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나는/최승자
일찍이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도 눈 지린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년 전에 죽은 시체.
아무 부모도 나를 키워 주지 않았다.
쥐구멍에서 잠들고 벼룩의 간을 내먹고
아무 데서나 하염없이 죽어 가면서
일찍이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떨어지는 유성처럼 우리가
잠시 스쳐갈 때 그러므로,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너를모른다 나는너를모른다.
너당신그대, 행복
너, 당신, 그대, 사랑
내가 살아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시 읽기> 일찍이 나는/최승자
위악 뒤에 숨은 진심
위선과 위악 중에서 어떤 것이 더 나쁠까? 잘 모르겠다. 그런데 이건 분명하다. 위선적인 사람과 위악적인 사람 중에서 더 대하기 쉬운 쪽은 전자라는 것, 적어도 나에겐 그렇다. 나이를 좀 먹고 사회생활이라는 걸 하다 보니 위선적인 사람 앞에선(약간의 비위 거슬림만 참아낸다면) 얼마든지 마음속으론 그 사람보다 우위에 서는 은밀한 쾌감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위악을 떨어대는 사람은 정말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나마 위선적인 사람에 비해 그 수가 적다는 사실에서 위안을 찾을 수 있을까.
‘일찍이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으며,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 ‘루머’일뿐이라고 위악을 떨어대는 사람을 직접 만나고 싶지는 안다. 하지만 정말 궁금하다. 이 삶은 도대체 왜 이럴까? 이 시가 수록된 『이 시대의 사랑』(문학과지성사, 1981)이라는 시집 전체를 읽다 보면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다. 시인에게 이 세계는, 더 정확히 말해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의 한국 사회는 지옥과도 같았다. 이 세계가 위선과 탐욕으로 깊게 병들어 있다면 아예 ‘아무 데서나 하염없이 죽어 가면서 자신의 존재를 지워버리는 것이 함께 병들지 않은 방법인 것.
종종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기도 하다. 사랑의 반대는 증오가 아니라 무관심이듯 무엇인가를 과도하게 부정하는 것은 그것이 무엇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끊을 수 없기 때문이리라. 무엇인가를 가장 완벽하게 혐오하는 방법은 그것에 대한 일체의 관심을 거두어들이는 것, 시인이 자신을 포함한 이 세계의 모든 것을 정말 부정했다면 시를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부정하는 말로 가득 찬 시를 썼다는 건 이 세계에 대해 도저히 관심을 끊을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기에 이 시를 반복해서 읽다 보면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에선 ‘나도 무엇인가가 되고 싶다’는 욕망이, ‘나는너를모른다’에선 ‘나는 너를 모른다’에선 ‘나는 너를 알고 싶다’는 열망이 느껴진다. 이렇게 지독한 방식으로 말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 이인의 참혹한 내면이 슬프고 안타깝지만.
―김경민, 『시 읽기 좋은 날』, 쌤앤파커스,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