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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2. 묵상글 (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 주님께 대한 사랑으로.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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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2.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주님께 대한 사랑으로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제가 처음 양성책임을 맡을 때 겨우 서른이었습니다.
저보다 나이가 더 먹은 형제들도 가르쳐야 했습니다.
당연히 양성을 잘할 수 있을까 고민에 고민을 할 때
양성을 하다 보면 할 수 있게 된다고 여러분이 조언하였고
재속프란치스코회에서 양성을 처음 하게 된 분들도 양성하면서
양성자로 자신이 차츰 양성되었다는 말을 많이 하셨습니다.
저도 실제로 하다 보니 할 수 있었고 차츰 양성자가 되어갔습니다.
그러나 저에게 더 큰 힘이 된 조언은 역시 신앙적인 조언으로서
소임을 주신 주님께서 할 수 있는 힘도 주실 거라는 조언이었습니다.
사실 자리가 사람을 만들기도 하지만
자리가 사람을 망치기도 하지요.
권력자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리를 이용하여 자기 사욕을 차리다 잘못되곤 하잖습니까?
그러므로 베드로 사도좌는 이런 것과 달라야 합니다.
사도좌는 인간이 쟁취한 자리가 아님은 물론
인간이 마련해준 자리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당신 교회를 세우시고 그 으뜸 자리를 맡기신 겁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라고 주님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당신 교회의 으뜸 자리를 맡기신 것은
베드로가 하느님으로부터 지혜를 받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좌 곧 교황의 자리에 앉는 사람은
주님의 양 떼를 돌보는 역할을 해야 할 사람입니다.
그래서 오늘 서간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하느님의 양 떼를 잘 치십시오.
그들을 돌보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자진해서 하십시오.”
그러므로 베드로처럼 주님의 양 떼를 돌보는 자리에 앉는 사람은
자기 욕심이 아니라 주님의 뜻대로 다스려야 할 사람으로서
그에게 주님께 대한 순명과 사랑은 기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잘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양 떼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주님께 대한 사랑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주님은 베드로에게 당신 양 떼를 맡기시면서
당신 양 떼를 사랑하느냐 묻지 않으시고
당신을 사랑하는지 베드로에게 물으시지 않습니까?
얼핏 생각하면 당신 양들을 사랑하느냐고 물으실 것 같고
우리 같으면 주님의 양들을 사랑하느냐고 물을 것 같은데
주님께서는 그렇게 묻지 않으시고 당신을 사랑하냐고 물으십니다.
주님을 사랑해야 주님의 양들에 대한 사랑도 있을 것이고,
주님을 사랑해야 주님의 양들에 대한 사랑도 완전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주님께 대한 사랑과 순종의 자세 없이 책임자의 자리를 맡고
인간적인 사랑만으로 양들을 사랑하면 자주 실패하고 말 것입니다.
그 사랑은 금세 고갈될 것이고 그 사랑에는
욕심이나 기대라는 불순물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으로 양들을 사랑해야
우리의 사랑이 주님의 사랑으로 충만하고,
우리의 사랑이 주님의 사랑처럼 순수하고,
무엇보다 원수까지 사랑하는 완전한 사랑이 되어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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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2.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아는 후배가 스마트폰을 꺼내더니 하나의 사진을 보여줍니다. 이 사진 안에는 아주 멋진 몸(상반신)을 드러낸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바로 그 후배 신부였습니다. 보디 프로필 사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사진, 사진 편집 프로그램으로 편집한 거야?”라고 묻자, 아니라고 합니다. 이 사진 한 장을 남기기 위해 식단 조절을 하면서 몇 개월 동안 다이어트를 했고 또 하루도 빠짐없이 헬스 트레이닝을 열심히 받았다면서 너무 힘든 시간이었음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이 후배의 얼굴에는 자랑스러움이 묻어 있었습니다. 이 힘든 것을 해냈다는 뿌듯함을 볼 수 있었습니다.
사진은 깜짝 놀랄 정도로 멋져 보였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지금의 모습을 보면 그렇게 멋져 보이지 않았습니다. 예전의 통통한 모습만 기억하고 있었기에, 지금의 많이 마른 모습이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살이 빠져서 그런지 얼굴에는 주름이 많이 보였고, 그래서 실제의 나이보다 더 늙어 보였습니다. 물론 본인의 만족도가 커서 괜찮다고는 하겠지만, 이 사진 한 장을 위해서 그렇게 힘든 시간은 보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들에게 자랑스럽게 보일 수 있는 사진 한 장이 중요한 것일까요? 그보다 스스로 느끼는 멋진 사람으로 사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남에게 보이는 삶은 순간의 만족만을 가져다줍니다. 그러나 자기에게 보이는 삶은 계속된 만족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멋진 사람이라고 스스로 느낄 수 있는 여건들을 계속 만들어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라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멋진 사람으로 살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선택하시어 당신의 지상 대리자로 삼으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렇다면 왜 베드로 사도를 선택하셨을까요? 그 이유가 바로 오늘 복음에 등장합니다.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라는 예수님 질문에, 다른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답합니다. 그러나 시몬 베드로는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하지요. 베드로는 인간적인 약점이 너무 많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정답 하나 말했다고 해서, 하늘 나라의 열쇠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어도,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보시고 크게 쓰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도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그 믿음이 우리를 멋진 사람으로 살 수 있게 하며, 이 세상을 만족하며 살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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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당신이 사랑하는 삶을 살아라(밥 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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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2.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9)
오늘은 베드로 사도좌 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리스도의 신비’와 ‘교회의 신비’를 잘 드러내줍니다. 곧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통해서는 ‘그리스도의 신비’를, 베드로에게 부여되는 권한을 통해서는 ‘교회의 신비’를 드러내줍니다.
우선,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라는 베드로의 고백은 성부 하느님에 대한 고백이요, 성자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이요, 성부 하느님과 성자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대한 고백입니다. 곧 예수님의 신성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성부와 절대적이고 유일한 관계를 지니신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신비를 드러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밝혀주신 이 계시 위에 교회를 세우십니다. 곧 교회는 바로 “하느님 아드님”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근거하여 세워집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합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태 16,18)
또한, 베드로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9)
“열쇠”는 권한을 나타내는 상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매고 푸는” 특별한 권한을 베드로에게 부여하셨습니다. 곧 “매고 푸는” 권한을 하늘에서 보증하고 인정해주는 이 어마어마한 사실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늘이 땅에서 열린 것입니다. 곧 우리는 하늘을 땅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매인 것’을 푸는 일은 하늘에 가서 하는 일이 아니라, 땅에서 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곧 우리가 땅에서 용서하고 화해하고 사랑할 때 하늘을 만나게 됩니다. 그것은 하늘이 이미 땅에 와 있기 때문입니다. 다름 아닌 바로 우리의 사랑의 행위 안에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땅에서 하늘을 열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형제를 용서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아직 용서하지 못한 사람이 있거든, 바로 지금 용서해야 할입니다. 바로 오늘이 용서의 축제일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교회의 신비는 바로 여기에서 유래됩니다. 곧 교회 안에는 하늘로부터 오는 “계시”가 활동하고, 하늘로부터 오는 “권한”이 활동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베드로는 오직 하늘에서 오는 그 “매고 푸는” 능력으로 모든 형제들에게 믿음을 굳게 해 주는 사명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베드로와 그의 후계자들과 신앙으로 일치하여 나아가게 됩니다.
하오니, 주님!
묶인 것, 막힌 것을 풀게 하소서!
오늘, 이 땅에서 당신의 나라를 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9)
주님!
당신께서는 하늘나라의 열쇠를 하늘에 두지 않으셨습니다.
땅에 있는 저희에게 주시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리게 하셨습니다.
형제를 받아들임이 당신을 받아들임이라 하시고,
형제와 사랑을 당신 나라를 여는 열쇠로 주셨습니다.
하오니, 묶인 것, 막힌 것을 풀고 사랑하게 하시어
이 땅에서 당신의 나라를 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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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2.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은 그리스도께서 베드로 사도를 선택하여 지상의 대리자로 삼으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베드로 사도를 교회의 최고 목자로 공경하는 이날 사도들의 후계자들과도 소통할 수 있는 은혜가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마태16,13).하고 물으시자 제자들이“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하고 대답하자“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태16,15).하고 물으셨습니다. 이 물음은 남들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내가 생각하고 또 받아들이는 사람의 아들’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너희에게 내가 어떤 존재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이렇다 저렇다 하는 것에도 귀 기울여야 하지만, ‘나의 소신과 믿음’이 더 중요합니다. 결국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 이십니다”(마태16,16).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고백이 베드로의 고백이기도 하지만 오늘 나의 고백으로 승화되어야 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하는 질문 앞에서 ‘저는 당신의 무엇입니다.’하는 답을 해야 합니다. 성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자신을 ‘주님의 손에 쥐인 몽당연필’로 표현하셨습니다. 연필을 사용하는 것은 주인 몫입니다. 설사 부러지더라도. 예수의 데레사 성녀는 환시를 통해 만난 아기 예수님의 ‘너는 누구냐?’는 질문에 ‘나는 예수님의 데레사’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누구냐?’고 묻는 데레사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데레사의 예수’라고 답해 주셨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물음에 “‘사랑’이십니다.”그리고 “저는 당신의 연장입니다.”하고 답합니다. 저의 삶의 여정에 많은 허물과 잘못, 죄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용서와 자비를 베풀어 주신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앞으로도 그러실 것이고 저도 끝까지 주님의 도구로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그분의 무엇인지를 생각할 수 있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만큼 주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소명에 귀 기울이고 복음적인 삶에 결코 소홀함이 없기를 희망합니다. 텔레비전 시청, 핸드폰 보는 시간을 10분만 줄여 성경을 봉독한다면 하루의 삶이 달라질 것입니다. 일반 신문이나 잡지를 보는 시간 중 5분을 교회 서적을 읽는 시간에 할애하거나 묵주기도 1단을 봉헌한다면 기도의 맛을 느끼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육신을 위하는 시간 못지않게 영적인 몫을 챙겼으면 좋겠습니다.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와 더불어 오늘을 변화와 쇄신의 날로 삼고 기뻐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그리스도’는 그리스어로 ‘구세주’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어로는 ‘메시아’입니다. 메시아는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이라는 말이 구세주란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은 이스라엘의 역사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는 강대국이었지만, 그 후에는 쇠락의 길을 걷다가 마침내 기원전 587년 바빌론 침공을 받아 멸망합니다. 그리하여 약 50년간 바빌론 유배를 가게 되었습니다. 유배가 끝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나라를 재건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주변 강대국의 속박을 받으며 겨우 명맥을 이어갑니다. 이런 와중에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주님인 하느님께 희망을 두면서 그분께서 언젠가는 구원자를 보내어 선택받은 민족인 자신들을 구원해 주리라 믿었습니다. 이러한 기대를 하면서 미래의 구원자에 대해 상상하게 되었는데, 어떤 이들은 다윗과 같은 강력한 임금으로, 어떤 이들은 사제와 같은 인물로, 또 다른 이들은 위대한 예언자와 같은 인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임금과 사제, 예언자는 모두 머리에 기름 부음을 받아 임명되었고, 이런 공통점에 근거해서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보내주실 미래의 구원자를 ‘기름 부음 받은 사람’, 곧 ‘메시아’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은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은 예수님은 여러 예언자처럼 역사의 인물이기는 하지만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인물임을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 사람 중의 하나가 아니라 으뜸 중의 으뜸이라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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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2.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댈러스에 오기 전에 저의 자리는 ‘가톨릭평화신문미주지사’였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신문을 만들고, 신문사를 운영했습니다. 교구의 인사이동으로 이제 저의 자리는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의 주임신부입니다. 저는 이곳에서 본당 사목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자리는 직책과 직무를 뜻합니다. 예전에 사람들은 별을 보고 방향을 정했습니다. 북극성은 방향을 잡는 기준이 되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별자리는 기준과 원칙을 뜻합니다. 비슷한 의미로 신호등이 있습니다. 빨간 신호등에서는 멈추어야 합니다. 파란 신호등에서는 움직여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원활하게 이동할 수 있고, 사고를 예방할 수 있습니다. 문화와 문명이 발달한 나라는 이런 원칙과 기준이 잘 지켜지기 마련입니다. 제가 살던 명동은 한국에서 가장 비싼 장소 중에 하나였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자리는 높은 수익을 보장하는 장소를 뜻합니다. 제가 살고 있는 텍사스는 미국에서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곳이라고 합니다. 기업들도 텍사스로 옮기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타주에 비해서 세금이 저렴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자리는 직무와 직책의 의미로, 원칙과 기준의 의미로, 생활하는 공간의 의미로 이해 할 수 있습니다.
댈러스 교구는 저의 직책과 직무에 맞게 권한을 주었습니다. 제가 본당 사목을 할 수 있도록 댈러스 교구에서 요구하는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하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프로그램에 참여하였고, 교육에 참여했다는 수료증을 받았습니다. 저의 직책에 따른 권한은 제가 사제서품을 받았을 때 받았던 권한과 비슷합니다. 미사를 집전할 수 있는 권한, 고백성사를 드릴 수 있는 권한, 병자성사를 드릴 수 있는 권한, 혼배성사를 드릴 수 있는 권한, 세례성사를 드릴 수 있는 권한입니다. 본당 공동체와 함께 지역에 복음을 전하고, 본당 공동체가 하느님의 백성으로 성장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함께 생활하는 사목자와 수도자가 불편 없이 지낼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미주지역에서 사목하는 사제들과 연대하여 도움을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는 것입니다. 특히 중남부 지역의 사제들과 연대하여 신심단체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저는 뉴욕에서는 ME 대표신부를 맡았었고, 꾸르실료 지도신부를 맡았습니다. 이제 이곳 중남부에서는 꾸르실료 지도신부를 맡게 되었습니다. 근본적으로 사제의 직무는 복음을 전하는 예언직과 공동체를 성장시키는 사목직과 성사를 통하여 공동체를 하느님께 인도하는 제사직입니다.
오늘은 베드로 사도의 자리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생전에 베드로 사도는 자신의 자리를 내세운 적이 없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였고, 동생 안드레아의 손에 이끌려 예수님을 만난 뒤로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였습니다. 그런 베드로를 교회는 사도들의 으뜸이라고 생각하였고, 기꺼이 베드로에게 교회의 사도좌의 권위를 내어 주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사랑하였고, 죽기까지 예수님의 뒤를 충실하게 따랐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3가지를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은 베드로의 능력과 재능에 따라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었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교회를 맡겨 주셨습니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 따라서 우리는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라고 고백을 합니다. 베드로 사도를 계승하는 교황은 또한 예수님께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으로 교회를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둘째,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셨습니다. 천국은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닙니다. 천국은 지금 이곳에서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고, 아껴주며, 나누는 이곳이 이미 천국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신 것이 아니고, 살아있는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셋째,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조건으로 용서를 이야기 하셨습니다. 용서가 없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권위는 주장하고 내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권위는 유리와 같아서 쉽게 깨지고, 상처를 받기 쉽습니다. 진정한 권위는 아낌없이 내어주고, 희생하는 것입니다. 그런 권위는 불의와 폭력 앞에서 위축되지 않으며 어둠 속에서 더욱 빛나기 마련입니다. 나의 자리가 없다고 생각하신다면, 나의 권위를 알아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된 권위가 아닙니다. 나의 체면과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권위일 뿐입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는 참된 권위에 대해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에 있는 하느님의 양 떼를 잘 치십시오. 그들을 돌보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자진해서 하십시오. 부정한 이익을 탐내서 하지 말고 열성으로 하십시오. 여러분에게 맡겨진 이들을 위에서 지배하려고 하지 말고, 양 떼의 모범이 되십시오. 그러면 으뜸 목자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은 시들지 않는 영광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 사랑과 용서, 나눔과 희생으로 사라지지 않는 우리들의 자리를 만들어 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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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2.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주님께서 물으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사도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베드로 사도의 이 대답이 참으로 쉽게 들립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베드로 사도에 대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대답한 베드로 사도는 나중에 주님을 배신합니다. 모른다고 세 번이나 말합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고기 잡던 배에서 물로 뛰어들어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과 화해하고 그리스도교의 반석이 됩니다. 그리고 베드로 사도에게 주어진 하늘의 열쇠는 후대의 교황에게 이어져 옵니다. 오늘까지 말입니다.
보십시오. 오늘의 한마디 대답이 얼마나 큰 업적인지 말입니다. 이 얼마나 대단한 답변이었는지 말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살아 계신 하느님’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이는 이미 구약에서도 밝혔습니다. 즉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표현을 통해 살아 계신 하느님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그 살아 계신 분을 오늘 베드로도 그대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는 분, 그분이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것을 통찰했습니다. 살아 계신 하느님에 대한 고백과 그 아드님에 대한 고백은 우리 신앙의 중심입니다. 이러한 통찰을 주신 분은 다름 아닌 하느님이십니다.
이 통찰로 인해 우리는 살아 계신 하느님 안에 살 수 있다고 고백합니다. 우리 또한 천국의 열쇠를 가진 사도들의 도움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음을 고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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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행복
어제는 먼길을 떠나는 친구를 만났습니다.
저녁이 지난 밤 시간이어서
간단히 소주 한잔을 기울였습니다.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은
치킨 한 마리와 아귀포 조금이었습니다.
그렇게 소소한 대화를 하고
그렇게 소소한 위로를 하고
그렇게 소소한 소주 한잔을 기울였습니다.
행복은 멀리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행복은 작은 곳에 있다고 합니다.
행복은 지금 나와 그것을 나누는 사람 사이에 있다고 합니다.
오늘은 소소한 행복 나눠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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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2.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목자 영성
-“자비와 지혜, 온유와 겸손, 사랑과 섬김”-
지난 밤 초춘(初春)에 내린 흰눈이 온누리를 덮었습니다. 나무마다 눈꽃 설화(雪花) 만발한 초봄입니다. 우리 모두 순결한 사랑, 순결한 마음으로 살라 하느님 주신 은총의 선물입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시편23,1)
오늘 시편 화답송 후렴은 다음 오늘 감사송(하느님 백성의 목자인 사도)과도 잘 어울립니다. 영원한 목자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닮은 사도들이요 오늘날의 주교들, 사제들이어야 함을 깨닫습니다. 우선적인 직무가 섬김의 목자직이라는 것입니다.
“영원한 목자이신 아버지께서는 양 떼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끊임없이 보호하며 지켜 주시려고, 복된 사도들을 목자로 세우시어, 성자를 대리하여 양 떼를 다스리게 하셨나이다.”
오늘은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로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제자들 가운데 으뜸으로 세우시고 교회를 이끄는 특별한 권위와 권한을 주신 것을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본기도가 이를 분명히 합니다.
“전능하신 하느님, 베드로 사도의 신앙 고백을 반석으로 삼아 교회를 세우셨으니, 어지러운 이 세상에서 교회가 흔들리지 않게 하소서.”
베드로 반석 위에 세워졌기에 흔들리지 않는 교회요 우리 믿는 이들의 삶입니다. 오늘 축일의 유래를 간략히 살펴 봅니다. 로마시대에는 죽은 이의 기일에 무덤에 모여 추도하는 관습이 있었고, 2월22일 오늘은 가족들이 모여 음식을 나누며 죽은 이를 추모하는 가족 행사를 거행했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이 관습을 받아들여 4세기부터 베드로 사도 무덤을 참배하고 추모했으며 바로 오늘 축일은 여기서 유래합니다.
이어 바오로 4세(재위1555-1559) 교황이 6-7세기때 갈리아 지방에서 유래된 1월18일을 로마전례력에 수용해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로 정했으며, 1960년 성 요한 23세(재위1958-1963) 교황이 이 사도좌 축일을 2월22일에 지내도록 했습니다.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의 근거가 되는 교부들의 어록도 참 풍부합니다.
1.“그리스도의 교회는 베드로의 굳건한 반석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성 대 레오 교황)
2.“베드로는 반석을 뜻하는 말인데, 반석은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라는 이름 안에 교회가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성 아우구스티누스)
3.“이 바위는 베드로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온 인류를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고백을 바위라고 표현하신뒤, 그 반석 위에 당신의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셨습니다.”(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루스)
4.“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세웁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교회를 세우시는 방식입니다. 곧 반석 위에 세우시어 굳건함과 힘을 지니게 하십니다.”(오리게네스)
5.“사도들은 유일한 초석 예수님 안에 있는 초석들입니다. 설사 사도들이 없다해도 예수님만은 마땅히 초석으로 불리시지만, 사도들은 그리스도 없이는 결코 교회의 초석들이라고 불릴 수 없습니다.”(프리마시우스)
6.“‘교회가 베드로 위에 세워졌다(마태16,18)’고 말하지만, 모든 사도 위에 세워졌음을 알려주는 말씀도 있습니다(마태18,18). 그들 모두가 하늘 나라의 열쇠를 받았으며 교회의 힘도 그들 모두에게서 나옵니다. 그러나 열둘 가운데 하나가 선택된 것은 분열이 일어나지 않도록 머리가 지명된 것입니다.”( 성 예로니모).
이 모든 교부들의 말씀은 오늘 복음에 근거합니다. 그러니 신앙의 모범인 베드로를 본받아 예수님과 우정의 관계를 날로 돈독히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사랑할 때 압니다. 사랑과 앎은 함께 갑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누구보다 예수님을 사랑했기에 예수님의 정체를 정확히 고백함으로 주님의 극찬과 더불어 전권을 위임 받을 정도로 축복을 받습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베드로를 신뢰했는지 깨닫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오늘 복음에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반석이라 극찬을 받던 베드로가 순식간 사탄의 걸림돌이 되어버립니다. 세 번 주님을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세 번 사랑의 확인을 받아낸 일화(요한21,15-19)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예, 사랑합니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요지로 주님과 베드로 사이에 세 번 오고 간 문답입니다. 베드로가 이 체험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지요! 베드로가 순교에 이르기까지 항구할 수 있었던 믿음도 이런 체험의 은혜일 것입니다. 새삼 이런저런 시행 착오를 겪으며 깊어지는 믿음의 여정이요 깊어지는 주님과 우정의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베드로의 면모는 믿음 약한 우리들에게는 얼마나 위로와 힘이 되는지요!
바로 오늘 제1독서 주님의 사도이자 목자인 베드로의 고백에는 참목자 예수님을 닮은 목자의 사랑이 녹아있음을 봅니다. 교회지도자들은 물론 믿는 모든 이들에게 큰 가르침과 깨우침을 주는 금과옥조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에 있는 하느님의 양 떼를 잘 치십시오. 그들을 돌보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자진해서 하십시오. 부정한 이익을 탐내서 하지 말고 열성으로 하십시오. 여러분에게 맡겨진 이들을 위에서 지배하려 하지 말고, 양 떼의 모범이 되십시오. 그러면 으뜸 목자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은 시들지 않는 영광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
목자뿐 아니라 양떼 신자들이 으뜸 목자 예수님께 보고 배워야 할 삶의 자세입니다. 참으로 자비와 지혜, 온유와 겸손, 사랑과 섬김의 자세가 하나로 녹아 있는 참 목자 예수님을 닮은 아름답고 거룩한 삶의 자세입니다. 오늘의 다산 어록과 논어의 공자 말씀도 주님의 평생 배움의 학인(學人)들인 우리를 격려합니다. 세월과 함께 쌓여 드러나는 ‘공부의 주름’, ‘연륜의 나이테’이길 소망합니다.
“공부란 세월과 함께 쌓이는 주름과 같으니, 배웠다면 몸에 새겨 일상에 드러내야 한다.”(다산)
“시 삼백편을 외워도, 사방이 사신으로 나가서 일을 잘 해내지 못한다면 비록 많이 배웠다고 하더라도 무슨 소용이 있는가?”(공자)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런 참목자 예수님을 닮아 주님과 사도들과 함께 교회의 반석이 되게 합니다. 또 하나의 베드로 반석인 우리를 향한 주님의 황송스럽고 영광스런 말씀입니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저승의 세력도 교회를 이기지 못하리라.”(마태16,1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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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2.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 있음에>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9)
나 있음에
하늘이 땅으로
내려올 수 있기를
나 있음에
땅이 하늘로
오를 수 있기를
나 있음에
하늘과 땅이
땅과 하늘이
하나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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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2.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태 16,18)
이 반석 위에
이 바위는 베드로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온 인류를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고백을 바위라고 표현하신 뒤, 그 반석 위에 당신의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그 고백과 믿음 위에 당신의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그 고백을 한 사람을 이 이름으로 부르시며, 장차 그의 것이 될 권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교회의 일반적인 권한과 특별한 권한을 모두 베드로에게 주신 것은 그의 고백 때문입니다. 앞으로 모든 신자의 공통되는 속성이 될 바위라는 이름을 베드로에게 주신 것은 바로 이 고백 때문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교회의 특징적인 면이 원래부터 베드로에게 있었던 것처럼 말씀하신 것도 그의 고백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심으로써 결과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이것이 교회의 공통적인 미덕임을 보여 주십니다. 고백이라는 공통적인 요소를 베드로가 가장 중요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하늘 나라의 열쇠를 교회가 갖게 되리라는 뜻입니다.
이 열쇠, 곧 교회의 열쇠를 지닌 사람은 따라서 모든 거룩한 것에 대한 열쇠도 갖게 될 것입니다. 교회에 속한 사람으로 여기며 교회의 구성원으로 인정되는 사람은 하늘 나라에 참여하는 사람이고 그 상속자입니다. 여기에 들지 못한 사람은 어떤 지위에 있건 거룩한 것들에 참여할 자격이 없습니다.
오늘날까지도 교회의 사제들은 이 말씀을 들어 자격이 없는 이들을 물리치며, 회개로 자격을 얻은 사람들만을 받이들입니다.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루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3 피조물은 하느님이다
피조물이 하느님을 드러내는 곳에서 하느님은 하느님이 되신다
엑카르트는 우리가 하느님뿐만 아니라 신성에게로 되돌아가게 되어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거기로 되돌아가면, 아무도 묻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없어진 것을 눈치 챌 사람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성 안에서는 누구도 자신이 없어진 것을 눈치 채이지 않는다. 모든 이가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이 귀환은 우리가 흘러 나오거나 창조될 때보다 더 놀랍고 고귀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이 귀환은 진정한 돌파를 이룰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설교 20에서 더 자세히 살펴보게 될 것이다.
하느님으로부터 흘러 나오는 것과 하느님에게로 되돌아가는 것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창조하고 또 창조하는 창조주가 됨으로써 하느님은 줄어드는가? 엑카르트는 안에 머물되 밖으로 흘러 나오는 말의 원리를 하느님과 신성의 관계에 적용한다. 하느님은 “지자신 안에 머무른다. 절대로 자신의 바깥에 머무르는 법이 없다. 하지만 하느님은 서서히 녹아서 밖으로 흘러 나간다. 녹아서 밖으로 흘러 나가는 것이야말로 하느님의 선이다.” 이와같이 엑카르트는 용해의 이미지를 동원히여 사물이 밖으로 흘러 나오되 안에 머무른다고 넌지시 말한다. 그는 하느님이 1,000마일의 여정을 거쳐서 신성으로부터 흘러 나왔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신성과의 작별은 하느님이 녹음으로써 이루어진다. 창조계는 하느님의 선이 녹아서 된 것이다. “하느님이 녹아서 밖으로 흘러 나가 모든 피조물과 하나가 될 때, 비로소 선은 존재한다." 용해와 몸 바꾸를 일으키는 창조계는 선하다.(124)
✝️ 목요일 성모님의 날✝️
<파티마의 성모 마리아와 목동 / 세 바르따스>
제 4장 오직 고통뿐
가정 환경
이 추수의 손실에다가 시간 허비에서 오는 일의 손해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루치아를 만나러 오는 사람이 오면 언니들 중 한 사람은 맡아놓고 동생을 찾으러 쫓아다녀야 했는데 그 때문에 다른 일을 거의 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그녀 대신 양떼를 지켜야 했던 것이다. 9월 중순에는 손이 부족해서 하는 수 없이 양을 팔지 않으면 안 될 형편이었으므로 집안의 수입은 형편없이 줄어들었다.
그리고 고바 다 이리아에 땅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항의도 있었다. 어느 밭이건 간에 다 짓밟혀서 엉망이 되었고 모든 농작물이 다 망가쳤으므로 피해자들의 불평과 손해 배상 재촉까지 곁들여지자 기막힌 상태가 되었다. 이러한 곤경에 처한 마리아 로사는 난처한 나머지 루치아에게 화풀이를 했다.
“그래 넌 그따위 도깨비에 홀려서 모든 사람과 한통속이 되어 이렇게 집안을 못살게 만드는 거냐 ?"
이렇게 된 그 복잡한 모든 어려움의 책임이 다 루치아에게 돌아갔던 것이다. 가족들은 집에 닥친 위험을 생각하고 루치아에게 사정을 깨닫게 하여 그녀가 말하는 것은 어린애의 상상이 꾸며 낸 헛된 망상이거나 몽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일깨워 주려고 한 것이다. 이런 때 루치아는 희생자로서 하느님의 부름을 받은 것을 생각하면서 이 굴욕을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바치는 수밖에 달리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하느님으로부터의 표징인 저 대기적 후에는 군중이 고바 다 이리아를 황폐하게 하는 상황은 날로 더해 갔다. 그 사건 이후로 루치아를 거짓말장이라고 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루치아는 가족들이 받게되는 이 지독한 손해를 메꿀 수가 없어서 애태우며 괴로워했다.(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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