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15-24 중앙아시아 코카서스3국 10일 아르메니아 예레반 추모공원 16 오늘은 아름다운 도시 아르메니아의 수도인 예레반을 위주로 여행을 하는 날이다. 예레반은 인구 100만의 도시로 고도가 1,600m 정도의 고지대라 여름에도 별로 덥지 않은 곳이다.
우린 아침 일찍 아라라 산을 관망하기 위해 서둘러 픽토리아 공원으로 오른다. 햇살이 뜨거워 지면 보이지 않을수 있기에 아침 일찍 보아야 한단다. 예레반은 아르메니아의 12번째의 수도라고 하며, 우리에겐 큰 도랑 같은 흐라즈단(라잔) 강이 원형으로 돌아 나가기에 시가지도 원형의 형태라고 하며, 터키의 국경에서 23㎞ 떨어져 있다. 도시는 천재적인 건축가 타미안(Tamanian 1817~1936)의 설계에 의해 오늘날의 모습을 건축했다고 하는데 그의 동상은 빅토리아 공원에 설계도 석비와 같이 있다. 역사적으로 첫 기록을 남긴 것은 AD 607년이지만 BC 6000~3000년경 이곳에 정착촌이 있었으며, BC 783년 예르부니 요새가 있었고, BC 6세기 아르메니아 왕국에 합병되었단다. 그 후 파르티아, 아랍, 몽골, 투르크, 페르시아, 그루지야, 러시아 등의 지배당하는 수난의 역사를 거쳤으며, 1582년에는 투르크로, 1604년에는 페르시아로, 그리고 1827년에는 러시아로 넘어갔다. 1920년 아르메니아의 수도가 되면서 대학교를 비롯하여 많은 고등교육기관들이 들어섰고, 1943년에 발족한 아르메니아 과학 아카데미에 의해 마테나다란 고문서국에는 887년의 ‘나사로(라자로) 복음서’를 비롯한 고대 필사본을 세르게이 파라자노프 박물관 많이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구시가의 볼거리들은 공화국광장 근처에 있으며, 주말이면 열리는 큰 시장은 수공예품, 구소련시절 기념품들과 그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다양한 물건들을 구경할 수 있다. 가난한 나라에서 유럽풍의 예레반을 건설하는 돈은 외국에 있는 동포들이 보내온 돈이라고 한다 우린 예쁘고 똑똑한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맨 첫번째 코스인 빅토리아 공원으로 향했다. 우리가 빅토리아 공원에 도착하니 큰 칼을 안고 우뚝 서있는 아르메니아 어머니상 부터 눈에 드러 온다. 이 어머니상 아래 지하는 군사 박물관이란다. 이 어머니상을 보고 있노라니 조지아에서 본 어머니상과 너무나 닮았다. 이 어머니상은 아르메니아의 원수로 대학살의 주범인 터키를 향해서 있다고 한다. 우린 서둘러 빅토리아 공원 전망대 포인터 쪽으로 이동후노아의 방주의 사연을 갖고 있는 아라라산을 관망한다. 벌써 햇살이 뜨거워 진 탓인지 아라라산이 흐릿하게 보인다.. 예레반 시가지도 한눈에 들어 온다. 나도 인증샷.... 이제 슬픈 아르메니아의 슬픈 사연을 담고 있는 제노사이드 박물관을 (Tsitsernakaberd) 찾아간다. 이곳 입구쪽앤 각 국의 사절단과 교황 요한 바오르 2세가 방문해서 기념으로 심었다는 나무가 있었다.
우선 지하에 있는 박물관 구경을 하기 전에 지상에 있는 기념물을 멀리서 나마 먼저 구경했다. 추모탑으로 2개의 탑이 합쳐져 하늘로 높게 솟아오른 모양이다. 한 쪽은 자국민을, 다른 한쪽은 외국동포로 서로 합쳐서 하나가 된다는 의미 또는 세계 다른국가들과 화합한다는 의미이며, 그 옆에는 아르메니아인들의 정신적 지주인 노아방주가 머물렀던 아라라 산을 10개로 형상화했는데 이것은 10개주를 의미한다. 그 조형물 속에 불타고 있는 성화를 보호하는 열개의 벽으로 구성된 이 기념물은 보면 볼수록 감동적이다. 이렇게 감동적인 기념물을 본적이 없었다. 그벽에는 제노사이드로 사라진 수많은 마을의 이름이 적혀진 것이란다. 뾰족히 쏫은 2깨의 합쳐진 탑은 하늘을 왜 그렇게 날카롭게 찌르고 있을까. 앞에서 말한것 외에도 미외에도 왜 그런 끔찍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었느냐고 하늘을 원망하며 외치는 절규 일수도 있을듯. 제노사이드 희생자를 추모하는 성화를 보호하는 10개 벽으로 된 기념물과 뾰족한 탑이 함께 붙어 있었다. 나는 잘 모르고 있었는데 아르메니아는 매우 슬픈 역사를 가진 나라로 세계에 알려져 있었다.
오토만 제국의 군대가, 북쪽으로부터는 러시아 제국 군대가, 그리고 남쪽으로는 아랍의 이슬람 군대가 아르메니아를 지나갔던 것이다. 그야말로 바람 잘 날이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나라 위치..... (자국민과 외국 동포가 화합을상징하는 두깨 기둥의 탑) 아르메니아 사람들의 슬픈 역사는 1915-1922년에 일어난 아르메니아 제노사이드로 (Genocide) 그 정점에 이른다.
그런 것을 하고싶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학살을 원천적으로 부인하면 얘기가 변명과 사죄로 발전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은 내부에 성화를 보호하는 열개의 벽으로 구성된 이 기념물이다. 살아 남아야 한다. 박물관 지하 전시관으로 갔다. 슬픈 음악이 감동적으로 흘러 나오고 엄숙한 기분이다. 그곳에는 학살에 관한 사진과 글이 여러 나라 말로 적혀있었다.
이들의 뜻은 터키 땅에는 회교를 믿는 터키족 사람만 살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아르메니아 사람들과 그들이 수천 년 동안 살던 흔적을 완전히 없애버리려 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간섭을 할 수가 없을 것이라 이런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터키 정부는 학살을 자행했다는 것이다.
둘째는 당시 터키 영토에는 아르메니아 사람들 외에도 회교를 믿지 않는 종족이 여럿 더 있었는데
이 나라 사람들의 영혼이라는 아라라트 산이 있는 터키 아나톨리아의 아르메니아 자치지구에는 400만(인터넷300만) 정도가 살았다고 하고, 교회는 500개가 넘었다고 한다. 각 나라 독립방법 중에는 무력투쟁, 외세이용 등의 방법이 있는데 이 나라 외세를 이용하는 것으로 1차 대전 때 터키와 러시아는 전쟁 중이었고, 이 2나라는 자기편을 들어주면 독립을 시켜주겠다고 했다. 이 때 터키 동부의 아나톨리아 아르메니아인들은 독립을 위해 종교가 같은 러시아 편을 들면서 터키 정부의 요인들에게 테러를 가했으며, 이에 반감이 쌓인 터키는 1915년 4월부터 16년까지 대학살이 진행됐다. 먼저 종교와 정치지도자들을 잡아 학살한 다음 일반인들은 총알도 아깝다고 사막으로 몰라내 거기서 굶주림과 추위로 죽게 만들었다고 하며, 그들이 살던 동네는 폐허로 만들었다고 한다. 추방당할 때 신발을 달라고 하면 발에 편자를 밖아 주었다고 하며, 이러한 만행으로 200만 명이라는 희생자를 낳게 했으나 터키는 전쟁 때문에 어쩔 수 생긴 일이라며, 지금까지 대학살을 철저히 부인하고 있다. 엄청난 사건이지만 터키의 눈치를 보기에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고, 러시아 지배 때도 덮어 두었기에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제는 독립을 맞이하였으니 전 세계적으로 터키의 만행이 알려지게 될 것이다. 8월 18일 기념일이 되면 전 아르메니아인들이 찾아와 꽃동산을 이룬다고 한다. 지하 전시관엔 사막으로 쫓겨나기 전의 평화롭던 모습부터 시작되며, 사막으로 행진, 헐벗고 굶주린 모습, 대량학살해서 매장된 모습의 사진이 있다. 1894~95년 터키의 압둘 하미드 2세가 민족주의를 선도한 아르메니아 기독교인들을 2만 명을 대량 학살하는 교수형장면, 엄청난 유골들, 파괴전과 파괴된 후의 마을을 비교해 볼 수 있는 사진도 있다. 그런데 그 험한 곳에서도 기적처럼 살아남은 사람들의 사진을 볼수도 있었고 그들이 산 증인들이었다. 가장 슬픈 사진은 학살과 굶주려 죽는 아이들의 사진인데 역사적으로는 유태인보다 더 불쌍했던 민족이 아르메니아라는 말은 이런 추모관을 통해 알게 했다. 이곳은 터키를 의식해 외국 국빈들이 찾지 않으나 아르메니아도 러시아 노선을 강력 지지하여 러시아 대통령이 2010년 8월에 이곳에 방문후 헌화했다고 하며 우리나라 관료도 기념 식수 한것이 보였다. 이 잔인한 악당들.... 아르메니아의 유명한 인물들....최우선 희생... 발가 벗겨서 십자가에 메달아 죽이기도.... 살아 남은 고아들.... 이곳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울먹인듯한 마리안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
출처: 자전거로 돌아보는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구름/SW Cho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