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檀君(단군) 단군왕검(檀君王儉)
時代(시대) 時代未詳(시대미상)
채용신(蔡龍臣)이 그린 檀君像(단군상)
檀君(단군)은 우리 民族(민족)의 始祖(시조)로 古朝鮮(고조선)의 첫 번째 임금(王)이다. 檀君(단군)에 관한 記錄(기록)은 『위서(魏書)』, 『삼국유사,三國遺事』, 『帝王韻紀(제왕운기)』 등에 傳(전)하는데, 具體的(구체적)인 內容(내용)은 모두 다르다. 하지만 檀君(단군)이 우리 民族(민족)의 始祖(시조)라는 데에서는 一致(일치)한다. 기원전(紀元前) 2333년 아사달(阿斯達)에 도읍(都邑)을 정(定)하고 단군조선(檀君朝鮮)을 개국(開國)했다.
中國(중국)의 古代(고대) 神話輯(신화집) 산해경(山海經은 中國(중국)선진(先秦) 시대에 저술되었다고 추정되는 대표적인 神話輯(신화집) 및 地理書(지리서)이다. 우(禹)의 협력자 백익(伯益)의 著書(저서)라고도 전하나 이것은 가설이고, 春秋時代(춘추시대)부터 한대(漢代) 初期(초기)까지 걸쳐서 호기심 많은 學者(학자)들이 한 가지씩 첨가한 것인데, 남산경(南山經)에서 시작하여 해내경(海內經)으로 끝나는 총 18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진(晋)나라(265-420)의 곽박(郭璞)이 旣存(기존)의 資料(지료)를 모아 편찬하여 주(註)를 달았다. 본래 《山海經(산해경)》은 人文地理誌(인문지리지)로 분류되었으나, 現代(현대) 神話學(신화학)의 發展(발전)과 함께 神話輯(신화집)의 하나로 認識(인식)되고 硏究(연구)되기도 한다. 《초사(楚辭)는 中國(중국)의 古典(고전) 詩歌(시가) 作品集(작품집)이다.《楚辭(초사)》의 <天文(천문)>과 함께 中國神話(중국신화)를 記錄(기록)한 귀한 古典(고전)이다. 古代(고대) 天文學(천문학)의 槪論書(개론서)이라고 한다.)證言(증언)하는 檀君朝鮮(단국조선)~古朝鮮(고조선) 首都(수도)는 어디였나?
고조선의 역대 군주 | |
재위 | 기원전 2333년? ~ ? |
대관식 | 단군(檀君 壇君) |
전임 | 환웅(桓雄) 삼국유사(三國遺事) |
후임 | 부루(夫婁 扶婁) 삼국유사(三國遺事) |
부왕 | 환웅(桓雄) 삼국유사(三國遺事) |
이름 | |
휘 | ? |
이칭 | 단군왕검(檀君王儉) |
별호 | 신인(神人) 신(神) 선인왕검(仙人王儉) |
연호 | ? |
묘호 | 단군왕검(檀君王儉) |
시호 | 단군(檀君) |
신상정보 | |
출생일 | 생년 미상(生年 未詳) |
출생지 | 아사달(阿斯達) |
사망일 | 몰년 미상(沒年 未詳) |
사망지 | ? |
매장지 | 없음 |
왕조 | 고조선(古朝鮮) |
가문 | ? |
부친 | 환웅(桓雄) 삼국유사(三國遺事) |
모친 | 웅녀(熊女) 삼국유사(三國遺事) 단수신(檀樹神) 백호(白虎) |
배우자 | 하백(河伯)의 딸 삼국유사(三國遺事) |
자녀 | 부루(夫婁 扶婁) 삼국유사(三國遺事) 부여(夫餘) 부우(夫虞) 부소(夫蘇) |
종교 | 대종교(大倧敎) |
https://www.youtube.com/watch?v=VquVe2W5aaQ
단군(檀君/壇君) 또는 단군왕검(檀君王儉)은 韓民族(한민족)의 神話的(신화적)인 始祖(시조)이자 고조선(古朝鮮)의 국조(國祖)이다.
韓民族(한민족)의 歷史(역사)에서 始祖(시조)로 推仰(추앙)받았으며 대종교(大倧敎) 등의 宗敎(종교)에서는 信仰(신앙)의 對象(대상)이기도 하다. 檀君(단군)은 王儉(왕검), 왕험 등으로도 알려져 있다. 韓國(한국)의 歷史書(역사서) 중에 하나인 《三國遺事(삼국유사)》, 《帝王韻紀(제왕운기)》, 《世宗實錄(세종실록)》, 《동국통감(東國通鑑)은 檀君朝鮮(단군조선)에서 高麗(고려) 末(말)까지의 歷史(역사)를 編年體(편년체)로 記錄(기록)한 史書(사서)이다. 총56권 28책의 活字本(활자본)으로 이뤄졌다. 古朝鮮(고조선)의 建國(건국) 年代(연대)를 紀元前(기원전) 2333년으로 밝히고 있으며, 三國(삼국)의 歷史(역사)를 敍述(서술)하였음에도 新羅(신라)의 歷史(역사)를 追加(추가)로 執筆(집필)하였다는 特徵(특징)을 지닌다. 外技(외기)》 등에 나오는 韓民族(한민족)의 으뜸가는 祖上(조상)의 이름이다.
檀君(단군)은 우리 民族(민족)의 始祖(시조)로 古朝鮮(고조선)의 첫 번째 임금이다. 紀元前(기원전) 2333년 阿斯達(아사달)에 都邑(도읍)을 定(정)하고 檀君朝鮮(단군조선)을 세웠다. 檀君(단군)에 관한 記錄(기록)은 『위서(魏書)』, 『三國遺事(삼국유사)』, 『帝王韻紀(제왕운기)』 등에 傳(전)하는데, 具體的(구체적)인 內容(내용)은 모두 다르다. 하지만 檀君(단군)이 우리 民族(민족)의 始祖(시조)라는 데에서는 一致(일치)한다. 檀君(단군)이라는 이름만 보더라도 『三國遺事(삼국유사)』에는 ‘단(壇)’ 字(자)로 記錄(기록)되어 있고, 李承休(이승휴)의 『帝王韻紀(제왕운기)』에는 ‘단(檀)’字(자)가 되어 있다.
檀君(단군)의 誕生(탄생)에서도 差異(차이)가 있다. 『三國遺事(삼국유사)』에는 桓因(환인)의 아들 환웅과 인간이 된 곰인 웅녀를 부모로 하여 단군이 태어났다고 하지만, 『제왕운기』에는 단웅천왕(檀雄天王)이 孫女(손녀)에게 약을 먹여서 사람이 되게 한 다음에 단수신(檀樹神)과 結婚(결혼)시켜 낳은 아들이 檀君(단군)이라고 하였다.
檀君(단군) 神話(신화)에 따르면 檀君(단군)이 1500년 동안 王(왕)으로 나라를 다스리다가 그 후에 山神(산신)이 되었다고 한다. 1500년이라는 시간을 한 사람이 살았다고 보기는 物理的(물리적)으로 無理(무리)가 있다. 따라서 檀君王儉(단군왕검)이 1500년이라는 시간을 帝王(제왕)에 자리에 있었다고 하는 것은 古朝鮮(고조선)에서 王(왕)을 말하는 一般名辭(일반명사)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 歷史(역사)에서 檀君(단군)은 古朝鮮(고조선)을 開國(개국)한 建國(건국) 始祖(시조)로 神聖視(신성시)되어 왔다. 高麗(고려) 時代(시대)에 들어와서는 中國(중국)과는 다른 우리나라만의 獨自的(독자적)인 歷史(역사)를 강조하게 되는데, 그 시작이 바로 檀君(단군)이었다는 것이다. 『三國遺事(삼국유사)』에 檀君神話(단군신화)가 記錄(기록)되어 있는 理由(이유)이다. 그런 점에서 檀君(단군)의 강조는 우리 民族(민족)의 民族的(민족적) 自主(자주)意識(의식) 鼓吹(고취)와 連結(연결)된다.
檀君(단군)과 우리 民族(민족)의 自主(자주) 意識(의식) 高趣(고취)와의 연관성은 舊韓末(구한말) ‘檀君(단군)民族主義(민족주의)’로 다시 강조되어 나타났다. 日帝(일제)에 의한 植民(식민) 統治(통치) 속에서 우리 民族(민족)의 自主性(자주성), 救國(구국) 意志(의지)를 높이기 위해 檀君(단군)을 中心(중심)으로 하는 다양한 歷史(역사) 運動(운동)이 펼쳐졌다. 이때를 契機(계기)로 檀君朝鮮(단군조선)으로 날짜를 記錄(기록)하는 檀紀(단기)가 使用(사용)되고, 開天節(개천절)등을 記念(기념)하게 되었다.
現在(현재) 檀君(단군)을 마을신으로 모시고 있는 곳은 서울의 마을당인 東氷庫洞(동빙고동) 符君堂(부군당)이 代表的(대표적)이다. 이곳에서 처음부터 마을신으로 檀君(단군)을 모셨던 것 같지는 않고 日帝(일제)强占期(강점기) 때부터 檀君(단군)이 이곳의 主神(주신)으로 모셔졌던 것으로 보인다.
東氷庫洞(동빙고동) 符君堂(부군당)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 당시 김양원이라는 將軍(장군)은 戰場(전장)에 나가거나 이곳을 지날 때는 꼭 參拜(참배)를 했다고 한다. 檀君(단군)을 모시고 있는 즉 우리 民族(민족)의 主權(주권)이 살아있는 符君堂(부군당)에서 參拜(참배)하고 日帝(일제)와의 싸움에 나갔다는 것을 풀이할 수 있다.
KBS HD역사스페셜 – 첫나라 고조선 수도는 어디였나?
https://www.youtube.com/watch?v=rK0k8q3hOw8
生涯(생애)
檀君(단군)의 生涯(생애)에 대한 記錄(기록)은 《三國遺事(三國遺事(삼국유사))》, 《帝王韻紀(제왕운기)》, 《世宗實錄(세종실록)》, 《東國通鑑(동국통감) 外紀(외기)》 등에 간략하게 記錄(기록)되어 있다. 一般的(일반적)으로 紀元前(기원전) 2333년경에 아사달(阿斯達) 또는 平壤(평양)에 都邑(도읍)을 두고 朝鮮(조선)을 建國(건국)하여 1000여 년 동안 다스렸다고 전해지며, 檀君(단군)의 뒤를 이어 기자가 조선을 다스렸다고 한다. 하지만 기자 조선은 한국 학계에서는 인정하고 있지 않다. 단군은 고조선의 왕위에서 물러난 이후 아사달의 산신이 되었다고 한다. 1000여 년 동안 고조선을 다스렸다고 하는 기록은 현실성이 없기 때문에 조선시대부터 이미 단군은 한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고조선의 누대에 걸친 국왕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高麗史(고려사)》와 《世宗實錄(세종실록) 地理誌(지리지)》, 《응제시주》(應製詩註)》는 朝鮮(조선) 傳記(전기)에 권람(權擥)이 祖父(조부) 권근(權近)의 응제시(應製詩)에 주석(註釋)을 붙인 책으로 (權擥)권람은 응제시 24수와 어제시 3수에 대하여 1460년부터 주석을 붙이기 시작하여 1461년 가을에 탈고를 하고 1462년(세조 8년)에 《응제시주》를 간행하였다. 이후 서거정(徐居正)이 1470년에 약간의 보완을 가하여 복각(覆刻)하였다
》, 《新增東國輿地勝覽(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檀君(단군)이 세 아들을 시켜 삼랑성(三朗城)을 쌓고 太子(태자) 부루(夫婁)를 파견해 夏나라 우임금의 도산회맹(塗山會盟)에 參席(참석)시켰다고 한다.
제우(帝禹, 기원전 2,070년경)는 中國(고대) 古代의 전설상의 國家(국가)인 夏(하)나라의 創始者(창시자)이다. 아버지는 곤(鲧)이며 곤(鲧)의 아버지는 오제의 하나인 전욱이다. 따라서 禹(우)는 전욱의 孫子(손자)이다. 또 전욱은 皇帝(황제)의 孫子(손자)이므로 禹(우)는 皇帝(황제)의 高孫子(고손자)가 된다. 도산씨(塗山氏)의 딸에게 장가가 계라는 아들을 두었다. 우는 인덕을 가져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또 탁월한 정치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자랑하지 않았다. 아마도 전설적인 인물이기 때문에 이러한 聖人(성인)으로서 그려지는 것으로 보인다. 參考(참고)로 國內(국내) 이와 관련된 서적으로는 《中國 夏王朝(중국 하왕조)에 대한 簡略(간략)한 理解(이해)》등이 있다.
禹(우)는 卽位(즉우) 후에 한동안 武器(무기)의 생산을 중단하고 궁전의 재증축을 재고하였으며 관문이나 시장에 걸려있는 여러 세금을 면제하였다. 그리고 지방에 도시를 만들고 번잡한 제도를 폐지해 행정을 간략화했다. 그 결과 中國(중국) 안에서는 물론 밖에서까지도 조공을 요구해 오게 되었다. 또한 禹(우)는 많은 하천을 정비하였고 주변의 토지를 경작해 초목을 키웠으며 중앙과 동서남북의 차이를 기(旗)로써 사람들에게 나타냈고 옛 방식도 답습해 전국을 나누고 九州(구주)를 두었다. 禹(우)는 검약 정책을 취해 스스로 率先(솔선)해 행동했다.
根據(근거)는 알 수 없으나 司馬遷(사마천)은 夏王朝(하왕조)의 姓(성)을 사(姒)라고 기술 하였다, 禹(우)임금의 姓(성)은 하우(夏禹), 유하(有夏) 등 다양하게 전해지는데 紀元前(기원전) 2,000년전의 口傳(구전)이므로 확실하지 않다. 이름은 문명(文命), 대우(大禹), 하우(夏禹), 융우(戎禹) 등 다양하다. 현재 中國(중국)의 하(夏)씨, 증(曾)씨, 하후(夏侯)씨 등은 이 우(禹)의 子孫(자손)이라고 전한다. 하(夏)가 망한 후 하(夏)씨가 생기고, 그리고 훗날 春秋戰國時期(춘추전국시기) 기(杞)나라 임금 간공(簡公)의 아우 타(佗)가 杞(기)나라가 초(楚)나라에 亡(망)하자 노(魯)로 亡命(망명)하여 후작(侯爵)을 받았으므로 다시 하후(夏侯) 씨가 생기게 되었다. 參考(참고)로 三國志(삼국지)의 英雄(영웅) 조조(曹操)는 正史(정사) 三國志(삼국지) 중 배송지의 周(주)에 의하면 그 아버지 조숭(조위 태황제 조숭(曹魏 太皇帝 曹嵩, ? ~ 193년)은 後漢(후한) 末(말)의 政治家(정치가)로, 字(자)는 거고(巨高)이며 예주(豫州) 패국(沛國) 초현(譙縣) 사람이다. 무제(武帝)의 아버지이다. 본래 하후(夏侯)씨로, 하후돈(夏侯惇)과 하후연의 叔父(숙부)였으나 宦官(환관)인 十想시 조등(曹騰)의 養子(양자)가 되었다.)의 本姓(본성)이 夏候(하후)씨라고 한다.
東國通鑑外記(동국통감외기)~檀君朝鮮(단군조선)
東方初無君長有神人降于檀木下國人立爲君是爲檀君國號朝鮮是唐堯戊辰歲也初都平壤後
동방초무군장유신인강우단묵하국인립위군시위단군국호조선시당요무진세야초도평양후
徒都白岳至商武丁八年乙未入阿斯達山爲神
도군백악지상무정팔년을미입아사달산위신
臣等按신등안
古紀云檀君與堯並立扵戊辰歷虞夏至商武丁八年乙未入阿斯達山爲神享壽千四十八年此說
고기운단군영요병립어무진력우하지상무정팔년을미입아사달산위신향수천사십팔년차설
可疑今按堯之立在上元甲子甲辰之歲而檀君之立在後二十五年戊辰則曰與堯並立者非也自
가의금안요지립재상원갑자갑진지세잉단군지립재후이십오년무진즉왈여요병립자비야자
唐虞至于夏商世漸澆漓人君亨國乆長者不過五六十年安有檀君獨壽千四十八年以享一國乎
당우지우하상세점요이인군형국구장자불과오륙십년안유단군독수천사십팔년이향이국호
知其說之誣也前軰以謂其曰千四十八年者乃檀氏傳世歷年之數非檀君之壽也此說有理近世
지기설지무야전배이위기왈천사십팔년자내단씨전세력년지수비단군지수야차설유리근세
權近入親天庭
권근입친천정
太祖高皇帝命近賦詩以檀君爲題近詩曰傳世不知幾歷年曾過千
태조고황제명근부시이단군위제근시왈전세부지기력년증과천
帝覽而可之時論亦以近之言爲是姑存之以備後考
제람이가지시론역이근지언위시고존지이비후고
箕子(기자) 古朝鮮(고조선)
기자(基子)
箕子(기자) 彫刻像(조각상)
072 Ji Zi, Investiture of the Gods at Ping Sien Si, Pasir Panjang, Perak, Malaysia Photograph from the Ping Sien Si Temple in Perak, Malaysia taken by Anandajoti.
072 Ji Zi, Ping Sien Si, Pasir Panjang, Perak, Malaysia의 神(신)들의 수사 사진 Anandajoti가 찍은 말레이시아 페락의 Ping Sien Si 寺院(사원)에서 찍은 寫眞(사진).
기자(箕子, 生沒年(생몰년) 未詳(미상))는 中國(중국) 商(상)나라 문정(文丁)의 아들, 王族(왕족)이자 箕子朝鮮(기자조선)의 始祖(시조)로 알려져 있는 傳說(전설)상의 人物(인물)이다. 姓(성)은 자(子), 이름은 서여(胥餘) 또는 수유(須臾)이며, 箕子(기자)는 爵位名(작위명)인 同視(동시)에 別稱(별칭)이다. 商(상)나라 末期(말기)에 王族(왕족)으로 태어나 周王(주왕) 帝辛(제신) 時期(시기)를 살았으며, 商(상)나라가 周(주)나라에게 滅亡(멸망)당하자 朝鮮(조선)으로 亡命(망명)하였다고 전해진다. 朝鮮(조선)으로 亡命(망명)한 후에는 朝鮮(조선)의 君主(군주)가 되어 그의 後孫(후손)이 1천여 년 동안 古朝鮮(고조선)을 다스렸다고 傳(전)해지나, 事實(사실) 與否(여부)는 論難(논란)이 많다.
Map of Shang Dynasty from Bamboo Annals
대나무 연대기의 상 왕조지도
수도 | 은허 |
정치 | |
정부 형태 | 군주제 |
왕 기원전 1600년 ~ 기원전 1589년 기원전 1075년 ~ 기원전 1046년 | 탕(초대) 제신(말대) |
역사 | |
•성립 | 기원전 1600년(?) |
•멸망 | 기원전 1046년(?) |
인문 | |
공용어 | 상고한어 |
공용문자 | 갑골문 |
종교 | |
종교 | 무속 신앙 |
기타 | |
현재 국가 | 중화인민공화국 |
자금성(紫禁城), 경산공원에서 바라본 紫禁城(자금성) 전체 모습
자금성(紫禁城)=中國(중국) 베이징(北京)에 있는 明(명)나라, 청(청)나라 때의 宮城(궁성)
베이징(北京)의 경산(景山)공원(公園)
경산(중국어: 景山)은 중국 베이징 시청 구(중국어: 西城区)에 위치한 인공산이다. 베이징(北京) 중심 축 상 자금성 북쪽 바로 위에 위치한다. 남쪽으로는 자금성의 신무문(神武门)을 면하고, 서쪽으로는 북해(北海)에 임한다. 원래는 황실 정원으로 사용되었으나, 근래에 와서 일반인에게 공개된 공원이 되었다.
경산공원(중국어: 景山公园)의 면적은 약 23헥타아르인데, 경산이 주요 부분을 차지한다. 공원 내에는, 송백(松柏)이 울창하며, 꼬牡丹(모란)꽃이 많이 피어 있다.
公園(공원)의 오솔길
산 정상을 향해 바라본 광경.
관묘정, 만춘정, 집방정
기망루와 만춘정
商(상)나라 갑골문 귀갑(甲骨文 龟甲)
선사시대 황하 문명 페이리강 문화 라오관타이 문화 베이신 문화 츠산 문화 양사오 문화 허우강 문화 다원커우 문화 룽산 문화 얼리터우 문화 장강 문명 위찬옌 유적 셴런퉁 루퉁환 유적 펑터우산 문화 다시 문화 추자링 문화 스자허 문화 하모도 문화 마자방 문화 쑹쩌 문화 량주 문화 우청 문화 쓰촨 문명 바오둔 문화 삼성퇴 유적 훙산 문화 |
신대 삼황오제(기원전 4000년? ~ 기원전 2070년?) |
고대 상고시대 하(기원전 2070년? ~ 기원전 1600년?) 상(기원전 1600년? ~ 기원전 1046년?) 주(기원전 1046년? ~ 기원전 256년?) 춘추전국시대(기원전 771년 ~ 기원전 221년) 춘추 시대(기원전 771년 ~ 기원전 453년) 전국 시대(기원전 453년 ~ 기원전 221년) 진(기원전 9세기 ~ 기원전 206년) 한(기원전 202년 ~ 서기 220년) 전한(기원전 202년 ~ 서기 8년) 후한(25년 ~ 220년) 신(8년 ~ 23년) 삼국 시대(220년 ~ 280년) 위(220년 ~ 265년) 촉(221년 ~ 263년) 오(229년 ~ 280년) 진(265년 ~ 420년) 서진(265년 ~ 316년) 동진(317년 ~ 420년) |
고전후시대 5호 16국 시대(304년 ~ 439년) 남북조 시대(386년 ~ 589년) 수(581년 ~ 619년) 당(618년 ~ 907년) 오대십국시대(907년 ~ 979년) 송(960년 ~ 1279년) 북송(960년 ~ 1127년) 남송(1127년 ~ 1279년) 대요(916년 ~ 1125년) 서하(1038년 ~ 1227년) 대금(1115년 ~ 1234년) |
근세 대원(1271년 ~ 1368년) 대명(1368년 ~ 1644년) |
근현대 대청(1616년 ~ 1912년) 중화민국(1912년 ~ 현재) 중화제국(1915년 ~ 1916년) 중화인민공화국(1948년 ~ 현재) 상(商, 기원전 1600년경 ~ 기원전 1046년경)은 역사적으로 실제 했다고 여기는 최초 中國(중국) 王朝(왕조)다. 반경(盤庚)이 마지막으로 옮긴 首都(수도)가 은(殷)이기 때문에 殷(은)나라로 부르기도 한다. 나라의 제31대 王(왕)으로 마지막 君主(군주)이다. 姓氏(성씨)는 자성(子姓)이다. 서백후 희창을 강제로 拉致(납치)하여 監禁(감금)하였다. 희창이 죽은 후, 희창의 아들 희발(서주 무왕)이 아버지를 보복하기 위해서 姜太公(강태공) 등의 부하들과 함께 周王(주왕)에 반역하였다. 叛亂軍(반란군)은 맹진에서 周王(주왕)과 대치하였으나 失敗(실패)하였고, 殷墟(은허 殷墟 中國(중국) 河南省(허난성)의 安陽縣(안양현)에 있는 殷(은)나라 때의 遺跡(유적)) 남쪽의 牧野(목야)에서 벌어진 2번째 戰鬪(전투)때는 周王(주왕)을 敗北(패배)시켰다. 殷(은)의 都邑(도읍)으로 들어가지만, 周王(주왕)을 逮捕(체포)할 수 없었다. 周王(주왕)은 敗北(패배)한 이후 樓臺(누대)에 올라가 自殺(자살)하였고, 商(상)나라는 滅亡(멸망)한다. 실제 歷史(역사)에서 그는 실정보다는 東南方(동남방) 회하 유역의 東夷族(동이족) 國家(국가) 인방(人方)에 대한 장기간 遠征(원정)에 힘을 쏟다가 周(주)나라 武王(무왕)의 叛亂(반란)으로 나라를 잃었다. 그 최후는 歷史書(역사서)마다 다르게 서술되어 있으며,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周(주)나라 성립 이후에, 제신(帝辛)은 희대의 暴君(폭군)으로 묘사되었다. 非公式(비공식) 說話(설화)에 傳(전)해지는 그는 妲己(달기:中國語(중국어) 간체자: 妲己, 병음: Dájǐ)는 中國(중국) 은(殷) 王朝(왕조) 末技(말기)(기원전 11世紀(세기)경)의 王(왕) 제신(帝辛)의 총비(寵妃)였다.하(夏) 王朝(왕조)의 말희(末喜)와 더불어 악녀(惡女)의 代名詞(대명사)로서 알려져 있다. 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고 성격이 난폭하여 간언을 하는 사람을 그 자리에서 살해하였으며, 宮闕(궁궐)이 초라하다고 해서 화려하게 만들고, 술로 만든 호수를 만드는 등(酒池肉林: 주지육림) 국가예산을 많이 낭비하였으며, 사람을 숯불에 태워 죽이는 형벌(炮烙之刑 : 포락지형)을 새로 제정하여 원성을 샀다고 전해진다. 화이 허(淮河, Huái Hé, 표준어:화이허)는 중화인민공화국의 하河이다. 이 강은 남쪽의 장강(長江), 북쪽의 황하(黃河)와 함께 3대하(三大河)로 불린다. 우리말 독음으로 회하라고도 하며, 옛날에는 '하(河)'라는 말이 '황하'를 가리키는 고유명사였으므로 회수(淮水)라고 불렸다. 길이는 1,078 km, 면적은 174 km²에 이른다. 한어는 유수량流水量에 따라 해海,만彎,하河,강江,수水로 나눈다. 이렇기 때문에 화이허강은 틀린 말이다. 이 하의 하류는 평탄한 저지대를 지나고 있어 물길이 복잡하기 때문에 홍수를 일으키기 쉽고 치수가 매우 어렵다. 이 때문에 '괴하'(壊河)라고도 불린다. |
商(상)나라
BC 1600년? ~ BC 1046년?
대나무 연대기의 商(상) 王朝지(왕조) 地圖(지도)
수도 | 은허 |
정치 | |
정부 형태 | 군주제 |
왕 기원전 1600년 ~ 기원전 1589년 기원전 1075년 ~ 기원전 1046년 | 탕(초대) 제신(말대) |
역사 | |
성립 | 기원전 1600년(?) |
멸망 | 기원전 1046년(?) |
인문 | |
공용어 | 상고한어 |
공용문자 | 갑골문 |
종교 | |
종교 | 무속 신앙 |
기타 | |
현재 국가 | 중화인민공화국 |
선사시대 황하 문명 페이리강 문화 라오관타이 문화 베이신 문화 츠산 문화 양사오 문화 허우강 문화 다원커우 문화 룽산 문화 얼리터우 문화 장강 문명 위찬옌 유적 셴런퉁 루퉁환 유적 펑터우산 문화 다시 문화 추자링 문화 스자허 문화 하모도 문화 마자방 문화 쑹쩌 문화 량주 문화 우청 문화 쓰촨 문명 바오둔 문화 삼성퇴 유적 훙산 문화 |
신대 삼황오제(기원전 4000년? ~ 기원전 2070년?) |
고대 상고시대 하(기원전 2070년? ~ 기원전 1600년?) 상(기원전 1600년? ~ 기원전 1046년?) 주(기원전 1046년? ~ 기원전 256년?) 춘추전국시대(기원전 771년 ~ 기원전 221년) 춘추 시대(기원전 771년 ~ 기원전 453년) 전국 시대(기원전 453년 ~ 기원전 221년) 진(기원전 9세기 ~ 기원전 206년) 한(기원전 202년 ~ 서기 220년) 전한(기원전 202년 ~ 서기 8년) 후한(25년 ~ 220년) 신(8년 ~ 23년) 삼국 시대(220년 ~ 280년) 위(220년 ~ 265년) 촉(221년 ~ 263년) 오(229년 ~ 280년) 진(265년 ~ 420년) 서진(265년 ~ 316년) 동진(317년 ~ 420년) |
고전후시대 5호 16국 시대(304년 ~ 439년) 남북조 시대(386년 ~ 589년) 수(581년 ~ 619년) 당(618년 ~ 907년) 오대십국시대(907년 ~ 979년) 송(960년 ~ 1279년) 북송(960년 ~ 1127년) 남송(1127년 ~ 1279년) 대요(916년 ~ 1125년) 서하(1038년 ~ 1227년) 대금(1115년 ~ 1234년) |
근세 대원(1271년 ~ 1368년) 대명(1368년 ~ 1644년) |
상(商, 기원전 1600년경 ~ 기원전 1046년경)은 역사적으로 실제 했다고 여기는 최초 중국 왕조다. 반경(盤庚)이 마지막으로 옮긴 수도가 은(殷)이기 때문에 은나라로 부르기도 한다.
目次(목차)
名稱(명칭)
'주(周)'를 비롯한 다른 나라에서 '은(殷)'이라는 이름으로 부른 탓에 '慇(은)'으로 더 잘 알려져 있으나, 스스로 나라 이름을 칭할 때 '慇(은)'나라를 세운 '部族(부족)' 이름인 '상(商)'이라는 이름을 더 많이 사용했으므로, 學界(학계)에서는 '商(상)'으로 統一(통일)해 부른다.
'상(商)'나라는 여러 차례 首都(수도)를 옮겼는데, '般庚王(반경왕)'이 마지막으로 옮긴 首都(수도)가 '은(殷)'이었으므로, '은(殷)'이라는 名稱(명칭)이 붙었다.
槪要(개요)
商(상)나라 始祖(시조)에 관한 의견은 분분한데, 記錄(기록)에 의하면 전설상 인물인 황제(黃帝)의 후손 탕왕(湯王)이 세웠다고 전한다. 湯王(탕왕)은 夏(하)나라의 마지막 王(왕)이자 暴君(폭군)인 桀王(걸왕)을 무찌르고 商(상)나라를 開國(개국)하였다.
마지막 王(왕)은 舞姬(무희) 달기(달기:中國語(중국어) 간체자: 妲己, 병음: Dájǐ)와 함께 百姓(백성)을 殘酷(잔혹)하게 다룬 30대 주왕(紂王)이며, 주(周)나라 始祖(시조)인 서주 무왕(西周 武王)에 의해 滅亡(멸망)하였다.
19세기 末(말)까지 전설상 王祖(왕조)로만 다루었으나 20世紀(세기) 初(초) 은허(殷墟)가 發掘(발굴)되고 考古學的(고고학적) 證據(증거)가 나타나면서 실재하는 王祖(왕조)로 인정했다.
出土(출토)된 靑銅器(청동기)나, 갑골문자(甲骨文字)를 讀解(독해)함으로써 先史(선사) 社會(사회)부터 歷史時代(역사시대)로 옮겨진 殷(은)나라 社會(사회)의 實態(실태)가 解明(해명)되기에 이르렀다.
歷史(역사)~創業(창업) 以前(이전)
전설상 商(상) 王祖(왕조)의 始祖(시조)는 설로 되어 있다. 설은 유융씨의 딸이자 제곡 차비인 간적이 제비의 알을 먹었기 때문에 낳은 아이로 되어 있다. 설은 순 때에 우의 치수를 도운 공적이 인정되어 순에 의해 상에 봉해져 자씨 성(子姓)을 받았다.
그 후 설의 자손은 대대로 하나라를 섬겼다. 또 설로부터 탕까지의 14대 사이에 8차례 首都(수도)를 옮겼다고 한다.
설은 성인이 된 후에 우의 황하 치수를 도왔다. 순은 설의 업적을 평가해 사도(司徒)로 임명하고 상(商)에 봉하였으며 자(子)라는 성을 주었다. 다만 시경에는 요가 상에 봉했다고 쓰여져 있다.
歷代(역대) 治世(치세)
契(설)로부터 13대째의 탕은 박(현재의 허난성 상추시)을 首都(수도)로 삼고 있었다. 탕은 현인 이윤의 도움을 빌려 하왕걸을 쓰러뜨리고 諸侯(제후)들에게 추천되어 王(왕)이 되었다.
商(상)나라 4대 왕인 태갑은 暴君(폭군)이었기 때문에 이윤에게 追放(추방)되었다. 후에 태갑이 반성했고 이윤은 이를 허락했다. 이후 태갑은 선정을 베풀어 태종(太宗)으로 칭해졌다.
옹기 때에 왕조는 잠시 쇠약해졌다. 옹기의 다음 왕인 태무는 현인 이척을 임용해 선정을 베푸려 노력했고 상 왕조는 부흥했다. 태무의 공적을 칭송해 태무는 중종(中宗)으로 칭해졌다.
중종의 사후에 다시 왕조는 쇠약해졌다. 조을은 현인 무현을 임용해 선정을 하려고 노력했고 상 왕조는 부흥했다.
조을의 사후에 다시 왕조는 쇠약해졌다. 반경은 은허로 천도했고 탕 때의 선정을 부활시켰다.
반경의 사후에 다시 왕조는 쇠약해졌다. 무정은 현인 부열을 임용해 상 왕조의 중흥을 완수했다. 무정의 공적을 칭송해 무정은 고종(高宗)으로 칭해졌다.
상나라 고종 이후의 왕은 대체로 어리석은 폭군이었다. 상 왕조의 마지막 왕인 주왕(紂王)은 즉위 후 달기라는 미녀에게 빠지고 폭정을 실시했고, 백읍고가 아버지 희창을 위해 알현하고 원숭이를 바쳤는데 달기의 모함에 의해 주왕(紂王)에게 살해 당하고 부친은 사면을 위해 주왕(紂王)에게 살해 당한 백읍고의 육병을 먹은 뒤 귀가하고 먹은 육병을 토했고 임종 전에 상 왕조를 멸망할 대책을 세운 후 그의 아들인 희발(姬發)이 상나라의 여러 제후들을 모아서 주왕을 주살하고 상 왕조는 멸망했다.
滅亡後(멸망후)
周王(주왕)의 아들인 무경(武庚, 紀元前(기원전) 11세기)은 殷(은)나라 末技(말기)의 人物(인물)이다.
殷(은) 周(주)의 武王(무왕)에 의해 商(상)나라의 옛 땅에 봉해졌다. 武王(무왕)의 사후에 무경은 武王(무왕)의 兄弟(형제)와 함께 反亂(반란)을 일으켰지만 失敗(실패)해 呪殺(주살)당했다. 그 후, 무경의 백부의 미자계(주왕의 형)가 송에 봉해져 商(상) 王朝(왕조)의 祭祀(제사)를 계속했다.
商(상)나라의 都邑地(도읍지)
歷代(역대) 君主(군주)
국왕 | 당시의 지명 | 현재의 지명 |
선상(先商) 시대 | ||
설(契) | 박(亳) | 일설로는 현재 랴오닝성 서부에 이르는 허베이성 동북부 일대, 일설로는 현재 허난성 뤄양시 옌스시 스샹거우 유적(尸乡沟遺跡) |
번(蕃) | 일설로는 현재 베이징시, 허베이성 북부 지둥 평원(冀東平原) 일대 | |
소명(昭明) | 지석(砥石) | 일설로는 현재 허베이성 스자좡(石家庄) 이남, 허베이성 싱타이시 이북 지역. |
상(商) | 일설로는 현재 장하(漳河) 일대, 일설로는 현재 산시성 샹뤄시 샹저우구 | |
상토(相土) | 상구(商丘) | 일설로는 현재 허베이성 중부, 허난성 북부. |
“태산(泰山) 아래” | 일설로는 태행산(太行山) 기슭. | |
상구 | 윗줄과 동일. | |
왕해(王亥) | 은(殷) | 해당하는 현재 위치는 불명. |
상갑미(上甲微)(망(芒) 33년 ~ 공갑(孔甲) 9년) | 업(鄴) | 현재 허베이성 한단시 린장현 장하 유역 |
“상후(商侯 =은후(殷候))”(공갑 9년 ~ 걸(桀) 15년) | 상구(商丘 ※=商邱) | 윗줄과 동일. |
조상(早商) 시대 | ||
태을(大乙) 탕(湯) — 대무(大戊) 밀(密)(걸 15년 ~ 중정(中丁) 원년) | 박 | 일설로는 현재 허난성 정저우시 상성 유적(商城遗址) |
중정 장(莊), 복임(卜壬) 발(發)(중정 원년 ~ 하단갑(河亶甲) 원년) | 오(囂) | 일설로는 현재 허난성 싱양시 동북쪽 오창(敖倉) 혹은 오산(敖山), 일설로는 현재 산둥성 기몽산 구(沂蒙山区), 일설로는 현재 허난성 정저우시 상성 유적(商城遗址) |
전갑(戔甲) 정(整)(하단갑 원년 ~ 조을(祖乙) 원년 혹은 2년) | 상(相) | 일설로는 현재 허난성 안양시 네이황현 동남쪽. |
차을(且乙) 등(滕) ~ 차정(且丁) 신(新)(조을 원년 혹은 2년 ~ 남경(南庚) 3년) | 비(庇) | 일설로는 현재 산둥성 윈청현 북쪽. |
형(邢) | 일설로는 현재 허베이성 싱타이시 | |
남경 경(更), 상갑(象甲) 화(和)(남경 3년 ~ 반경(盤庚) 15년?) | 엄(奄) | 일설로는 현재 산둥성 지닝시 취푸시 |
만상(晩商) 시대 | ||
반경(般庚) 순(旬) | 은(殷) | 현재 허난성 안양시 서북 은허 유적(殷墟遗址) |
제신(帝辛) 수(受) | 조가(朝歌) | 현재 허난성 허비시 치현 차오거 진 |
社會(사회)와 文化(문화)
은대의 국가는 왕이 거주하는 도시를 중심으로 해서 그 주위에는 농업생활을 영위하는 여러 촌락이 전개되어 있었으며, 왕이나 귀족은 농민을 지배하여 곡물을 조세로 징수해서 일족(一族) 및 예속되어 있는 가내노예나 각종 기술자들을 부양했다. 농민은 하나의 대가족 집단이 하나의 마을을 구성하고 마을의 경작지에서 영농을 하고 있었다. 이 혈연 촌락은 족장의 통솔 밑에 어느 정도의 자위조직(自衛組織)도 가지고 공동작업에 종사하여, 자율적인 생활 기능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지배자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농민을 장악하기보다는 族長(족장)들을 장악하고, 族長(족장)들을 통해서 촌락을 지배했다.
은나라 시대의 정치는 신권정치로서 제사·정벌·권농·목축 등 주요한 국사는 신의 뜻을 묻는 점(占)에 의하여 결정되었다. 사회는 부권적(父權的) 씨족제로서 처음은 형제 상속이었으나 곧 부자상속으로 되었다. 귀족은 더없이 정교한 청동기·백도(白陶)·옥기(玉器)를 사용하고 있었다. 농민은 목제 농기구나 석제 농기구를 사용하여 보리·수수·기장 등을 재배하고, 양잠을 하였으며, 말·양·돼지·소 등을 사육했다. 인신공양 풍습 또한 존재하였다.
政治(정치)
商(상)나라 사람들은 제(帝)가 宇宙(우주)의 支配者(지배자)이며 그 의지에 따라 모든 미래가 결정된다고 생각하였다. 점을 쳐서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신정 정치가 이루어졌다. 갑골문은 상제의 의향을 묻기 위한 행위의 기록을 의미하는 것으로 상제에 대한 제사와 조상 숭배가 합쳐져서 商(상)나라는 政治(정치)와 宗敎(종교)가 일치된 제정일치 국가의 성격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또한, 상나라 시기에 정교한 청동기가 발달되었는데 이러한 청동기는 바로 신정적 권위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후기로 갈수록 신정적 권위는 쇠퇴하고 세속적 권위를 강화해 간 王權(왕권)이 성장하였다.
行政(행정)
商(상)나라는 읍제(邑制)국가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邑(읍)이란 씨족 집단을 중심으로 성벽을 갖춘 국가를 의미한다. 읍은 大邑(대읍)과 족읍, 소읍으로 나뉘는데, 大邑(대읍)은 商(상)나라 王(왕)이, 족읍은 商(상)나라 왕과 연합관계에 있던 氏族(씨족)의 우두머리, 小邑(소읍)은 氏族(씨족)의 우두머리와 연합관계에 있던 同族(동족)集團(집단)의 우두머리가 각각 統治(통치)하였다. 이 처럼 누층적으로 구성된 읍들 사이와 정치적 연합관계를 봉건(封建)관계라고 부른다.
遺跡(유적)과 遺物(유물)
갑골문 귀갑(甲骨文 龟甲)
대표적인 유적으로 은허가 있다.
殷墟(은허)殷墟 =1. 고고학 은허.2. 중국 허난성(河南省) 안양(安陽)시에 있는 은대(殷代) 중기 이후의 도읍의 유적
이 부분의 본문은 은허입니다.
19세기 말에는 허난성(河南省)에서 은허, 즉 은나라 수도의 유적으로 알려진 곳에서 갑골문자가 새겨진 귀갑(龜甲)과 우골(牛骨)이 대량으로 발견되었다. 은왕조의 계도(系圖)는 한대(漢代)의 사마천이 《사기》(史記) 속에 기술하였는데, 갑골문자 속에 나타난 여러 왕의 이름과 그 세계(世系)가 《사기》와 대체로 일치하고 있다. 은허에서 출토되는 갑골문에 의하여 은나라 왕의 존재가 인정되고, 특히 은허로 도읍을 옮긴 후, 반경의 동생인 왕 무정(武丁) 이후의 은나라 후반기의 실재가 확인되었다. 은허로 수도를 옮긴 후의 은나라 후반기의 실제 연대는 기원전 14세기 말부터 기원전 11세기 중엽이다.
甲骨文字(갑골문자)
갑골 문자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899년에 갑골문(甲骨文)이 발견됨으로써 그 실존이 알려졌는데, '갑골'이란 거북의 뱃가죽뼈와 소의 어깨뼈를 말한다. 갑골문이란, 갑골의 안쪽 면에 불에 달군 나무를 눌러 급속히 팽창시키면 표면에 국부적인 균열이 생기는데, 그 균열의 상태를 보아 점을 치고 거기에 점친 날짜와 점쟁이의 이름, 점친 내용과 결과 등을 새겨 넣은 글을 말한다. 갑골문의 주요 내용은 주로 조상신이나 자연신에 대한 제사의 여부, 전쟁의 가부, 농사의 풍흉, 바람과 비의 유무, 수렵이나 재해의 유무 등 왕의 통치와 관련된 다양한 사안들이었다.
硏究(연구) 및 其他(기타)
상인(商人)라는 말은 상나라 사람들이 나라가 멸망한 후에 생업을 위해 각지를 떠돌아 다니며 물건을 팔았던 것에서 유래한다. 주나라가 상나라를 멸망시킨 것이 구체적으로 몇 년인지를 추정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중국의 하상주단대공정은 이 사건을 기원전 1046년의 일로 보고 있다. 예전의 설로는 죽서기년에 무왕에서 유왕(서주의 마지막 왕)까지 257년이는 기술이 있어 유왕이 죽은 것이 기원전 771년의 일이므로 상나라가 멸망한 것은 기원전 1027년이 된다. 또 한서에는 주는 867년 동안 계속되었다는 기술이 있어 이것으로부터 기원전 1123년의 사건으로 보기도 한다. 그 이외에도 여러가지 설이 있어, 상나라 멸망을 가장 오래전으로 보는 것은 기원전 1127년, 가장 나중으로 보는 것은 기원전 1018년이다. 중화권 교수와 서울대 박사 출신의 강사 등 여러 사학자들 중에서 상나라는 동이족의 歷史(역사) 라고 가르치는 등 國內外(국내외) 史學界(사학계)에서 이런 주장들이 늘어나고 있다. 商(상)나라 王族(왕족)이 古代(고대) 韓半島(한반도)의 支配層(지배층) 出身(출신)이라고 볼수는 있으나 漢字(한자)의 原形(원형)인 甲骨(갑골)문은 商(상)나라의 遺物(유물)이지 동이족의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古代(고대) 韓半島(한반도) 지역에서 중원으로 진출하기 전까지 지배층 氏族(씨족) 文化圈(문화권) 사이에서는 通常的(통상적)으로 사용하다가 商(상)나라 建國(건국) 이후 標準化(표준화) 했다고 볼수도 있겠지만 가장 오래된 갑골문 유물이 출토된건 商(상)나라의 다른 유물들과 함께 발견되는 商(상)나라 시대의 것이기 때문에 갑골문은 商(상)나라에서 發明(발명) 되었고 일반적인 갑골문 형태를 최종적으로 규격화 한건 商(상)나라 시대다. 中國(중국) 學者(학자)도 商(상)나라를 고대 韓半島(한반도) 우두머리 支配(지배)族屬(족속)이 중원으로 진출해서 정착했고 商(상)나라를 建國(건국)했다는걸 認定(인정)하며 商(상)나라 滅亡(멸망)후 일부 箕子(기자)와 같은 商(상)나라 王族(왕족)을 따라 遺物(유물)과 風習(풍습) 등이 韓半島(한반도)로 이주해 온 痕迹(흔적)이 발견된다. 商(상)나라의 靑銅器(청동기) 시대 遺物(유물)들이 渤海(발해)와 古朝鮮(고조선) 지역에서 發見(발견)되는데 이것은 先史時代(선사시대) 石器(석기)로 만들었던 수확용 농기구에서 발전한 것으로 商(상)나라의 발달한 靑銅(청동) 製造(제조) 기술과 결합하여 개량한 유물이 韓半島(한반도)에서도 發見(발견)된 것이며 발달한 商(상)나라 靑銅(청동) 기술의 특징을 담고있다. 또한 인접한 지역에서 역시 商(상)나라의 솥 그릇 술잔 등 도기로 추정되는 유물들이 발굴되었다. 서울대 國史學(국사학) 敎授(교수)의 硏究(연구)에 의하면 이 때문에 箕子朝鮮(기자조선)을 긍정한다. 箕子(기자)와 같은 氏族(씨족)인 일부 商(상)나라 王室(왕실) 構成員(구성원)들이 건너 온 것으로 분석한 것이다.
상나라 도읍지 변천표
目次(목차)
生涯(생애)
이덕무의 《앙엽기》(盎葉記), 이만운의 《紀年兒覽(기년아람)》, 安鼎福(안정복)의 《동사강목》(東史綱目)에 따르면 箕子朝鮮(기자조선)의 제1대 君主(군주)인 箕子(기자)는 紀元前(기원전) 1126년부터 紀元前(기원전) 1082년까지 在位(재위)했다고 한다. 또한 그의 휘는 서여(胥餘) 또는 수유(須臾)였고 諡號(시호)는 태조문성왕(太祖文聖王)이라고 한다. 그의 王位(왕위)는 장혜왕(송(松))이 承繼(승계)받았다고 한다.
箕子(기자)에 대한 傳說(전설)은 ‘商(상)나라의 王族(왕족) 箕子(기자)’와 ‘기자동래설’의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箕子(기자)는 商(상)나라의 王族(왕족)으로 暴君(폭군) 주왕의 親戚(친척)이었다. 商(상)나라의 태사(太師)로 官職(관직)에 있을 무렵 周王(주왕)이 暴政(폭정)을 행하는 것을 보고 이를 그만둘 것을 諫言(간언)하였다가 監獄(감옥)에 갇혔다. 이에 箕子(기자)는 거짓으로 미친 척하여 주왕은 그를 奴婢(노비)로 삼았다고 한다. 紀元前(기원전) 1122년에 商(상)나라가 周(주)나라 武王(무왕)에게 滅亡(멸망)당하고 箕子(기자)를 釋放(석방)하여 臣下(신하)로 삼고자 하였으나 箕子(기자)는 이를 拒否(거부)하고 隱遁(은둔)하였다. 箕子(기자)는 周(주)나라의 武王(무왕)이 천도(天道)를 묻자 홍범구주(洪範九疇)를 진술하기도 하였다고 하며 紀元前(기원전) 1119년에 周(주)나라 王室(왕실)에 조빙(朝聘:1.조정에 만나뵈러 나아가다.2.서로 사신을 보내다. 3.조정에서 불러들이다.)하였다고 한다.
한편, 기자 동래설은 위의 箕子(기자) 傳說(전설)과 약간 다르다. 商(상)나라가 滅亡(멸망)하자 箕子(기자)는 周(주)나라의 臣下(신하)가 되는 것을 拒否(거부)하고 朝鮮(조선)으로 亡命(망명)하였으며 이에 周(주)나라 武王(무왕)은 箕子(기자)를 朝鮮(조선)에 封(봉)하였다고 한다. 箕子(기자)는 5천여 명의 무리와 함께 朝鮮(조선)으로 와서 朝鮮(조선)의 百姓(백성)들에게 文明(문명)을 가르쳤다고 한다. 일부 記錄(기록)에서는 箕子(기자)가 건너오자 원래 朝鮮(조선)의 君主(군주)였던 檀君(단군)이 箕子(기자)를 피해 藏唐京(장당경)으로 옮겨 갔다고 나타난다. 箕子(기자)는 平壤(평양)에 都邑(도읍)을 두고 8조의 法禁(법금)을 베풀어 나라를 다스렸다. 또한 정전제(井田制)를 실시하고 농사짓는 법과 누에치는 법을 가르쳐 百姓(백성)들이 기뻐했다고 한다.
箕子(기자)의 死亡(사망)한 時期(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洪萬鍾(홍만종)의 《동국역대총목(東國歷代總目)》에는 《진조통기(震朝通紀)》라는 作者(작자) 未詳(미상)의 書籍(서적)을 引用(인용)하여 紀元前(기원전) 1083년(무오년)에 93세로 死亡(사망)하였다고 記錄(기록)하고 있다.
箕子(기자)동래설
기자동래설이란 箕子(기자)가 商(상)나라가 滅亡(멸망)한 이후 동쪽으로 亡命(망명)해와 古朝鮮(고조선)의 王(왕)이 되어 1000여 년 동안 다스렸다는 傳說(전설)이다. 기자동래설은 대체로 한나라(기원전 2세기) 이후의 文獻(문헌)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漢(한)나라 이전의 문헌(선진문헌{先秦文獻})에는 箕子(기자)가 周(주)나라의 支配(지배)를 拒否(거부)하고 隱遁(은둔)하였던 사실만 記錄(기록)하고 있으며, 그 이후 箕子(기자)의 삶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生成(생성)과 發展(발전)
기자동래설이 나타나는 最初(최초)의 文獻(문헌)은 《상서대전(尙書大典)》과 《史記(사기)》이다. 《尙書大傳(상서대전)》은 中國(중국) 最初(최초)의 역사서로 평가되는 《尙書(상서)》에 註釋(주석)과 本文(본문)을 追加(추가)한 儒敎(유교) 經典(경전)으로 漢(한)나라 이전의 《尙書(상서)》에는 나타나지 않는 기자동래설이 추가되어 있다. 《尙書大傳(상서대전)》에 따르면 箕子(기자)는 周(주)나라의 지배를 거부하고 朝鮮(조선)으로 亡命(망명)하였다고 하며 周(주)나라 武王(무왕)은 이를 듣고 箕子(기자)를 朝鮮(조선)에 封(봉)하였다고 한다. 한편 《史記(사기)》 〈송미자세가〉에도 箕子(기자)가 朝鮮(조선)의 君主(군주)가 되었다고 記錄(기록)되어 있는데 《상서대전》과 반대로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여 箕子(기자)가 朝鮮(조선)에 가서 나라를 일으켰다고 한다. 이러한 두 文獻(문헌)의 차이는 이후 箕子(기자)가 스스로의 힘으로 朝鮮(조선)을 세웠는지, 아니면 周(주)나라의 諸侯國(제후국)으로 朝鮮(조선)을 세웠는지를 놓고 論爭(논쟁)이 벌어지는 原因(원인)이 되었다. 이후 《漢書(한서)》와 《三國志(삼국지)》에서 계속해서 기자동래설을 기록하는 한편 기자 이후의 고조선 역사에 대해서도 기자와 연관시켜 기록하였다.
이러한 기자동래설에 대한 기본 문헌들이 성립되자 이후부터 기자동래설의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箕子(기자)를 朝鮮(조선)의 君主(군주)로 崇尙(숭상)하는 傾向(경향)이 많아졌다. 三國時代(삼국시대)에도 高句麗(고구려)가 箕子(기자)에게 祭祀(제사)를 지냈다고 하며 新羅(신라)의 崔致遠(최치원)도 기자동래설을 肯定(긍정)하였다. 高麗(고려)시대에는 儒敎(유교)가 통치 이념으로 점차 굳어져 가면서 韓國(한국) 儒敎文化(유교문화)의 始原的(시원적) 존재로 箕子(기자)에 대한 崇拜(숭배)가 强化(강화)되었다. 그 결과 1102년에는 平壤(평양)에 箕子(기자)祠堂(사당)이 세워져 國家(국가)의 祭祀(제사)를 받았으며 箕子(기자)의 墓(묘)까지 만들어졌다. 이후 朝鮮(조선) 初期(초기)에는 檀君(단군)과 箕子(기자)가 나란히 國祖(국조)로 崇尙(숭상)되었으며 《東國史略(동국사략)》에서 檀君朝鮮(檀君朝鮮(단군조선))·箕子朝鮮(기자조선)·衛滿朝鮮(위만조선)의 三朝鮮(삼조선)으로 이어지는 體系(체계)를 정립하면서 箕子朝鮮(기자조선)이라는 王祖(왕조)가 確固(확고)하게 자리잡았다. 性理學(성리학)이 發達(발달)하면서 士林(사림)에 의해 箕子(기자) 尊崇(존숭) 儀式(의식)은 더욱 發展(발전)하였고, 李珥(이이)의 《기자실기(箕子實記)》와 같은 箕子(기자)를 尊崇(존숭)하는 書籍(서적)까지 編纂(편찬)되었다. 開港期(개항기) 이후에도 箕子(기자)에 대한 尊崇(존숭) 儀式(의식)은 계속되었으나 自主性(자주성)을 강조하기 위해 箕子(기자)가 武王(무왕)에 의해 朝鮮(조선)의 君主(군주)로 冊封(책봉)된 것이 아니라 箕子(기자)가 朝鮮(조선)의 君主(군주)가 되고 난 후에 武王(무왕)이 冊封(책봉)하였다는 解釋(해석)이 支配的(지배적)이 되었다.
기자동래설에 대한 批判(비판)
기자동래설은 三國時代(삼국시대) 이래 오랫동안 사실로 여겨져왔으나 現代(현대)에 들어서는 많은 批判(비판)을 받아 사실이 아닌 조작된 것이라는 主張(주장)이 支配的(지배적)이다. 특히 箕子(기자)에 대한 文獻(문헌)을 分析(분석)해 본 結果(결과) 漢(한)나라 이전의 文獻(문헌)에서는 箕子(기자)가 朝鮮(조선)으로 갔다는 내용이 없고, 漢(한)나라가 古朝鮮(고조선)을 滅亡(멸망)시킬 무렵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점이 중요한 根據(근거)가 된다. 또한 考古學的(고고학적)으로도 古朝鮮(고조선)과 商(상)나라·周(주)나라의 文化(문화)가 明白(명백)하게 차이를 보이는 점도 중요한 根據(근거)이다. 平壤(평양)에는 箕子(기자)와 관련된 遺跡(유적)들이 존재하는데, 실제 考古學的(고고학적)으로 平壤(평양)의 遺跡(유적)들은 高麗(고려)·朝鮮時代(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도 이 주장을 뒷받침한다.
기자동래설이 등장하게 된 背景(배경)으로는 보통 中國(중국) 특유의 中華(중화)儀式(의식)이 지적된다. 古代(고대) 中國(중국)은 周邊(주변) 이민족들에 대하여 記錄(기록)할 때 항상 中國(중국)의 古代(고대) 人物(인물)의 後孫(후손)이라 記錄(기록)하였다. 이러한 背景(배경) 아래에서 朝鮮(조선)의 始祖(시조)를 箕子(기자)로 看做(간주)하는 시각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中國(중국) 측 시각에 便乘(편승)하여 주변 이민족들이 자신들의 始祖(시조)를 中國(중국)의 古代(고대) 人物(인물)이라 주장하는 모화(慕華) 의식이 많이 나타나는데, 三國時代(삼국시대) 이후로 나타난 箕子(기자) 尊崇(존숭) 儀式(의식)도 이와 같은 것이라고 解釋(해석)한다.
한편 기자동래설에 대하여 일부분 肯定(긍정)하는 主將(주장)도 존재한다. 中國(중국) 허베이성(허베이 성(하북성, 중국어: 河北省, 병음: Héběi Shěng) 東部(동부) 및 랴오닝성 (랴오닝성(중국어 간체자: 辽宁省, 정체자: 遼寧省, 병음: Liáoníng Shěng)西部(서부)에 해당하는 遼西(요서) 地方(지방)에는 기(箕)라는 銘文(명문)이 새겨진 靑銅器(청동기)가 많이 發見(발견)된다. 考古學的(고고학적)으로 이들을 箕子(기자)와 관련된 種族(종족)으로 보는데 이들이 점차 동쪽으로 移住(이주)하면서 古朝鮮(고조선)의 支配(지배)階層(계층)을 대체하거나 합쳐졌다는 견해이다. 箕子(기자) 혹은 箕子(기자)족이 동쪽으로 이동한 사실을 肯定(긍정)하면서 箕子(기자)에 의해 箕子朝鮮(기자조선)이라는 國家(국가)가 成立(성립)된 것은 아니지만 後(후)에 箕子(기자)와 관련된 人物(인물)이 朝鮮(조선)의 支配層(지배층)이 되면서 箕子朝鮮(기자조선) 傳說(전설)로 發展(발전)하였다는 見解(견해)도 있다.
일부 在野(재야)史學者(사학자)들은 箕子(기자) 또는 箕子(기자)의 後孫(후손)이 古朝鮮(고조선)의 일부인 번조선의 王(왕)이 되었고, 이 때문에 箕子朝鮮(기자조선) 傳說(전설)이 생겨났다고 主張(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見解(견해)는 대부분 《桓檀古記(환단고기)》와 같은 緯書(위서)에 根據(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韓國(한국)史學界(사학계)에서는 認定(인정)되지 않는다.
評價(평가)
기자동래설은 現在(현재) 韓國(한국)史學界(사학계)에서 사실이 아니라고 평가된다. 하지만 기자동래설이 三國時代(삼국시대) 이후 韓國史(한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크기 때문에 그 영향에 대해서는 다양한 평가가 존재한다. 대체로 이른 시기부터 韓國(한국)이 中國(중국)의 文物(문물)을 수용하여 中國(중국)에 못지않게 文明國(문명국)이었다는 것을 내세우려는 象徵(상징)으로 箕子(기자) 尊崇(존숭)이 나타났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箕子(기자) 한민족설(韓民族設)
이 주장은 箕子(기자)가 朝鮮(조선)을 建國(건국)한 것은 맞지만 箕子(기자)는 中國人(중국인)이 아니며 漢民族(한민족)이라는 說(설)이다. 이를 主張(주장)하는 學者(학자)로는 천관우(千寬宇), 이상시, 이병도(李丙燾) 등이 있으며 그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다.
中國(중국) 산서성 태곡현 일대에 동이가 세운 기국이 이미 존재하였고, 周(주)나라의 압력을 받아 東方(동방)으로 이동하였고, 동진을 계속하여 大同江(대동강) 유역에 이르렀다는 主張(주장) 천관우(千寬宇).
그 내용은 기존의 史書(사서)를 따르지만, 동래한 箕子(기자)는 中國(중국)인이 아닌 東夷(동이)의 人物(인물)이라는 主張(주장)(이상시).
'한씨 조선설' - 古朝鮮(고조선)에 기원한 한후(韓候)가 遼西(요서)로부터 阿斯達(아사달)로 異動(이동), 支配(지배)勢力(세력)이 되었다는 主張(주장) 이병도(李丙燾)).
其他(기타)
그는 韓國(한국) 民間(민간)과 巫俗(무속)에서 군왕신(君王神)의 하나로 모셔지며, ‘기자신’(箕子神)이라 부른다. 平壤(평양)과 黃海道(황해도) 지역의 巫俗神(무속신)으로 주로 崇拜(숭배)되었다.
1763년 윤치정(尹致定)의 지인에 의해 애민여자(愛民如子)라고 쓴 箕子(기자)의 親筆(친필) 書信(서신)이 한 山寺(산사)에서 發見(발견)되었다. 이는 日帝(일제) 强占期(강점기)와 韓國(한국) 戰爭(전쟁)을 겪으면서 失傳(실전)되었다.
文獻(문헌)記錄(기록)
檀君(단군)에 대한 記錄(기록)이 있는 文獻(문헌)으로는 高麗(고려) 때의 記錄(기록)인 《三國遺事(삼국유사)》와 《帝王韻紀(제왕운기)》가 있다. 그 이전 記錄(기록)에는 檀君(단군)에 대한 언급이 보이지 않는다. 《三國史記(삼국사기)》에서는 檀君(단군)이란 글자는 없지만 “仙人(선인) 王儉(왕검)”이란 글자가 보인다.
檀君(단군)의 出生(출생)과 生涯(생애)에 대해 《三國遺事(삼국유사)》는 桓雄(환웅)이 熊女(웅녀)와 결혼하여 낳은 아들이 檀君(단군) 王儉(왕검)이라고 記錄(기록)한다. 그는 平壤城(평양성)에 都邑(도읍)을 정하고 朝鮮(조선)이라 하였다. 그는 다시 都邑(도읍)을 白岳山(백악산) 阿斯達(아사달)로 옮겼다. 그는 여기서 1천5백 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紀元前(기원전) 1122년(주 武王(무왕) 13년, 기묘년)에 武王(무왕)이 기자(箕子)를 朝鮮(조선)에 봉(封)하니, 檀君(단군)은 이에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겨갔다가, 후에 돌아와 阿斯達(아사달)에 숨어서 산신(山神)이 되었는데, 이때 나이가 1908세였다. 한편, 《帝王韻紀(제왕운기)》는 약간 다른 기록을 전하고 있다. 《帝王韻紀(제왕운기)는 고려 시대의 학자 이승휴(李承休)가 충렬왕 13년(1287년) 한국과 중국의 역사를 시로 쓴 역사책이다. 상·하 2권으로 출간되었으며, 단군부터 고려 충렬왕까지의 역사를 기술했다. 공민왕 9년(1360년)과 조선 태종 13년(1413년)에 각각 다시 간행되었다.[1] 오늘날 유포된 책은 이 3간본을 영인(影印)한 것이다.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내미로리 두타산 아래의 천은사(天恩寺)에서 저술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는 《본기(本記)》를 引用(인용)하여 하늘에서 내려온 桓雄(환웅)의 孫女(손녀)와 신단수(神檀樹)의 神(신)이 結婚(결혼)하여 檀君(단군)을 낳았다고 한다. 檀君(단군)은 古朝鮮(고조선)을 建國(건국)하고 1028년 또는 1038년 또는 1048년 동안 다스리다가 阿斯達(아사달)의 山神(산신)이 되었다고 한다. 《帝王韻紀(제왕운기)》의 檀君(단군)은 ‘박달나무 단(檀)’으로 標記(표기)되어 있다.
한편, 왕검(王儉)이란 글자가 최초로 등장하는 기록은 《三國史記(삼국사기)》의 高句麗(고구려) 東川王(동천왕) 21년(247년)조이다. 東川王(동천왕)이 平壤(평양)으로 遷都(천도)하였을 때의 記錄(기록)에 세주로 ‘平壤(평양)은 본래 선인(仙人) 王儉(왕검)이 살던 곳(원문, 平壤者本仙人王儉之宅也 或云王之都王險)’으로 登場(등장)한다. 인명(人名)으로 王儉(왕검)이 登場(등장)하는 것은 이 記錄(기록)이 最初(최초)이다. 인명이 아닌 경우 衛滿(위만)이 都邑(도읍)하였던 古朝鮮(고조선)의 首都(수도)에 王儉(왕검) 또는 왕험(王險)이 나타나기도 한다. 《三國史記(삼국사기)》에는 仙人(선인) 王儉(왕검)에 대한 기록과 함께 仙人(선인) 王儉(왕검)이 王(왕)이 되어 都邑(도읍)한 곳이 왕험이라 記錄(기록)하고 있기도 하다.
그 외에 《규원사화》, 《단기고사》, 《桓檀古記(환단고기)》 등 近代(근대)에 이르러 등장한 檀君(단군)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있으나, 이들 기록은 學界(학계)에서 緯書(위서)로 判斷(판단)하여 認定(인정)되지 않고 있다. 일부 在野(재야)史學者(사학자)들만이 이러한 記錄(기록)이 緯書(위서)가 아닌 眞實(진실)이라 主張(주장)하고 있다.
檀君(단군)에 대한 認識(인식)
檀君(단군)은 高麗(고려) 末(말), 對蒙抗爭(대몽항쟁) 時期(시기)에 주목받기 시작하여 朝鮮(조선) 時代(시대)부터 본격적으로 국조(國祖)로 推仰(추앙)되었다. 世宗(세종) 때에는 平壤(평양)에 檀君(단군)과 東明王(동명왕)을 모신 祠堂(사당)을 지어 國家的(국가적)으로 祭祀(제사)를 올렸으며 桓因(환인), 桓雄(환웅), 檀君(단군)의 神主(신주)를 모신 삼성당(三聖堂) 또는 三聖祠(삼성사)가 黃海道(황해도) 文化縣(문화현) 九月山(구월산)에 만들어지기도 했다.
舊韓末(구한말)에는 外勢(외세)의 角逐(각축)에 대항하는 韓民族(한민족)의 求心點(구심점)으로 대폭 강조되어 단군교(檀君敎)와 같은 宗敎(종교)로까지 發展(발전)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民族主義(민족주의)의 구심점으로 부각된 檀君(단군)은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 동안 獨立運動(독립운동)의 精神的(정신적) 土臺(토대)로 큰 役割(역할)을 하였다. 또한 大倧敎(대종교) 및 獨立運動(독립운동) 세력에 의해 檀君(단군) 時代(시대)의 歷史(역사)를 民族主義的(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부풀린 《대동사강(大東史綱)은 1929년에 김광(金洸)이 쓴 책으로, 檀君朝鮮(단군조선)에서 大韓帝國(대한제국) 純宗(순종) 皇帝(황제)까지의 歷史(역사)가 記錄(기록)되어 있다.
根據(근거)가 되는 史料(사료)는 明示(명시)되지 않았으나, 奎章閣學士(규장각학사) 민경호(閔京鎬)의 序文(서문)에 의하면, 歷史(역사)와 野乘(야승)을 수 년간 모아 엮었다고 한다. 오진영(吳震泳)이 校訂(교정)을 보았다.》, 《규원사화》 등의 위서들이 편찬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日帝(일제) 혹은 親日派(친일파)들이 檀君(단군)을 宗敎的(종교적)·學問的(학문적)으로 이용하여 民心(민심)을 撫摩(무마)하려 하거나 일선동조론 등의 황국신민화 정책에 악용하기도 하였다.
光復(광복) 이후 南韓(남한)의 檀君(단군)에 대한 연구는 古朝鮮(고조선) 사회에서 가지는 歷史的(역사적) 의미에 중점을 두었다. 檀君王儉(단군왕검)은 古朝鮮(고조선) 사회의 祭主(제주)이자 君長(군장)으로, 檀君(단군)은 大祭司長(대제사장)적인 성격을 많이 담고 있으며 王儉(왕검)은 國家(국가)를 통치하는 대군주의 의미를 띠고 있다고 해석한다. 즉 제정일치의 지도자이다. 방언의 분포와 비교언어학적으로 살펴볼 때에도 제사장과 정치적 지도자를 함께 이르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최남선(崔南善)은 무당이 ‘단골’로 불리는 것을 주목하여 檀君(단군)을 제사장의 의미로 해석하였으며, 단(檀)을 제터(壇)의 다른 표현이라 하여 檀君(단군)을 ‘壇君(단군)’으로 표기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최남선(崔南善)의 지적에 대해 巫女(무녀)를 당골네라고 부르는 것은 巫女(무녀)가 서낭당이 있는 고을에 산다고 하여 ‘당골네’로 부르는 것일 뿐, 檀君(단군)과는 관련이 없다는 지적이 있다.
北韓(북한)에서는 光復(광복) 이후 檀君(단군) 및 檀君神話(단군신화)를 古朝鮮(고조선)에서 정치권력이 성립하는 과정을 정당화하기 위해 꾸며진 建國(건국)神話(신화)로 보는 것이 기존의 입장이었다. 그러나 1994년에 檀君陵(단군릉)을 발굴할 무렵부터 입장을 바꾸어 檀君(단군) 神話(신화)는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고 檀君(단군)이 實存(실존)人物(인물)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檀君(단군)은 韓民族(한민족)이 세운 國家(국가)인 古朝鮮(고조선)의 최초의 王(왕)으로서 出生(출생)·建國(건국)·무덤이 모두 平壤(평양)에 있다고 주장한다. 平壤(평양)直轄市(직할시) 근처에는 北韓(북한)이 發掘(발굴)하여 再建(재건)한 檀君陵(단군릉)이 있으나, 그 사실 여부에 대해서 南韓(남한) 學界(학계)는 비판적인 입장이다. 특히 1990년대 이후 갑작스러운 입장 변화에 대하여 南韓(남한)의 역사학계는 主體思想(주체사상)이 北韓(북한)의 역사관으로 강조되게 된 정치적 요인에 의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世間(세간)의 認識(인식)
1980년대 이후 《桓檀古記(환단고기)》와 같은 위서가 유행하면서 세간에는 檀君(단군)의 역대 王(왕)系譜(계보)가 퍼지기도 하였다. 한편 2007년에 靑銅器(청동기) 시대의 연대를 기존보다 더 오랜 것으로 파악할 수 있는 考古學(고고학) 발굴 결과에 발맞추어 국사교과서의 古朝鮮(고조선) 관련 부분의 서술에서 古朝鮮(고조선)의 편년을 조금 더 확정적으로 서술하는 형태로 지침이 변경되었다. 그러나 언론에서는 이를 “檀君(단군)·古朝鮮(고조선)을 神話(신화)에서 역사로 수정”한다는 자극적인 보도를 하여 世間(세간)의 誤解(오해)를 불러일으켰다. 역사학계와 國史編纂委員會(국사편찬위원회)는 이러한 언론의 보도가 사실이 아니라는 우려를 표명하기도 하였다.
宗敎(종교) 속의 檀君(단군)
檀君(단군)은 조선시대부터 환인, 환웅과 함께 국조로 민간에서 숭상되었으며 국가적으로도 사당을 지어 제사하였다. 특히 황해도 지역에서 단군 관련 신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구한말 외세의 침탈이 격화되면서 단군에 대한 숭상은 점차 강화되어 환인, 환웅, 단군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대종교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그 외에도 단군을 신앙하는 여러 소수 종교가 나타나기도 한다.
巫俗(무속)
무속에서는 단군을 옥황천존, 삼신제석 등의 천신과 함께 모신다.
歷史書(역사서) 속의 檀君(단군)
魏書(위서)
《위서(魏書)》는 현재 전해지지 않으며, 《삼국유사》에서 인용되었다. 당요와 같은 시기에 단군이 아사달을 수도로 삼고 고조선을 세웠다.
古記(고기)
《고기(古記)》는 현재 전해지지 않으며, 《삼국유사》에서 인용되었다. 당고 즉위 50년에 단군이 평양성을 수도로 삼고 고조선을 세운 뒤 아사달로 도읍을 옮기고 1500년간 다스렸다.
檀君(단군)古記(고기)
《단군고기(檀君古記)》는 현재 전해지지 않으며, 《세종실록》〈지리지〉에서 인용되었다. 고조선의 임금은 단군(檀君), 부루(夫婁), 금와(金蛙)의 3대만 기록되어 있다.
부도지
古朝鮮(고조선)의 임금은 임검씨(壬儉氏), 부루씨(夫婁氏), 읍루씨(浥婁氏)의 3대만 기록되어 있다.
僞書(위서) 속의 檀君(단군)
역사학계에서 위서(僞書)로 판단하고 있는 《규원사화(揆園史話)》는 1675년에 북애자(北崖子)가 著述(저술)하였다는 歷史書(역사서) 형식의 사화(史話)로, 上古時代(상고시대)와 檀君朝鮮(단군조선)의 임금에 대해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단기고사》, 《桓檀古記(환단고기)》 등의 기록에는 古朝鮮(고조선)을 지배하였던 歷代(역대) 檀君(단군) 47대의 역년과 상세한 治世(치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들 史書(사서)는 47대의 檀君(단군) 人名(인명)은 거의 모두 일치하지만 역년과 상세한 治世(치세) 내용은 큰 차이를 보인다. 특히 世上(세상)에 공개된 年度(연도)가 가장 늦은 《桓檀古記(환단고기)》에는 《규원사화》와 《단기고사》에 각각 등장하는 治世(치세) 內容(내용)이 함께 記錄(기록)되어 있어 두 책을 베꼈을 가능성이 높다.
공통된 47대 檀君(단군)의 王號(왕호)는 다음과 같다.
대수 | 한자 | 이름 | 대수 | 한자 | 이름 |
1 | 王儉 | 왕검 | 25 | 率那 | 솔나 |
2 | 夫婁 | 부루 | 26 | 鄒盧 | 추로 |
3 | 嘉勒 | 가륵 | 27 | 豆密 | 두밀 |
4 | 烏斯 | 오사/오사구 | 28 | 奚牟 | 해모 |
5 | 丘乙 | 구을 | 29 | 摩休 | 마휴 |
6 | 達文 | 달문 | 30 | 奈休 | 나휴 |
7 | 翰栗 | 한율 | 31 | 登兀 | 등올 |
8 | 于西翰 | 우서한/오사함 | 32 | 鄒密 | 추밀 |
9 | 阿述 | 아술 | 33 | 甘勿 | 감물 |
10 | 魯乙 | 노을 | 34 | 奧婁門 | 오루문 |
11 | 道奚 | 도해 | 35 | 沙伐 | 사벌 |
12 | 阿漢 | 아한 | 36 | 買勒 | 매륵 |
13 | 屹達 | 흘달 | 37 | 麻勿 | 마물 |
14 | 古弗 | 고불 | 38 | 多勿 | 다물 |
15 | 伐音 | 벌음/후흘달 | 39 | 豆忽 | 두홀 |
16 | 尉那 | 위나 | 40 | 達音 | 달음 |
17 | 余乙 | 여을 | 41 | 音次 | 음차 |
18 | 冬奄 | 동엄 | 42 | 乙于支 | 을우지 |
19 | 緱牟蘇 | 구모소/종년 | 43 | 勿理 | 물리 |
20 | 固忽 | 고홀 | 44 | 丘忽 | 구홀/구물 |
21 | 蘇台 | 소태 | 45 | 余婁 | 여루 |
22 | 索弗婁 | 색불루 | 46 | 普乙 | 보을 |
23 | 阿勿 | 아물 | 47 | 古列加 | 고열가 |
24 | 延那 | 연나 |
朝鮮(조선)上古史(상고사)
기원전 2333년부터 기원전 1285년까지 1048년간 지속되었다.
규원사화
이 부분의 본문은 규원사화 § 단군기입니다.
기원전 2333년부터 기원전 1128년까지 1205년간 지속되었으며 이후는 기자조선으로 이어진다.
단기고사
이 부분의 본문은 단기고사 § 국한문본의 내용입니다.
기원전 2512년부터 기원전 416년까지 2096년간 지속되었다.
桓檀古記(환단고기)
이 부분의 본문은 환단고기 § (단군)조선입니다.
기원전 2333년부터 기원전 238년까지 2096년간 지속되었다.
其他(기타)
檀君(단군)의 語源(어원)을 투르크 및 몽골 지역의 天神(천신)을 가리키는 텡그리로 보는 주장이 있다.
關聯(관련) 文化財(문화재)
統一(통일)冀願(기원)國祖(국조)檀君像(단군상), 대청댐다목적댐(大淸多目的dam)은 大田(대전)광역시 대덕구 신탄진동과 忠淸北道(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덕유리 사이의 錦江(금강) 본류를 가로지르는 댐이다. 명칭은 과거 댐이 만들어질 때 행정구역이었던 대덕군(現 대전광역시)과 청원군(現 청주시)의 앞 글자를 딴 것이다.
大韓民國(대한민국) 대전광역시와 忠淸北道(충청북도)의 경계에 위치한 대청댐 사진. 대청댐은 금강에 위치하고 있다. 현암사로 가는 길 입구 부근에 있는 展望臺(전망대)에서 찍음.
대청댐의 위치 (대청댐은 금강 하구로부터 150km 상류지점인 대전광역시 동북방 16km, 청주시 남방 16km 지점에 있다. 대청댐의 좌측은 대전광역시 대덕구 미호동이고 우측은 충북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덕유리이다)
1975년 3월에 공사를 착수하여 1981년 6월 완공되었다. 높이 72m, 길이 495m, 저수면적은 72.8km2, 체적 123만4천m3의 중력식 콘크리트댐과 사력댐으로 구성된 복합형 댐으로 금강 하구로부터 150km 상류지점인 대전광역시 동북방 16km, 청주시 남방 16km 지점에 있다. 주요시설로는 저수용량 14억9천만m3의 본댐과 조정지댐이 있으며, 본댐 주변에는 저수지내의 물이 다른 지역으로 넘치지 못하도록 해 주는 3개의 보조댐이 있다. 또한 대전광역시와 청주시를 비롯한 충청권 일부지역으로 용수를 공급하기 위한 도수로와 시설용량 9만㎾의 수력발전소가 있다. 대청댐으로 생긴 대청호는 저수량 기준으로 大韓民國(대한민국)에서 소양호와 충주호에 이어 세 번째로 큰 호수이다.
檀君陵(단군릉) - 平壤市(평양시) 江東郡(강동군) 문흥리 (朝鮮(조선)民主主義(민주주의)人民共和國(인민공화국)의 國寶(국보) 제174호)
谷城(곡성) 檀君殿(단군전) - 全羅南道(전라남도) 谷城郡(곡성군) (大韓民國(대한민국) 登錄(등록)文化財(문화재) 제228호)
扶餘(부여) 天眞殿(천진전) 檀君畫像(단군화상) - 忠淸南道(충청남도) 扶餘郡(부여군) (忠淸南道(충청남도) 文化財(문화재)資料(자료) 제369호)扶餘(부여) 천진전 단군화상(扶餘 天眞殿 檀君畵像)은 忠淸南道(충청남도) 扶餘郡(부여군) 扶餘邑(부여읍) 동남리, 國立(국립)扶餘(부여)博物館(박물관)에 있는, 開國(개국)神話(신화)의 主人公(주인공)인 檀君(단군) 王儉(왕검)의 肖像畵(초상화)이다. 2000년 1월 11일 忠淸南道(충청남도)의 文化財(문화재)資料(자료) 제369호로 指定(지정)되었다.
關聯(관련)團體(단체)
檀君(단군)精神(정신)宣揚會(선양회) - 文化(문화)體育(체육)觀光部(관광부) 所關(소관) 社團法人(사단법인)
參考文獻(참고문헌)
이승휴, 《제왕운기》
《世宗實錄(세종실록) 地理誌(지리지)》
북애자, 《규원사화》, 고동영 번역, 한뿌리, 2005년
이유립, 《환단고기》, 광오이해사, 1979년
박금, 《부도지》, 김은수 번역, 주해, 한문화, 2002년
《단기고사》, 한뿌리, 1986년
같이 보기
다마야마 신사(ja:玉山神社) - 日本(일본) 가고시마현 히오키시에 있는 단군을 모셨던 신사
脚注(각주)
↑ 이동: 가 나 단군[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이동: 가 나 단군[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브리태니커 백과》
↑ 권근 등 (1402). 《동국사략》. 나라 사람들이 임금으로 세웠다.(당요 25년 무진년) (國人立爲君(唐堯二十五年戊辰)
↑ 일연 (1281) 古朝鮮 조(條) 제14~20문 “환웅은 이에 잠시 사람으로 변하여 결혼하였더니, 웅녀는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 이가 곧 단군 왕검(壇君 王倹)이다. 그는 [...] 평양성(平壤城) 지금의 서경(西亰)이다.에 도읍을 정하고 비로소 국호를 조선이라 불렀다. 다시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白岳山阿斯逹)로 옮겼다. 그 곳을 궁홀산(弓忽山), 혹은 방홀산(方忽山) 또는 금미달(今彌達)이라 불렀다. 그는 여기서 1천5백 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周(주)나라 무왕(武王)이 王位(왕위)에 오른 己卯年(기묘년)에 武王(무왕)이 기자(箕子)를 朝鮮(조선)에 봉(封)하니, 檀君(단군)은 이에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겨갔다가, 후에 돌아와 阿斯達(아사달)에 숨어서 산신(山神)이 되었는데, 이때 나이가 1908세였다.”
↑《본기》의 인용은 1028년으로 되어 있으며, 《帝王韻紀(제왕운기)》의 本文(본문)에는 1038년이라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本文(본문)에 나타난 年度(연도)를 통해 計算(계산)을 해 보면 1048년이 實際(실제) 在位(재위) 年度(연도)이다.
↑정인보 論說委員(논설위원) (1935년 1월 20일). “五千年間朝鮮(오천년간조선)의 얼, 始祖檀君(시조단군)”. 동아일보. 2012년 7월 17일에 확인함.
↑한창건 (2013년 4월 20일). 《한국고대사발굴, 마한월지국사》. 홍익출판기획. ISBN 9788994841021.
↑우실하 (2007년 4월 9일). 《동북공정 너머 요하문명론》. 소나무. ISBN 978897139332 |isbn= 값 확인 필요: length (도움말).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집부 (1996년 12월 20일). 《한국상고사의 제문제》. 한국정신문화연구원. ISBN 2007752004452 |isbn= 값 확인 필요: invalid prefix (도움말).
↑삿사 미츠아키, 〈한말·일제시대 단군신앙운동의 전개 : 대종교·단군교의 활동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대학원, 2003
↑정호완, 〈단군왕검의 형태론적 풀이〉, 《한글》 제219호, 한글학회, 1993년 3월, 5쪽 ~ 32쪽.
↑단군학회 엮음, 《단군과 고조선 연구》, 지식산업사, 2005년, 409쪽.
↑장우진, 〈대동강 유역은 인류의 발상지이며 조선사람의 발원지〉, 《조선고고연구》 1호, 1999년
↑이기동, 〈북한에서의 단군연구와 그 숭앙운동〉, 《한국사 시민강좌》27집, 2000년
↑ http://pub.chosun.com/client/news/viw.asp?cate=C06&mcate=M1060&nNewsNumb=20141015793&nidx=15794
參考資料(참고자료)
김정배(金貞培), 〈단군(檀君)에 대하여〉,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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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승철 ~ 일 2020-12-27 오후 6:24 ~ 새로운 좋은 소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