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명성’은 사탄을 의미하는가?
하나님 앞에 교만하여 그 힘을 상실한 바벨론 왕을 묘사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이사야 14:12
대학생 시절 어느 선교 단체에서 훈련을 받을 때, 사탄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강의를 들은 바 있다. 그때 사탄에 대해 강의하던 간사님은 사탄의 정체를 설명하기 위해 이사야 14:12을 자주 사용하였다. 필자는 그때부터 이사야 14:12을 사탄의 정체를 알려주는 중요 본문으로 기억하기 시작했다.
이사야 14:12에 등장하는 아침의 아들 계명성을 사탄과 연결시키는 해석은 많은 목회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고, 아직도 여러 목회자들이 이런 식으로 가르치고 있는 듯하다. 라틴어 역본인 벌게이트 역에서 이사야 14:12의 계명성은 ‘루시퍼’로 번역되고 있는데, 이 단어의 뜻은 단순히 ‘샛별’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계명성을 사탄으로 해석하는 순간, 이 단어는 사탄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사야서를 전공하면서 보다 세밀하게 본문을 연구해 본 결과, 필자는 이사야 14:12의 계명성을 사탄의 정체와 결부시킬 수 없으며, 루시퍼는 사탄의 이름이 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오히려 이사야 14:12은 사탄을 가리키기보다는 교만한 바벨론 왕의 심판과 멸망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이런 잘못된 해석이 시작되었을까? 이것의 문제점은 무엇일까?
‘사탄’으로 해석하는 시도들
이사야 14:12에서 계명성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헬렐’을 사탄과 동일시하는 해석은 유대인들의 위경에 속한 ‘아담과 하와의 생애’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또한 기독교에서 ‘헬렐’을 사탄으로 해석하는 전통은 이미 초대교회부터 시작하여 오늘날에도 만연해 있는 실정이다.
이사야 14:12의 ‘헬렐’을 사탄으로 간주하는 해석은 일찍이 초대 교부시대부터 시작되었다. 초대 교부 중 한 사람이었던 테르툴리아누스(ca. A. D. 160-230)는 마르시온과 대적하기 위해 저술했던 그의 작품 〈마르시온을 반박함〉에서 사탄의 교만을 묘사한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사탄이 하늘의 구름 속에서 자리 잡고 “가장 높으신 자”the Most High처럼 행세한다고 말하면서 이사야 14:14,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를 인용한다. 분명치 않지만 아마도 테르툴리아누스는 이사야 14:12의 ‘헬렐’을 사탄에 대한 묘사로 이해했던 것 같다.
이사야 14:12의 ‘헬렐’을 보다 분명하게 사탄으로 해석한 사람은 오리게네스(ca. A.D. 185-254)이다. 더욱이 제롬의 라틴역 성경에서 ‘헬렐’은 ‘루시퍼’로 번역되었는데, 원래 이 표현은 행성들 가운데 금성을 뜻하는 라틴어였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탄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인식되어 왔다. 가령 NKJV는 ‘헬렐’을 ‘루시퍼’로 번역하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은 이 명칭을 ‘사탄’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한다.
계명성의 배경
계명성으로 번역된 ‘헬렐’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어원적 배경을 먼저 추적해 보아야 한다. ‘헬렐’에 대한 어원적 배경을 설명하는 학자들의 입장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진다. 어떤 이들은 ‘헬렐’의 기원으로서 고대근동 신화의 배경을 강조하며, 혹자는 헬라 신화에 초점을 두며, 또 어떤 학자들은 신화적 배경을 고려치 않고 행성 중 하나인 ‘금성’에 대한 표현으로 해석한다.
‘헬렐’을 금성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입장은, ‘헬렐’을 바벨론 왕의 특징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 하나의 메타포로 해석한다. 필자는 금성을 ‘헬렐’의 배경으로 보는 세 번째 입장이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고대에 금성은 새벽에 가장 찬란한 빛을 발하지만 태양의 등장으로 속히 그 빛의 힘을 잃어버리는 별로 인식되었다. 그러므로 이사야가 ‘헬렐’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에는 이와 같은 금성의 특징을 염두에 두면서 하나님 앞에 교만하여 그 힘을 상실한 바벨론 왕을 묘사하기 위해 ‘금성’을 메타포로 사용한 것이다.
계명성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그렇다면 이사야 14장에서 강조되는 이 바벨론 왕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이 질문에 대해 학자들은 다양한 입장을 제시해 왔다. 학자들은 이 인물을 앗수르 왕 티글랏 빌레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 사르곤 2세,므로닥 발라단으로 해석해 왔다. 그러나 오스왈트는 본문 자체를 통해 이 바벨론 왕의 정체를 규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다만 이사야 14장의 구조는 12절의 계명성의 정체를 파악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다. 이사야 14:3-23의 구조에 대한 연구는 많이 진행되어 왔지만, 대체로 이 본문의 구조는 다음과 같은 구성으로 나뉜다.
•서론(14:3)
•독재자의 죽음으로 인한 평화(4b-8)
•독재자에 대한 지하 세계의 반응(9-11)
•독재자의 가식과 멸망(12-15)
•독재자의 버림받음(16-21)
•결론(22-23절)
이사야 14장의 구조는 한 독재자의 심판과 멸망에 초점을 두고 있으며, 특히 이사야 14장이 교만한 바벨론 왕을 비난하는 조소의 시임을 확인시켜 준다. 그렇다면 12절에 등장하는 계명성도 당연히 바벨론 왕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칼빈 역시 이사야 14:12의 계명성을 해석할 때 주의하라고 요청한다. 그는 이사야 14:12에 등장하는 계명성을 사탄으로 보아서는 안 되며 바벨론 왕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분명하게 주장한다.
이사야는 앞에서 죽은 자들이 살아서 말하는 것처럼 이야기를 계속하면서, 독재자는 사람들이 자신을 일종의 신으로 믿어 주기를 바라지만 다른 사람과 전혀 다를 것이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는 이 독재자를 ‘루시퍼’에게 비유하면서 새벽의 아들로 부른다. 그를 이렇게 묘사한 것은 그 독재자가 남보다 화려하고 밝게 단장하기 때문이다. 이 구절을 해석하면서 이것을 사단으로 보는 사람도 있는데, 이것은 무지의 소치다. 앞뒤 문맥을 살피자면 이 말이 바벨론의 왕과 관련해서 말한다는 점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성경 구절을 아무렇게나 읽으며 문맥에 무관심하다 보면 그런 실수가 잦게 된다. 하지만 ‘루시퍼’가 마귀의 왕이요 선지자가 여기서 그에게 이런 이름을 주었다고 상상하는 것은 참으로 무지의 소치다. 이런 추측은 타당성이 없으므로 그저 쓸데없는 우화로 넘겨 버리도록 하자. - 존 칼빈, 「칼빈 성경 주석 이사야 I」(성서교재간행사, 1992), 445쪽
설교자를 위한 제안
지금까지 우리는 이사야 14:12의 계명성을 사탄으로 해석해 온 여러 입장들을 살펴보았고 그 문제점을 살펴보았다. 비록 학자들마다 이사야 14:12의 계명성의 배경과 어원에 관해서는 서로 다른 입장을 취하지만, 이사야 14:12의 계명성을 사탄의 이름으로 해석하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이사야 14:12의 더 넓은 맥락을 고려해 볼 때 본문의 맥락이 계명성을 사탄이 아닌 ‘바벨론 왕’으로 해석하도록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들은 더 이상 이사야 14:12의 계명성을 사탄으로 가르쳐서는 안 될 것이다. 오히려 설교자들은 14장의 전체 문맥에 근거하여 이 계명성을 바벨론 왕으로 바르게 가르쳐야 할 것이다. CTK 2014:7/8
장세훈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구약학 교수, 「한권으로 읽는 이사야서」, 「내게로 돌아오라: 스가랴서 주해와 현대적 적용」의 저자
출처 : 크리스채너티 투데이 한국판(http://www.ctkorea.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