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640
10월11일[연중 제27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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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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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ipWKVvHHUIY?si=g6mH_-7OI7Z2krIA
[성바오로수도회 조용준 니콜라오 신부님 집전(가톨릭영화인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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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가장 탁월한 처방전, 기도>
언젠가 여러 수도회 수도자들이 모여 각자 자신들의 기도생활에 대한 체험을 나누는 시간이 있었는데, 참으로 그 나눔이 풍요로웠습니다.
“기도에 몰입하면 할수록, 묵상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관상에 도달하면 도달할수록, 절실히 느끼는 것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느님 앞에 나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공동체 형제들과의 관계에서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는 상처나 고통의 치유를 위해 가장 효과적인 대처방법은 기도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기도야말로 공동체 내외부의 다양한 갈등국면을 최대한 빨리 해소시키는 탁월한 처방전임을 확신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께 한 가지 중요한 청을 드리고 있습니다.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예수님 시대 당시 가르침을 받는 제자들은 스승에게 기도 방법을 청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당대 큰 스승이었던 세례자 요한 역시 이런 흐름에 따라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방법을 지도했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를 눈여겨보았던 예수님의 제자 역시 스승님께 기도방법을 가르쳐달라고 청하고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기도문 하나를 하사하시는데, 오늘날 우리가 틈만 나면 바치는 ‘주님의 기도’의 원형입니다.
기도 중의 기도, 공동체의 기도, 모든 기도의 기반이 되는 기도, 그래서 우리가 하루에도 수십 차례나 바치는 기도가 주님의 기도입니다.
너무나 자주 바치다보니 거의 습관적으로 바치는 경향이 많습니다. 다양한 전례 안에 반드시 빠지지 않고 ‘약방의 감초’처럼 ‘기본양념’처럼 들어가는 기도이기에 형식적으로 바치는 경향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음미해보면, 사실 ‘주님의 기도’ 안에는 신앙인으로서 지녀야 할 자세 전반이 다 들어있습니다. 짧은 기도지만 그 안에 하느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 신앙인의 일상생활이 어떠해야 하는지,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만 정성껏 잘 바쳐도 그 안에서 얼마나 많은 은혜를 받게 되는지 모릅니다. 무엇보다도 ‘주님의 기도’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통해 직접 우리에게 건네주신 기도의 유산입니다. 전 세계 모든 신앙인이 밤낮으로 바치는 교회의 기도이자 공동체의 기도입니다.
적당히, 건성으로가 아니라 교회의 마음으로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우리는 거룩한 교회의 신비체에 합일하는 것이고, 예수님이라는 포도나무의 한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고통 받는 사람, 신음하는 사람, 죽어가는 사람을 기억하며 바치는 주님의 기도는 그 기도 자체로 그들을 위한 위로와 사랑의 손길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마다 나 홀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온 교회 공동체와 함께 바친다는 마음으로 기도드리길 바랍니다.
나 자신의 내면에서 물결치는 감정의 흐름에 따라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기도의 창시자인 예수님과 함께, 온 교회와 함께 전 세계를 향해 기도 바치기를 바랍니다.
진정으로 기도 바치는 사람은 기쁨의 순간에도 슬픔의 때를 생각합니다. 열렬히 기도 바치는 사람은 슬픔의 순간에도 슬픈 감정에만 머무르지 않고 주님의 도우심에 희망을 두고 기뻐할 줄 알아야 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자기 위주의 기도를 탈피하는 것입니다. 내 기쁨을 위해, 내 만족을 위해, 나의 정서적 안정을 위해 기도하기보다,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 기도드릴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감정으로부터의 탈피와 극복은 바람직한 기도의 필수조건입니다. 그런 균형감각은 내 시각이 아니라 하느님의 시선으로 세상만사를 바라보게끔 도와주며 이웃의 기쁨과 슬픔에 보다 깊이 공감하고 동참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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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isjsHHRGV0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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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를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법: 어린이처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알려주십니다. 그들은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보고는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청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세례자 요한대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쳤습니다. 그러면 그 기도를 바치면 되는데 왜 예수님께 왜 또 기도를 배우려 할까요? 세례자 요한보다 예수님이 더 높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겐 각자가 바치는 각자의 기도문이 있습니다. 그 기도문이 결국 자신이 누구인지를 증명합니다. 옆집 아이가 할 수 있는 말과 내 자녀가 나에게 할 수 있는 말이 같을 수는 없습니다. 곧 기도문 자체가 내가 누구인지 결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기도만큼 높은 기도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 기도를 바치신 분은 하느님의 외아드님이었습니다. 그 말을 가르쳐주셨다는 말은 우리가 하느님 자녀가 될 수 있음을 인정하셨다는 뜻입니다. 기도의 목적은 나의 정체성의 확립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3)라고 하십니다. 기도의 목적은 나의 의로움과 하느님 나라를 구하려는 목적으로 해야 합니다. 이를 가장 잘하는 존재가 아기들입니다. 아기들은 같은 말을 반복함으로써 부모가 누구인지, 자기가 누구인지 확신합니다. 이것이 기도의 목적입니다.
어떤 할아버지가 저녁마다 성당에 기도하러 들르십니다. 그런데 10초도 안 돼 다시 나오십니다. 본당 신부님은 매일 너무도 짧게 기도하시는 할아버지를 ‘기도할 줄 모르시는 분’으로 여깁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할아버지가 보이지 않습니다.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마지막 때가 온 것입니다. 사제는 신자들과 함께 할아버지에게 병자성사를 주러 병원에 들렀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의 얼굴이 기쁨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사제는 “할아버지, 뭐가 그리 좋으세요?”라고 묻습니다. 할아버지는 대답하십니다.
“예, 신부님. 저는 기도할 줄 몰라서 매일 성당에 들러 ‘예수님, 저 왔어요!’라고 인사만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예수님께서 매일 오셔서 ‘요셉아, 내가 왔다’라고 하십니다. 어떻게 기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 자녀가 된 행복이고 그분의 의로움은 그분께 하느님 자녀로 인정받음입니다. 위 할아버지는 다른 것을 청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하느님께 사랑 받는 존재가 되기를 청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인정받았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먼저 내가 누구인지 알고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주님의 기도에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한 형제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의 외아드님이 아버지께 바치는 기도였습니다. 이 기도를 바칠 자격은 예수님에게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루카 복음에서는 마태오 복음에 나와 있는 주님의 기도에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와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가 빠져있습니다. 당시 여러 버전의 주님의 기도가 있었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였던 마태오의 전통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말을 많이 하는 것일까요?
기도는 수준이 높아질수록 그 말이 단순해집니다. 아기들이 “엄마, 엄마, 엄마…” 하는 기도가 더 셀까요, 아니면 많은 말로 부모를 설득하는 자녀의 기도가 더 셀까요? 부모를 말로 설득하려는 노력 안에는 부모에게 온전히 의탁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오히려 단순하게 엄마라는 말을 반복하는 아기가 부모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받습니다. 주님의 기도나 묵주기도, 혹은 자비의 기도가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게 되는데, 그래도 그러한 기도가 더 힘이 강한 이유가 이것입니다. 많은 말을 하는 기도보다는 기도가 단순해질수록 더 높은 수준의 기도입니다.
그러나 같은 말을 반복한다고 다 높은 수준의 기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기처럼 그 단순한 “엄마!”란 말에 자기 온 감정을 집중 시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순한 주님의 기도라도 한 기도 말에 오래 머무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선교사가 문명과 접하지 않은 한 섬에 선교를 들어갔다가 시간이 없어 주님의 기도만 알려주고 나왔습니다. 3년 뒤에 그 선교사가 그들을 다시 방문하게 되었는데 그 마을 주민들은 물 위를 걸어서 선교사를 맞으러 나왔습니다. 깜짝 놀란 그들은 선교사에게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저희가 선교사님이 가르쳐준 기도를 다 기억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하는 것만은 기억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만을 반복해서 바쳤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느님이 아버지이신데 우리에게 불가능한 게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고 물 위를 걸어보니 마을 사람들 모두가 물 위를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기도 말이 단순하다는 말은 그 말 안에 자신의 모든 감정을 담는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아기가 반복하는 “엄마, 아빠!”란 말엔 아기가 하고 싶은 모든 말이 들어있습니다. 점점 어린이처럼 기도가 단순해질 때 기도는 더 높아집니다.
저는 성체조배 할 때 주님의 기도만을 바칩니다. 보통 주님의 기도를 한 번 하는 데 한 시간이 걸립니다. 그 방법은 이렇습니다. 정신을 집중하기 위해 기도할 때 호흡에 맞춰 숫자를 셉니다. 잠이 안 올 때 상상으로 양의 숫자를 세는 것과 같습니다. 숫자를 세면서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이 분심이 되면 어디까지 숫자를 셌는지 잊어버립니다. 저는 주님의 기도를 끊어가며 바치고 그 의미에 집중하면서 동시에 70번 호흡을 셉니다. 그러면 주님의 기도 한 번 바치는 데 한 시간이 걸립니다. 이런 식으로 주님의 기도를 하며 성경 묵상을 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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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1)
사제생활을 10년 했던 2001년 때입니다. 본당사제로 사목하면서 바쁘게 지냈지만 영적인 갈망이 있었습니다. 강론 준비하고, 미사를 봉헌하고, 신자들과 친교를 나누고, 아픈 사람을 찾아가면서 지냈지만 영적인 목마름은 계속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너는 잘 하였다. 그러나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너는 나를 따라라. 그러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부자청년은 슬퍼하며 예수님을 떠났다고 했습니다. 가진 것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30대 후반의 저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기도와 침묵’이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예수님을 만나서 일곱 마귀를 떨쳐버릴 수 있었던 것처럼 ‘기도 사제모임’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베드로와 요한이 한 걸음에 예수님의 ‘빈무덤’을 찾아갔던 것처럼 매주 금요일에 왕복 200킬로가 넘는 혜화동 신학교엘 갔습니다. 기도모임 사제들은 매주 금요일 성체조배를 하였고, ‘영신수련’에 대한 책을 공부하였습니다. 그때부터 ‘영신수련’은 제게 영적인 갈증을 채워주는 가뭄 끝의 단비가 되었습니다.
영신수련 지도 사제들은 매년 신학생들의 8일 피정과 30일 피정을 지도하였습니다. 저는 선배 사제들에게 배우면서 신학생들을 위한 피정에 함께 하였습니다. 선배들이 이야기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힘을 주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지도자가 힘을 주면 학생들도 힘을 주게 되고 그렇게 되면 지도자도 힘들고 학생들도 힘들다는 것입니다. 학생들이 자연스럽게 하느님을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라고 하였습니다. 피정에 깊이 들어가면서 학생들은 ‘열등감과 죄의식’에 빠질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자신의 내면을 깊이 보면서 지난날의 잘못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피정을 준비하면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먼저 묵상하면 좋다고 하였습니다. 신학생들은 이미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으니 ‘선택’보다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기 위한 ‘명상’을 하면 좋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영신수련 피정에 함께하면서 좀 더 깊이 알고 싶었습니다. 주교님께 ‘해외연수’를 청하였고, 주교님께서는 저의 청을 들어주셨습니다. 캐나다 토론토에서 영신수련을 공부하였고, 직접 40일 피정을 하였습니다. 해외연수를 마친 후에 돌아와서 영신수련 지도사제 모임에 함께 하였고, 2014년 성소국장이 될 때까지 10년 넘게 학생들과 함께 피정을 하였습니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자들도 영적인 목마름이 있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세례를 받았고, 어엿하게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 보다 먼저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고, 이미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 또한 스승인 요한에게 배워서 열심히 기도하였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우리도 요한의 제자들처럼 ‘기도’할 수 있도록 가르쳐 주시기를 청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아름다운 기도를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님의 기도’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기도를 외우면서 영적인 갈증을 채울 수 있었습니다. 주님의 기도를 외우고, 주님의 기도에 따라서 살면 아무런 걱정도, 갈등도 없었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200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신앙인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유일한 기도문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바치는 모든 기도문의 원형이 되었습니다. 습관처럼 주님의 기도를 외우기보다는 주님의 기도가 주는 영적인 힘을 느끼면서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예전에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지 마라 세상일에만 빠져 있으면서. '우리'라고 하지 마라 너 혼자만 생각하며 살아가면서. '아버지'라고 하지 마라 아들딸로 살지도 않으면서.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라고 하지 마라 자기 이름을 빛내기 위해서만 안간힘을 쓰면서.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시며'라고 하지 마라 물질 만능의 나라를 원하면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고 하지 마라 내 뜻대로 되기만 바라면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하지 마라 죽을 때까지 먹고 남을 양식을 쌓아 두려 하면서.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오니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라고 하지 마라 누구에겐가 아직도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라고 하지 마라 죄 지을 기회를 애써 찾아다니면서. '악에서 구하소서.'라고 하지 마라 악을 보고도 아무런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으면서. '아멘'이라고 하지 마라 주님의 기도를 진정 나의 기도로 바치지도 않으면서.”
오늘 하루 ‘주님의 기도’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그 가르침대로 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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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1,1-4: 저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
주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가르치심으로써 제자들이 기도를 통해 당신과 하느님과의 관계에 참여하게 하신다. 우리도 하느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2절)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아들과 같게 하신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하며, 하느님의 자녀답게 그분께 맞갖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때 우리의 간청을 받아주실 것이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2절), 이 기도는 그분의 이름이 우리 안에서, 우리 마음과 뜻 안에서 거룩하게 지켜지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이 기도는 그분의 이름이 영예롭고 거룩한 것임을 알고 고백하는 마음과 믿음이 자신에게 생기게 해달라고 청하는 것이다. 이 기도가 생명의 근원이며 축복의 원천이다. 구원받아 높이 들어 올려지는 데 더 좋은 기도는 없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2절) 아버지의 나라는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마태 25,34)이다. 이것이 우리의 청원이다. 그 나라는 올 것인데, 만일 우리가 왼쪽에 서게 되면 우리는 그 나라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중요한 것은 그 나라에서 모든 구원받은 자들에게 돌아갈 몫을 우리도 받을 수 있도록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3절) 일용할 양식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을 말한다. 주님께서는 빵만이 아니라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신다. 또한, 영적인 양식으로 단 하루도 먹지 않으면 살 수 없는 “내가 생명의 빵이다.”(요한 6,35)하신 그리스도의 몸이다. 이 양식을 청하는 것은 그분 안에 살고 그분과 하나 되기를 청하는 것이다.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4절) 우리는 지은 죄를 용서해 주십사고 하느님께 빌어야 한다. 그러려면 우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그들이 어떤 잘못을 했든지 용서해야 한다. 이렇게 용서하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 주님의 기도는 마지막으로 유혹자에게 끌리지 않도록 기도하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즉 죄만 용서해 주는 것이 아니라, 죄를 피할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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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주님의 기도>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그분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루카 11,1-4)
‘기도하는 것’이라는 말은, ‘기도하는 방법’이라는 뜻입니다. 표현만 보면, 제자들이 ‘기도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보이는데, 실제로는 그리스도교 신앙인들만의 기도문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아마도 세례자 요한은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문을 만들어 준 것 같습니다. 사도들은 그것을 보고 자기들도 자기들만의 특별한 기도문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예수님께 그것을 요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는 그리스도교 신앙인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특별한 기도이고, 또 신앙생활의 목적과 방법을 알려 주는 지침과도 같은 기도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라는 뜻으로 ‘주님의 기도’라고 부르는데, ‘주님께서 바치신 기도’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평소에 ‘주님의 기도’와 거의 같은 기도를 바치셨을 것입니다. 그 기도를 제자들이 바치는 기도로 표현만 조금 바꿔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주님의 기도’가 원래 예수님께서 바치시던 기도였을 것으로 생각한다면, 예수님의 ‘간절한 심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기도의 전반부는 인류 구원에 대한 아버지의 뜻과 계획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의 간절한 심정을 나타내고, 기도의 후반부는 신앙인들이 아버지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서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간절한 심정을 나타냅니다. <기도의 전반부는 신앙생활의 목적과 목표에 대한 가르침이고, 후반부는 목적지에 도달하는 방법에 대한 가르침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가장 많이, 또 가장 자주 바치는 기도인데, 습관적으로 아무 생각 없이 바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마다 예수님의 간절한 심정을 묵상하면서, 우리도 그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바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간절함에서 정성이 생깁니다. 정성을 다 쏟아서 바치는 기도가 참된 기도입니다. 간절함도 없고, 정성도 없이 습관적으로 바치는 기도는 ‘빈말’이 되어버립니다. 그런 ‘빈말’은 기도가 아닙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마태 6,7ㄱ)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는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희망하는 기도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완성’은 곧 우리 ‘구원의 완성’입니다. ‘구원의 완성’이 곧 신앙생활의 목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모두 믿고 회개해서 구원받기를 간절하게 바라셨습니다.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루카 13,34ㄷㄹ) 이 말씀은, 예루살렘만을 향해서 하신 말씀이 아니라,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 모두를 향해서 하신 말씀이고, 그들이 멸망을 향해서 가는 것이 안타까워서 하신 말씀입니다.
바로 그 안타까운 심정도 주님의 기도에 들어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기를 바라는 희망은, 종말이 빨리 오기를 바라는 희망이기도 한데, 예수님과 우리의 희망은, 심판의 날이 빨리 와서 이 세상이 망해버리기를 바라는 것은 결코 아니고, 죄인들이 모두 심판받고 멸망을 당하기를 바라는 것도 아닙니다. 종말과 심판의 날이 닥치기 전에 사람들이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사람들이 회개할 때까지 종말과 하느님 나라의 완성이 조금이라도 늦추어지기를 바라는 희망일 수도 있습니다.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는 신앙생활을 하는 방법을 나타내는 기도이고, 하느님 나라의 완성에 참여하는 방법을 나타내는 기도이기도 합니다. ‘구원의 완성’에 참여하려면 ‘일용할 양식을 나누는’ 사랑 실천을 해야 하고, 용서를 실천해야 하고, 유혹을 물리치고 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일용할 양식’을 청하는 기도는 하느님 나라에 잘 도착할 수 있도록 날마다 ‘힘’을 주십사고 청하는 기도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힘만으로는 하느님 나라에 도착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도와주셔야 합니다. “잘못한 이를 용서하오니”는 이웃을 용서하겠다는 다짐이고, 이웃을 용서할 힘을 주십사고 청하는 기도입니다. ‘용서’도 사람의 힘만으로는 안 될 때가 많기 때문에, 주님께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죄를 용서해 달라는 간청은 구원해 달라는 간청인데, 구원받기를 바란다면 먼저 회개해야 하고, 진심으로 회개하는 사람은 이웃을 용서하는 일도 당연히 실천하게 됩니다. 유혹을 물리치는 일은, 전적으로 주님의 도우심에 의지해야 하는 일입니다.(마르 9,29) ‘주님의 기도’는 유혹을 물리치려고 노력할 때 우리가 첫 번째로 바치게 되는 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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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은 루카 복음서에서 ‘기도’를 주제로 다루는 첫 번째 본문입니다(11,5-13 참조). 예수님의 제자들은 기도하는 것을 배우기를 바랐습니다. “주님, ……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이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루카 복음서 저자가 소개하는 ‘주님의 기도’는 마태오 복음서의 ‘주님의 기도’보다(6,9-13 참조) 간결합니다. 5개의 명령문으로 이루어진 기도문은 두 가지 기원(2인칭 단수)과 세 가지 청원(1인칭 복수)을 담고 있습니다. 먼저 하느님의 자녀로서 하느님의 거룩함을 찬양하고 그분의 다스림이 종말론적으로 성취되고 실현되기를 기원합니다. 다음에, 세 가지 청원이 이어지는데, 먼저 필요한 양식을 주시기를 청하며, 이어서 죄의 용서와 유혹에서 보호하여 주시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추가로 주목할 것은 제자들의 요구에 앞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11,1 참조). 이를 통하여 루카 복음서 저자는 예수님을 아버지께 기도하시는 분으로 묘사하면서(10,21 참조), 예수님께서 먼저 기도하셨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실 수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 의존하시면서 한결같고 견고한 믿음 안에서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알려 주신 ‘기도’에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확신, 그리고 겸손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기도를 바칠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알려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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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
우리는 지난 월요일부터 제1독서를 통해서 요나 예언서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요나서는 다른 예언서들과는 달리 이야기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요나 예언자의 모습도 여느 예언자들과 매우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다른 예언서에 등장하는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거부하지 않고 백성에게 하느님 말씀을 전하였지만, 백성은 그들의 선포를 귀 기울여 듣지 않았고 오히려 탄압하였습니다.
반면에 요나 예언자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피하여 도망가기도 하였으며, 단 한 번의 선포만을 하였을 뿐입니다.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요나 예언서 3장 4절)
더욱 놀라운 것은 예언서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예언자의 선포를 들은 사람들이,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부터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임금까지, 모두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의 시간을 가진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요나 예언서가 3장에서 끝났다면, 모든 것이 행복하게 끝나는 결말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4장에 이르러, 너무나 당황스럽게도 하느님 말씀을 선포하였던 요나 예언자가 불만을 터뜨립니다. 회개한 니네베 사람들도,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하느님도 마음에 들지 않아 투정을 부리는 요나 예언자의 모습이 오늘 제1독서에서 그려집니다.
이 이야기에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선민의식’과 하느님 구원의 ‘보편성’이 충돌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으니, 하느님께서는 우리만의 하느님이 되셔야 한다는 인간적 고집이 드러납니다.
반면에, 요나서의 중심에는 인간의 편협함을 뛰어넘는 하느님의 크신 사랑과 자애가 있습니다. 요나 예언서는, 우리의 편협한 시선과 생각이 하느님의 자비를 방해할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만의 하느님이 아닌, 세상 모든 이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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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분도회 왜관수도원 이성근 사바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유다인들도 의무적으로 바쳐야 하는 기도가 있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아마도 예수님의 기도가 그들의 기도와는 달리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었나 봅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다른 복음사가들에 비하여 유독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장면을 많이 전해 주고, 특별히 큰 사건을 앞에 두고서 기도하시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으로 기도하셨는지 알려 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기도 첫 줄에서부터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신 기도가 당시 사람들의 기도와 무엇이 달랐는지 금방 눈치 챌 수 있습니다. 그 기도는 바로 자녀로서 아버지께 바치는 기도라는 사실입니다.
첫마디의 ‘아버지’라는 호칭은 단순히 하느님을 부르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분이 바로 나의 그리고 우리의 아버지라는 신앙 고백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아람어로 ‘아빠’라고 부르셨고, 그 말은 육으로 맺어진 친아버지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유다인들은 그것을 신성 모독이라고 생각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로 우리 모두가 당신을 통하여, 당신 안에서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자녀들임을 깨우쳐 주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기도가 완벽한 기도이면서 동시에 우리 기도의 모범임을 발견합니다. 주님의 기도뿐 아니라 우리의 모든 기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그분 안에서 그분을 통하여 드리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감히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고, 그래서 우리가 청하는 것을 감히 받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임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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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면 할수록 더 잘하게 됩니다>
“기도는 하면 할수록 더 잘하게 됩니다. 기도를 자주 함으로써 기도를 배우게 됩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도 기도의 참맛을 느낄 수 없습니다.”(알베리오네) 그리고 기도는 “영적 생활의 기초입니다. 기도할 때 그대는 하느님과 통교하게 됩니다. 마치 전등이 발전기와 연결됨으로써 빛을 발하는 것과 같습니다.”(구엔 반 투안 주교) 그러므로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호흡해야 살듯이 기도해야 신앙의 삶을 지킬 수 있습니다. “비록 잘못에 떨어졌다 할지라도 기도하기를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그 잘못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힘은 꾸준히 계속되는 기도를 통해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예수의 성녀 데레사).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고, 일용할 양식을 주시며 죄를 용서하시고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하고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나라가 이 땅에 실현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나라는 하느님의 다스림을 의미하고 하느님의 다스림이란 결국 사랑의 삶을 말합니다. 요한 사도는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고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까롤로 까레또는 “사랑이 있으면 천국이요, 사랑이 없으면 지옥”이라고 말했습니다. 모든 일에 있어서 사랑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을 때 바로 그곳이 아버지의 나라입니다.
또한 우리는 매일 필요한 양식을 청해야 합니다. 양식은 단순히 밥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 일상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필요한 양식은 그날에 필요한 양식입니다. 잠언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마십시오. 먹고 살 만큼만 주십시오. 배부른 김에 하느님이 다 뭐냐? 하며 배은망덕하지 않게, 너무 가난한 탓에 도둑질하여 하느님의 이름에 욕을 돌리지 않게 해 주십시오.”(잠언30,8-9) 매일의 양식을 달라고 간절히 ‘날마다’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육적인 양식뿐 아니라 영적인 양식을 달라고 청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과 더불어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생명의 빵을 매일 모셔야 합니다. 미사는 다른 여느 기도 중에 가장 중요한 기도이며 영성체를 통해서 가장 완전하게 주님과 하나가 되는 은총의 혜택을 입게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 앞에 “하느님, 죄 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18,13) 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실수와 잘못 안에 용서받아야 할 연약함을 지니고 살기 때문입니다. 또한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유혹은 믿음으로부터 멀어지는 위험을 의미합니다. 그 유혹은 항상 있게 마련입니다. 예수님도 유혹을 받으셨고 말씀으로 유혹을 물리쳤습니다. 사실 우리의 진보는 유혹을 통해 이뤄지고 유혹을 통해 자신을 완전히 알게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 앞에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겸손한 사람은 기도하게 됩니다.
성 레오교황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성인이여, 기뻐하십시오. 당신께 면류관이 가까이 있습니다. 죄인이여, 기뻐하십시오. 당신은 죄의 용서에로 초대받았습니다. 이방인이여 용기를 내십시오. 당신은 생명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옛 생활을 청산하고 낡은 인간성을 벗어버리고 그리스도의 탄생에 참여하게 된 자들로서 육신의 행위를 끊어버립시다. 부패한 행실로 말미암아 이전의 비참한 상태로 돌아가지 않도록 조심합시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를 용서받아야 하는 과거와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갈망하는 현재와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는 미래의 다스림이 하느님 안에 있음을 잊지 않고 자비와 사랑, 섭리의 하느님과 더불어 기뻐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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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사람은 다음 네 가지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1) 나도 알고, 남들도 아는 나의 모습.
2) 나는 알지만, 남들은 모르는 나의 모습.
3) 나는 모르지만, 남들은 아는 나의 모습.
4) 나도, 남들도 모르는 나의 모습.
대부분 첫 번째와 두 번째 모습에 집중합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에 대해 자기가 제일 잘 안다고 여기며, 그중에 어떤 모습은 다른 사람들이 제대로 알아주지 않는다며 불평합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 안에 세 번째와 네 번째 모습도 있음을 인정합니다. 즉, 자기도 모르는 새로운 나의 모습이 있고, 때로는 남들이 나에 대해 더 잘 알수도 있음을 받아들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남들에게 거짓된 모습을 보이려 하기보다 자기 모습을 더 잘 알기 위해 노력합니다. 반대로 어리석은 사람은 다른 이가 바라보는 자기 모습에만 더 큰 관심을 두기에 늘 거짓과 위선 속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진실로 지혜롭기를 원하십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지혜롭다고 인정받던 바리사이, 율법학자 등의 종교 지도자들을 향해 ‘위선자’라는 표현으로 꾸짖으시며, 이런 거짓된 지혜로움에서 벗어나길 바라십니다. 위선자란 자기를 세상에 숨기고 더 나아가 하느님께도 숨기는 사람이었습니다.
거짓된 나를 숨기지 않는 참된 겸손이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먼저 나를 잘 알 수 있도록 깊은 묵상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기도를 직접 가르쳐주십니다. 그 기도는 우리가 매 미사 때 바치는 ‘주님의 기도’입니다. 그 시작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길 바라는 것이었습니다. 누군가를 높이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가 낮아져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시에는 ‘하느님’이라고도 함부로 부를 수 없었는데, 이 하느님을 감히 ‘아버지’라고 말씀하시지요. 그만큼 하느님과 우리의 간격을 좁혀 주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모두 잘 알고 계시고, 사랑으로 함께하시는 분임을 ‘아버지’라는 표현으로 강조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사랑으로 가까이 오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 사랑에 대답해야 할까요? 자기를 숨기는 데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 겸손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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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기도>
루카 11,1-4 (주님의 기도)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그분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기도>
기도는
삶의 방향을
곧게 바꾸는 것
나에게서
하느님께로
나에게서
우리에게로
기도는
삶의 지향을
바르게 세우는 것
나의 이름에서
하느님의 이름으로
나의 나라에서
하느님의 나라로
기도는
삶의 품을
곱게 넓히는 것
홀로에서
더불어 함께로
가름에서
보듬음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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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같이 회개하고 같이 행복하라는>
잘 아시다시피 요나는 자기가 주님의 예언자로 니네베에 파견되는 것이 싫었는데 그 이유가 바로 자기의 회개 선포로 니네베가 회개하는 것이 싫었고, 그래서 주님의 자비가 그들에게도 내리는 것이 싫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저는 당신께서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신 하느님이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크시며, 벌하시다가도 쉬이 마음을 돌리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얘기가 되는 것입니다.주님께서 자비하시고 분노에 더디신 것은 좋은데 나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한테 그러시는 것은 좋지만 내가 싫어하거나 미워하는 적대자에게도 그러시는 것은 싫습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서 하나의 의문이 듭니다.왜 이런 사람을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로 삼으셨는지? 이런 사람은 우리나 별로 다를 바가 없지 않습니까?
우리도 나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지만 누군 안 받았으면 좋겠다고 하고, 나는 용서받아도 내게 원수인 사람은 받지 않게 되기를 원하지요.
이런 우리이기에 주님께서는 오늘 기도를 가르쳐주시면서 우리가 원수를 용서하듯 우리를 용서해달라고 청하라고 하셨지요.
저는 주님의 기도 이 부분과 관련하여 여러 차례 질문받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듯 우리 서로 용서케 해달라고 해야지 어찌 우리가 용서하듯이 우리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는지 말입니다.
물론 하느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듯 우리도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가 원수를 용서하지 않으면 그런 우리를 용서하시지 않겠다는 말씀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용서치 않는데 당신이 먼저 용서하시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왜 그러시는 것입니까?
내가 용서하기 싫은 원수를 하느님께서 용서하시면 그런 하느님이 좋고 그런 하느님을 내가 용서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내가 먼저 용서할 기회를 하느님께서 가로채시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의 용서 없이도 하느님은 용서하실 수 있으십니다. 오늘 요나는 용서할 마음도 하느님 자비를 받게 할 마음도 없지만 하느님은 니네베인들을 용서하시고 자비를 베푸시고자 하시잖아요?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굳이 요나에게 니네베의 회개를 선포케 하십니다. 그것은 요나가 회개를 선포함으로써 자신도 회개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요나와 다를 바 없는 우리도 회개의 선포자가 되라는 뜻이고, 회개의 선포자가 되기 위해 원수를 용서치 않으려는 내가 먼저 회개하라는, 그에게 하느님 자비가 내리는 것을 싫어하는 내가 먼저 회개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먹기 싫은 음식을 강요하듯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하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그래야 내가 행복하고 모두가 행복하기에 그렇게 하라는 행복 권고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를 선포하기 위해 먼저 회개하라는 그럼으로써 같이 회개하고 같이 행복하라고 주님의 초대를 받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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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의 기도>
-온 인류에게 주신 참 좋은 선물-
어제 구입한 신간 서적, 세계적 신학자 스위스의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가 지은 “발타사르, 예수를 읽다”를 자기 전 반 읽었습니다. 결론은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다 알고 계신다.”는 내용이요 크게 위로를 받았습니다.
여기에 저는 하나 더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다 사랑하신다”를 첨부합니다. 우리 모두를 다 알고 계시는, 우리 모두를 다 사랑하시는 예수님께서 오늘 당신의 노하우,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주님의 기도는 믿는 이들은 물론 모든 인류를 위한 기본적이요 보편적인 가르침의 기도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 표지엔 제목과 더불어 한마디가 더 첨부되어 있었습니다.
“하느님을 진정으로 알려거든 먼저 사랑하십시오.” 기도에 우선적 조건이 하느님 사랑, 예수님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사랑할 때 기도하게 되고, 기도할 때 알게 되고, 알게 될 때 살게되니, 사랑-기도-앎-삶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여 끊임없이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날로 주님을 알게 되고, 날로 생명력 넘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의 깊이는 하느님의 깊이입니다. 늘 바쳐도 늘 새로운 깨달음을 줍니다. 사람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하느님 없이는 아무리 사람이 누군지 물어도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주님의 기도에 나오는 아버지 하느님은 그리스도교인들의 아버지일뿐 아니라 온 인류의 아버지임을 깨닫습니다.
이는 오늘 제1독서 요나서를 봐도 담박 알 수 있습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로서 요나서는 끝나지만 하느님의 유머스럽고 익살스러운 모습에 단순 담백한 요나를 생각하면 저절로 웃음짓게 됩니다.
요나라는 인물을 통해 인간의 양면성이 절묘하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니느베의 구원을 위해 회개를 선포했지만 내심 심판을 기대했다가 구원되는 모습에 기뻐해야 할 텐데 반대로 매우 화가나서 그 실망을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이제 주님, 제발 저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참 옹졸하고 편협한 그러나 솔직하고 담백한 요나에게 하느님의 참 교육이 시작됩니다. 이방인들을 포함 모두가 자비하신 하느님의 관심 대상임을 가르치십니다. 참으로 끊임없이 확장되어야할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시야요 이해지평임을 깨닫습니다.
“네가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하느님은 요나에게 물으신 다음 아주 재미있는 아주까리 일화를 통해 요나에게 산 교육을 시키십니다. 시종일관 미소짓게 하는 아주까리 일화입니다. 아주까리는 순식간에 자라나 요나에게 그늘을 만들어 뙤약볕을 가려주자 좋아하던 요나는, 하느님이 아주까리에 벌레를 보내어 아주까리를 쏠게 하자 말라버리고 뙤약볕에 노출되자 열화같이 분노합니다.
참으로 그 옛날부터 하느님은 온 인류의 하느님이심이 입증되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요나의 감정적 대응에 전혀 동요함이 없이 차분히 타이르시고 깨우치시며 지혜로이 대응하십니다.
“너는 네가 수고하지도 않고 키우지도 않았으며, 하룻밤 사이에 자랐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버린 이 아주까리를 그토록 동정하는구나! 그런데 하물며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도 모르는 사람이 십이만 명이나 있고, 또 수많은 짐승이 있는 이 커다란 성읍 니네베를 내가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느냐?”
이렇게 요나서는 끝납니다. 요나는 물론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도 얼마나 동정과 연민의 하느님이신지 우리를 교육하는 요나서입니다. 참사람이 되는 공부중의 평생공부가, 가장 중요한 공부가 하느님을 아는 공부입니다. 하느님을 알아야 비로소 나를 알 수 있고 겸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하느님 공부에 참 좋은 자료가 바로 주님의 기도입니다.
오늘 주님의 기도는 크게 두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기도의 전반부는 아버지와 우리의 관계, 그리고 후반부는 일상의 삶에서 필수적 요소의 청원들입니다. 주님의 기도에는 그대로 예수님의 단순하고 본질적 가난한 삶이 그대로 압축되어 있습니다. 참으로 주님의 기도를 날로 깊이 바쳐가면서 우리의 삶은 더욱 주님을 닮아 단순하고 본질적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위치를 깨달아 앎으로 날로 우리를 겸손하고 단순하게 하는 주님의 기도입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부단한 회개를 통해 내 중심의 삶에서 아버지 중심의 삶으로 부단히 전환해야 함을 배웁니다. 온 인류의 아버지이시니 우리는 모두 아버지의 자녀들이며 서로는 형제자매들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온인류가 아버지의 한가족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에 따른 우리의 의무와 책임이 마땅히 주어집니다. “아버지의 자녀답게”, 존엄한 인간 품위의 삶을 살아야 할 의무이자 책임입니다. 거룩하고 자비하신 아버지를 닮아 거룩하고 자비로운 자녀로서 살아야 할 책무요 이렇게 참 자녀답게, 참 사람답게 살라고 우리 삶의 좌표로 주어진 성인들입니다. 이어 기도의 후반부는 인간 품위를 위한 최소한의 기본적 필수적 세가지 청원입니다.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하루하루 날마다 일용할 양식의 간절한 청원과 더불어 일용할 양식을 얻기 위한 우리의 노력도 함께 해야 함을 봅니다. 이어 주님의 용서를 받기 위해 우리의 이웃의 용서를 위한, 또한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한 우리의 자발적 노력이 참으로 절실합니다.
일방적으로 하느님 은총에 맡겨버리는 무책임한 자세가 아니라 최선을 다해 하느님 은총에 협조해 드리는 우리의 책임적 자세입니다. 사람의 운명은 하느님의 파트너가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100% 하느님 손에 달린 듯이 기도하고, 100% 내 손에 달린 듯이 노력하라는 진인사대천명의 믿음의 자세를 촉구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온몸과 온맘으로, 온힘으로 간절히 주님의 기도를 바치며 실천해 갈 때 우리는 예수님을 닮은 꼴로 변모되어 주님의 자녀다운 삶이겠습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날로 “주님의 기도” 청원대로 우리를 변모시켜 주시어, 우리 모두 하늘 나라를 실현하며 아버지의 자녀답게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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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루카11,1a)
<기도의 본질!>
오늘 복음(루카11,1-4)은 '주님의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루카11,1b)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하시면서,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직접 가르쳐 주신 '유일하고도 가장 완전한 기도'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아버지"라는 말로 시작되는데, 이는 주님의 기도가 '하느님과의 대화'이며, '하느님 아버지께 드리는 청원기도'라는 의미입니다.
오늘 복음인 루카 복음사가가 전하는 주님의 기도는 다섯 개의 청원기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바치고 있는 주님의 기도는 '일곱 개의 청원기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를 통해서 본 기도의 본질은 '하느님 아버지와의 대화인데, 오늘 복음 묵상은 이 대화를 어떻게 해야 할 지에 대한 '대화의 두 가지 방법'에 대한 묵상입니다.
첫째, '솔직한 대화'입니다. 대화는 거짓과 가식이 없어야 합니다. 사랑과 신뢰가 크면 클 수록 진실된 대화,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갖고 대화를 합니다. 하느님을 정말로 사랑한다면 그렇게 대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프면 아픈 마음으로, 기쁘면 기쁜 마음으로 대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대화의 성숙도'입니다. 어린아이일 수록 자기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기도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기도의 모범'입니다.
가장 완전한 기도인 주님의 기도를 습관적으로 바치지 말고 온 마음과 정성을 담아 바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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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JGIuOs_BE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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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주님,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루카 11, 1)
나날이
기도가 필요한
삶임을 절실히
깨닫습니다.
기도는
기도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로부터
기도는
시작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주님의 기도는
주님의 삶이며
주님의
사랑입니다.
이처럼
주님께서 만드신
공동체는
기도 없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공동체의 뼈대도
기도이고
우리 개인의 삶도
기도로 익어갑니다.
기도로
아버지 하느님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당신의 기도로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온전히
하느님의
거룩하신 이름이
드러나도록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맡겨드립니다.
우리에게 오시는
아버지의 나라는
예수님을 통해
드러나는
사랑의 나라
용서의 나라입니다.
매순간
아버지 하느님을
향하는 마음이
기도입니다.
청원의 기도는
하느님을
우리 안에 모시는
가장 큰 기쁨입니다.
하느님을
모시면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며
우리를
살게 하시는
놀라우신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살게 하시는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서로의 잘못을
용서하게 하시며
우리 자신을
보게 하십니다.
용서를
청할 수 있는
사람만이
용서를
체험합니다.
그래서
용서는
하느님과
함께하는
가장 큰
신비입니다.
나약한 우리가
계속하여
빠져드는
유혹의 구렁텅이도
우리 힘이 아닌
아버지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불가능함을 기도로
깨닫습니다.
주님의 기도로
아버지 하느님과
우리는 사랑과
용서의 결합체이며
감사와 봉헌의
공동체임을
체험합니다.
오늘을 선물로
주신 하느님께
주님의 기도로
새날을 새롭게
시작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닮아야 할
주님의 삶입니다.
기도로 닮아가는
우리들 삶입니다.
기도로 열리고
기도로
흐릅니다.
사랑은
진심으로
우리를 위해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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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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