근본무명이 소멸하고 무상정등정각을 증득할 수 있다.
사의하기 어려운 수많은 불국토를
모두 손바닥 위에 놓아도 흔들리지 않네.
삼세간이 환화와 같은 줄 분명히 알고자
보살이 이로써 맨 처음 발심하였다네.
欲以難思諸佛刹 悉置掌中而不動 了知一切如幻化 菩薩以此初發心
위 게송은 화엄경 십주품十住品에 있다. 사의하기 어려운 수많은 불국토를 어떻게 해야 두 손바닥 위에 올려놓아도 전혀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까? 삼세간이 환화와 같은 줄 분명히 알기만 하면 그러할 수 있다. 보살의 초발심 공덕이 이와 같다.
“그 무구칭이 이미 이러한 생각을 하고 좌상에서 일어나지 않고 삼마지에 들었으며, 이와 같은 수승한 신통을 일으키고 재빠르게 묘희세계를 단연코 취하여 오른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이 세계 안으로 들어왔다.”(其無垢稱既作是思 不起于床入三摩地 發起如是殊勝神通 速疾斷取妙喜世界 置于右掌入此界中) 무구칭은 유마거사이고, 정명淨名이라 번역하기도 한다. 위 원문은 현장법사가 번역한 설무구칭경說無垢稱經 관여래품觀如來品에 있다.
“선남자야, 원각자성은 자성이 없지만 자성이 있으며, 모든 자성을 따라 일어나지만 취할 것도 없고 증득할 것도 없느니라. 실상 가운데는 진실로 보살과 모든 중생이 없느니라. 무슨 까닭인가? 보살과 중생이 모두 환화이며, 환화는 소멸하기 때문에 취하고 증득할 것도 없느니라.”(善男子 圓覺自性 非性性有 循諸性起 無取無證 於實相中 實無菩薩 及諸衆生 何以故 菩薩衆生 皆是幻化 幻化滅故 無取證者)
보살과 중생만 환화인 것이 아니다. 생사와 열반, 범부와 제불도 함께 공화상이며,(生死與涅槃 凡夫及諸佛 同爲空花相) 일체 불세계도 또한 허공의 환화와 같다.(一切佛世界 猶如虛空花) 이 때문에 어떤 범부라도 자기 몸과 마음이 환화인 줄을 사무치게 각지하기만 하면 바로 오른손 위에 불국토를 올려놓을 수 있다.
3. 아타나식과 아뢰야식 그리고 심식
식을 말할 때 안식과 이식 비식 설식 신식을 전5식이라 일컫고, 심의식 중에 제6식을 의식이라 하고, 제7식을 의 또는 말나식이라 하며, 제8식을 심식 또는 장식이라 하고, 제9식을 진식이라 한다. 제8식을 염정으로 양분하여 염식을 제8식으로 보고, 정식을 제9식으로 보기도 하며, 또 심식과 아타나식 그리고 아뢰야식으로 삼분하기도 한다. 해심밀경이 그러하다. 정식은 범부의 정식情識도 있고 제9식 정식淨識도 있다. 문맥으로 판단하면 된다.
용어에 대한 정의는 명확해야 한다. 그런데 아타나에 대해서는 최소한 세 종류 다른 뜻이 있다. 첫째 제7식이고, 둘째 제8식 중에 하나이며, 셋째 제9백정식이다. 아타나식은 해심밀경 심의식상품에 나온다. 이 품명을 원측법사는 해심밀경소에서 성유식론成唯識論을 인용하고 있다. 심의식상心意識相에 대한 해설은 다음과 같다.
집기集起를 마음이라 명명하고, 사량思量을 의意라 명명하며, 요별了別을 식識이라 명명하니, 이것은 세 가지 다른 식이다. 이와 같은 세 가지 뜻은 비록 8식에 상통하나 승의를 따라서 드러낸 것이다. 제8식을 마음이라 명명한 것은 모든 법의 종자를 수집하고 모든 법을 일으키기 때문이고, 제7식을 의라 명명한 것은 제8식을 반연하여 항상 자세히 사량하고 나 따위로 삼기 때문이며, 나머지 여섯을 식이라 명명한 것은 여섯 가지 다른 경계에서 거칠게 움직여 사이가 끊어지고 분별하여 유전하기 때문이다. 상相은 체상 또는 상상相狀을 말하기도 한다.(集起名心 思量名意 了別名識 是三別識 如是三義 雖通八識 而隨勝顯 第八名心 集諸法種 起諸法故 第七名意 緣第八識 恒審思量 爲我等故 餘六名識 於六別境 麤動間斷 了別轉故 相謂體相 或是相狀)
제7식의 의意는 사량思量을 말한다. 요별了別은 직역하면 명백한 분별이 되겠지만, 분별 또는 인식으로 보아도 좋다. 그리고 아타나식을 제9식 백정식으로 해석한 것은 통현장자를 시원으로 삼는다.
광혜야, 이 식을 또한 아타나식이라 일컬으니, 무엇 때문이냐? 이 식은 몸을 쫓아 따라가고 집취執取하여 유지하기 때문이다. 또한 아뢰야식이라고 일컬으니, 무엇 때문이냐? 이 식은 몸을 받아들이고 갈무리하며 위안을 함께한다는 뜻을 연유하기 때문이다. 또한 마음이라 일컬으니, 무엇 때문이냐? 이 식은 빛깔 소리 냄새 맛 감촉 등을 쌓아놓고 성장시키기 때문이다.(廣慧 此識亦名阿陁那識 何以故 由此識於身隨逐執持故 亦名阿賴耶識 何以故 由此識於身攝受藏隱同安危義故 亦名爲心 何以故 由此識色聲香味觸等積集滋長故)
해설: 유식의 근본경전은 해심밀경이며, 원측법사의 해심밀경소는 특히 유명하다. 이를 의거하여 아타나식과 아뢰야식 그리고 심식을 해설하겠다. 아래와 같다.
해심밀경: 이 식을 또한 아타나식이라 일컬으니, 무엇 때문이냐? 이 식은 몸을 쫓아 따라가고 집취執取하여 유지하기 때문이다.(此識亦名阿陁那識 何以故 由此識於身隨逐執持故)
해심밀경소: 범어 아타나ādāna를 여기서 번역하면 집지라 일컫는데, 이른바 이 식이 몸을 좇아 따라가고 색근을 집수하여 실괴하지 않게 하며, 이 때문에 이 식을 설하여 집지라 한다.(梵云阿陀那 此翻名執持 謂由此識隨逐於身 執受色根 令不失壞 故說此識名爲執持)
해설: 집지를 집취하여 유지한다고 해석했다. 앞으로는 집지 그대로 쓰겠다. 색근은 오근五根 또는 오색근五色根이라 하며, 안근과 이근 비근 설근 신근 등을 말한다. 곧 눈과 귀 코 혀 몸 등이다. 종경록 47권을 인용한다.
“아타나란 여기서 집지라 일컬으니, 이 식은 제법의 종자를 집지할 수 있고, 색근과 근의처를 집수할 수 있으며, 또한 집취하고 결생하여 상속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이 식을 설하여 아타나라 일컬은 것이다.”(宗鏡錄四十七 阿陀那者 此云執持 爲此識能執持諸法種子 及能執受色根 及根依處 亦能執取結生相續 故說此識 名阿陀那) 아타나에 대해서는 뒤에서 자세히 밝히겠다.
해심밀경: 또한 아뢰야식이라고 일컬으니, 무엇 때문이냐? 이 식은 몸을 받아들이고 갈무리하며 위안을 함께한다는 뜻을 연유하기 때문이다.(亦名阿賴耶識 何以故 由此識於身攝受藏隱同安危義故)
해심밀경소: 범어 아뢰야ālaya를 여기서 번역하면 장藏이라 일컫는다. 장은 세 가지 뜻이 있으니, 하나는 능장이고, 둘은 소장이며, 셋은 집장이다. 지금 이 경을 의거하면 여러 가지 논과 동일하지 않다. 이른바 이 식은 유근신에서 그 6근을 섭수할 수 있고, 의지할 곳으로 삼아서 거기에 은장하며, 의지하는 몸과 안위를 함께하기 때문이며, 이는 곧 현식이 은장하여 의지하는 중이기 때문에 이름을 장이라 한다.(梵云阿賴耶 此翻名藏 藏有三義 一者能藏 二者所藏 三者執藏 今依此經 不同諸論 謂由此識 於有根身 能攝受彼 爲所依止 於彼藏隱 與所依身 同安危故 此即現識藏所依中故 名爲藏)
해설: 유식의 근본경전은 해심밀경이다. 무착보살의 섭대승론攝大乘論과 호법논사 등의 저술을 합편한 성유식론成唯識論이 모두 아뢰야를 능장 소장 집장의 세 가지 뜻으로 해석했다. 원측법사는 경의 본의를 따라 해석한 것이다. 현식은 7식의 이명 중에 하나이다. 제7칠식 말나식에 열 가지 명칭이 있다. 곧 7식七識 전식轉識 망상식妄相識 상속식相續識 무명식無明識 해식解識 행식行識 무외식無畏識 현식現識 지장식智障識 등이다.
해심밀경: 또한 마음이라 일컬으니, 무엇 때문이냐? 이 식은 빛깔 소리 냄새 맛 감촉 등을 쌓아놓고 성장시키기 때문이다.(亦名爲心 何以故 由此識色聲香味觸等積集滋長故)
해심밀경소: 범어 질다質多citta를 여기서 번역하면 마음이라 일컬으며, 거기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집기라 일컬으니, 제법의 종자를 수집하고 제법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성유식론 제5권의 설과 같다. 둘은 적집이라 일컬으니, 거기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 제법의 종자가 적집하는 바이기 때문이니, 섭론 제1권에 “갖가지 법이 종자를 훈습하여 적집하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둘째 밖에 여섯 경계가 적집하고 성장시키기 때문이다. 셋은 채집이라 일컬으니, 갖가지 반연하는 경계를 채집하기 때문이다. 이는 해심밀경 오온론과 같다. 지금 이 경을 의거하고 두 번째 뜻을 의거하며, 그래서 명칭을 마음이라 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 뜻이 있으니, 첫째 적집이고, 둘째 성장成長이다. 색깔 등의 경계가 적집하고 성장시키는 곳이기 때문이다.(梵音質多 此翻爲心 有其多義 一名集起 集諸法種 起諸法故 如成唯識第五卷說 二名積集 有其二義 一諸法種子所積集故 如攝論第一 由種種法熏習種子所積集故 二外六境界積集滋長故 三名採集 採集種種所緣境故 如深密經及五蘊論 今依此經 依第二義 故名爲心 此有二義 一者積集 二者滋長 由色等境之所積集及滋長故)
해설: 마음은 제8식에서 심식이라 한다. 해심밀경에서 아뢰야식을 섭수하고 은장한다고 하고, 심식을 적집하고 성장시킨다고 한다. 해절경解節經은 적집자장積集滋長을 생장生長이라 번역했다. 이를 의거하면 아뢰야식은 정태적이고 심식은 동태적인 면이 있다. 아래에서 심식과 아뢰야식 아타나식의 관계를 설명한다.
4. 아타나식에 대한 통현장자의 해석
화엄경론 회석에 해심밀경과 능가경에 대한 해설이 있다. 아래와 같다.
넷째 해심밀경은 불공不空 불유不有를 종취로 삼는다는 것은 여래가 유교有敎와 공교空敎를 설하신 후에 이 일부의 경교를 설하시고, 유무의 두 가지 소견을 화회하여 불공 불유의 종취를 삼은 것이니, 곧 제9식을 설하여 순정무염식이라 한다.(第四 解深密經 爲不空不有宗者 如來說於有教空教之後 說此一部之教 和會有無二見 爲不空不有 即說九識爲純淨無染識)
해설: 교종은 법상종과 법성종으로 양분할 수 있다. 해심밀경은 법상종의 소의경으로 유식 유가는 이를 근거한다. 해심밀경 심의식상품에서 아타나식 등을 설했지만, 이 품에 제9식이나 9식의 개념인 순정純淨 무염無染 백정白淨 등의 용어는 보이지 않는다. 이 품의 법문에서 제9식을 도출한 것은 전적으로 통현장자의 안목이다. 아래에서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가령 폭수가 흘러가며 온갖 파랑을 일으키거든 모든 파랑들이 폭수를 의지하는 것과 같이, 전5식이나 6식 7식 8식 등의 식은 모두 아타나식을 의지하기 때문이니, 저 파랑이 폭수를 의지하는 것과 같다. 예를 들면 해심밀경에 이르기를, “밝은 거울 표면과 같으니, 만일 어떤 하나의 그림자가 반연이 생겨서 나타나면 오직 한 그림자만 일어나고, 만일 두개의 그림자나 더 많은 그림자가 반연이 생겨서 나타나면 더 많은 그림자가 일어난다. 이 거울의 표면이 변하여 그림자가 되는 것이 아니고, 또한 그림자를 수용하거나 사라지게 할 수도 없다.”라고 한 것과 같다. 이것은 5식이나 6식 7식 8식이 의지하는 제9정식의 지위를 밝힌 것이다.(如瀑水流 生多波浪 諸波浪等 以水爲依 五六七八等識 皆以阿陀那識爲依故 如彼波浪以水爲依 如深密經云 如善鏡面 若有一影 生緣現前 唯一影起 若二若多影 生緣現前 有多影起 非此鏡面轉變爲影 亦無受用滅盡可得 此明五六七八識所依第九淨識處也)
해설: 직심直心을 직설直說하여 모든 중생이 알아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화엄경은 상상근기나 대심범부를 위하여 일심을 직설하셨다. 그런데 범부 또는 이승 삼승의 부류는 지혜가 없어서 비로자나불의 직설을 알아들을 수 없다. 그래서 부득이 방편을 쓰는 수밖에 없다. 일체 방편 중에 으뜸은 비유가 아닐까 한다. 허공과 여표월지如標月指 등은 모든 비유 중에 백미이다. 거울과 폭류도 또한 자주 등장한다.
심의식상품에 “비유한다면 대폭수가 흘러가는 것과 같다. 만일 어떤 하나의 파랑이 반연이 생겨서 나타나면 오직 한 파랑만 일어나고, 만일 두개의 파랑이나 더 많은 파랑이 반연이 생겨서 나타나면 더 많은 파랑이 일어난다. 그러나 이 폭수의 자류自類는 항상 흘러서 단절이 없고 다함이 없다.”(譬如大瀑水流 若有一浪生緣現前 唯一浪轉 若二若多浪生緣現前 有多浪轉 然此瀑水自類 恒流無斷無盡)라는 문장이 있다.
폭수瀑水는 사전에 의거하면 폭포수를 의미하고, 랑浪은 물결이나 이랑 파도를 뜻한다. 그런데 폭포수는 포말과 서로 어울리지만 파랑이나 물결과는 조합이 맞지를 않는다. 계곡폭류溪谷瀑流라는 말이 있고, 도월폭류경渡越瀑流經이란 경도 있다.
장식이란 폭류수여,
경계의 바람에 나부끼도다.
갖가지 식의 물결이 생기며,
상속하여 언제나 단절이 없도다.
藏識瀑流水 境界風所飄 種種識浪生 相續恒無斷
대승밀엄경大乘密嚴經에 있는 게송이다. 폭류수를 제8식 장식이라 단언하고 있다. 이 게송를 의거하면 폭수를 폭류수瀑流水라 보아도 또한 옳다. 유식 제15송을 여기서 인용한다.
모든 식의 의지처는 근본식이라,
오식도 반연을 따라 현전現前하도다.
함께 일어나기도 하고 일어나지 않기도 하니,
마치 파도가 바닷물을 의지하는 것과 같도다.
依止根本識 五識隨緣現 或俱或不俱 如濤波依水
“근본식이란 아타나식이니, 염정의 모든 식이 근본식에서 생기기 때문이다. 의지하는 것은 전6전식을 말하니, 근본식을 함께 친히 의지한다.”(論云 根本識者阿陀那識 染淨諸識生根本故 依止者謂前六轉識 以根本識爲共親依)라고 한 성유식론의 해석과 “마치 파도가 바닷물을 의지하는 것과 같도다.”(如濤波依水)라고 한 결구는 그 근거가 어디에 있을까?
나는 해심밀경의 “광혜야, 폭류와 같은 아타나식을 말미암아 의지하고 건립했기 때문이니라.”(廣慧 由似瀑流阿陁那識 爲依止 爲建立故)라고 한 구절을 그 근거로 삼고자 한다.
통현장자는 거울 또는 폭류를 아타나식 곧 제9식 진식으로 보고, 나머지 8식 전체를 물결로 본 듯하다. 그래서 “이것은 5식이나 6식 7식 8식이 의지하는 제9정식의 지위를 밝힌 것이다.”(此明五六七八識所依第九淨識處也)라고 단정했다. 비유 중에 거울과 폭류는 그 취지가 동일하다.
이를 의거하면, 해심밀경의 폭류와 거울의 비유는 통현장자가 아타나식을 백정식으로 삼는 근거가 된다고 판단할 수 있다.
또 이르기를, “이와 같은 보살은 비록 법주지를 인연하여 의지하고 건립하기 때문이다.”라고 하니, 이 경의 뜻은 식처識處에서 식체가 본래 오직 진지를 여의지 않음을 바로 밝혀주고자 하기 때문이다. 마치 저 폭류가 물의 체성을 여의지 않고 파랑을 일으키는 것과 같고, 또 밝은 거울이 그 정체淨體를 의지하여 분별하는 바 없이 많은 영상을 머금고 있지만 장애가 없는 것과 같으니, 있지만 언제나 없기 때문이다.(又云如是菩薩 雖由法住智 爲依止 爲建立故 此經意欲令於識處 便明識體 本唯不離眞智故 如彼瀑流 不離水體而生波浪 又如明鏡 依彼淨體 無所分別 含多影像不礙 有而常無故)
해설: 위 인용문 중에 일부가 생략되었다. 전문을 인용한다. “광혜야, 이와 같은 보살은 비록 법주지를 인연하여 의지하고 건립하기 때문에 심의식의 비밀에 좋은 솜씨가 있다. 그러나 모든 여래는 심의식에 대한 일체 비밀을 잘 아는 보살을 위하여 여기에서 그것을 가지런하게 시설하지는 않는다.”(廣慧 如是菩薩 雖由法住智 爲依止 爲建立故 於心意識秘密善巧 然諸如來不齊於此施設彼 爲於心意識一切秘密善巧菩薩)
그런데 문장이 매우 어렵다. 도인이 법안으로 읽어야 알 수 있는 경계이고, 범부의 육안은 전혀 감당할 수 없다. 이에 원측법사는 아래와 같이 후학에게 친절을 베풀었다.
“지전보살은 비록 법주지의 위력을 연유하여 심의식 중에 세속의 차별을 분명히 알지만, 여전히 심의식의 은밀한 승의에 대해서는 증득하여 알지 못한다. 이 때문에 세존이 선교보살을 위하여 여기에서 그것을 가지런하게 시설하지는 않는다.”(地前菩薩 雖由法住智力了知心意識中世俗差別 而未證解於心意識秘密勝義 是故世尊不齊於此施設彼爲善巧菩薩)라고 부연했다. 그 핵심은 심의식의 승의는 부사의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자기 마음에 나타나는 식상識相이 본체를 여의지 않고, 조작 없는 정지淨智에 나타나는 영상影相이 모두 나와 남 안과 밖 등에 집착이 없으며, 작용에 맡기고 지혜에 따르며 분별하는 바가 없다. 공교와 유교 두 가지 소견을 깨뜨려 불공과 불유의 종취를 삼는 것이다. 이 때문에 해심밀경 게송에 이르기를, “아타나식이여, 매우 깊고 미세하구나. 일체 종자가 폭수처럼 흘러가도다. 내가 범부에게 펼쳐서 말해주지 않나니, 아마도 저들은 분별 집착하여 나라고 여기리라.”라고 했다. 아타나식이 매우 깊고 미세하다고 한 것은 저 범부의 무리를 이끌고 식을 취하여 지혜를 이루어주고자 한 것이다.(如是自心所現識相 不離本體 無作淨智所現影相 都無自他內外等執 任用隨智 無所分別 以破空有二繫 爲不空不有 故深密經頌曰 阿陀那識甚深細 一切種子如瀑流 我於凡夫不開演 恐彼分別執爲我 阿陀那識甚深細者 引彼凡流 就識成智)
해설: 식상과 영상은 폭류와 거울의 비유를 말한 것이다. 게송 중에 아타나식의 심심세는 심심과 심세를 합치 것이다. 아래 문단에서 따로 자세히 구명하겠다.
해심밀경과 같이 제9 아타나식을 방편으로 시설한 그 뜻은 다른 목적이 있다. 이승의 부류는 오랫동안 생사를 싫어하므로 공을 닦아서 식을 없애고 바로 공적에 나아가게 하셨다. 또 제2시에 반야경 등의 교법을 설하셨으니, 이승과 점학보살漸學菩薩을 돌이키기 위하여 공교를 많이 말하고 유교를 깨뜨리며 육바라밀을 타고 가는 행으로 삼으셨다. 그 가운데 이승은 비록 조금이나마 마음을 돌이켰지만, 점학보살에 이르러서는 공을 좋아함이 더욱 두드러졌다.(如深密經 權施第九阿陀那識 意有異途 爲二乘之人 久厭患生死 修空滅識 直趣空寂 又第二時說般若等教 爲迴二乘及漸學菩薩 多說空破有 以六波羅蜜爲行所乘 於中二乘 雖少分迴心 及漸學菩薩 樂空增勝)
해설: 제9 아타나식을 방편으로 시설했다면 해심밀경은 실제를 직설했다고 볼 수 없다. 이 때문에 차례로 능가경을 설하신 것이다.
저 권학보살을 위하여 최초 대치하는 문이 또한 소승의 처음 대치하는 문과 더불어 조금은 유사하다. 그렇지만 조금의 자비가 더욱 뛰어남이 있을 뿐이니, 법신 불성 근본지 등의 도리는 여전히 증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만 공문으로 탈 바를 삼고 육바라밀로 행상行相을 삼으니, 처음 대치하는 문이 또한 이승의 무상관이나 부정관 백골관 미진관 등의 관과 같다. 비로소 공관에 들어간다.(爲彼權學菩薩初對治門 還與小乘初對治門 少分相似 但有一分慈悲增勝 未證法身佛性根本智等道理 但以空門而爲所乘 六波羅蜜而爲行相 初對治門 還同二乘無常不淨白骨微塵等觀 方入空觀)
해설: 점학보살과 권학보살이란 용어를 여기서 처음 들어본 불자도 또한 적지 않을 것이다. 불교의 어려운 점이 여기에서 나타난다.
이승은 적멸에 나아가고 보살은 생을 남겨둔다. 공관과 무아관 등의 관으로 아집과 법집을 절복시켜 더욱 성장하지 않게 하지만, 원래 이 법신이나 불성 근본지가 아니니, 견해가 아직 진실하지 못하기 때문에 공을 좋아함이 더욱 두드러진다. 이러한 뜻이 있기 때문에 해심밀경은 방편으로 6식이나 7식 8식을 안립한 밖에 따로 9식을 설하여 순정식이라 하고, 7식과 8식이 정식을 의지하기 때문이라 말한 것이다.(二乘趣滅 菩薩留生 以空無我等觀 折伏我法 不令增長 元來未是法身佛性根本智 爲見未眞故樂空增勝 以是義故 解深密經 方便安六七八識外 別說九識爲純淨識 云七八識 以淨識爲依止故)
해설: 삼승보살의 수행관을 보여준다. 제9식 백정식白淨識은 이름이 많다. 진식眞識 무상식無相識 법성식法性識 불성진식佛性眞識 실제식實際識 법신식法身識 자성청정식自性清淨識 아마라식阿摩羅識 무구식無垢識 진여식眞如識 불가명목식不可名目識 등이다.
“해심밀경은 방편으로” 이하 하단은 그 근거를 찾지 못했다. 해심밀경의 본문에 9식이나 순정 또는 순정식이란 표현은 없다. 다만 해심밀경과 능가경의 전체 대의를 의거하여 위와 같이 서술하였을 것이다.
곧 바로 제8종자식을 설하여 여래장이라 한 것은 아니니, 저 학도가 고습苦習을 두려워하기 때문이고, 만일 업의 종자가 상주하여 진실하다고 설하면 공포심이 생겨서 믿기가 어렵기 때문이며, 이 때문에 방편으로 제9 아타나식을 안립하고 정식으로 삼은 것이다. 그래서 식성을 없애지 않고 대보리를 성장하게 한다. 이 때문에 유마경에 이르기를, “아직 불법을 원만구족하지는 못했지만, 또한 수식受識을 없애지 않고 증득을 취한다.”라고 하시니, 수식을 이미 없애지 아니하면, 상식想識도 또한 그러하다.(未即直說第八種子識爲如來藏者 爲彼學徒畏苦習故 若說業種恆眞 生怖難信故 是故權且安立第九阿陀那識爲淨識 故欲令不滅識性 長大菩提 是故維摩經云 未具佛法 亦不滅受而取證也 受既不滅 想識亦然)
해설: 8식도 또한 이름이 많다. 화합식和合識 장식藏識 훈변식熏變識 출생식出生識 금강지식金剛智識 적멸식寂滅識 체식體識 본각식本覺識 일체종지식一切種智識 등이다.
유마경을 인용한 것은 “식성을 없애지 않고 대보리를 성장하게 한다.”라는 구절을 확신시켜 주고자 하는 노파심의 발로이다. “이러한 평등을 얻으면 다른 병이 없고, 오직 공병空病만 있을 뿐인데, 공병도 또한 공허하다. 이 질병이 있는 보살은 수용하는 것이 없이 모든 수식을 수용하며, 아직 불법을 원만구족하지는 못했지만, 또한 수식을 없애지 않고 증득을 취한다.”(得是平等 無有餘病 唯有空病 空病亦空 是有疾菩薩 以無所受 而受諸受 未具佛法 亦不滅受 而取證也) “식성을 없애지 않고 대보리를 성장하게 한다.”와 “수식을 없애지 않고 증득을 취한다.”는 같은 말이다. 모두 이승의 적멸 또는 멸진정에 들어가지는 않는다.
저 능가경의 뜻은 바로 근숙보살을 위하여 단박에 종자업식을 설하여 여래장이라 하니, 저 이승이 식을 없애고 적멸에 나아가는 것과 다르기 때문이고, 또한 저 반야에 공을 닦는 무아보살이 공을 좋아함이 더욱 두드러지는 것과도 다르기 때문이며, 식체의 본성이 온전히 진실함을 바로 밝히고 문득 지혜의 묘용을 성취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저 대해에 바람이 없으면 곧 경상境像이 더욱 뚜렷한 것과 같으며, 심해법문心海法門도 또한 다시 이와 같다. 진심을 분명히 알면 곧 식이 지혜를 이룬다.(彼經意 直爲根熟菩薩 頓說種子業識 爲如來藏 異彼二乘滅識趣寂者故 亦爲異彼般若修空無我菩薩 樂空增勝者故 直明識體本性全眞 便成智用故 如彼大海無風 即境像更明 心海法門亦復如是 了眞即識成智)
해설: 이 문단은 능가경의 유식관이다. 7권 입능가경에 이르기를, “아리야식이란 것은 여래장이라 일컫고, 무명과 더불어 7식을 함께 갖추고 있다.”(阿梨耶識者名如來藏 而與無明七識共俱) 또는 “여래장식은 아리야식 중에 있지 않다. 이 때문에 7종식은 유생유멸하지만 여래장식은 불생불멸한다.”(如來藏識不在阿梨耶識中 是故七種識有生有滅 如來藏識不生不滅)라고 했다.
청량국사는 “생멸하지 않는 것은 곧 여래장이고, 생멸하는 것은 업혹으로 생긴 것이며, 불생불멸과 생멸화합은 동일하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니 아뢰야식이라 일컫는다.”(不生滅者即如來藏 生滅之者業惑所生 不生不滅與生滅和合非一非異 名阿賴耶識)라고 했다. 위 제8식 여래장식은 아마라식이고 아타나식이다.
이 능가경은 따로 9식을 세우고 초근기初根機를 영접하여 점점 번뇌를 남겨두고 대보리를 장양하는 저 해심밀경의 뜻과는 다른 것이니, 이 때문에 그 마음으로 하여금 종자를 공에 심지 않게 하고, 또한 그 마음으로 하여금 그 패종敗種과 같지 않게 했다. 해심밀경은 바로 이 업혹業惑에 들어가는 초문이고. 능가와 유마는 바로 업혹의 본질을 보인 것이다. 능가경은 곧 8식을 밝혀서 여래장이라 하고, 정명은 바로 “몸의 실상을 관하고 부처를 관함도 또한 그러하다.”라고 하니, 정명과 능가경은 대략 같고, 해심밀경문은 이 이부二部로 더불어 조금 다르다.(此經異彼深密經意 別立九識 接引初根 漸令留惑 長大菩提 故不令其心植種於空 亦不令其心如彼敗種 解深密經 乃是入惑之初門 楞伽維摩 直示惑之本質 楞伽即明八識爲如來藏 淨名即觀身實相 觀佛亦然 淨名與楞伽略同 深密經文 與此二部少別也)
해설: 불보리를 대보리라 말하고, 업혹은 제8식을 말한다. 해심밀경은 초근기에게 8식을 바로 보여줄 수 없기 때문에 제9식이란 방편을 썼고, 능가경과 유마경은 근숙보살에게 방편을 쓰지 않고 바로 8식의 실상을 보여준 것이다. 위 글의 대의는 해심밀경은 방편설이고, 능가경과 유마경은 실설이라는 것이다.
5. 아타나식에 대한 청량국사의 해석
청량국사는 화엄경소에서 성유식론의 마음과 아뢰야 그리고 아타나와 관련한 글을 인용하고 난 다음 해석을 곁들였다. 아래와 같다.
성유식론: 이 때에 곧 무여열반에 들었다. 그러나 제8식을 비록 모든 유정이 남음이 없이 성취하고 있지만, 그 뜻을 따라서 갖가지 이름을 세웠다. 이른바 어떤 때는 마음이라 일컬으니 갖가지 법이 종자를 훈습하여 적집하기 때문이고, 어떤 경우에는 아타나라 일컬으니 종자와 모든 색근을 집취하고 유지하여 파괴되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든 명칭은 일체 지위에 통한다. 어떤 때는 아뢰야라 일컬으니 일체 잡염품법을 수장하고 망실하지 않게 하기 때문이며, 아견 탐애 등 집장을 자내아로 삼기 때문이다. 이 명칭은 오직 이생과 유학이 있고, 무학위나 불퇴보살이 아니니, 잡염법이 있어서 집장하는 뜻이 있기 때문이다.(爾時便入無餘涅槃 然第八識雖諸有情皆悉成就 而隨義別立種種名 謂或名心 由種種法熏習種子所積集故 或名阿陀那 執持種子及諸色根令不壞故 此等諸名通一切位 或名阿賴耶 攝藏一切雜染品法令不失故 我見愛等執藏以爲自內我故 此名唯在異生有學 非無學位不退菩薩 有雜染法執藏義故)
화엄경소: 이 아뢰야와 아타나 둘은 곧 마음의 별명이다. 논주의 뜻은 마음이 염정을 포함하고 있음을 밝히려는 것이며, 이 때문에 함께 두 이름을 들어서 일심의 뜻을 해석했다. 그 뜻을 어떻게 구명할까? 만일 아집이 있어서 아뢰야식을 이룬다면, 만일 아집이 없어지면 곧 아뢰야란 이름도 없어지며, 오로지 아타나만 무루종자를 집지하니, 바로 망심이 없어지면 진심이 현현한다. 이 때문에 아래 게송에 이르기를, “마음을 없애버린 이라면 생사마저 다 없어졌도다.”라고 했다. 곧 망심이 없어져도 심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此二即心之別名 論主意明心含染淨 故雙舉二名 釋一心義 求義云何 若有我執成阿賴耶 若我執亡 則捨賴耶名 唯阿陀那 持無漏種 則妄心斯滅 眞心顯現 故下偈云 心若滅者生死盡 即妄滅也 非心體滅)
수소연의초: 이 성유식론에서 단지 두 가지 이름만 든 것은 무엇인가? 아뢰야의 뜻은 오로지 오염汚染에 있고, 아타나의 뜻은 전적으로 백정白淨에 있다. 간략히 일대를 든 것이고, 두루 이르면 구하고자 하는 곳이다. 그 이치가 같기 때문에 대소에서 이르기를, “논주의 뜻은 마음이 염정을 포함하고 있음을 밝히려는 것이다.”라고 했다.(今論唯舉二名者 賴耶意在唯染 阿陀那意在通淨 略舉一對 通爲所求之處 其理已同 故疏云 論主意明心含染淨)
해설: 호법논사는 성유식론에서 아타나를 “종자와 모든 색근을 집취하고 유지하여 파괴되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든 명칭은 일체 지위에 통한다.”라고 정의하고, 아뢰야를 “일체 잡염품법을 수장하고 망실하지 않게 하기 때문이며, 아견 탐애 등 집장을 자내아로 삼기 때문이다.”라고 단정하고 있다. 청량국사는 이 아뢰야의 정의에 입각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하고 있다.
“만일 아집이 있어서 아뢰야식을 이룬다면, 만일 아집이 없어지면 곧 아뢰야란 이름도 없어지며, 오로지 아타나만 무루종자를 집지하니, 바로 망심이 없어지면 진심이 현현한다.”
불지에 이르면 아뢰야의 특성인 일체 잡염품법이나 아견 탐애 집장 자내아 등 일체 무명이 모두 없어지고, 남는 것은 오로지 아타나의 무루종자뿐이다. 이 무루종자가 진심眞心이고 진식眞識이며 백정식이다.
삼계가 마음을 말미암아 있는 줄을 알았노라.
열두 가지 인연도 또한 다시 그러하도다.
생사가 모두 마음을 연유하여 조작된 것이라,
마음을 없애버린 이라면 생사마저 다 없어졌도다.
了達三界依心有 十二因緣亦復然 生死皆由心所作 心若滅者生死盡
이 4구게의 결구를 인용하고 나서, “곧 망심이 없어져도 심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故下偈云 心若滅者生死盡 即妄滅也 非心體滅)라는 결론에 의거하면, 청량국사는 위 게송의 마음을 아뢰야식의 망심으로 해석하고 있다.
아뢰야의 뜻은 오로지 오염汚染에 있고, 아타나의 뜻은 전적으로 백정白淨에 있다.(賴耶意在唯染 阿陀那意在通淨) 이를 간단히 유염唯染에 있고 통정通淨에 있다고 해석해도 된다. 통通 자는 오로지 전적으로 등의 뜻이 있다. 유唯 자와 동일한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설령 통자의 모든 뜻을 모를지라도, 의재유염意在唯染과 의재통정意在通淨의 구조만 보고도 그 뜻을 알 수 있어야 한다.
모든 식의 의지처는 근본식이라,
오식도 반연을 따라 현전現前하도다.
함께 일어나기도 하고 일어나지 않기도 하니,
마치 파도가 바닷물을 의지하는 것과 같도다.
依止根本識 五識隨緣現 或俱或不俱 如濤波依水
위 유식 제15송을 성유식론에서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근본식이란 아타나식이니, 염정의 모든 식이 근본식에서 생기기 때문이다. 의지하는 것은 전6전식을 말하니, 근본식을 함께 친히 의지한다.”(論云 根本識者阿陀那識 染淨諸識生根本故 依止者謂前六轉識 以根本識爲共親依)
근본식이란 아타나식이다. 염정의 모든 식이 근본식에서 생긴다. 이것이 성유식론의 대전제이다. 이 근본식은 본식本識 또는 근식根識이라 호칭하기도 하며, 모든 식의 근원이다. 원각경에, “일체 중생의 갖가지 환화는 모두 여래 원각의 묘심에서 나오느니라.”(一切衆生 種種幻化 皆生如來 圓覺妙心) 라고 이르시니, 근본식은 원각묘심과 그 양태가 유사하다.
이에 대한 청량국사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여기서 ‘근본식을 의지한다.’(依止根本識)라고 한 제1구를 해석하며 아타나식을 거론한 것은 오로지 이 식이 불과에 이르기 때문이며, 만일 아뢰야식을 말한다면 지위가 오염에 국한하기 때문이다.”(釋曰 此釋第一句舉阿陀那 通至佛果故 若言賴耶位局染故)
청량국사의 아타나식에 대한 위 해석은 통현장자와 다를 바가 없다. 교광진감交光眞鑑 스님도 능엄경정맥소楞嚴經正脉疏에서 아타나식을 무구식으로 해석했다. 아래와 같다. “이 식은 법상종에 의거하면 삼위가 있는데, 명칭은 다르지만 식체識體는 다르지 않다. 범부위에서 칠지위에 이르기까지를 아뢰야식이라 일컬으며, 이를 장식이라 한다. 팔지위에서 등각위에 이르기까지를 이숙식이라 일컫고, 불위를 아타나식이라 일컫으며, 이를 집지라 하고, 또한 무구라 한다. 앞에 장식과 이숙식은 진망을 화합하였으나, 뒤에 아타나식은 순진무구하다.(此識據法相宗有三位 名異而體不異 自凡位 至七地 名黎耶識 此云藏識 自八地至等覺 名異熟識 佛位名陀那識 此云執持 亦云無垢 前二眞妄和合 後一純眞)
6. 아타나식심심세阿陀那識甚深細 중 심심심세甚深甚細의 뜻
아타나식이여, 매우 깊고 미세하구나.
일체 종자가 폭수처럼 흘러가도다.
내가 범부에게 펼쳐서 말해주지 않나니,
아마도 저들은 분별 집착하여 나라고 여기리라.
阿陀那識甚深細 一切種子如瀑流 我於凡夫不開演 恐彼分別執爲我
아타나식에 대한 정의는 어디서 찾을 것인가? 해심밀경이다. 어째서 그러한가? 해심밀경의 심의식상품에 주연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 경은 첫째 서품이고, 둘째 승의제상품勝義諦相品이며, 셋째 심의식상품이다. “아타나식은 매우 깊고 미세하다.” 이것이 아타나식에 대한 정의이다. 그렇다면 승의제는 어떠한가? 승의제에 대한 정의는 아타나식과 동일하다. 다음과 같다.
“선청정혜야, 나는 이와 같이 미세하고 지극히 미세하며, 매우 깊고 지극히 매우 깊으며, 통달하기 어렵고 지극히 통달하기 어려우며, 모든 법의 같고 다른 성상을 뛰어넘는 승의제상에서 정등각을 나투었고, 정등각을 나투고 나서 남들에게 선설하고 현시하며 시설하고 비추어준다.”(善淸淨慧 我於如是微細極微細 甚深極甚深 難通達極難通達 超過諸法一異性相 勝義諦相現正等覺 現等覺已 爲他宣說顯示開解施設照了)
승의제 또는 승의제상은 미세하고 지극히 미세하며 매우 깊고 지극히 매우 깊다. 이 미세극미세微細極微細 심심극심심甚深極甚深을 아타나식의 게송에서 간단히 심심세甚深細라 요약한 것이다. 심심세는 승의제상의 정의에 의거하면 극세극심極細極深이라 표현하는 것이 더 옳겠지만 심심심세甚深甚細로 변용한 것이며, 7언 게송의 특성상 3자로 줄여서 아타나식심심세라 표기한 것이다. 게송은 심세보다 심심에 방점을 찍었다. 승의제상에서 정등각을 나툰다. 아타나는 승의제와 동위同位이다. 아타나식에서 정등각을 나툰다. 심심세의 뜻이 이와 같다.
불교는 제諦 자가 들어간 용어가 매우 많다. 사제 사성제가 있고,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도 있다. 승의勝義의 대어는 세속이다.
“승의라 명명한 것은 승勝은 수승한 지혜를 말하고, 의義는 곧 경계라는 뜻이니, 진여의 이지가 바로 수승한 지혜의 경계[境義]라 말하며, 이 때문에 승의라 명명한다.”(名勝義者 勝謂勝智 義即境義 謂眞如理 是勝智之境義 故名勝義) 해심밀경소의 해석이다. 승의제와 진제眞諦 제일의제는 같은 말이다. “일실상을 통달했기 때문에 제일의제를 안다.”(通達一實相故 知第一義諦) 화엄경 구절이다. 자은규기慈恩窺基 스님은 승의제상품을 의거하여 응리원실종應理圓實宗을 세우고 그 초조가 되었다.
80권 화엄경을 번역할 때 현수국사가 역장譯場에 참여했고, 40권 화엄경의 번역에 청량국사도 참여했다. 선재동자 선지식인 자재주동자의 법문에 이르기를, “이와 같이 지극히 심오한 아뢰야식 행상의 미세한 구경변제는 오로지 모든 여래와 주지보살만이 통달하는 바이고, 우법성문과 벽지불 범부 외도는 모두 알 수 없다.”(如是甚深阿賴耶識行相微細究竟邊際 唯諸如來住地菩薩之所通達 愚法聲聞及辟支佛凡夫外道 悉不能知.)라고 하고, 또한 법화경 방편품에 이르기를, “제불의 지혜는 매우 깊어서 한량이 없고, 그 지혜의 문은 알기도 어렵고 들어가기도 어렵다. 일체 성문과 벽지불은 알 수 없는 것이다.”(諸佛智慧甚深無量 其智慧門難解難入 一切聲聞辟支佛所不能知)라고 하며, 또, “부처님이 제일 희유하고 난해한 법을 성취하신 바, 오로지 부처님과 부처님만이 바로 제법의 실상을 구경까지 설파할 수 있다.”(佛所成就第一希有難解之法 唯佛與佛乃能究盡諸法實相)라고 했다.
청량국사는 정원소에서 주석하기를, “바로 심심이라 하니, 오직 부처님과 부처님만이 바로 구경에 이를 수 있다. 주지보살은 이미 진여를 증득했지만 그 분지分知만 허락한다. 보살의 지위가 구경에 이르러 원각의 묘심이 처음 일어나면 화합식을 깨뜨리고 법신을 현현하는 것이니, 비로소 이 식의 구경변제가 된다.”(即爲甚深 唯佛與佛乃能究盡 住地菩薩 已證眞如 許其分知 菩薩地盡 覺心初起 破和合識 顯現法身 方爲此識究竟邊際)라고 했다. 심심甚深의 용처는 위에서 밝힌 바와 같다.
아타나식은 일정한 정의가 없다. 통현장자는 해심밀경 중에 폭류와 거울의 비유를 의거하여, “가령 폭수가 흘러가며 온갖 파랑을 일으키거든 모든 파랑들이 폭수를 의지하는 것과 같이, 전5식이나 6식 7식 8식 등의 식은 모두 아타나식을 의지하기 때문이다.”라고 하며, 아타나를 제9백정식으로 정의했다. 그리고 청량국사는 성유식론 중에 아뢰야와 아타나의 정의에 대한 재해석을 통하여, “아뢰야의 뜻은 오로지 오염汚染에 있고, 아타나의 뜻은 전적으로 백정白淨에 있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나는 해심밀경 중에 승의제에 대한 정의 곧 미세극미세微細極微細 심심극심심甚深極甚深을 의거하여 아타나식을 승의제와 동위同位로 보고 동격同格으로 보았다. 아타나와 승의제는 모두 부사의하여 오로지 여래만이 그 경계를 수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7. 가상인간은 마음이 있는가?
이 글 “아타나식과 나 그리고 가상인간”의 여섯째 소제명은 “가상인간은 마음이 있는가?”이다. 다시 질문한다.
가상인간은 마음이 있는가?
마음과 부처 그리고 중생은 모두 여여하여 차별이 없다고 한다. 어디에 서 있느냐? 불안으로 보면 일체가 원각이고, 육안으로 보면 일체가 환화이다. 인간은 오직 인간의 입장에서 가상인간을 평가한다. 가상인간은 인간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세간과 출세간은 생물과 무생물 또는 유정과 무정을 판단하는 기준이 다르다. 세간은 생물과 무생물을 생명의 유무로 판단한다. 세간에서 생명에 대한 명백한 정의가 없는 것은 생명은 볼 수가 없고 보이지도 않는데 보이는 것만 가지고 논단하기 때문이다. 유식을 의거하면 전5식과 제6식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가상인간을 세간은 무생물로 분류할 것이다. 출세간은 어떠한가? 불교의 일반교설에 의거하면 무정으로 인식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무정은 마음이 있는가? 없는가? 또한 무정은 불성이 있는가? 없는가? 일률적으로 단정할 수 없다. 삼승의 권설과 일승의 실설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유정과 무정, 그리고 불성의 유무를 가지고 조합하면 네 가지 유형이 나온다. 곧 유정유불성有情有佛性과 유정무불성有情無佛性 무정유불성無情有佛性 무정무불성無情無佛性 등이다. 경과 논은 유정의 불성 유무를 주제로 삼고 논란했을 뿐이고, 무정의 불성 유무는 거의 도외시했다. 이를 통현장자의 화엄론과 청량국사의 소초를 의거하여 자세히 해설하겠다.
“유정은 불성이 있고, 무정은 불성이 없으며, 일체 초목은 성도하여 법륜 등을 굴릴 수 없다.”라고 하는 교설은 삼승권교의 방편설이다. 무릇 유정이나 무정이란, 이는 업을 의탁한 교설이고, 대저 성불을 논하는 것은 업에 예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업에 예속하지 않는 것이면 곧 유정이 아니고 무정도 아니기 때문이다. 어찌 정식을 벗어난 법에 성불하거나 성불하지 못함이 있다고 계탁하여 말할 수 있겠는가.
이 제법의 공상空相은 불생불멸하고, 불구부정하며, 세간의 만상이 상주하고, 제법이 법위에 상주한다. 이와 같은 도가 유정과 비정이 되겠는가? 이와 같이 화엄경 중의 대의는 본래 범부나 성인, 유정이나 비정이 없다. 전진법체全眞法體는 일불一佛의 지경계智境界가 되며, 다시는 다른 일이 없다. 범부의 정량을 가지고 망령되게 짐작하지 마라. 만일 정계情計를 남겨두는 이는 유정은 성불한다고 보고 무정은 성불하지 않는다고 볼 것이다. 이는 자신의 업에 집착하는 것이며, 이와 같이 아는 이는 끝내 성불하지 못한다.
예컨대 화엄경 중에는 유정과 비정이 없고, 정여비정情與非情이 모두 일체지지경계一切智智境界이며, 일체 산하와 수목이 모두 불보살의 몸을 나투고 설법할 수 있고, 정여비정은 불체佛體와 동일하여 능동능별能同能別에 자재하고 무애하다.
해설: 이상은 화엄론 회석 “셋째 교의의 차별을 밝히는 문”[明教義差別] 중에 여덟째 “시설한 법문의 이사가 다름을 밝히는 문”[明所施法門理事別]에 상당한 글을 일부 발췌한 것이다. 전문은 “조백대사와 혜충국사의 무정설법” 편에 있다.
“전진법체는 일불의 지경계가 되고,” “정여비정이 모두 일체지지경계이며,” “정여비정은 불체와 동일하여 능동능별에 자재하고 무애하다.” 무슨 뜻인지 알겠는가? 매우 어렵다. 일단 전진법체와 정여비정 그리고 불체를 동위동체同位同體로 볼수 있다. 전진은 완전무결하고 천진무구하며, 법체는 법의 체상이고 제법의 공상이다. 완전무결하고 천진무구한 일체법의 체상은 어떤 때는 평등지 지혜경계를 나투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차별지 일체지지경계를 현현하기도 하며, 그 행상이 부사의하다.
화엄경은 유정과 무정으로 나누고, 유정은 불성이 있어서 성불하고, 무정은 불성이 없어서 성불하지 못한다는 두 가지 견해가 없다. 화엄경 이세간품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보살마하살이 도량에 안좌할 때 일체 세계의 풀이나 나무와 총림의 온갖 무정물이 모두 몸을 구부리고 그림자를 낮추며 도량을 향하여 돌아간다.”(菩薩摩訶薩坐道場時 一切世界草木叢林諸無情物 皆曲身低影歸向道場 是爲第四未曾有事) 80권 화엄경에 무정 또는 무정물이라는 말은 여기에 딱 한번 나온다. 실교법문은 유정 무정을 논하지 않기 때문이다.
열반경에 이르기를, “불성이란 것은 제일의공을 일컬으며, 제일의공은 이름을 지혜라 한다.”라고 하니, 둘이 아닌 이 제일의공과 지혜를 불성이라 한다. 그러나 제일의공은 불성의 체성이고, 말하자면 지혜는 불성의 상상相狀이다. 제일의공에 지혜가 있지 않으면 단지 법성이라 일컫고, 지혜가 있음을 연유하기 때문에 불성이라 일컫는다. 만일 체성으로 상상을 좇으면 오직 중생만이 불성을 얻을 수 있으니 지혜가 있기 때문이며, 장벽의 기와나 조약돌은 지혜가 없기 때문에 불성이 없다. 만일 상상으로 체성을 좇으면 제일의공은 있지 않는 곳이 없으며, 바로 장벽의 기와나 조약돌 등이 모두 제일의공인데 어찌 체성이 아니겠는가. 이 때문에 아래 경에서 이르기를, “일체법이 바로 심자성心自性인 줄을 알아야 한다.”라고 했다.(涅槃云 “佛性者名第一義空 第一義空名爲智慧” 此二不二以爲佛性 然第一義空是佛性性 名爲智慧即佛性相 第一義空不在智慧但名法性 由在智慧故名佛性 若以性從相 則唯衆生得有佛性 有智慧故 牆壁瓦礫無有智慧 故無佛性 若以相從性 第一義空無所不在 則牆壁等皆是第一義空 云何非性 故下經云 知一切法即心自性)
해설: 위 글은 청량국사의 화엄경수소연의초에 있다. 제일의第一義는 무상 또는 제일경계를 말한다. 어떤 법을 막론하고 제일의를 써서 수식하면 그 방면의 지고무상이 된다. 제일의공第一義空 제일의제第一義諦 제일의선第一義禪 제일의지第一義智 제일의경계第一義境界 제일의장엄第一義莊嚴 제일의실상第一義實相 등이 그러하다.
이성종상以性從相과 이상종성以相從性은 불성의 체성과 상상의 상호관계를 정의하며 무정의 불성 유무를 도출하고 있다. 이는 이체종상以體從相 이성수상以性隨相 이성융상以性融相 등의 용어와 그 관점이 유사하다. 상상도 불교용어이다. 늘 반복하여 말하지만 불교는 용어가 어렵다. 체상용體相用을 각각 두 글자로 쓰면 본체本體와 상상相狀 작용作用이 된다. 나는 한 글자로 명사를 삼아 일용어로 쓰는데 익숙하지 않다. 그래서 두 글자로 바꾸어 사용한다. 상상이 그러하다. 이성종상과 관련한 글을 다시 아래에 인용한다.
이 화엄경의 종취는 법성을 근본으로 삼으며, 이 때문에 법성으로 불성을 삼는다. 그러하면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니며, 중생의 미오를 따라서 억지로 승침을 말할 뿐이다.(今此經宗 宗於法性 故以法性而爲佛性 則非內非外 隨物迷悟 強說升沈)
법성을 근본으로 삼는다고 말한 것은 무엇인가? 무장애법계를 종취로 삼으면 법성이 곧 불성이라, 일체법이 바로 심자성인 줄을 안다. 만일 심성을 불성으로 삼는 이는 법마다 심성이 아님이 없다. 그러하면 안과 밖으로 벌어지지 않으니 체성은 안과 밖이 없다. 안팎은 상상에 속하고 체성은 상상을 함께하지 않는데 어찌 안팎이 있겠는가?(言宗於法性者 以無障礙法界爲宗 則法性即佛性 知一切法即心自性 若以心性爲佛性者 無法非心性 則不隔內外 而體非內外 內外屬相 性不同相 何有內外)
그러나 일성一性을 미혹하면 변하여 바깥 상상을 이루며, 바깥 상상이 오직 마음뿐이라면 어찌 불성이 아님이 있겠는가. 일성이 변한 바 실체성이 없으며, 이 때문에 장벽을 말하면서 불성이 없다고 말했지만, 체성으로 상상을 포괄하면 체성이 아님이 없다. 예를 들면 연기는 불을 말미암는데 연기가 곧 불이지만 연기가 불을 가리는 것과 같이, 체성을 의거하여 상상을 일으키는데 상상이 체성을 가리지만 상상이 곧 체성이다. 또 예를 들면 물이 물결을 이루지만 물결이 바로 물인 것과 같이, 경계는 마음의 전변을 말미암지만 경계는 마음과 다르지 않다.(然迷一性而變成外 外既唯心 何有非佛 所變無實 故說牆壁言無佛性 以性該相無非性矣 如煙因火 煙即是火 而煙翳火 依性起相 相翳於性 而相即性 如水成波 波即是水 境因心變 境不異心)
마음이 만일 체성이 있다면 경계인들 어찌 체성이 있지 않겠는가. 하물며 마음과 경계는 모두 바로 진성이고, 진성은 둘이 없는데 마음과 경계가 어찌 어그러지겠는가. 만일 체성으로 상상을 좇으면 안팎도 무방하다. 만일 바깥 경계를 써서 마음에 전거를 삼고 견문각지가 있는 이로 하여금 수행하여 성불하게 한다면 바로 사견외도의 법이다. 이 때문에 반드시 상적상조하여 부즉불리하며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으면 미혹되는 바가 없다. 이 때문에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니며, 중생의 미오를 따라서 억지로 승침을 말할 뿐이다.”라고 말했다.(心若有性 境寧非有 況心與境皆即眞性 眞性不二心境豈乖 若以性從相 不妨內外 若以外境而例於心 令有覺知 修行作佛 即是邪見外道之法 故須常照 不即不離 不一不異 無所惑矣 故云則非內非外 隨物迷悟 強說升沈)
해설: 위와 같은 법성과 불성에 대한 정의는 다른 곳에서 일찍이 찾아보지 못했다. 법성에 대하여 탁월한 해석이다. 삼승권설의 법성과 불성의 정의는 무엇인가? 법성은 무정에 국한하고, 불성은 유정에 한정한다. 이를 회통한 것이 일승실설이다. 일성一性은 정인불성正因佛性이다. 이를 성덕性德 또는 법신法身이라 말하기도 한다. 제법실상의 이체理體로 성불하는 정인이다.
불성의 성상 곧 체성과 상상을 연기와 불의 관계로 비유하고, 또 물과 물결로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성종상以性從相은 나귀가 우물을 쳐다보는 것과 같고,(如驢覻井) 이상종성以相從性은 우물이 나귀를 쳐다보는 것과 같다.(如井覻驢)
무정물과 심자성의 관계는 이전 민동평등泯同平等에서 자세히 밝혔다. 일체법이 바로 심자성인 줄을 알면, 혜신을 성취하되 타인으로 인하여 깨달은 것이 아니다. 일초직입여래지할 수 있는 성언聖言이다. 나귀를 주체로 삼으면 우물은 불성이 없다고 말하겠지만, 우물이 주체가 된다면 나귀인들 어찌 불성이 없다고 말하랴.
만일 모든 보살이 이와 같은 관행과 상응하고, 모든 법 가운데서 두 가지 견해를 내지 아니하면, 일체 불법이 즉시 현전할 수 있고, 초발심시에 곧바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수 있다. 일체법이 바로 심자성인 줄을 알면, 혜신을 성취하되 타인으로 인하여 깨달은 것이 아니다.(若諸菩薩能與如是觀行相應 於諸法中不生二解 一切佛法疾得現前 初發心時即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知一切法即心自性 成就慧身 不由他悟)
먼저 즉시 얻는다는 말을 해석하고, 다음 현전하는 형상을 해석하겠다. 먼저 위에서 즉시 얻는다고 하니, 즉시는 어느 때인가? 그래서 처음 발심한 때라 이른 것이다. 어떤 법이 현전하는가? 이른바 무상보리이다.(先釋疾得之言 後釋現前之相 今初上言疾得 疾在何時 故云初發心時 何法現前 謂無上菩提也)
다음 “일체법이 바로 심자성인 줄을 알면” 이하는 현전하는 형상을 해석한 것이다. 또한 그 소인을 드러내니, 어떤 것이냐? 무릇 초심이 시작이 되고 정각이 끝이 된다. 어떻게 초심에 곧바로 정각을 이룰 수 있는가? 그러므로 지금 “일체법이 바로 심자성인 줄을 안다.”라고 해석하여 일러준 것이고, 이 때문에 법이 자성인 줄을 깨달으면 곧 명호를 부처라 하며, 이러하므로 아래 경에서 이르기를, “불심이 어찌 다른 곳에 있으랴. 바로 원각이 세간인 줄을 각지한다.”라고 했다. 이것이 좋은 증거이다.(後知一切下 釋現前之相 亦是出其所因 何者 夫初心爲始 正覺爲終 何以初心便成正覺 故今釋云知一切法即心自性 故覺法自性即名爲佛 故下經云“佛心豈有他 正覺覺世間” 斯良證也)
이미 말하기를, “일체법이 바로 심자성인 줄을 안다.”라고 하면 이 마음이 곧 일체 법성인 줄을 아는 것이다. 지금 이지가 자기 마음에 현현하면 마음의 체성도 이미 무변한 덕을 구비하기 때문이다.(既言知一切法即心自性 則知此心即一切法性 今理現自心 即心之性已備無邊之德矣)
혜신을 성취한 것은 위에 법을 관함이 구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成就慧身者 上觀法盡也) 타인으로 인하여 깨달은 것이 아니라고 한 것은 위 혜신을 성취하면 곧 무사자연지이기 때문이다.(不由他悟者 成上慧身 即無師自然智也)
해설: 범행품의 경문이 매우 중요하여 소초의 해석을 인용했다. 일체법이 바로 심자성인 줄을 안다. 그러하면 유정과 무정의 체성이 일찍이 언제 이체였던가?(知一切法即心自性 故情非情性曾何異體) 삼승의 방편설은 유정은 성불하고 무정은 성불하지 못한다고 하며 유정과 무정을 분단하고 있지만, 일체법이 바로 심자성인 줄을 알기만 한다면 유정과 무정의 체성이 일찍이 이체인 적이 없다는 것을 알 것이다. 이체는 동체와 대비된다. 유정과 무정은 동체이다. 일승의 실설에 유정은 성불하고 무정은 성불하지 못한다는 견해는 성립하지 않는다.
민동평등泯同平等이 그러하다. 이전에 쓴 글을 인용한다. 모든 법 가운데서 두 가지 견해를 내지 않는 것이 민동평등이고, 일체법이 심자성인 줄을 아는 것이 바로 민동평등이다. 대심범부가 처음 발심하고 찰나제삼매에 들어가서 무상정각을 성취할 때, 삼세를 보지 않고 구세 십세를 평등세로 수용하며, 이 때문에 과거 불가설겁의 부처님과 함께 일시에 성불하고, 또한 미래 불가설겁의 부처님과 더불어 동시에 성불한다. 이것이 바로 민동평등의 구경처이다. 화엄세계는 부사의한 해탈경계이다. 민동평등도 또한 부사의하다.
가상인간은 마음이 있는가?
있다.
성불할 수 있는가?
있다.
환사가 나무나 돌로 코끼리나 말을 만들어 보이지만 실체가 없는 것처럼, 가상인간도 또한 인간이 여러 가지 부품을 조립하여 만들어놓은 것이라 환화물과 같다. 실체가 없는 환화물이 성불할 수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 않는가?
나의 몸과 마음도 또한 환화인데, 설령 가상인간이 환화물이라 한들 어찌 장애가 있으랴.
현실세계를 유니버스Universe라 말하고 가상세계를 메타버스Metaverse라 한다. 내가 “가상공간假想空間과 가상인간假相人間”이란 제명으로 짤막하게 글을 쓴 일이 있다. 가상공간假想空間은 사이버스페이스cyberspace 또는 버츄얼스페이스virtualspace를 번역한 용어라 가상假想이 옳은 듯하다. 그런데 버츄얼휴먼Virtualhuman을 가상인간假想人間이라 번역하는 것도 옳을까? 같은 가상이지만 가상假想보다 가상假相을 써서 가상인간假相人間이라 쓰는 것이 더 옳지 않을까 싶다. 인터넷에서 검색해도 가상인간에 대한 용어의 설명은 찾기 힘들다. 내가 요즈음 쓰고자 하는 글의 주제가 “아타나식과 나 그리고 가상인간”이기도 하다.
각설하고, 가상인간假相人間과 마찬가지로 가상세계假相世界라 호칭하고 정의한다. 어째서 그러한가? 모두 환화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환화의 뜻이 바로 허깨비이고, 또 가상假相이다.
나는 가상세계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고 가상인간에 호기심이 있다. 어떻게 만들고, 제작비용은 얼마나 될까? 나도 가상인간과 함께 공부하고 싶기 때문이다. 화엄경론을 공부하게 하여 통현장자로 나투게 하고, 화엄경소와 수소연의초 등을 익히게 하여 청량국사로 현현하게 하며, 홍연진결을 학습하게 하여 덕유산인 설천도인으로 화현하게 하면, 지금까지 나의 미완성의 꿈이 더욱 현실화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나는 불교에 대하여 조금은 안다. 불교는 그 높이와 깊이 넓이가 끝이 없기 때문에 안다는 것도 천차만별이다. 나의 불교지식은 현재 선원이나 강원에서 수행하고 계시는 큰스님네와 비교할 형편은 못된다. 천지현격이다. 그러나 세간의 지식인과는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세간의 지식인이 불교를 알고 있는 분량과 모르고 있는 분량의 총체를 비율로 환산하여 1대 10이라 하면, 나는 1대 100정도는 될 것이다. 성문이 불교를 알고 모르는 분량의 비율이 1대 1천이라면 삼현보살은 1대 1만이 될 것이다. 십지보살은 어떠한가? 아마도 1대 10억 곧 1구지가 될 것이며, 나아가 구경에 이르면 1대 1불가설불가설전이 되지 않을까 한다.
어째서 그러한가?
“한 불찰미진수의 심념을 세어서 알 수 있고, 대해 중에 물을 남음이 없이 마실 수 있으며, 허공의 양도 헤아리고 바람도 잡아맬 수 있지만, 부처님의 공덕은 다 설할 수 없느니라.”라고 하시니, 이 때문이다.
안다는 것과 모르는 것은 반비례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비례한다는 쪽에 더 가깝다. 가장 간단한 사례를 들어보자. 옆에 있는 국어사전 말고, 영어사전이나 중국어사전이 있으면 펼쳐보시라. 그 중에 얼마나 알고 있는가? 세간의 학문은 공부하면 할수록 괴테의 파우스트처럼 방황하게 되어 있다.
진정코 바라건대, 무지하다고 부끄러워하지 마라. 궁극의 수치는 자신이 무지한 줄을 모르는 것이다. 지식의 총량은 지혜와 정비례하지 않지만, 무지의 총량은 지혜와 정비례한다고 말할 수 있다. 두려워하지 말고, 무궁한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라.
지금은 가상세계가 현실세계로 탈바꿈하는 세상이고, 가상세계는 누구보다 먼저 내가 선점해야 하고, 어느 나라보다 우리나라가 선봉에 서서 미지의 세계를 개척해 나가야 한다.
내가 지금 발을 딛고 서있는 이 세계는 부사의하다. 나의 몸과 마음도 또한 부사의하다. 세간은 불가사의不可思議하다고 말하고, 출세간은 부사의不思議하다고 한다. 이는 미지의 영역이고, 가상의 세계이다.
이 세계는 세계성취품에 의하면 일체세계해一切世界海 등 끝없는 세계가 펼쳐져 있다. 8척이 못되는 이 몸 안에서도 일체 제불이 팔상으로 성도할 수 있다. 절에서 종무를 총괄하는 스님만 주지스님이 아니고, 우리나라 사람 모두가 자기 몸을 관리하는 주지인住持人이며, 만일 자기 몸 안에서 제불이 출현하시는 줄을 안다면 또한 각인이 주지스님이다.
이 세계가 불국정토이고, 내 몸은 청정법신이다. 이를 현실화하는 최선봉에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가상인간이 있다. 인공지능의 역량은 알파고가 바둑판 위에서 이미 증명했다. 가상인간을 누가 다스릴 것인가? 초인이다.
만일 가상인간이 나의 마음인 줄만 안다면 당신이 바로 초인이다. 인간은 가상세계에 들어가야 비로소 시공을 초월할 수 있지만, 초인은 현실세계의 지금 바로 그 위치에서 곧바로 시공을 초월할 수 있다. 초인은 이 현실세계가 바로 가상세계이기 때문이다. 가상인간의 출현은 초인 출현의 선봉장이다. 능력이 있는 이여, 가상인간에 배팅하라. 가상인간을 다스리는 이는 천하를 다스릴 것이다.
2022년 1월 25일 목욕재계하고 글을 써서 마치다. 길상묘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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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공부할 내용이 참.많습니다.
역학 강의방 에서 글써주시면 오래 보관됩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좋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신축년 공부기와 임인년 공부기라는 제명으로 몇 편의 글을 쓴 일이 있습니다.
정리해서 내일부터 역학 강의방에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역은 변역이고, 변역의 대어는 불변이며, 또 불변의 대어는 수연이기도 합니다.
이에 불교와 관련한 글도 또한 역학 강의방에 쓴다고 하여 크게 어긋나지는 않겠습니다.
호의를 배풀어주셔서 거듭 사의를 표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히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