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하는 신앙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뭔가 행동을 하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이란 주님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하고’ 있는 사람이다.
행동의 책
성경은 사람들 사이에서 행동하시는 하나님,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 무엇을 행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담은 책이다. 하나님은 행동을 하실 때 대개의 경우 사람들을 부르사 당신과 함께 그리고 당신을 위하여 행동하게 하신다. 당신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하게’ 하시는 것이다. 성경은 인간의 힘없는 실패와 어찌할 수 없는 좌절의 역사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 때마다 하나님은 사람을 세워 그 백성을 절망의 상황에서 이끌어 내게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바로의 국고성을 건축하며 노예 생활을 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모세를 세우사 가서 바로에게 “내 백성을 보내라”고 말하게 하신다. 모세가 죽자 후계자로 훈련받은 또 다른 행동하는 사람 여호수아가 준비하고 있다가 그 자리를 이어받는다. 이후의 역사를 보면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이방 민족의 침략을 받게 되는데(대개는 홀로 하나이신 참되신 하나님을 향한 불순종의 결과로 내려진 형벌이었다.) 그 때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사람들을(드보라의 경우와 같이 여자들도 포함하여)세우신다. 처음에는 옷니엘, 에훗, 삼갈, 바락, 기도온, 입다, 삼손, 사무엘 같은 사사들을 다음에는 사울과 다윗 같은 왕들을 그리고 나중에는 엘리야, 엘리사,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같은 선지자들을 세우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마지막 상태에 대하여 하나님은 에스겔(22:30)을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서 나로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서 찾다가 얻지 못한 고로.”
그 전에만 해도 백성들을 돌이켜 회개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게 했던 요시야와 히스기야 같은 왕들이 있었지만 이제는 아무도 없었다. 구약은 자신의 전체를 아낌없이 드려 하나님을 섬길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이야기이다.
행동하는 사람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으 행하셨던”(행10:38) 예수님 자신이 가장 두드러지게 행동하는 분이셨다. 그 분은 하나님이 동물의 제사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하나님의뜻을 행하러 왔나이다”(히10:5-7)하신 것과 같이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드리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아셨기에 기꺼이 고난 속으로 뛰어드셨다. 그 분은 아버지께서 하라고 명하신 일을 다 이루기 위해 오셨다. 마침내는 그 일을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을 뿐 아니라 또한 제자들에게도 행동의 필요성을 가르치셨다.
이것이 바로 그 많은 비유의 핵심이 아닐까? 앞에서 이미 살펴본 달란트와 므나의 비유를 보면 책망을 받은 사람은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사람이다. 양과 염소의 비유를 보면 인간의 필요와 고난을 보고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무서운 심판이 예비되어 있다.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마25:41-43). 내가 주렸을 때 너희는 무엇을 하였느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내가 감옥에 같혔을 때 너희는 무엇을 하였느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내가 벗었을 때 너희는 무엇을 하였느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마지막 지상 명령은 가서 행하라는 명령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19-20). 가서 무엇인가를 행하라. 제자를 삼고 그 제자4들 또한 가서 내가 너희에게 하라고 명했던 모든 일들을 행하도록 가르치라. 계속해서 제자들을 더 많이 삼아 그들 또한 가서 행하도록 가르치는 일이 포함되는 것은 물론이다. 현대식으로 표현하자면 이것은 ‘행동개시’의 명령이었다. 따라서 신약의 4복음서 다음에 사도행전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사도들은 성령의 능력 안에서 주 예수를 위해 뭔가를 행하도록 보냄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행동하시는 하나님
이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성경의 하나님은 행동하시는 하나님 즉 늘 무엇을 행하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현대인들 사이에 유행하는 ‘우리 존재의 근거’ 운운하는 신과는 대조적인 것으로 그들이 생각하는 신은 인간 의식의 깊은 내면에서 어쩌다 한 번씩 그것도 무력하게 움직이는 신이다. 인간사에 결정적으로 개입하기를 꺼려하고 굳이 개입할 일이 있더라도 대리자를 통해 언제 그랬는지 의아심이 들 정도로 간접적으로만 움직이는 신이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일하시는 하나님, 행동하시는 하나님이다. 그분은 창조하시며 행동하신다. 그분은 개입하시며 열방을 흔드신다. 그분이 산을 만지시면 온 산이 연기를 발한다. 그분은 산을 숫양처럼 뛰게 하시며 작은 산을 어린 양처럼 뛰게 하신다. 그분은 철장으로 다스리시며, 그분은 위대한 왕이시다. 이것은 반감을 느낄 수도 있는 극도의 신인동형적인 표현이지만, 하나님이 영광중에 살아 계신 분이요 승리 안에 행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아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분의 행동은 능하시고 상황에 적절하며 은혜로우시고 거스를 수 없으며 의로우실 뿐만 아니라 심판을 이루신다. 성경의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다니엘과 에스겔과 요한과 마찬가지로) 땅에 엎드려서 언제나 “두려워 말라…”는 안위의 음성을 들을 수 밖에 없다. 두려움과 경외심은 인간이 하나님을 만날 때 저절로 생겨나는 반응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힘과 권능과 위력은 바울이 사용한 그 모든 최상급 단어들을 가지고도 제대로 다 표현할 수 없다.
이 행동하시는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곧 우리도 몸을 움직여 행동을 개시해야 한다는 즉각적인 도전으로 다가온다. 우리는 그 분 앞에 엎드려 이렇게 고백하게 된다. “주님 저의 손을 취하사…저의 발을 취하사…저를 주님을 섬기는 일에 사용하여 주옵소서.”
행동을 불러일으키는 행동
하나님의 사람들은 일을 시작한다. 블레셋 사람들에게는 철의 독점을 통한 효율적인 무기 봉쇄와 막강한 병력이 있었다. 그들은 요소요소마다 군대를 배치하여 이스라엘 블레셋 요새의 감시를 받는 점령국으로 만들려 하고 있었다. 이 때 요나단은 병기 든 자 하나만 데리고 나가 분연히 어느 요새 하나를 공격한다. 결국 그것이 도와선이 되어 블레셋 군대는 전부 패주하게 된다. 요나단의 행동은 규모는 지극히 작은 것이었지만 대단히 용감한 행동이었다. 요나단은 대략 2Km 넓이의 땅 안에서 적군 스무 명을 죽었다. 이것은 아주 작은 접전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한 사람의 용맹스러운 행동으로 인해 싸움이 시작되고 행동이 개시되어 결국 위대한 승리를 가져오게 되었다.
블레셋 사람들은 세력을 갖추어 다시 돌아온다. 그들은 새로운 비밀 병기를 동원했는데, 그가 바로 몸집 좋고 입심 좋은 거인 골리앗이다. 이스라엘 병사들은 사실 일 동안을 계곡 반대편에 앉아 멀뚱멀뚱이 거인을 쳐다보며 떨고 있었다. 이 때 하나님의 행동하는 사람, 다윗이 등장한다. 그는 무기라고는 하나도 들지 않고 실전 경험도 전혀 없었지만, 하나님을 모욕하는 말을 듣고 분노를 참지 못한다. 그는 거인과 대결하여 그를 죽임으로 만인을 놀라게 한다. 그는 단 한 사람을 죽였지만 그것이 도화선이 되어 블레셋 군대 전체가 패하여 달아나게 된다.
요나단과 다윗은 둘 다 작은 전선 즉 현재의 자기 위치에서 행동을 시작했으나, 그것이 있었기에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자기가 있는 지역에서 전투를 시작할 필요가 있다. 적군 전체를 상대로 하여 싸운다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또 그럴 필요도 없다. “네 손 닿는 대로 주 위하여 일하라”는 한 찬송가 가사처럼 자신이 처한 그 곳에서 용기를 내어 행동을 개시하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다. 우리의 행동의 결과로 전쟁이 전면적으로 확대되면, 나머지 모든 것은 하나님이 책임지실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와 똑 같이 무엇을 시작하고자 하는 열망이 필요하다. 공장에서 전도 그룹을 만드는 것도 좋고, 이웃집 주부들을 초대하여 커피를 대접하며 함께 성경공부를 하는 것도 좋다. 사무실에서 토론을 벌이는 것도 좋고, 학생 성경공부 모임을 만들거나 어린이 주일 학교를 시작하는 것도 좋다. 기독 단체의 지부를 설립하는 것도 좋고 전도용 도서실을 운영하는 것도 좋다. 영국을 포함한 다른 나라들의 회원이 여전히 대부눈 어린아이 사역을 할 때, 일본에서 성인들을 위한 성서 유니온 운동을 시작한 사람은 열여섯 살 난 미국인 소녀였다. 또 어느 일본인 교장 선생을 통하여 세 곳에 교회가 시작되었다. 그는 작은 그룹을 모은 다음 몇 가정이 회심하여 목사를 초빙할 수 있게 될 때까지 성경공부를 계속했다. 우리 또한 손과 발을 주님께 드려 우리가 있는 자리에서 그 분을 위해 뭔가 일을 시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행동을 회피하려는 우리
물론 성급하고 경솔한 행동을 조심스레 삼가는 것이 좋을 때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일하시기를 기다리는 것이 영적인 태도라고 생각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우리는 곧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떠넘겨 버린다. 원수를 갚은 일만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구체적인 행동을 통해 원수에게 사랑을 보이라는 명령이 주어져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일을 하나님께 떠넘겨 버린다. 하나님은 특정한 문제들에 대해 이미 분명한 규정을 주셨다. 우리는 원수에게 먹을 것을 주고, 우리를 악용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기 위해 새로운 지침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우리는 가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고 가르치기 위해 특별한 환상을 받을 필요가 없다. ‘세상 끝날까지’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라고 분명히 나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든 사람 특히 믿음의 가족들에게 선을 베풀기 위하여 따로 명령을 받을 필요가 없다. 실상은 일종의 불순종에 지나지 않는 가짜 ‘정적주의’가 있을 수 있다. 마땅히 행해야 할 바가 성경에 이미 명백히 나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어’하는 태도는 영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는 행동을 피하려 한다. 어떤 때는 하나님이 부르셨다는 증거로 굉장한 표적을 구하기도 한다. “너는 이 네 힘을 의지하고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삿6:14). 이런 명령을 받았을 때 기드온은 자기 집이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자기가 작은 자임을 구실로 내세운다. 그는 하나님께 표징을 구하고 구한 대로 받고 나서, 이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깨닫는다. 기드온은 떨리는 마음으로 순종의 첫발을 내딛어 자기 아비에게 있는 바알의 단을 부순다. 그 뒤로 기드온은 두 번이나 더 표징을 구한다. 우리 역시 행동을 하라고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건만 모두가 하나같이 “보낼만한 자라를 보내소서”하며, 이것을 다은 사람에게 떠 넘기려고만 하고 있다. 성경은 우리를 행동으로 부르고 있다. 손과 발을 그 분께 드려 그 분은 섬기라 하고 있다.
주님의 손발과 마음, 갈보리에서 저를 위해 못박히셨으니
저도 지금 여기서 저의 손발과 마음을 제물로 드립니다.
1.나는 수동적인 구경꾼 유형의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으로 만조하고 있는가?
2.내가 그리스도를 위해 주도적으로 나서서 시작한 일은 무엇인가?
3.지금 내가 주님을 위해 실제로 하고 있는 일은 무엇인가? 그 외에 내가 더 할 수 있는 일은 없는가?
4.내 주위에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는가? 내가 그 사람을 위해서 해줄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5.한 번 시도했다가 실패했다고 더 이상의 시도를 포기하고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