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29-38
하나님이 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
본문에는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의 긍휼로 아브라함과 관련된 롯과 그의 두 딸들을 구원해 주신 사실들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곧 이어서 롯의 중심에 머무른 불경건성이 방종으로 빠진 사실과 그 두 딸들의 패륜적 사실들이 기록되어서 경건히 살아야 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경종이 되고 있습니다.
1. 본문 29절은
“하나님이 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 곧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 입니다.
비록 모세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구원이 그에게 알려졌다고는 주장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롯이 아브라함을 인하여 멸망에서 구원되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아브라함이 가장 필요하며 알고 싶었던 그 위로를 받았다고는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감사를 드렸던 그 혜택을 의식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여지고 있습니다. 만약 거룩한 사람 롯이 다른 사람의 덕택으로 그렇게 구원받았다면 마치 여호와께서 롯 자신의 경건은 전혀 참작하지 않고 존귀하게 여기지 않으셨단 말입니까? 그것이 조금 애매하다면 이 두 가지 일들은 서로 잘 일치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분의 백성을 잘 돌보심으로 그분이 택하시고 그분의 영으로 다스리려고 하신 롯을 돌보아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롯의 생명을 보존시켜 주심 가운데서 그분께서 아브라함을 얼마나 사랑하셨는가를 보여주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 자신을 보호하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그것 뿐 만이 아닙니다. 또한 다른 사람의 구원도 그에게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관찰해 보는 것이 옳은 방법입니다. 즉, 여호와께서 다른 원인으로가 아니라 오직 그분 자신의 선하심으로 인하여 그렇게 은혜스럽게 하십니다. 이렇게 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깨우치고 그분에게 기도하게 하려고 경건한 자들과 사람들의 기도에 돌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조금 전에 하나님께서 롯을 구원하시는 가운데서 참으로 놀라운 긍휼을 직접 증거하고 계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롯이 아브라함의 조카가 아니었다 할지라도 결코 멸망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롯이 소돔과 함께 멸망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모세는 롯이 소돔과 함께 멸망되지 않은 것은 아브라함에게 허락된 은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여호와께서 그 종에게 하사하신 그 은총을 지금 아브라함의 가족에서 떨어져 나가 나그네가 되어 있는 그 조카에게도 베풀어 주셨다면 신앙을 가지고 신실하게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야 더욱 더 틀림없이 은총을 베풀어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절대로 그분의 권속에 뒤지지 않은 똑같은 은혜를 베풀어주시리라고 더욱 더 확신할 수가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만약 여호와께서 우리를 사랑하실 때 우리를 보시고 우리와 관련된 다른 사람들도 포용해 주실진대 하물며 우리 자신들에 관해서는 훨씬 더 은혜를 베풀어 우리를 받아 주시지 않겠습니까? 롯이 그 도시들에서 거주하고 있었다고 말하는 가운데서 그 전체로 일부분을 의미하는 제유법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기적을 보다 빛나게 하려고 특별히 채용되고 있습니다.
다섯 도시들이 모두 멸망되는데 거기서 한 사람이 피해 나올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특이한 섭리로만 되어졌기 때문입니다.
2. 본문 30절은
“롯이 소알에 거하기를 두려워하여 두 딸과 함께 소알에서 나와 산에 올라 거하되 그 두 딸과 함께 굴에 거하였더니” 입니다.
이 해설은 우리가 전에 암시했던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즉 사람들이 자기들의 육신적인 이성에서 나오는 경솔한 생각으로 제기한 모든 일은 절대로 번영될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특별히 헛된 소망으로 들떠 있거나 타락된 소원들로 지배되고 있는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날 때 그런 결과가 발생하게 됩니다. 비록 일반적으로 무모성을 지닌 헛된 소망과 타락한 소원들이 처음엔 제법 성공적인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정욕으로 도취되어 사는 자들이 일이 잘 되어 가는 기쁨에 희열을 만끽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결국에 가서는 여호와께서 그분의 인가를 받지 않으신 것은 모두 저주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이사야의 선언과 같습니다. 그 선지자는 “화 있을진저 패역한 자식들이여 그들이 계교를 베푸나 나로 말미암아 하지 아니하며 맹약을 맺으나 나의 신으로 말미암아 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그들이 바로의 세력 안에서 스스로 강하려 하며 애굽의 그늘에 피하려 하여 애굽으로 내려갔으되 나의 입에 묻지 아니하였으니 죄에 죄를 더하도다”(사30:1-2)라고 했습니다.
롯이 산으로 가라고 명령을 받을 때에 그는 그것을 반대하고 소알에 사는 것을 택했습니다. 그의 소원대로 그곳에 사는 것이 허락된 후에 그는 곧 자기 잘못을 회개하고 가슴 아프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는 바로 소돔에 가까운 곳에 멸망이 시시때때로 다가오는 것을 생각할 때에 떨리지 않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에도 역시 똑같이 불경건하고 악한 자들이 다스리고 있었던 곳인 듯합니다. 우리는 롯이 그토록 임박한 그리고 아주 혹독한 형벌을 받지 않았던 것은 오직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으로 인하여 되어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그 당시에 그를 용서해 주심으로 그 자신의 죄에 대하여 판단하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소알에서 강제로나 사람들의 손에 의하여 추방되지 않고 오직 맹목적인 그의 번민이 그를 쫒아 냈으며 그리고 그를 굴속으로 급히 몰고 갔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명령보다는 그의 육신의 정욕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여 그 신실한 자를 징계하시면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형벌을 경감시켜서 그것을 그들의 가장 좋은 약으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들의 어리석음을 엄격하게 다루셨다면 그들이야말로 철저한 혼동 속으로 빠졌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그들에게 회개할 수 있는 시간적인 간격을 주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것은 그들이 기꺼이 잘못을 인정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3. 본문 31-38절은
“(31)큰 딸이 작은 딸에게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늙으셨고 이 땅에는 세상의 도리를 좇아 우리의 배필 될 사람이 없으니
(32) 우리가 우리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우고 동침하여 우리 아버지로 말미암아 인종을 전하자 하고
(33) 그 밤에 그들이 아비에게 술을 마시우고 큰 딸이 들어가서 그 아비와 동침하니라 그러나 그 아비는 그 딸의 눕고 일어나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34) 이튿날에 큰 딸이 작은 딸에게 이르되 어젯밤에는 내가 우리 아버지와 동침하였으니 오늘밤에도 우리가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우고 네가 들어가 동침하고 우리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인종을 전하자 하고
(35) 이 밤에도 그들이 아비에게 술을 마시우고 작은 딸이 일어나 아비와 동침하니라 그러나 아비는 그 딸의 눕고 일어나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36) 롯의 두 딸이 아비로 말미암아 잉태하고
(37) 큰 딸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모압이라 하였으니 오늘날 모압족속의 조상이요
(38) 작은 딸도 아들을 낳아 이름을 벤암미라 하였으니 오늘날 암몬족속의 조상이었더라” 입니다.
이 제목과 그 다음에 이어지는 절들에 관한 길다란 설명은 지금까지 생략하는 것이 전적으로 필요한 것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우리가 주목해 둘만한 가치가 있는 몇 가지 점들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1) 칼빈께서는 롯의 방종에 촞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① 칼빈은 이 상황에서 롯의 방종의 결과로 사업적인 열심에 지배되어 있다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② 다른 주석가들과 같이 칼빈께서는 롯의 딸들의 자녀들의 이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모압)이라는 말인데 그 의미는 “한 아버지에서” 라는 뜻입니다. 다른 이름은 (벤암미) 라는 뜻인데, 이 이름은 “나의 백성의 아들” 이라는 뜻입니다. 이들은 모압 족속들과 암몬 족속들의 조상들이었습니다.
2) 이 부분에 대하여 박윤선 목사님께서는 롯의 두 딸들의 패륜에 촞점을 맞추었습니다.
(1) “이 부분에서는 롯의 두 딸이 합당치 않게 행한 일을 보여준다. 그들은 패륜의 죄악을 범하였다” 고 하였습니다.
(2) 박윤선 목사님께서는 동시에 이런 기록들이 하나님의 말씀일 수 없다는 식의 주장에 대 하여도 비판을 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정직하여 필요한 경우에 인간의 죄악을 그대로 드러내어서 사람들을 경고한다. 사실을 그대로 기록하는 진실성은 도리어 그 기록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모압과 암몬 두 족속은 롯의 두 달의 패륜 행동에서 유래되었다. 이 두 족속은 이스라엘 민족에 대하여 대대로 원수가 되고 있다(신23:3, 사16:6, 렘48:26, 겔 25:3,6, 습2:8-10)”고 하였습니다.
(3) 박윤선 목사님께서는 고등 비평가들의 견해도 비판하고 있습니다. 박윤선 박사께서는 바울 사도께서 “구약 전체를 포함하여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는 사실을 관설하십니다(딤후3:16). 또 이 부분이 롯을 의인으로 규정했다가 수치스런 인물로 내세우는 부당성에 대한 주장에 대해서도 “그러나 성경의 기자들은 의인들의 실수도 정직하게 기록하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노아나 아브라함이나 다윗 등의 실수도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 라고 하였습니다.
(4) 박윤선께서는 “본 장 30-38절에 있는 롯의 두 딸들에 대한 설화는 모압에서 유래됐을 것이다” 라는 견해에도 비판을 가하십니다. “모압 사람들의 생각에는 자기 민족이 다른 민족과 혼혈됨이 없이 처음부터 그 선조의 피를 계승해 온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그러므로 모압 민족은 이런 설화를 오히려 좋게 여겨서 전했을 것이다” 라는 견해에 대하여 박윤선 목사님께서는 적극 비판하시기를 “그러나 이와 같은 추측은 옳지 않는 것이다. 친자간의 성적 상관은 본능적으로 배척되는 죄악이고 어떤 야만 민족 중에서도 패륜으로 정죄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모압 민족이 그것을 도리어 높이 평가하였다는 것은 지나친 억측이다” 라고 비판합니다.
3) 본문 전체에서 우리가 얻는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생각을 따라가지 않고 굳이 하나님의 뜻, 곧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안전이요 위로이고 소망이고 승리 생활입니다. 신앙 생활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가는 생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