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있었던 일화이다. 현대 그룹 정주영 회장의 집에 도둑이 들었다.
그 당시 정주영 회장의 아내인 변중석 여사는 잠을 자다 인기척에 일어났다.
그러다 도둑들과 마주치게 되었고, 생명의 위협까지 받게 되었다.
도둑은 휘발유를 들고 집을 불태워버리겠다고 협박했다.
그런데, 한참의 시간이 지나도 가져갈 만한 물건을 찾을 수 없었다.
오래된 가구와 낡은 식기, 부잣집에서는 흔한 양탄자 하나 없었다.
도둑은 분명 자신이 모르는 비밀금고가 있을 것이다 라는 생각에 온 집안을
뒤졌지만, 낡은 가전제품이나 허름한 옷 몇 벌 말고는 찾을 수 없었다.
결국 변중석 여사는 아들의 결혼 패물과 월급으로 받은 200만 원을 건네며
도둑들을 내보냈다고 한다.
정주영 회장의 집을 나서면서 도둑들이 했던 유명한 말이 있다.
“현대 회장 집이 뭐 이래!”
1995년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이 62억 달러의 재산을 가진 세계 9번째 부자로
선정되었다. 정주영 회장은 아무것도 없는 우리나라에서 건물을 올리고 교량을
건설한 개척자로 불린다. 소를 판 돈 70원을 들고 가출해 맨손으로 세계적인
기업을 일구고 우리나라 산업화의 기초를 다졌다.
1967년 현대차를 설립하고, 1986년에는 국내 처음으로 미국 시장에 진출하는
위업을 이뤄낸다. 1972년에는 현대조선소를 조성하는데, 여기에는 사업계획서
달랑 한 장 들고 유럽으로 날아가 26만 톤급 2척을 수주하는 거짓말 같은 일화가
담겨있다. 또한, 모두가 안 될 것이라 포기한 중동에 건물을 올리는 기염을 토했다.
정주영 회장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만족하는 법을 배웠다.
당시 나이 19살, 막노동을 시작한 시절부터 절약하는 생활을 했고, 구두가 닳는
것을 늦추려 굽에 징을 박아 신고 다녔다고 한다. 그는 세 켤레의 같은 디자인
구두를 30년이나 신었다. 그가 살던 청운동 자택을 보면 고급스러운 가구는
하나도 없고, 거실 소파의 가죽은 헤져있다고 한다.
그는 신문에 자신이 개인 소득 1위를 달성했다는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죄책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래서였을까? 그의 생활은 별다른 중산층과 다를 바 없었다.
똑같은 밥을 먹고, 똑같은 생활을 했다. 그는 신용을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지나가는 말 한마디 허투루 여기는 법이 없었고, 정주영 회장의 지인들은
하나같이 그의 신용을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유명한 일화가 하나 더 있다. 어느 날, 그의 아들이 외제차를 구입했다.
이 모습을 본 정주영 회장을 불같이 화를 냈다고 한다. 우리 회사가 대한민국
자동차의 자존심이나 마찬가지인데, 그 회장 일가가 이 차를 타고 다니지 않고,
외제차를 타고 다닌다면 사람들이 뭐라 욕하겠냐?
정주영 회장의 이러한 마음가짐이 지금의 현대를 만들었다.
많은 사람이 그를 평가하기를 ‘일 중독자’라고 한다. 돈을 쓸 방법을 몰라서
인생을 누릴 방법을 몰라서 검소하게 산 것이 아니라 그 시간마저 아까울 정도로
일 중독자였다는 것이다. 정주영 회장은 새벽에 일찍 일어나는 습관을 버리지
않았는데, 그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오늘 할 일을 생각하면 기대와 흥분으로
설렜다고 한다.
88년 올림픽 유치를 두고 우리나라와 일본이 유치전을 벌일 때, 당시 한국이
올림픽 유치에 성공할 것이라는 생각은 아무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올림픽
유치위원장이었던 정 회장은 그럴수록 더욱 치밀하게 분석했다.
그중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정 회장은 우리나라 IOC 위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꽃바구니 하나씩을 각국
IOC 위원 방에 넣어주었다고 한다. 그 꽃바구니는 현대의 해외 파견직 직원들의
부인들이 정성스럽게 만든 수제 꽃바구니였다. 꽃바구니의 반응은 대단했다.
다음날 IOC 위원들이 한국 대표단을 보며 모두 반가워하고 감사하다는 인사를
진심으로 전했다.
반면, 최고급 손목시계를 선물했던 일본에는 감사의 인사가 없었다고 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각국 IOC 위원들의 반응이 호의적으로 변하고 정 회장의 유치
활동은 점점 성과를 내기 시작했고 결국 우리나라가 올림픽을 유치하게 되었다.
고 정주영 회장이 생전에 가장 좋아하던 말이 있다.
바로 ‘무한한 상상력의 힘’이었다고 한다.
창조적으로 사고하고 철저히 실천하라.
그것이 그가 걸어온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