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3장 14절의 히브리어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는 ‘하나님의 이름’이 아닌, ‘하나님의 속성’을 설명하는 말이지만, 그렇다고 개역성경에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번역하듯이 ‘하나님의 존재의 속성’을 가리키는 말은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돼 관심을 끈다.
최근 발간된 학술논문집 <성경과 교회 5 (2007)>에 실린 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이태훈 교수의 논문에서다.
출애굽기 3장 14절에 대한 연구 너무 방대해
하나님이 바로의 압제 하에 고통받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모세를 애굽으로 보내려고 하자 ‘당신의 이름을 무엇이라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해야 하느냐’고 묻는 모세의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 출애굽기 3장 14절이다.
이 구절의 히브리어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에 대한 연구는 너무 방대해 아직까지 정확한 번역이 확정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개역성경 ‘나는 스스로 있는 자’는 칠십인역의 헬라어 ‘에고 에이미 호 온’의 번역인 ‘나는 존재한 자다’의 번역의 영향을 통해 온 것이다.
그러나 칠십인역이 참조는 될 수 있지만, 확실한 번역에 대한 증거는 되지 못한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그래서 영어성경의 경우 대체로 ‘I am who I am: 나는 곧 나다’ 혹은 ‘I will be who I will be: 나는 되고자 하는 대로 될 나일 것이다’로 직역하고 있다. 하지만 이 말은 직역한 것으로 번역이 아닐 뿐 아니라, 그 의미의 이해에 있어서도 어려움이 따른다.
이런 이유로 ‘JPS Hebrew-English Tanakh(1985)’은 이를 번역하지 않고 고유명사처럼 ‘Ehyeh-Asher-Ehyeh’ 그대로 음역하고 있다.
출애굽기 3장 14절, 하나님의 속성을 설명하는 말
이에 이태훈 교수는 문맥을 통해 이 구절의 의미를 찾고자 했고, 인근 문맥인 3장 11-15절에서 해석의 직접적인 실마리를 찾았다.
하나님이 바로의 압제 하에 고통받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모세를 애굽으로 보내려고 하자(10절), 모세는 하나님께 두 가지의 질문을 한다.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 자손을 인도해 내겠습니까”(11절)라는 모세의 첫 질문에, 하나님은 “내가 너와 함께 할 것”(12절)이라고 대답하신다.
“그들(이스라엘 자손들)이 (나를 보낸)하나님의 이름에 대해 물으면 내가 무엇이라고 말해야 합니까”(13절)라는 두 번째 질문에는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14절)라는 대답을 먼저 주신다. 그리고 이어 “‘여호와,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보내셨다’고 하라”(15절)고 대답을 하신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실질적인 대답은 15절이며, 14절은 하나님의 이름을 표현하는 구절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감추는 말’이라는 것이 대부분 학자들의 견해다. 그래서 ‘14절은 하나님의 속성을 설명하는 구절’이라는 견해가 많은 학자들의 지지를 받는다.
하지만 칠십인역에서 번역하듯이 ‘하나님 존재의 속성’을 나타내는 말은 아니라는 것이 최근 대두되고 있는 견해다. 영어성경 번역본들이 이 구절을 ‘I am who I am’ 혹은 ‘I will be who I will be’로 직역하고 있는 것이 이를 잘 나타내고 있다.
출애굽기 3장 14절,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설명하는 말
이태훈 교수는 14절이 하나님의 속성을 표현하는 말이라면, ‘하나님의 어떤 속성’을 설명하는가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인접 문맥인 12절 ‘내가 너와 함께할 것이다’(예흐예 임마크)에서 찾았다.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에서의 ‘예흐예’(나는 이다: I am)는 ‘임마크’(너와 함께: with you)가 생략된 형태고, 이를 반복 사용한 것은 강조를 위함이며, ‘아쉐르’는 ‘관계대명사’(who) 외에 ‘접속사’로도 사용되므로 이를 정리하면 ‘내가 (너와 함께)하리니, 내가 (정녕 너와 함께)할 것이다’라고 번역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리이까”(11절)라며 바로에 대한 두려움을 나타내는 모세에게 “내가 너와 함께할 것”이라는 말로 용기와 위로를 주었음에도, 여전히 두려움과 회의에 사로잡혀 ‘여호와의 이름’을 묻는 모세(13절)에게 ‘너와 함께하는 자’라는 말로 책망과 동시에 용기를 주는 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14절 하반의 “‘에흐예’가 너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보냈다고 말하라”고 하는 구절도 “‘내가 (너와 함께)한다’고 약속하시는 하나님, 곧 ‘너희와 함께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나를 너희에게 보냈다고 말하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 이 교수가 제안하는 바다.
이에 이 교수는 14절을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와 함께)하리니 내가 (정녕 너와 함께)할 것이다.’ 그리고 그가 말씀하셨다. 이같이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라. ‘내가 (너희와 함께)하리라는 그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로 사역(私譯)했다.
이 교수는 이어 “모세의 두 가지 질문에 대답하신 하나님은 이어서 그가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시고(출 3:16-22), 모세는 더 이상 두려움과 회의 가운데 주저하지 않고 하나님이 명하시는 대로 실행한다”며 “모세는 하나님이 주신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라는 말의 의미를 마음속으로 이해했던 것 같다”고 해석함으로써 자신의 논지를 뒷받침했다.
‘I will be who I will be: 나는 되고자 하는 대로 될 나일 것이다’ 로 직역해서 가르치신다는 말씀인지요? 저는 이런 번역이 가능하다는 걸 알고 엄청난 관심과 흥분에 설레고 있습니다. 물론 이 번역도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 를 다 옮기지 못한다는 건 덤으로 짜릿하고요. 역시 신의 이름을 인간 언어로 담지 못해야 정상이 아닌가요. 이름이라기보다는 존재적 속성이라 해야 맞는다고 합니다.
분명히 하자.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다. 일찍이 히브리인들이 ‘바람’ 또는 ‘숨결’ 그리고 무엇보다도 ‘영’을 뜻하는 히브리어 ‘루아흐’로 불렀고, 토마스 아퀴나스가 “무한하고 무규정적 실체의 거대한 바다”와도 같다고 묘사한 신은 그 어떤 형체도 갖고 있지 않다. 그럼으로써 오히려 모든 형체가 있는 것들의 근원이 된다. 물론 신은 전능하므로 그가 어떤 형체를 갖고 나타나는 일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구약성서에서 아브라함에게 그랬듯이 신은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창세기 18~19 등) 모세와는 대면해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출애굽기 33:11, 민수기 12:6~8 등) 하지만 이것은 신이 자기를 나타내는 한 방법일 뿐 신이 가진 본래의 모습은 아니다. 당연히 신약성서에서도 신은 “어느 때나 하느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요한일서 4:12), 또는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디모데전서 6:16)로 표현되었다.
그래서 굳이 비교하자면, 기독교 신학에 나타난 신의 모습은 우주의 근원을 탐색하는 현대 물리학자들이 ‘퍼텐셜’이라고 부르는 것과 오히려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물리학자들은 아무런 형체가 없기 때문에 어떤 방법으로도 인지할 수는 없지만 우주 전체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물질이 그것에서 생성되고 소멸되는 ‘소립자장’을 퍼텐셜이라 부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일 뮌헨의 막스플랑크연구소 소장 한스 페터 뒤르는 물리학자들이 퍼텐셜이라 부르는 것을 신학자들은 ‘신의 숨결’이라 부른다고도 했다.
하지만 ‘퍼텐셜’이 우리가 앞서 말했던 ‘존재’나 기독교에서 섬기는 신은 아니다. 왜냐하면 퍼텐셜이 모든 물질의 근원이라 해도 그것은 여전히 세계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일 퍼텐셜을 신이라고 하면 신도 세계의 일부가 된다. 그러면 기독교의 신이 가진 중요한 속성인 신의 절대적 독립성, 곧 신의 세계 초월성이 훼손된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은 퍼텐셜을 가능케 하고 또한 포괄하지만 퍼텐셜을 초월한다. 신의 크기가 모든 물리적 공간의 크기를 가능하게 하지만 그것을 초월하고, 신의 영원성이 모든 물리적 시간의 흐름을 가능하게 하지만 그것을 초월한다.
첫댓글 이태훈 교수가 재밌는 사람이네요. 그의 주장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 전에 제기된 겁니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는데, 아마 현대성서주석에도 저 설명이 실려 있을 겁니다. 저도 이미 20년 전부터 그렇게 교인들에게 설명하고 있는 내용이죠.
‘I will be who I will be: 나는 되고자 하는 대로 될 나일 것이다’ 로 직역해서 가르치신다는 말씀인지요? 저는 이런 번역이 가능하다는 걸 알고 엄청난 관심과 흥분에 설레고 있습니다. 물론 이 번역도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 를 다 옮기지 못한다는 건 덤으로 짜릿하고요. 역시 신의 이름을 인간 언어로 담지 못해야 정상이 아닌가요. 이름이라기보다는 존재적 속성이라 해야 맞는다고 합니다.
@주의검을보내사 이 내용을 공부한지 너무 오래 돼서 기억이 정확하지 않다는 걸 전제로 말하자면,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
= 나는 내가 있고 싶은 곳에 있는 자이다.
=나는 내 백성과 함께 있는 자이다. 내가 있고 싶은 곳은 내 백성들이다.
이 정도로 기억이 나네요. 결국 하나님은 자기가 택한 백성과 함께 하기에 아무 거리낌이 없는 존재라는 뜻일 겁니다.
@삼번국도 이 기사가 2007년 것이니 이태훈 교수가 그전 학계의 설왕설래를 집적해서 논문을 낸 모양이에요.
@주의검을보내사 [현대성서주석]은 [interpretation commentary]를 번역한 책입니다. 이 책이 어느 정도 오래됐는지는 모르겠군요. 번역본인 현대주석이 2001년이니 그보다 많이 앞섰겠지요.
@삼번국도 저는 I will be who I will be 라는 번역이 더 맘에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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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하자.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다. 일찍이 히브리인들이 ‘바람’ 또는 ‘숨결’ 그리고 무엇보다도 ‘영’을 뜻하는 히브리어 ‘루아흐’로 불렀고, 토마스 아퀴나스가 “무한하고 무규정적 실체의 거대한 바다”와도 같다고 묘사한 신은 그 어떤 형체도 갖고 있지 않다. 그럼으로써 오히려 모든 형체가 있는 것들의 근원이 된다. 물론 신은 전능하므로 그가 어떤 형체를 갖고 나타나는 일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구약성서에서 아브라함에게 그랬듯이 신은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창세기 18~19 등) 모세와는 대면해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출애굽기 33:11, 민수기 12:6~8 등) 하지만 이것은 신이 자기를 나타내는 한 방법일 뿐 신이 가진 본래의 모습은 아니다. 당연히 신약성서에서도 신은 “어느 때나 하느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요한일서 4:12), 또는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디모데전서 6:16)로 표현되었다.
그래서 굳이 비교하자면, 기독교 신학에 나타난 신의 모습은 우주의 근원을 탐색하는 현대 물리학자들이 ‘퍼텐셜’이라고 부르는 것과 오히려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물리학자들은 아무런 형체가 없기 때문에 어떤 방법으로도 인지할 수는 없지만 우주 전체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물질이 그것에서 생성되고 소멸되는 ‘소립자장’을 퍼텐셜이라 부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일 뮌헨의 막스플랑크연구소 소장 한스 페터 뒤르는 물리학자들이 퍼텐셜이라 부르는 것을 신학자들은 ‘신의 숨결’이라 부른다고도 했다.
하지만 ‘퍼텐셜’이 우리가 앞서 말했던 ‘존재’나 기독교에서 섬기는 신은 아니다. 왜냐하면 퍼텐셜이 모든 물질의 근원이라 해도 그것은 여전히 세계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일 퍼텐셜을 신이라고 하면 신도 세계의 일부가 된다. 그러면 기독교의 신이 가진 중요한 속성인 신의 절대적 독립성, 곧 신의 세계 초월성이 훼손된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은 퍼텐셜을 가능케 하고 또한 포괄하지만 퍼텐셜을 초월한다. 신의 크기가 모든 물리적 공간의 크기를 가능하게 하지만 그것을 초월하고, 신의 영원성이 모든 물리적 시간의 흐름을 가능하게 하지만 그것을 초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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