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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골산 칼럼 제1387호
호주 시드니에서 온 일백 일흔 두 번째 편지
이렇게 중요하고도 책임이 막중한 사람이 바로 당신입니다
내가 대학교에 다닐 때 바바리코트는 멋지게 입는 옷 중에 하나였습니다. 그 당시 지금처럼 여러 종류의 코트에 많은 종류의 옷들이 있었던 시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바바리코트 하나만 걸치면 멋들어진 폼(?)을 만들어 낼 수 있었습니다. 거기에 더 멋 낸답시고 철학에 관한 책 하나 옆구리에 끼고 덜어진 낙엽을 밟으며 ‘시몬 너는 아는가! 낙엽 떨어지는 소리를!’하고 읊조리면 온 세상의 고뇌를 혼자 안고 가는 양 그렇게 무게 잡고 걸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사실 바바리코트는 전쟁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1차 세계 대전 시 플랑드르에서 연합군과 독일군은 장기간에 걸친 참호전을 벌였습니다. 이때 참호전에서 비와 추위를 막기 위해 영국군이 고안해 낸 것이 바로 트렌치코트였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버버리 회사는 이 코트를 바바리코트라는 이름으로 내 놓았고 얼마가지 않아서 전 세계 시장을 석권하게 되었습니다.
그랬던 바바리코트가 어느 순간 어느 정신줄(?) 놓은 사람 때문에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바바리코트 안에 속옷을 입고 있지 않다가 지나가는 여성들 특히 어린 여학생들 앞에서 바바리코트를 열어 젖혀 자신의 신체의 일부를 노출하고 도망을 칩니다. 그것을 본 학생들이 기겁을 하면서 소리를 지르는 것을 보면서 쾌락을 느끼는 일종의 정신병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 때문에 ‘바바리맨’이라는 신종어가 생겨났습니다.
‘바바리맨’에 대해서는 프로이트가 분석한 것이 있다. 그에 따르면 남자의 노출증은 거세(去勢) 콤플렉스의 한 증상이라고 합니다. 즉 자신의 그것이 온전하다는 것을 자타에게 확인시키는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바바리코트를 멋들어지게 입은 남자가 혹 변태는 아닌가 하는 의심의 눈초리를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 때문들에 그 광경을 본의 아니게 목격한 어린 학생들이 정신적인 고통에 시달립니다. 잠도 잘 자지 못하고 꿈에서도 ‘바바리맨’이 등장하여 식은땀을 흘리며 잠을 깨곤 합니다. 괜히 바바리코트를 입은 사람만 봐도 다리가 얼어붙어 걸음을 뗄 수가 없을 정도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으슥한 골목길에 들어서기만 해도 누군가가 자꾸만 자신을 따라 오는 것 같은 착각을 갖게 되고 지나가는 사람을 보면 먼저 의심부터 하게 되는 정신적 후유증을 갖게 된다고 합니다.
나는 바바리코트를 좋아했습니다. 지금 호주에서는 입을 기회가 없어서 아예 있지도 않지만 한국에서 호주로 올 때 바바리코트를 가지고 올 정도였으니까 말입니다. 사실은 내가 바바리코트를 좋아한 이유가 있습니다. 한국에서 대학생 때 ‘파리는 안개에 젖어’ 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주인공이 누구였는지, 무슨 내용이었는지도 전혀 기억이 나지를 않지만 오직 제목 그대로 안개에 젖은 파리의 모습만이 그리고 그 짙은 안개 속에서 남자 주인공이 바바리코트의 깃을 세우고 걸어가는 장면만이 눈에 선합니다. 그때 그 바바리코트를 입는 남자의 모습이 멋있어 보였는지 그때부터 바바리코트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 영화의 장면이 눈에 선명하게 남아 있어서인지 2002년도에 유럽을 방문했을 때 안개에 젖은 파리를 꼭 보고 싶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기대했던 파리에서는 안개를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 대신 전혀 다른 곳에서 지금까지 가졌던 안개의 개념과는 전혀 다른 무시무시한 안개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안개라고 하면 그때 그 무서움이 먼저 떠오르게 됩니다.
이탈리아를 여행하고 그리스로 해서 독일로 돌아오는 길에 알프스 산맥의 한 줄기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시각은 새벽 3시. 분명 하늘에는 알프스 산자락에 있던 수많은 별들이 쏟아지고 있었는데 갑자기 몇 초 사이로 짙은 안개가 휘몰아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안개라고 하기 보다는 안개 기둥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갑자기 정전이 되어 캄캄한 곳을 감으로만 더듬으며 살 살 걷는 것과 같았습니다. 얼마나 무서웠고 소름이 끼쳤으면 10분이 좀 넘는 시간이 몇 시간이 흐른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사실 호주에서도 새벽에 안개를 뚫고 가면서 운전을 하면 재미있고 스릴이 있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 그 당시는 스릴이 아니라 죽음의 문턱을 오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유럽의 고속도로는 한국이나 호주처럼 제한 속도가 있지 않았습니다. ‘무제한’, 글자 그대로 아무리 속도를 내어도 사고만 발생하지 않는다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유럽에서 낮에는 차의 속도가 시속 150Km는 보통입니다. 그러나 밤의 속도는 그보다 훨씬 더 빠릅니다. 그런데 그때 새벽, 차의 속도는 어마어마했습니다. 지금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인 시속 200Km.
차만 거북이걸음으로 서행했다면 그까짓 안개쯤은 무서울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차의 속도가 200Km. 그리고 내 차의 속도만 220Km가 아니라 그 고속도로를 달리는 모든 차들의 속도가 다 200Km가 넘습니다. 그러니 10m 앞도 전혀 보이지 않는 그 상황에서 200km가 넘는 속도로 차들이 달리고 있으니 그 공포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내 차의 속도를 줄일 수도 없습니다. 만약 내 차의 속도를 줄이면 뒤에서 달려오는 차들이 내 차 속도가 줄어든 것 때문에 충돌하고 맙니다. 그렇게 되면 나로 인해서 대형 사고가 나게 됩니다. 그러니 내가 살고 또 남들이 살기 위해서는 내 차의 속도는 그대로 유지하면서 오직 앞에 달리고 있는 차의 백라이트 불빛을 보면서 그대로 따라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앞에 달리고 있는 차가 잘못하여 차 선 밖으로 차를 몬다면, 만약 옆에서 운전하고 있는 조카가 실수하여 차 선 밖으로 차를 운전한다면.’ 그렇게 되면 나는 물론이고 아무것도 모르고 잠들어 있는 나의 사랑하는 아내와 두 딸도 그리고 우리를 따르는 모든 차들도 계곡 밑으로 굴러 떨어질 것입니다. 이 생각을 하니 나의 등 뒤로 식은땀이 주르르 흘렀습니다.
이것은 ‘파리는 안개에 젖어’라는 영화의 한 장면이 아니라 실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실제 상황이 지금 우리 주변에서도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내가 인생이라는 차를 잘못 운전해 나간다면 나로 인해서 나를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이 지옥 불로 떨어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정신 차리고 잘한다면 나로 인해서 나의 가족과 나의 주변 모든 사람들까지도 천국으로 안전하게 인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혹시 ‘바바리맨’과 같이 사회에 악영향을 끼치는 사람이 된다면 나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가운데 지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니 또 다시 나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고 있습니다.
순간 무엇인가가 나의 뇌리를 스쳐갑니다. “‘나’라는 사람이 이렇게 중요한 사람이구나! ‘나’라는 사람의 책임이 이렇게 막중하구나! 하나님의 백성된 내가 그 하나님 나라를 전할 아주 소중한 사람이구나!” 그런데 정말 이렇게 중요하고 소중한 사람인 ‘나’, 이렇게 책임이 막중한 사람인 ‘나’가 바로 이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라는 사실, 이것이 더 중요합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여 하심이라”(벧전2:9)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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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글로 창골산 봉서방 카페와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저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들립니다~~감사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