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성윤의 미술치유] 비너스와 석굴암- 황금비율과 마음의 평화
고귀한 단순성과 고요한 위대성
밀로 비너스/asobou
지금 보고 있는 화면은 왜 모두 직사각형일까?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미는 절대적, 객관적이다. 피타고라스에게 예술은 수학이었다. 비례와 균형, 조화는 수적 환산이 가능하며 이것에 어긋난 미술, 음악, 건축은 추하게 된다.
황금비율(Golden Ratio:1.618:1)에 따르면 인간에겐 아름다움을 주는 특정 비율이 있고 이 비율에 부합할 때 인간은 미적 쾌감을 느낀다. 훌륭한 비례는 편안함을 주고 나쁜 비례는 불편함을 준다.
이 모범(Canon)에 따라 그리스의 예술은 이루어졌고 현대 일상에서 사용하는 A4 용지, 스마트 폰과 모니터의 화면, 지갑 안의 신용카드에도 이 법칙은 은밀히 담겨있다.
<밀로의 비너스>는 루브르의 터줏대감으로, 현존하는 몇 안 되는 고대 그리스의 원본 걸작 이다. (대부분의 그리스 조각은 로마시대의 복제품이다).
이 비너스는 팔이 유실되었음에도 황금비율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보여주며 인간 육체의 아름다움에 찬탄을 자아내게 한다.
한국의 예술에도 황금비율이 존재했을까? 고대 헬레니즘 문화가 간다라 문화를 통해 천년의 여정을 거쳐 신라에 이르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경주 불국사와 석굴암, 본존불에는 나름의 황금비율이 곳곳에 숨어있어 신라 시대의 과학기술에 대한 상상력을 자극한다. 그렇다면 이 황금비율의 예술품을 통해 인간의 마음은 무엇을 얻을까?
주제는 다르지만, 이 두 작품의 아름다움은 우리의 마음에 공통적으로 어떤 변화를 일으킬까?
로마 시대의 철학자 플로티노스는 예술을 신성(神性)과 연결하여 그 지위를 격상시킨다. 예술가의 영혼이 택하는 재료와 창작과정, 나아가 감상까지 모두 신성과 맞닿아있다.
신체의 감각, 행동과 성격 모두 아름다움의 대상이고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자는 아름다운 작품을 감상하게 된다. 근대 미학자 빙켈만이 정의한 유명한 그리스의 이상미에 따르면,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은 ‘고귀한 단순성과 고요한 위대성’이니 이 미의식은 자연스레 마음의 안정, 절제와 평온함을 낳는다.
조각가 로뎅은 비너스 상을 보고 “그대 안의 신성함은 자연을 향한 그대 조각가의 무한한 사랑” 이라 하였고 청마 유치환은 석굴암의 본존불을 향해 “목 놓아 터뜨리고 싶은 통곡을 견디고 내 여기 한 개 돌로 눈감고 섰노니” 라 했다.
현실에 존재하기 어려운 이상적 여체의 아름다움은 인간의 단순한 욕망 너머의 것을 건드린다.
하지만 신성한 영혼이 창조한 작품은 자연스레 신성하게 감상 될까? 비너스 상과 석굴암 본존불의 예술가와 감상자는 항상 같은 마음의 결로 공명할까?
학자와 예술가의 준엄한 예술관은 다른 누군가의 마음과는 많이 달랐던 것 같다. 실제 밀로의 비너스를 막 발굴한 프랑스 병사들은 헛간에 놓인 비너스를 팔짱을 낀 채 ‘별로’라 고개저었고 또 다른 그리스 시대의 크니도스(Knidos) 섬의 비너스 상(최초의 여성 나체상이었긴 했지만)에선 정액의 얼룩이 발견되곤 했다
본존불 /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원
2001년 탈레반이 파괴한 아프카니스탄의 바미안 석굴처럼, 석굴암도 종교 극단주의자에겐 파괴본능을 자극할 것이다. 예술 창작과 감상 간의 큰 간극은 아름다움을 획일적으로 정의하기 어렵게 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 하여 아름다움에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과는 별개로, 인류의 두 걸작을 창작한 예술가의 마음 속 풍경은 상이한 주제지만 신성에 바탕해 고귀하고 고요한 아름다움을 찾는 구도의 여정이였다고 믿는다.
그 과정의 이정표인 비례와 조화, 황금비율의 형식은 우리의 마음에 격렬한 감정의 표현과 분출보다는 잔잔한 평화와 숭고한 절제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글 | 임성윤 교수
출처 : 마음건강 길(https://www.mindgil.com)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