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에게 쫓기는 산토끼처럼
우리는
욕망에 쫓기고 있다.
속박과 집착의 덫에 걸려
우리는
자꾸자꾸 고통을 당하고 있다.
출처: 법구경 342
옹달샘의 물:
인간은
자존감을 욕망합니다.
불교는 전통적으로
인간 욕망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인간 고통의 근원으로
욕망을 지목합니다.
인간현상을
단순히만 보면
욕망이라는 확장성이
여기저기 끝없는 문제를 야기하기에
그럴만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경솔한 판단이며
문명의 혜택이 열악하여
인문적 소양이 박약한 그룹에나
사용 가능한
인간에 대한 해석입니다.
현대의 상식으로는
인간은 욕망하는 존재이며
단지
무엇을 어떻게 욕망하느냐의 과제가
있을 뿐이지요.
우스갯소리로
불교인은 모든 욕망을 물리고
붓다를 욕망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반면 닦음에선
욕망을 지극히 긍정적으로 인식하며
인간 본성을
확장성 곧 성장 욕구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비록 언어적 표현으로
불교와 닦음의 관점이 서로 반하는 것으로
보이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단지
고대 불교의 투박한 표현을
닦음은 조금 더 정밀히 표현합니다.
표현의 상반됨이
내용의 모순을 의미하진 않지요.
현대인의 의식은
이 정도는 이해합니다.
인간이 욕구의 존재라면
무엇을 욕구하느냐가
관심사입니다.
인간이 성장을 지향하지만
그 구체적 모습은
자존감의 확대로 드러납니다.
자존감 확대의 사회적 형태로는
명예가 있습니다.
재물과 권력이 충족되고
남는 욕구가
명예라고 하지요.
그만큼 뿌리 깊으며
결국 자존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자존감 확대에 있어
2 방향으로 갈리는데
'특수한 자기' 와
'보편의 자기' 가 있습니다.
특수한 자기는
나르시시스트의 길이며
전통적으로
자만 교만 과신 아상 등과 같은
부정적 의미의 방향입니다.
보편의 자기는
개체성을 넘어 전체성을 향하는
존재 자체에 대한 인식입니다.
특수한 자기를
지속적으로 확대하여
보편적 존재에 닿는 안목입니다.
닦음에선
개체의 확장으로 표현하지만
불교에선
개체의 해체로 부릅니다.
무한한 확장과 무한한 축소는
같은 지점에 닿지요.
천문학에선
엔트로피의 무한 증대
즉 우주가 무한히 팽창된 상태와
아직 가설로 있기는 하지만
우주 시작의 빅뱅 지점은
동일한 특성의 상태를 지닌다고 합니다.
아무튼
보편의 자기도
자존감을 욕구합니다.
여기서의 존중은
보편에 대한 존중이지요.
나만이 아닌
모두에 대한 존중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자비라 사랑이라 부릅니다.
종교철학적으론
'여여' '평안' 이라고 하지요.
닦음에선
충만이라는 표현도 사용합니다.
결국은
확대된 자기에 대한 존중입니다.
지향점이 존중에 있기에
세상과 현상을 긍정하고 있습니다.
불교가
여여를 목표로 하고 있다면
염세적이거나
현상을 벗어나려 안달하는 모습은
진정한 불교가 아닙니다.
윤회를 하고 않고에
연연할 이유가 없으며
1차적 생리 욕구에 대한 터부시도
불교의 근본 모습은 아닙니다.
초기 불교에
계율이 만들어진 근본 목적을 놓쳤기에
후대 불교에
염세라는 왜곡이 생겼습니다.
열반적정이라는 여여를
목표로 하고 있는 불교가
염세적이라는 것은 모순입니다.
불교가 열반적정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세상을
적극적으로 긍정해야 합니다.
세상의 도피자는
불교인이 아닙니다.
이제
남는 과제는 확대이지요.
닦음은
자기 확대를 위한 과정이고
구체적 수련 체계를 가졌으며
자기 갇힘을
악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자존감의 확대 방향이
어디냐에 따라
우리가 도달할 지점은
많이 다릅니다.
불교와 닦음은
'자기' 를 어떻게 인식하느냐의
철학입니다.
바닥에 빛나는 작은 방울
서로 뭉쳐 존재감 높이고
넓은 수평 하나로 엉기니
살며시 깃드는 푸른 하늘.
..240904小野
카페 게시글
소야小野의 옹달샘
인간은 자존감을 욕망하니
소야(小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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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4 11:51
댓글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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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주법계중생 지구촌사람 모두함께
나무아미타불 마하반야바라밀 숙연의일대사인연 덕분입니다
현산김봉현 합장ㅅㅎㅅ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_()_
감사합니다. 아미타불 _()_
고맙습니다 나무아미타불~()~
아미타불! 아미타불! 아미타불!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_()_
고맙습니다. 나무아미타불 _()_
고맙습니다. 나무아미타불. _()_
고맙습니다.나무아미타불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