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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지혜는 사랑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나이를 조금씩 먹어가면서 갖게 되는 확신입니다. 나이든 사람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인생의 지혜로구나, 하는 확신입니다. 주변을 돌아보면 나이 먹어서도 어리석게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대표적인 사람들이 잠시 지나가는 이 세상에 모든 것을 거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중요시하지, 정작 더 중요한 보이지 않는 것들, 예를 들면 영혼, 정신, 마음, 영원한 생명을 개무시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오늘 첫 번째 독서로 봉독되는 지혜서는 얼마나 좋은 길잡이가 되어주는 지 모릅니다.
지혜서의 보다 완전한 이름은 ‘솔로몬의 지혜서’입니다. 지혜서의 본문 안에는 독자가 누구인지 암시되어 있습니다. 본문이 지칭하는 독자는 ‘세상의 통치자들’이지만, 내용상 독자층은 전체 이스라엘 백성들로 확장됩니다.
지혜서의 저자는 지혜에 대해서 이렇게 가르칩니다. 지혜는 다정한 영, 사람에게 우호적이며 사람을 사랑하는 영입니다. 결국 지혜는 하느님의 영입니다. 이러한 지혜는 간악한 영혼 안에 들지 않고, 죄에 얽매인 육신 안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솔로몬은 조금 더 깊이 있게 다섯 가지 측면에 걸쳐 지혜를 소개합니다. 지혜는 하느님 권능의 숨결입니다. 지혜는 전능하신 분의 영광의 순전한 발산입니다. 지혜는 영원한 빛의 광채입니다. 지혜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활동의 티 없는 거울입니다. 지혜는 하느님 선하심의 모상입니다.
솔로몬은 살아 생전 언제나 지혜를 추구했고 그리워했습니다. 지혜를 사랑했고 존중했습니다. 그는 틈만 나면 지혜를 찬미했고, 지혜를 얻기 위해 간절히 하느님께 간구했습니다. 그는 지혜를 평생의 동반자로 삼았습니다.
오늘 첫 번째 독서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나는 지혜를 왕홀과 왕좌보다 더 좋아하고, 지혜에 비기면 많은 재산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였으며, 값을 헤아릴 수 없는 보석도 지혜와 견주지 않았다. 나는 지혜를 건강이나 미모보다 더 사랑하고, 빛보다 지혜를 갖기를 선호하였다. 지혜에서 끊임없이 광채가 나오기 때문이다.”(지혜 7, 8-10)
솔로몬은 세상의 통치자들을 향해 지혜를 얻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하라고, 그래야 자신의 손에 맡겨진 백성들을 올바로 인도할 수 있고, 구원에로 이끌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7장 말미에서 솔로몬은 장엄한 어조로 지혜의 본성을 찬미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솔로몬의 지혜 찬미’입니다. 그는 지혜가 지니고 있는 스무가지 이상의 속성을 쭉 나열하고 있습니다. 하나 하나 짚어보니 오늘 우리 지도자들과 우리 각자에게 꼭 필요한 덕목입니다.
지혜는 명석합니다. 거룩합니다. 유일합니다. 다양합니다. 섬세합니다. 민첩합니다. 명료합니다. 청절합니다. 티없이 맑다는 말입니다. 분명합니다. 손상될 수 없습니다. 선을 사랑합니다. 예리합니다. 자유롭습니다. 인자합니다. 항구합니다. 확고합니다. 평온합니다. 전능합니다. 모든 것을 살핍니다. 명석합니다. 깨끗합니다. 빠릅니다. 모든 것을 통달하고 통찰합니다.
인류역사상 지혜롭기로 따지면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솔로몬이었지만, 놀랍게도 하느님 앞에 자신을 완전히 낮춥니다. 자신의 연약함과 무지를 고백하면서 겸손되이 하느님께 지혜를 청합니다.
“저는 정녕 당신의 종, 당신 여종의 아들, 연약하고 덧없는 인간으로서 재판과 법을 아주 조금밖에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사실 사람들 가운데 누가 완전하다 하더라도 당신에게서 오는 지혜가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집니다.”(지혜 9,5-6)
요즘 정계나 학계에서 국민들 인내력 테스트라도 하는 듯, 정말이지 참아주기 힘든 사람들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폼이란 폼은 다 잡으면서, 아주 고압적이고 교만한 얼굴로,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인 양, 따져대고 가르치는 안하무인의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그들에게 참된 지혜의 덕이 겸비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봅니다.
참된 지혜를 갖춘 사람은, 주님의 성령 안에 살아가기에 교만하거나 무례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하느님 앞에 얼마나 미소한 존재인지를 늘 기억합니다. 그래서 지극히 겸손합니다.
결국 지혜는 사랑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참된 지혜는 하느님에게서 오고, 그 하느님께서 지니신 가장 우세한 속성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혜로운 삶은 사랑의 삶입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발버둥쳐도 지혜를 얻을 수 없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영국의 유명한 부자인 컨글튼 경이 어느 날 집에서 일하고 있는 하녀가 부엌에서 접시를 닦다 말고 한숨을 쉬며 “아이고, 5파운드만 있으면…. 5파운드만….”이라고 중얼거리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 소리를 들은 컨글튼 경은 그 하녀에게 5파운드가 급하게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돈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돌아 나오는데 더 큰 한숨 소리가 들리며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이었습니다.
“아이고, 10파운드라고 할걸. 10파운드라고 할걸….”
오늘 복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싶은 부유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십계명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그러나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예수님을 따를 용기는 없었습니다. 가진 것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진 것이 없을 때 우울해질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진 것이 많으면 우울해진다고 하십니다.
황창연 신부의 ‘화가 나십니까?’ 강의 중 이런 예가 있습니다. 신부님이 20년 전에 알던 분의 시동생이라고 합니다. 이 분이 성탄절 전날 불법 유턴을 하다가 전경에게 잡혔습니다. 그런데 이 분은 안 했다고 끝까지 우겼습니다. 물론 전경도 뒤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는 “너희 경찰 서장이 누구야?”라고 소리쳤고, 경찰 서장의 이름을 들으니 자기 친구였고, 그걸 믿고 전경의 뺨을 강하게 쳤습니다. 그래서 전경은 그 사람을 공무집행 방해로 철창에 집어넣었고, 그 사람은 철창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며 분을 참지 못하다가 그 자리에서 뇌출혈로 쓰러져 죽었습니다.
이 사람은 무엇을 잃을까 봐 두려워했을까요? 바로 명예입니다. 그러나 가진 것을 잃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정말 명예를 가졌을까요? 인간은 무언가 가질 능력이 있는 존재일까요? 조선시대 때 쓰이던 동전을 길에서 발견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때 누군가는 ‘이건 내 돈이야!’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의 것이 아닙니다. 누구도 죽음 앞에서 소유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아이들은 자기 소유를 주장할 수 있을까요? 저는 어렸을 때 명절 때 받은 돈을 어머니에게 다 빼앗겼습니다. 빼앗겼다기보다는 어머니가 맡기라고 해서 맡겼지만, 되돌려 받은 건 없습니다. 그런데 매번 그랬지만, 지금 어머니께 맡긴 것을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아이는 부모 앞에서 자기 소유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아이는 부모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때 아이는 슬플 일이 없습니다. 내 것이 없어서 빼앗길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욥은 자녀들과 재산, 건강까지 잃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도 잃었다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 주신 것, 하느님께서 가져가시니 하느님을 찬미할 뿐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하느님께 속한 사람이 즐거울 수 있는 이유입니다.
저도 군대에 갈 때 한 자매가 밤새 편지를 써서 출근도 안 하고 기차역까지 나왔습니다. 훈련소에 가서 시간 날 때마다 그 자매에게 편지를 썼지만, 답장이 오지 않았습니다. 걱정되었습니다. 7개월 만에 휴가를 나갔는데 다른 남자를 사귀고 있었습니다.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기분은 자대에 복귀에서 사라졌습니다. 어차피 나가서 무엇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한겨울에 뜨거운 목욕을 하면서 행복감을 느꼈습니다. 만약 밖에 있었고 무언가 할 수 있다고 믿었다면 집착을 끊기가 더 어려웠을 것입니다. 우리에겐 우리가 아무것도 소유할 수 없는 존재임을 믿게 만드는 군대와 같은 무언가가 필요합니다.
어머니 품이나 군대와 같은 곳에 머물려면 머물기 위한 무언가가 필요합니다. 아이는 부모에게 자기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증거로 돈을 맡깁니다. 군대에서 요구하는 것도 있습니다. 에덴동산에 머물기 위해서는 선악과를 봉헌하는 게 필요했습니다. 십일조입니다.
도미노 피자를 만든 톰 모나한(Tom Monaghan)은 어렸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고아원에서 자라야 했습니다. 그에게 돈이 전부일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여 엄청난 부를 일궜습니다.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믿을 때 공허함이 찾아왔습니다. 가진 것에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가톨릭 신앙을 회복합니다. 그리고 철저하게 십일조를 하고 돈을 사회와 종교에 환원합니다. 그제야 기쁨이 찾아왔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것을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 그를 기쁘게 하였습니다.
십일조는 나의 것은 아무것도 없는 존재이고 하느님께 속한다는 신앙고백입니다. 기쁨은 십일조의 열매임을 이해해야 합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마르 10,17-30: 가진 것을 다 팔고 나서 나를 따라오너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참으로 부자가 되려면 신앙의 선물을 통하여 부르시는 영광 안에서 추구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솔로몬은 지혜를 세상의 어떤 보물보다도 낫게 여기고 주님께 그것을 청한다. “나는 지혜를 왕홀과 왕좌보다 더 좋아하고, 지혜에 비기면 많은 재산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였으며, 지혜와 함께 좋은 것이 다 나에게 왔다. 지혜의 손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재산이 들려 있었다.”(지혜 7,8.11). 이 지혜는 바로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고 기도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선물이다(지혜 7,7).
오늘 복음에서도 참된 부는 세상의 재물을 포기할 줄 알고 끊어버릴 마음을 갖는 데서 얻을 수 있다고 한다. 복음을 보면 세 부분으로 구분되는데 주제는 모두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한 끊어버림이다. 이것은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말씀이다. 첫째 부분에서는 부자 청년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청년은 처음과 마지막 태도가 다르게 나타난다. 청년은 어려서부터 모든 계명을 잘 지켜왔다고(20절), 예수께서도 감탄하시고 대견해하셨다(21절).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21절) 하였을 때, 울상이 되어 근심하며 떠나갔다(22절). 이 극적인 상황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재산 때문에 나오는 위험이다. 청년은 용기 있게 결심하고 시작하였지만, 예수님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울상이 되어 근심하며 떠나갔다. 왜냐하면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다(22절). 물질에 대한 애착이 참된 선(善)이신 하느님을 추구하는 것을 방해했다. 이런 까닭에 처음에 당신이 선하다고 하는 것(18절)을 거절하시며 하느님만이 선하신 분임을 상기시키신다. 그래서 유일한 선이신 하느님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다른 선(善)들의 유혹이나 매력을 극복하여야 한다고 하신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계명은 제1계명에 의해 생기를 얻고 조명되지 않으면 구원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바로 여기서 하느님과 똑같으신 당신을 따르기 위해서 그의 모든 재산을 실질적으로 버리라고 하신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하느님을 첫 자리에 놓음으로써 나오는 결과이지 다른 요구가 아니다. 그 청년에게는 하느님보다는 자기의 재산에 대한 집착이 컸으므로 하느님이신 주님을 따를 수 없었다.
둘째 장면은 예수께서 재물의 위험에 대해 경고하시는 말씀으로 모든 시대의 당신 제자들의 공동체에 하시는 권고의 말씀이다(23-27절 참조). 예수께서는 두 번씩이나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23.24절) 하신다. 두 번째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상징적인 표현을 덧붙이신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25절). 이 표현은 너무 강해서 좀 부드럽게 해석하려고 하지만, “눈 속에 들보”(마태 7,3)라는 표현을 생각한다면, 청년처럼 재산에 마음을 두고 자신을 구원하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만큼 어려운 일이라는 의미이다. 제자들은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겠는가?”(26절) 수군거린다. 구약에서는 재물을 하느님의 축복으로 여겼는데, 장애물로 말씀하셨고, 또 그 청년이 구원에 아주 가까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낙담한 사람처럼 떠나갔기 때문에 제자들은 그렇게 수군거렸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구원이 어렵기도 하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27절). 구원이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무상으로 베풀어주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인간이 그 은총에 자신을 맡길 수 있는 용기와 신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부자 청년과 정반대되는 태도를 보인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28절). 그 보상에 대해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응답의 결실이며 그 은총이 확장되는 것이라고 알려주신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29-30절). 여기서도 하느님 나라를 위해 끊어버리는 행위를 요청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끊어버리는 행위가 그 행위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29절) 끊어버리는 행위가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와 복음이라는 가치를 소유하는 것은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한다 해도 자신을 더욱 충만한 존재가 되게 한다. 그 보상은 보편적 사랑과 형제애를 체험함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내세의 영원한 생명의 보증은(30절) 바로 지금, 이 순간부터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랑의 풍요함으로 자신이 부유해짐을 느낄 때 그것을 완성해준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박해도 받게 된다고 하신다.
그 박해까지도 믿는 이에게는 영광과 행복을 더해주는 역할을 할 것이다. 이것이 오늘 복음에서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이다. 박해까지 하느님의 사랑의 징표이며 우리 믿음에 대한 보상의 한 형태라고 한다. 히브리서는 그러기에 하느님의 말씀을 온유하게 들으라고 권고한다(참조: 히브 4,12). 하느님 나라를 위해 또 복음을 위해 집착을 끊어버리고 있는지 볼 수 있게끔 그 말씀을 통하여 철저히 자신이 드러나도록 내맡기는 것이 진정한 지혜이다. 우리 마음에 하느님과 재물이나 세상의 것들이 어떤 순서로 자리 잡고 있느냐가 문제이다. 오늘의 말씀에 따라, 참된 부, 참된 지혜를 차지할 수 있는 삶이 필요하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 안에 더욱 풍요해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삶의 은총으로 우리가 주님 안에 더 일치되고 기쁨을 나눌 수 있는 삶을 노력하여야 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친구가 많습니까? 국어사전에서 친구를 ‘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 나이가 비슷하거나 아래인 사람을 낮추거나 친근하게 부르는 말’이라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이런 정의라고 하면 친구는 정말로 많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소위 ‘찐친’이라고 말하는 진짜 친구가 많을까요? 진짜 친구를 미국 인디언은 ‘친구란 나의 짐을 자신의 등에 진 자’라고 말합니다.
상대방이 진 짐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하고, 짐을 진 그 뒷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그 짐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사랑하고 져주려는 사람이 진짜 친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친구 만나기가 쉽지 않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내 코가 석 자’라고 자기가 진 짐이 가장 무겁고 버겁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나만 그런 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나름의 무겁고 힘든 짐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짐만 힘들다고 외치면 내 주변에도 그런 사람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나도 힘들다’면서 외면합니다. 하지만 힘들어도 남의 짐에 관심갖고, 그 짐을 대신 들어주려는 사람 곁에는 역시 도움을 주려는 사람이 나타납니다. ‘저렇게 힘들어도 내 짐을 져주려고 하다니, 나도 도와야겠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찐친이 없는 이유는 ‘나’ 때문입니다. 나의 욕심, 이기심이 찐친을 가까이 만들지 못하게 만든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에 바르게 응답하는 사람은 찐친의 관계를 만들게 됩니다. 어렵고 힘들어도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 주님께서 우리를 당신 찐친으로 삼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한 부자가 달려옵니다. 그리고 “선하신 스승님!”이라고 부르지요. 달려왔다는 것은 자신감을 뜻하고, 예수님을 향해 스승님 외에 ‘선하신’이라는 호칭을 쓴 것을 보면, 예수님께서 자기를 높여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는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묻습니다. 이에 구약의 율법을 지키라고 하셨고, 그는 어려서부터 그 모든 계명을 다 지켜 왔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왜 달려왔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칭찬받으려고 온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하십니다. 이에 그 부자는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돌아갑니다.
주님과 찐친이 될 수 없었습니다. 주님과의 찐친은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사랑의 삶을 사는 사람만이 가능합니다.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내어주는 것입니다. 남의 짐에 관심갖고, 그 짐을 대신 들어주려는 사랑의 삶 안에서 주님과 찐친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쉽지 않다고 하십니다. 주님과 찐친이 아니면 절대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계속해서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에만 나의 욕심을 채워야 할까요?
오늘의 명언: 길이 막혔다면 원점으로 돌아가라. 미로에서 헤매느라 실마리를 찾지 못할 때는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뜻밖에 색다른 발견을 가져다줄 수 있답니다(쿠니시 요시히코).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묵상글 단톡방)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복음말씀
제1독서
<나는 지혜에 비기면 많은 재산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 지혜서의 말씀입니다.7,7-11
7 내가 기도하자 나에게 예지가 주어지고
간청을 올리자 지혜의 영이 나에게 왔다.
8 나는 지혜를 왕홀과 왕좌보다 더 좋아하고
지혜에 비기면 많은 재산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였으며
9 값을 헤아릴 수 없는 보석도 지혜와 견주지 않았다.
온 세상의 금도 지혜와 마주하면 한 줌의 모래이고
은도 지혜 앞에서는 진흙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10 나는 지혜를 건강이나 미모보다 더 사랑하고
빛보다 지혜를 갖기를 선호하였다.
지혜에서 끊임없이 광채가 나오기 때문이다.
11 지혜와 함께 좋은 것이 다 나에게 왔다.
지혜의 손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재산이 들려 있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하느님의 말씀은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4,12-13
12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13 하느님 앞에서는 어떠한 피조물도 감추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 눈에는 모든 것이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이러한 하느님께 우리는 셈을 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가진 것을 팔고 나를 따라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0,17-30
그때에 17 예수님께서 길을 떠나시는데
어떤 사람이 달려와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1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
19 너는 계명들을 알고 있지 않느냐?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횡령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20 그가 예수님께
“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1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이르셨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22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23 예수님께서 주위를 둘러보시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24 제자들은 그분의 말씀에 놀랐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거듭 말씀하셨다.
“얘들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25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26 그러자 제자들이 더욱 놀라서,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고 서로 말하였다.
27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바라보며 이르셨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28 그때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29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30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