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수들을 만나면서 무엇이 정말 고통스러운 것인가를 알게 되었다. 풀어서 풀릴 수 있는 것은 괴로움이 아니요, 참고 기다려서 해결될 수 있는 것은 고통이 아니다. 사형수 그들에게는 이런 희망이 없었다.” 30년 동안 사형수 교화위원으로 활동해온 양순자(69·상담 전문가) 선생은 자신이 최근 발표한 저서 ‘인생이 묻는다 내가 답한다’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세상 살아가면서 곤란이나 힘든 상황이 없을 수는 없지만, 그것이 해결될 수 있다는 희망만으로도 우리는 행복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아무리 간절하게 바라고 원해도 예정된 죽음을 돌이킬 수 없는 사형수들에 비하면 말이다. 사형수들의 마지막 가는 길을 동행하며 그가 느낀 것은 우리 인생도 사형수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들은 안에 있고, 우리는 밖에 있는 것. 그들은 언제 죽을지 알지만 우리는 모른다는 것만 빼면 말이다.
양순자 선생은 세상 살기 힘들다며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1년 365일이 하루도 같지 않다는 것이 우리에게 희망이다”며 “오늘은 비록 어렵지만 내일은 다른 날이 펼쳐질 수 있다는 것을 희망으로 삼고 긍정적인 마음을 가져라”하고 다독인다. 지난 30년 간 죽음 앞에 몸부림치는 이들과 대면한 그와의 인터뷰를 통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삶의 자세에 대해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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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순자
#1. 사형수와의 만남이 준 교훈 지난 30년 간 서울구치소 교화위원과 안양교도소 정신교육 강사로 활동해온 양순자 선생은 일흔에 가까운 나이가 무색할 만큼 활기찬 모습이었다.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와 편안한 말투로 금세 사람을 무장해제 시킨다. 오랜 상담 경력에서 우러나는 자연스러움일 것이다. 이런 편안함 때문일까. 그는 그 어떤 호칭보다 ‘양순자 할머니’로 불러지고 있다.
교화위원은 지역 내 덕망 있는 인사와 종교인들 가운데, 법무부 장관의 위촉을 받아 구성된다. 양순자 선생이 교화위원이 된 것은 1997년 서울구치소에서 자신이 속해 있던 단체로 교화위원 제의가 들어오면서 부터다. 당시 그의 나이 서른일곱, 대부분 5, 60대의 연륜 있는 사람들이 주로 신청을 하다 보니 그의 행보는 파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겁도 없이 덥석 사형수 교화위원을 맡은 이유는 ‘죽음에 대해 알고 싶어서’였다.
당시 결혼생활의 어려움으로 죽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는 그는 교화위원 제의가 들어오자 ‘사형수들은 어떤 마음으로 집행을 기다릴까’ 알고 싶어 신청을 하게 됐다고 한다. 그렇게 시작된 교화위원의 삶은 그에게 많은 변화를 안겨주었다. 사형선고를 받고 두려움 속에서 처절하게 몸부림치는 사형수들과의 만남을 통해 죽음에 대한 그의 생각이 사치에 불과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사형수 교화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_ 사형수들은 사형선고를 받은 그 순간부터 죽음과 싸워야 한다. 오늘일까, 내일일까, 언제 형이 집행될지 모르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상태를 유지한다. 그래서 악몽도 많이 꾸고 주변 재소자들을 많이 괴롭힌다. 심한 경우 틈만 나면 자살을 시도하거나 자해를 하는 경우도 있다. 아무리 악인이라도 죽음은 두렵고 고통스러운 것이다. 교화위원은 이런 사형수들과 일대일 결연을 맺고 형이 집행되는 순간까지 정신적 보호자 역할을 하는 사람이라고 보면 된다. 일주일에 한번 정기적인 만남을 통해 가족이나 살아온 삶에 대한 이야기, 신앙 상담 등을 한다. 사형수들이 마지막 가기 전에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동안 몇 명의 사형수를 만났는가. _ 30년 동안 활동했지만 상담자 숫자는 많지 않다. 교화위원 당 1명의 사형수만 맡도록 되어 있는데, 형이 집행되기까지 짧게는 2~3년, 길게는 5~8년 정도 걸리기 때문에 한 사람과 오랫동안 상담을 하게 된다. 현재까지 나를 거쳐 간 사형수는 9명이고, 내 담당은 아니었지만 필요에 의해 상담을 했던 사형수까지 더하면 11명이다. 사형수가 아닌 일반 죄수도 몇 명 있다. 사형수 가운데 9명은 형이 이미 집행됐고, 2명은 감형된 후 복역을 마치고 사회인으로 돌아간 상태다.
사형수의 가족들까지 챙겼다고 들었다. _ 교화위원은 원칙적으로 사형수만 담당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사형수들과 상담을 하다 보면 가족 걱정을 많이 한다. 집에 노모 혼자 계시는데 면회도 안 오고 걱정 된다 혹은 아이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궁금하다는 식이다. 그래서 ‘기왕 사형수가 가는 순간까지 함께 동행해주기로 다짐했으면 해줄 수 있는 것은 다 해주자’는 생각으로 가족을 대신 만나고 와서 안부를 전해준다. 사형수 가족들은 대부분 해체되거나 유지되더라도 생계 등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래서 사정이 너무 딱한 경우에는 일회성 만남으로 끝나지 않고 지속적인 도움을 주기도 했다. 한 사형수 자녀는 대학 졸업 때까지 11년 간 후원했다. 안타까운 사연도 많다. 부인이 집을 나가 버려진 아이들이 고아원으로 보내지거나 힘없는 노모가 힘겹게 아이들을 양육하는 경우가 많다. 한 사형수의 노모는 매일 아들 걱정을 하면서 하도 많이 울어서 눈이 실명에 이르게 됐다. 또 다른 사형수의 노모는 자식의 형이 집행되자 따라서 자살을 선택하기도 했다. 죄인보다 더 죄인처럼 사는 것이 사형수의 가족들인 것 같다.
오랫동안 한 사형수만 상담하면 애착이 생기지 않나. _ 아무래도 자꾸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애착이 생길 수밖에 없다. 특히, ‘살아온 환경이 사람을 이렇게 만들었구나’라는 생각이 들면 한없이 안타깝기도 하다. 그들이 방황할 때 누구라도 손을 잡아주고 붙들어줬다면 여기까지 오지는 않았을 텐데 사회가 보호해주지 못한 것은 아닌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 애착의 끈에 너무 많이 메이면 내가 힘들어진다. 형이 집행되면 보내야 하는데 그로 인한 상실감이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화위원으로 사형수를 만나는 동안에는 ‘나’라는 존재를 잊어버리려고 노력한다.
사형이 집행되는 과정은 어떻게 되나. _ 최근 10년 간 사형집행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지만 보통은 연말에 진행된다. 집행날짜는 일급비밀이기 때문에 사형수는 그 날을 알 수가 없고, 다만 성직자와 의무관만 하루 전에 출석 통보를 받는다. 사형이 집행되는 날은 구치소가 숨도 못 쉬는 날이다. 집행장과 면회실은 같은 길로 통하는데, 갈림길에서 운명이 결정된다. 그 갈림길까지의 길이 사형수에게는 마치 천길 낭떠러지와 같다. 그 길을 가다가 집행장으로 꺾이는 순간 어떤 사형수는 그대로 맥을 못 추고 주저앉기도 하고, 어떤 이는 그 자리에서 오물을 쏟기도 한단다. ‘나는 안 가, 안 갈꺼야’절규하며 있는 말 없는 말을 세상에 다 쏟아내면서 통곡한다. 오죽하면, 서대문형무소 사형장 입구에 있는 미루나무는 사형수들이 하도 붙들고 통곡을 해서 한쪽으로 휘어져 있고, 잘 자라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있을까. 사형수들의 고통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일화다. 교화위원인 나는 형이 집행된 후에야 연락을 받고 가족들과 함께 장례식을 치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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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한국
사형수들의 마지막은 어떤 모습인가. _ 죽음이라는 것, 마지막이라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이다. 사형수들은 자신의 집행날짜를 모르기 때문에 하루하루 피를 말리며 긴장 속에 산다. 특히, 연말이 되면 죽음이 오는 것을 느끼는지 하루가 다르게 야위어 간다. 상담하는 내용들도 점점 무거워지고 가족들에 대한 걱정이 더 많아진다. 무엇보다 자신들이 저지른 죄에 대한 후회는 더욱 커진다. 그렇게 짧게는 2~3년, 길게는 5~8년 이상을 집행을 기다리며 살다 보니 매일 죽는 것과 다름없다. 사형수들의 마지막 모습은 천차만별이다. 가는 순간까지 죄를 인정하지 못하고 원망하며 떠나는 사람도 있고,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용서를 구하며 가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공통적으로 하는 후회가 있다. 바로 ‘내가 왜 인생을 이렇게 밖에 살지 못했을까, 어쩌다가 여기까지 왔을까’다. 그리고 자신으로 인해 희생당한 사람들에 대한 죄책감과 남겨진 가족들에 대한 미안함을 나타낸다.
교화위원을 하면서 깨달은 교훈이 있다면. _ 단지 우울하다는 이유만으로 삶을 포기하려 하는 것은 ‘사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사형수들은 언제 형이 집행될지 알 수 없는 가운데, 하루하루 뼈를 깎는 고통 속에서 살아간다. 그들에게 죽음이란 현실이기 때문에 그냥 해보는 말이라도 ‘죽고 싶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오히려 뼈가 가루가 되도록 ‘제발 사형만 면해 주면 죽는 날까지 좋은 일만 하면서 살겠다’고 애원하지만 정해진 길을 갈 수밖에 없는 것이 그들의 운명이다. 아무 희망도 없는 사형수들에 비하면 우리는 정말 행복한 사람들 아닌가. 사형수들을 만나면서 우리도 사형수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느꼈다. 다만 그들은 안에 있고 우리는 밖에 있다는 것, 그들은 집행날이 정해져 있고, 우리는 언제 갈지 모른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러니 우리의 삶이 얼마나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다른 사람들도 그런 생각을 해본다면 앞으로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해답이 나올 것이다.
#2. ‘인생 상담 119’가 되다 지난 2005년 ‘인생9단’이라는 책을 발표한 후 사형수뿐만 아니라 일반인, 군부대 등에서 상담과 강연 문의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에 양순자 선생은 자신의 책을 읽은 독자들 가운데 상담을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종교, 지역, 남녀노소 등의 벽 없이 상담 의자를 내어주고 있다. 단, 하루에 한 사람만 상담한다는 원칙 속에서. 이유는 하루를 온전히 그 한 사람에게만 집중하기 위함이다. 상황에 따라서는 상담자가 있는 곳으로 직접 찾아가기도 하고 문제 해결을 위해 상담자의 주변인들까지 만나기도 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양순자 선생에게 ‘인생9단’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손사래를 친다. ‘인생9단’은 인생을 노련하고 세련되게 사는 사람을 말하는데 자신은 그렇게 살고 있지도 않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기 싫어서란다. 대신 ‘인생 상담 119’라는 별명이 더 어울린다고 말한다. 좋을 때나 어려울 때나 누군가가 SOS를 치면 두려움 없이 달려가는 그의 성격과 닮아있기 때문이다. 남을 돕는 일에는 계산하지 말고 누군가가 넘어졌으면 빨리 일으켜 세워줘야 한다는 것이 그의 신조다.
요즘은 사형수 교화 대신 군부대에서 강연을 한다고 들었다. _ ‘인생9단’ 발표 후 군대에서 강연 요청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군대에 가보니 어떤 부대는 부대원의 절반 이상, 다른 곳은 3분의 2 가량의 부모가 이혼을 한 상태였다. 대부분 독자로 태어나 제멋대로 살다가 군대에 오다 보니 군기 잡기도 힘들고 적응을 잘 못한다. 거기에 부모가 이혼을 하고 애인이 이별 통보를 하면 견디지 못하고 탈영을 하거나 자살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군인들이 제대로 군 생활을 하고 사회에 나오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이 인생을 잘 못 살아서 사형수가 되면 안 되니까 사형수를 만날 것이 아니라 사형수가 되기 전에 방어막을 쳐야겠다는 마음에서다. 지금까지 약 100개 부대에서 강의를 했는데 다행히 반응이 좋아 요즘도 꾸준히 다니고 있다.
교화위원으로 활동한 것이 상담이나 강연에 도움이 되는가. _ 군인들은 자신이 잘못된 선택을 했을 때 발생하게 될 문제들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충동적으로 일을 저지른다. 어떤 병사는 탈영했다가 600m도 못가서 붙잡혀 와 영창에 들어갔다. 사형수들 역시 대부분 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최악의 상황까지 오게 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순간 누군가 손을 잡아 주고 조언을 해주었더라면 사형수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강연을 통해 사형수들의 예를 들면서 자신의 선택 후에 발생하게 될 문제점들을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 것들을 단 한 번만 생각해도 섣불리 행동하지 않게 된다. 일반인들의 경우 사소한 것들로 힘들어하고 죽고 싶다는 말을 습관처럼 내뱉는다. 죽는다는 말을 그렇게 쉽게 내뱉어서는 안 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암 투병 환자나 사형수 앞에서도 죽고 싶다는 말을 그렇게 쉽게 할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그러면 죽겠다는 소리가 쏙 들어간다.
상담자를 대할 때 어떤 마음으로 하는가. _ ‘내가 뭔가를 해내야겠다’고 스스로에게 힘을 주거나, 상대방의 문제를 당장 해결해줘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래서 간혹 상담 후 효과가 전혀 나타나지 않더라도 그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다. 나는 상담을 통해 상대방의 손을 잡아주고 잠시 기댈 수 있도록 해주는 역할을 할 뿐이다. 내가 손을 잡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비틀거리고 일어서지 못한다면 그것은 서로에게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만다. 인간인 내가 또 다른 한 인간을 처음부터 끝까지 완성품으로 만들어줄 수는 없지 않는가. 그 사람이 인생의 퍼즐을 맞추는 가운데 내가 퍼즐 한 조각을 놓아주고 가면 되지 모든 퍼즐을 맞추려고 하면 안 된다. 불우이웃을 한번 도왔다고 해서 그들이 쉽게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만이자 욕심이다.
쉽게 삶을 포기하려는 사람들에게 상담자로서 조언을 한다면. _ 사형수들은 순간의 잘못으로 집행장을 향해 절망을 안고 가고 있다. 그들은 이 세상에 없는 죄까지 다 속죄를 해도 다시 살려주지 않으니까 희망 없이 가야한다. 하지만 우리는 참고 기다리면 희망이 오고 다 잘 풀리게 되어 있다. 쓰나미가 언제 밀려올지는 모르지만 항상 방어하면서 살아간다. 쓰나미가 올 수도 있다고 미리 죽는 사람은 없지 않나. 마찬가지로 지금 전 세계가 위기라고 하는데 언제든지 위기가 아니었던 적은 없었다. 상황에 따라 분수에 맞게 살면서 적응하면 된다. 아무리 힘들다고 해도 죽고 싶다는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 아프리카 어느 나라에서는 물이 없어서 며칠을 목마름 속에서 지내고 흙탕물도 감사하게 먹는데 우리가 못 참을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나 스스로도 이런 것들을 떠올리면 불만이 사라지고 매사에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된다. 세상에는 자신보다 더 힘든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알았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_ 어렵다, 어렵다 하면 정말 어려워지고, 아프다, 아프다 하면 정말 아픈 것처럼 느껴진다. 말이라는 것이 중독성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나라경제가 어렵다고 해도 너무 부정적인 말은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부정적인 사람은 행복을 만나기 어렵고, 늘 불평불만을 쏟아내는 사람은 행복할 수 없다. 나는 감히 ‘절대’라는 표현을 쓰고 싶다. 반대로 긍정적인 사람은 불행을 만나기 어렵다는 말이 있다. 긍정적인 사람은 남에게도 행복을 전파하는 긍정의 힘을 준다. 부정적인 곳에 나를 몰입하지 말고 긍정적인 생각에 몰입하면 분명히 세상은 살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 세상에 한번 왔는데 잘 살다가 가야 하지 않겠는가.
첫댓글 정말 대단하시네요. 글을 읽으며 많은 것을 느끼게 됩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