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Ⅱ-86]아름다운 사람(23)-아버지 문집을 엮다
꽃구름
휘감긴 이내 고향
쏘옥 쏙
빠져나오는
뻐꾸기
노래
山鳩歌聲花雲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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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평 뜰에
모여서
활짝 웃는 꽃들
푸른 하늘
머리에 이고
모두 제 세상
群芳笑顔無貴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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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작품을 가만히 한번 마음속으로라도 낭송하며 감상해 보시라. 봄과 여름의 풍경화가 눈에 선하지 않은가. 이런 독특한 단시短詩를 수 백 편 남기고 가신 목포의 아동문학가로 김일로(1911-1984) 선생이 계셨다. 동화작가 이원수와 같이 활동한 아동문학 1세대 작가이나, 비교적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한양대 정민 교수와 전 전북대 김병기 교수가 그분의 작품을 첫눈에 알아보고 반했다. 노산 이은상이 “시조 이외의 새로운 고유시의 씨앗”이라고 칭찬했다고 한다. 그분의 시와 단시, 동시, 아동문학, 수필 등을 4권에 담은 『김일로 전집』(목포문화원 발행)이 세상에 선을 보인 게 2022년. 엮은이 ‘김 강’(71)은 김일로 선생의 장남. '한길'과 '가람' 그 아버지와 그 아들의 이름도 심상치 않다.
그 분을 ‘아름다운 사람’ 23번째 주인공으로 모신 까닭이다. 그는 평생 은행원이었다. 부친의 모든 작품을 한자리에 모은 것만 해도 대단한데, 문화원의 지원과 당신의 사재를 털어 양장본 <아버지 문집>을 엮어낸 것이다. 거질巨帙을 일별해 봐도 알지만, 어지간한 효심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로 보인다. 74세로 별세할 때까지 끝끝내 동심을 잃지 않고 문학활동을 한 아버지를 존경하는 마음이 하늘에 닿았나보다. “제 선친의 선미禪味가 있는 시를 같이 공유하는 기쁨이 크다”고 했다. 말 그대로 김일로 선생의 거의 모든 작품은 ‘선미가 있는 시’였다.
만날 사람은 언제든 꼭 만나게 된다는 말처럼 우연한 계기로 그분을 알게 돼 전집 일습을 선물받고 감격했다. 읽으면 읽을수록 맛이 있다. 이런 시는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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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이 되어주다가
열매를 맺어주다가
소슬바람에
밀려나가는
노오란
은행잎 하나
人生如是亦如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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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가에 떨어진 ‘노오란 은행잎 하나’를 바라보며 시인은 금세 불심佛心에 잠겨 ‘인생 또한 이와(은행잎과) 같다’는 것을 깨닫는다. 고승高僧의 오도시悟道詩에 다름 아니다.
어제 그분과 모처럼 통화를 하며 ‘기쁜 소식’을 들었다. 아버지의 작품 중 그분 말대로 선미가 뚝뚝 떨어지는 50편을 골라, 국보급 전각작가와 ‘콜래보작업’으로 전시회 개최를 계획하고 있다는 거다. 듣자마자 박수를 치며 “역시”를 남발했다. 아버지의 시세계를 만천하에 알리겠다는 야심찬 기획이 아닌가. 무수히 좋은 작품을 남기셨는데도 거의 무명無名에 가까운 아버지의 문학세계를 널리 현창하는 것은 자식된 자의 도리가 아니겠는가. 남다른 효심도 재력이나 여유가 뒤따르지 않으면 어려울 터. 2년 전 펴낸 전집에 이은 제2탄이다.
전라고6회 동창회 | [찬샘단상 85/『김일로전집』]향토문학의 “보석”! - Daum 카페
하여, 조선조 학자나 문인들의 문집에 대해 조금 아는 것을 떠벌렸다. 조선의 선비들은 살아 생전에 문집이나 저서를 내는 것을 ‘천박하게’ 여긴 듯하다. 당신들의 생애와 학문이나문학의 업적은 후세가, 역사가 평가해주는 것으로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한국의 정치가들은 역사를 전혀 생각지 않으니 크게 반성할 일이다. 큰 학자나 문인이 별세하면, 대부분 그의 아들들이 문집을 펴내지만, 그들이 ‘부실(재력이나 효심)’하면 그의 제자들이 대부분 펴냈다고 한다(몇몇 예외는 있지만). 문집을 펴내려면 논 10마지기의 비용이 들기 때문에 재력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 그 지역의 ‘집단지성’들이 공론公論하여 제작비를 십시일반 추렴하여 펴내는 게 ‘책판冊版’이다. 이는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기 때문에 2015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김강 형님의 이 기획이 조만간 이루어진다면, 그야말로 멋지고 독창적인 시서화詩書畵가 될 듯하다. 김일로 선생이 생전에 남농 허건과 콜래보 전시회를 했듯이. 가난하지만, 귀하고 멋진 작품을 한 점이라도 소장所藏하는 기쁨을 빨리 누려봤으면 좋겠다. 화이팅!
첫댓글 상황을 길게 설명하는 산문도 있고, 긴 호흡의 시도 있고, 일도양단의 짧은 시도 있고, 특히 일본은 선시의 영향을 받아 짧은 시가 주류를 이루는데 한국의 시조는 살짝 길어, 뭐랄까~ 2도양단의 느낌이었는데....
근래 아래같은 몇몇 짧은 시가 있었지만 김일로는 우리나라 짧은 시의 始祖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눈물 <이외수>
지상에서 가장 투명한 詩
빨랫줄 <이외수>
왜 당신의 마음은 세탁해서 널어놓지 않나요
(내 생각을 바꿔 그에 대한 선입견을 버리고 그의 글을 좋아하게 된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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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군더더기 없이 바로 본질로 들어가는 선시를 좋아해서 평소에도 말이 짧은 경향이 있는데ㅎ
근래 우리도 촌철살인의 짧은 생활 시가 유행하기도 했지만 하나의 장르로 정착되지는 못했는데 이번에 김일로 전집을 기원으로 해서 하나의 장르로 정착되길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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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소개서>
이게 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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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 시간은 어기면 욕먹고
퇴근 시간은 지키면 욕먹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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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문득 이런 생각이....
<잡초>
이 얼마나 이기적인 표현인가
유목민에게 그 풀은 생명의 근원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