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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기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1876년에 알렉산더 그라함 벨(Alexander Graham Bell)에 의해 발명되었다. 서양 속담에 Timing is everything 이라는 말이 있는데, 전화기의 발명에 있어서 벨은 그야말로 간발(間髮)의 차이로 Timing을 맞추어 부(富)를 차지하고 또 역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이다. 그러면 Timing을 놓쳐 역사의 무대 뒤로 쓸쓸히 사라진 사람은 누구일까? 농구 경기의 마지막 순간에 바구니를 향해 던진 공이 아주 멋있게 골-인 되었다. 역전승의 순간이다. 그런데 경기 종료 신호가 먼저 울린 것으로 판정이 난다면 얼마나 억울할까. 0.001초가 안타까운 상황이다. 바로 이런 때 쓰는 말이 Timing is everything!
신(神)은 어떤 시대이건 특정한 소수의 인간들에게만 엄청난 열정과 재능을 부여하며, 인류 역사를 끌고 가는 거대한 수레 바퀴는 바로 이들에 의해 방향이 바뀐다. 그런데 이런 열정과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같은 시대에 같은 일에 매달리는 경우, 거기에는 반드시 승자(勝者)와 패자(敗子)가 생기게 되며 그리고 역사는 승자만을 기억한다. 전화기 발명에 있어 패자의 역할을 하게 되는 불행한 천재는 이제 누구도 그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그레이 (Elisha Gray)다. 1876년 2월14일 오후, 그레이는 자신의 발명품인 전화기에 대한 기본 사항을 등록하기 위해 특허국을 방문해 서류를 접수시켰다. 당시 마흔 한살의 그레이에게는 그야말로 가슴 벅찬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는 대장장이, 목수 등으로 어려운 젊은 시절을 보냈다. 스물 두 살의 나이에야 다시 고등학교로 돌아가 학업을 마치곤, 그 후에는 전화기 발명에 인생을 걸었다. 그레이가 느꼈을 성취감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신(神)은 그레이에게 매우 짓궂었다. 어쩌면 이럴 수 있을까 싶게, 같은 날 오전 중에 알렉산더 그라함 벨도 전화기 발명을 특허 접수했고 결국 이런 몇 시간의 차이 때문에 미국 특허국은 전화기에 대한 특허를 벨에게 내 주었다. 그레이에게는 아쉬움과 절망만이 남았다. 얼마나 억울했을까? 1901년 그의 사후(死後) 발견 된 메모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남아 있었다. "전화기의 역사는 절대로 진실이 아니다. 부분적으로는 이미 잊혀졌고, 또 다른 부분은 입을 다물고 있는 사람들의 가슴 속에 묻혀 있다. 물론 이미 세상을 떠나서 입을 다물고 있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살아 있는 사람들은 돈으로 목구멍이 막혔거나 혹은 황금 자물쇠로 입술이 채워졌는데 이들이 다문 입은 더욱 굳건하다". 진실이 무엇인지 우리는 모르지만, 그레이의 아픈 마음이 느껴진다. Timing is everything - 그레이는 얼마나 뼈저리게 느꼈을까.
그림 9.1. 그레이(Elisha Gray) 한 발자국 늦었던 전화기의 발명자.
몇 시간 차이로 전화에 대한 특허를 받은 운 좋은 사나이 벨의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돌아오기로 하고, 사람의 목소리를 전하는 전화기가 발명되기 이전까지 통신의 수단으로 쓰였던 전신기(電信器, Telegraph)에 대해 우선 알아보자. 전신기는 텔렉스(Telex)라 해서 팩스(Fax)가 나오기 전인 1980년대 초반까지도 원거리 통신에 널리 쓰였던 장비이다. 전신은 하나의 문자를 점(�)과 줄(-)의 조합으로 약속하고, 이를 전기적 신호로 바꾸어 원거리 상대방과 교신하는 소위 돈돈 쯔쯔 방식의 통신 수단이다. 기역(ㄱ)을 점 하나로 그리고 아(ㅏ)를 줄 둘로 약속하면, "가"는 돈쯔쯔가 그리고 "까"는 돈돈쯔쯔가 될 터인데 이를 그 발명자의 이름을 좇아 모르스 (Samuel Morse) 부호라 한다. 사실 전화기는 이런 전신기를 개량한 것으로, 결국 유선 통신의 기초는 모르스가 쌓은 것이다.
모르스는 전신기에 대한 특허를 1840년에 얻었다. 이 해는 영국에서 세계 처음으로 우편 요금을 조그만 증지로 바꾸어 봉투에 붙이는 우표(郵票)라는 제도가 도입된 해이기도 하다. 영국의 우정국(郵政局)은 여왕의 즉위식 때 만든 메달을 소재로 해서 흑색과 청색의 두 가지 우표를 그 해 5월1일에 발행했다. 여하튼 서로 떨어져 사는 사람들의 통신 수단으로는 편지만이 존재하던 무렵이었고, 웬만한 거리라면 편지 한 장 보내고 그 답장 받는데 한 달은 기다려야 했던 시절이었다. 우리나라의 우표는 1884년 당시 우정국 총판(總辦)이었던 홍영식(洪英植)이 만들었다. 1884년은 갑신정변이 일어난 해로, 홍영식은 우정국 개국 축하연을 계기로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등과 개화파 주도의 혁명을 일으켜, 새로운 정부를 조직하고 우의정이 되었다. 그러나 청나라의 개입과 더불어 3일 천하로 정부가 무너지자 대역죄로 처형되었는데 그 때 그는 30세였다. 갑신정변은 대중의 지지를 얻지 못한 소수 선각자에 의한 개혁 운동으로 너무 외세(外勢)에 의존하였다는 비판이 있지만, 만약 성공했더라면 우리 민족은 그 후 전혀 다른 삶을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역사에는 만약이 없는 법이니까, 이는 논외의 대상이다.
그림9.2. 세계 최초의 우표 (1840년 영국)와 우리나라 최초의 우표(1884년)
모르스는 41세 되던 해에야 처음으로 전신기를 만들어 볼 생각을 하게 되는데, 그 때까지는 미국과 유럽에서 인정 받던 이름있는 화가였다. 1805년 열 네 살의 나이에 예일(Yale) 대학에 입학한 수재로, 대학 시절 전기(電氣)에 관한 학과목을 수강한 적은 있지만 그의 모든 관심은 그림에 있었다. 대학 졸업 후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 왕립 예술 아카데미(Royal Academy of Arts)의 학생으로 본격적인 그림 공부를 하고는 4년 후인 1815년에 보스톤으로 돌아와 화가로서의 인생을 시작한다. 1819년에는 당시 대통령이던 제임스 몬로(James Monroe)의 초상화 작업을 위탁 받았을 정도이니까 화가로서의 그의 능력은 당대에 손 꼽히는 것이었다. 그 후 1829년에 다시 유럽으로 건너가 화가로서 국제적 경력을 쌓고, 1832년에는 미국으로 돌아오는 여객선을 타게 되는데 바로 이 때부터 모르스의 관심은 180도 바뀌었다. 여하튼 귀국하던 해 그는 뉴욕 대(New York)대학의 미술 대학 교수로 취임했다.
그림9.3. 젊은 시절 모르스(Samuel Morse)가 그린 스케치와 자화상.
당시 증기 기관 여객선으로 유럽을 떠나 미국까지 도착하는 데에는 약 20일 정도가 걸렸는데, 이런 여행 기간은 많은 사람들에게 그야말로 친구들과 담소(談笑)하며 휴식을 취하거나 혹은 독서로 소일하는 시간이었다. 마침 모르스가 탔던 배에는 훗날 마취제를 발견한 유명한 의사(醫師)이자 뛰어난 광물학자였던 잭슨(Charles T. Jackson)이 함께 타고 있었는데, 모르스는 어느 날 저녁 식탁에서 잭슨으로부터 그 즈음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던 전기공학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특히 모르스는 전기가 구리선만 있으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어디든지 갈 수 있다는 이야기에 큰 흥미를 보였다. 전기를 통신에 이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 바로 그 순간이었다.
통신에 대한 이러한 모르스의 관심은 그의 첫 사랑에 대한 개인적인 아픔과도 관련이 있다. 모르스는 스물 다섯 살 되던 1816년에 열 여섯 살 된 아가씨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둘은 곧 이어 결혼해서 어렵지만 행복한 가정을 꾸민다. 1825년 1월에는 세 번째 아이까지 출산하게 되는데, 그 해 2월에 그의 사랑하는 아내는 스물 다섯의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다. 당시 모르스는 의뢰 받은 초상화 작업을 위해 뉴욕에 머물고 있었는데, 아내 소식을 듣고 급히 집에 돌아와 보니 아내의 장례식은 이미 2주일 전에 끝난 상태였다. 갑자기 땅 속에 묻힌 아내, 얼마나 상심했을까? 세상을 떠나기 전 아내의 얼굴이라도 한 번 볼 수 있었다면 하는 절실한 안타까움이 짐작된다. 빠른 통신의 필요성을 모르스 만큼 느낀 사람도 없을 것이다. 모르스는 잭슨과의 저녁 식사 후 남은 여행기간 중에 그의 스케치 북에 점(�)과 줄(-) 구성되는 모르스 부호에 대한 초안을 작성했는데, 이는 훗날 특허 분쟁에서 모르스에게 엄청나게 유용한 자료가 되었다.
여하는 귀국 후의 모르스는 디자인 예술 대학의 교수로 일하면서 봉급을 받았지만, 그의 주된 업무는 전신기를 만드는 것이었다. 모르스는 4년간의 노력 끝에1836년에는 드디어 액자 틀을 책상에 고정하고, 거기에 고물 시계에서 떼어낸 톱니 바퀴 같은 부품을 이용해서 첫 번째 전신기를 만드는데 성공한다. 1840년에는 이에 기초해서 전신기에 대한 특허를 받게 되는데, 이때는 이미 사업가의 면모를 갖춘 49세의 장년이었다. 그림 그리기는 이제 그의 취미 생활이 되었다. 그 후로 모르스의 전신 사업은 우여 곡절이 있었지만 그야말로 일취월장(日就月將)해서 1843년에는 정부로부터 $30,000을 지원 받아 그 이듬해 워싱톤(Washington)과 발티머어(Baltimore)간의 통신에 성공한다. 이 때 엔지니어로 참여했던 코넬(Ezra Cornell)은 전신 사업의 팽창에 따라 그 후 억만장자가 되었고, 그는 코넬(Cornell) 대학의 설립자가 되었다. 1852년에는 영국 런던과 프랑스 파리간의 해저 전신망도 구축되었다.
그림9.4. 모르스의 전신기 특허 중 한 부분.
잘 숙련된 사람은 모르스 통신기로 1분에 약 40-50 단어를 송수신 할 수 있었다니까, 거의 눈으로 읽어 내려가는 속도이다. 당연히 당시의 모든 원거리 통신 여기에 의존했음은 당연하다. 한 두 달씩 혹은 적어도 며칠씩 걸려야 하던 우편물 대신에 급한 것은 모두 전보(電報)로 대체되었으며, 특히 신문사에서는 모든 기사를 전신망을 통해 확보했다. 19세기 말엽에 이르렀을 때 미국 내에서 일년간 오간 전신은 이미 8000만 통에 달하고 있었다. 1876년 알렉산더 그라함 벨이 전화기를 들고 나왔을 때는 모든 이가 전신망에 익숙해서 별로 불편을 모르고 있을 때였다. 이 시절 오히려 많은 사람들은 벨이 발명한 전화기라는 것에 대해, 그저 매우 과학적인 장난감에 불과하지 실제로 쓰일 물건은 절대 아니라는 평가를 했었다.
벨은 1847년 스코트랜드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할아버지 및 아버지는 웅변 학원을 운영했고, 벨도 당연히 그 직업을 이어 받을 것으로 생각했기에 특별히 사람의 목소리에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는데, 여하튼 모든 종류의 소리에 대한 그의 지식은 당시 길고 짧은 두 가지 소리만을 조합해 보내는 전신기를 이용해서도 비교적 간단한 소리는 전달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했다. 벨이 실제로 처음 만든 것은 "Harmonic Telegraph"라는 전신기인데 이는 하나의 통신선으로 신호의 세기를 달리하면서, 여러 개의 메시지를 동시에 전달할 수 있는 장치였다. 벨은 이 기계로 1874년 당시의 Western Union Telegraph Co.의 지원을 받게 되었고, 그의 조수인 전기 엔지니어 왓슨(Thomas Watson)과 더불어 사람의 목소리를 바로 그대로 전하는 기계, 즉 전화를 발명하고자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갔다.
1875년 여름이 되면서 전화기의 발명은 거의 실현되었다. 벨과 왓슨은 우선 사람의 목소리에 있는 강약을 전류 세기의 강약으로 바꾸는데 성공했고, 다음은 전달 되어진 전류의 강약을 다시 사람이 들을 수 있는 소리로 바꾸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던지 너무 집중하면 헛것이 보이거나 혹은 들리기도 하는데, 그 해 유월 그들은 탁상 시계의 스프링에서 나는 윙윙거리는 소리를 듣고서 그들의 전화기 발명이 성공한 줄 알고 뛸 듯이 기뻐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876년 3월 그들은 드디어 성공한다. 옆 방의 왓슨에게 전화를 걸어 벨이 했다는 유명한 말, "Mr. Watson -- come here -- I want to see you." 은 인류 최초의 통화 기록이다.
그림9.5. 벨과 왓슨이 처음 발명한 전화기 (1876년)
그림 9.6. 벨이 처음으로 받은 전화기에 대한 특허 중의 일부
그림 9.7. 벨에 의한 뉴욕에서 시카고까지의 첫 번째 장거리 전화 시험(1893년).
그 후 전화기는 순풍(順風)에 돛단배 가듯 발전은 했다. 1876년 특허 등록 이후 그 이듬해 Bell Telephone Co.가 사업을 시작했으며, 1900년에는 이미 미국에 135만대의 전화가 등록되었다. 그 숫자는 계속 폭발적으로 증가해1920년에는 1300만대에 이르게 되었다. 지역적으로 떨어져 살면 단절될 수 밖에 없었던 인류는 벨에 의해 아무 때나 서로 대화하고 의견을 나눌 수 있게 된 셈이다. 장거리로 인한 귀머거리와 벙어리에서 벗어난 셈이다. 벨은 실제로 귀머거리나 벙어리에 대해서도 많은 애정을 갖고 이들과의 의사 소통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으며, 우리가 잘아는 헬렌 켈러(Kellen Keller)와 절친한 교분을 맺기도 했다.
벨의 천재성은 엄청난 부를 쌓은 후에도 끊임없이 발휘되었다. 1880년에는 "Photophone"이라는 기계를 발명해 특허를 받았는데, 이는 소리를 전기적 신호로 바꾸어 보내는 것이 아니라, 빛의 신호로 바꾸어 보내는 장치이다. 벨은 이를 자기가 만든 것 중에서 가장 우수한 발명품으로 여겼는데, 이 원리는 그 후 몇 십 년이 지나 광섬유를 이용한 통신에 그대로 이용되면서 요즈음 우리가 쓰는 통신 체계의 주축을 이루고 있다. 벨은 스스로 비행기를 만들기도 했는데 불행히도 이는 라이트 형제가 비행기를 발명 한지 6년이 경과 된 시점이었다. 그리고 금속탐지기도 만들었는데 이 기계는 당시의 대통령이었던 가필드(James Garfield)가 암살범의 저격을 받았을 때 몸 안에 있는 총알의 위치를 파악해 제거하는 수술에 이용되기도 했다. 단지 문제는 침대 매트리스에 있는 용수철을 총알로 잘못 탐지해서 수술이 잘못되는 바람에 안 죽을 사람이 죽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이제는 누구도 모르는 일이다.
여하튼 전화는 급속도로 대중화 되었다. 1937년 영국에서는 비상시에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즉 경찰, 병원, 소방서를 부르는 간단한 전화번호로 999번이 채택되었고 이 제도가 미국에서는 911번으로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일제 시대에 도입된 119로 자리잡았다. 지금은 누구나 들고 다니는 것이 전화이지만 사실 우리나라에서 전화란 것은 1980년 초반까지도 재산 목록으로 꼽을 수 있는 매우 값 비싼 것이었다. 전화값이 집값에 버금갔기에 전화의 매매만을 전담하는 전화 복덕방이 지금의 부동산 소개소만큼 많았던 것이 바로 20여 년 전 일이다.
우리나라 전화의 대중화에는 80년대 중반에 이루어진 TDX-교환기 개발 사업이 큰 공헌을 했는데, 그 결과 1988년에는 전화기 가입자 수가 1000만을 돌파하면서 매 가구당 전화 한대가 실현되었고 그 후 곧 이어 1997년에는 2000만대 즉 1 가구 2전화 시대가 열렸다. 사실 TDX나 90년대 CDMA무선 통신의 개발 성공은 대한민국이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기술적 업적이다. 이 일을 진두 지휘했던 대표적인 두 사람은 오명(吳明), 서정욱(徐廷旭)인데, 그 외에도 이 일에 매달렸던 수 많은 엔지니어에게 우리는 진심으로 감사해야 한다.
전화는 이제 모든 사람이 항상 지니고 다니는 필수품 중의 필수품이 되었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휴대폰 등록 수는 거의 3000만대에 이른다고 하니까, 초등 학생들 까지도 거의 모두 휴대폰을 갖고 있는 셈이다. 요즘의 휴대폰은 상대방과 단순히 대화하는 기능을 넘어 전자 수첩, 게임기, 카메라, TV 등 엄청난 다른 기능을 지니고 있는데, 이런 변화도 끝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이니까 앞으로 어떻게 더 바뀔 지 짐작할 수 없는 일이다. 손안에 쥔 전화기에서 혁명이 일어나고 있으며, 이를 우리의 기업이 그리고 대한민국 엔지니어가 주도하고 있음은 매우 자랑스런 일이다. 벨이 오늘 다시 대한민국에 환생한다면, 전화의 발전에 놀래 넘어져 아마 다시 깨어나지 못할 것이다.
전화에 대한 이야기를 마감하면서 마지막 한가지- 우리나라 사람들은 지난 5년간 평균적으로 세 번 이상 휴대용 전화기를 새로 장만했으며, 그에 따라 이미 약 8000만대 이상의 쓸모 있는 전화기가 퇴출(退出)된 것으로 믿어진다. 전화기 한대의 값을 평균적으로 20만원씩만 생각해도 버려진 전화기의 총액은 16조원. 어마어마한 돈이 그냥 버려지고 있는데, 무언가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포항 공대 같은 훌륭한 학교를 하나 만드는데 여태껏 들어간 돈이 약 1조원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