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3일(금)
* 시작 기도
주님...
주님께서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과 더불어 새 언약을 맺으리라 하셨습니다.
새 언약이라 함은 첫 언약 곧 옛 언약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며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히 8:8, 13).
새 언약은 완전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요 유다 집과 이스라엘 집은 육신의 혈통을 따라 난 자들이 아니라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자들이 진짜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이들이야 말로 진짜 이스라엘 자손임을 천명하는 것입니다(갈 3:7, 29).
이 새 언약 백성들은 그 마음에 주의 법을 두고 그 생각에 기록하여 주께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은 주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하여 그의 백성이요 자녀된 자로서 오늘도 주님이 주신 생명의 양식을 먹으며 살아야 하기에 생명인 주의 말씀을 얻어먹습니다.
그 양식이 없이는 살 수 없사오니 그 양식으로 나의 주린 배를 채우소서.
주의 말씀을 사모하여 수가성 여인이 얻은 생수를 나 또한 마시기 원합니다.
그 은혜가 내게 충만하기 원합니다.
내 안에서 나오는 나의 의가 아니라 주님이 공급하시는 영원한 은혜로만 살게 하소서.
내게서 나오는 것은 썩어지고 쇠할 것뿐이오니 그런 것은 십자가에 못 박고 내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 충만한 자 되게 하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십자가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워주소서.
나는 이 하루도 주님과 연합하여 동행하는 주의 소유입니다.
오직 내게서 주의 향기가 풍겨나는 자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왕상 12:21-33
제목 : 여로보암의 유사 신앙, 나의 유사 신앙.
21 르호보암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유다 온 족속과 베냐민 지파를 모으니 택한 용사가 18만 명이라. 이스라엘 족속과 싸워 나라를 회복하여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에게 돌리려 하더니
22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사람 스마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23 솔로몬의 아들 유다 왕 르호보암과 유다와 베냐민 온 족속과 또 그 남은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24 여호와의 말씀이 너희는 올라가지 말라. 너희 형제 이스라엘 자손과 싸우지 말고 각기 집으로 돌아가라. 이 일이 나로 말미암아 난 것이라 하셨다 하라 하신지라. 그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따라 돌아갔더라.
25 여로보암이 에브라임 산지에 세겜을 건축하고 거기서 살며 또 거기서 나가서 부느엘을 건축하고
26 그의 마음에 스스로 이르기를 나라가 이제 다윗의 집으로 돌아가리로다.
27 만일 이 백성이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성전에 제사를 드리고자 하여 올라가면 이 백성의 마음이 유다 왕 된 그들의 주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서 나를 죽이고 유다의 왕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리로다 하고
28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의 신들이라 하고
29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둔지라.
30 이 일이 죄가 되었으니 이는 백성들이 단까지 가서 그 하나에게 경배함이더라.
31 그가 또 산당들을 짓고 레위 자손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고
32 여덟째 달 곧 그 달 열다섯째 날로 절기를 정하여 유다의 절기와 비슷하게 하고 제단에 올라가되 벧엘에서 그와 같이 행하여 그가 만든 송아지에게 제사를 드렸으며 그가 지은 산당의 제사장을 벧엘에서 세웠더라.
33 그가 자기 마음대로 정한 달 곧 여덟째 달 열다섯째 날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절기로 정하고 벧엘에 쌓은 제단에 올라가서 분향하였더라.
* 나의 묵상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이 되어 백성들을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지 않고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젊은 소년들의 자문을 받아 행하였다.
이에 여로보암을 비롯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을 위한 선정을 베풀지 않는 르호보암을 대적하여 유다와 베나민 지파를 제외한 나머지 열 지파가 똘똘 뭉쳐서 돌아가 버린다.
이에 르호보암이 예루살렘에서 유다와 베냐민 지파의 용사들을 불러 모았는데 그 숫자가 180,000명이다.
르호보암은 이들 용사로 돌아간 이스라엘과 싸우려 하였다.
바로 그 때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사람 스마야에게 임하여 유다와 베냐민 지파의 용사들에게 전달한다.
그 내용은 이러하다.
이 일은 나 여호와로 말미암은 것이므로 너희는 싸우러 올라가지 말고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18만의 용사들은 이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집으로 돌아갔다.
한편 여로보암은 에브라임 산지에 세겜 성을 건축하고 거기서 살다가 부느엘 성을 건축하였다.
그의 마음에 갑자기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온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제사를 드리러 가면 혹시 그들이 다윗의 집 곧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두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는 맨 위쪽에 있는 단에 세우고 하나는 예루살렘 바로 위에 있는 벧엘에 세웠다.
르호보암은 백성들에게 선포하기를 이제는 더 이상 제사를 하러 예루살렘까지 갈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너희들이 살고 있는 곳에서 가까운 제단에 가서 내가 만든 금송아지 곧 애굽에서 너희를 인도하여 올린 신에게 제사하면 된다고 하였다.
이 일은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되었다.
당시는 중앙 성소인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제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법이다.
그런데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만들어 놓은 금송아지 신상에게 제사하도록 한 것이다.
이뿐 아니라 여로보암은 산당을 지어놓고 제사장들을 세우는데 레위지파가 아닌 다른 지파 사람으로 제사장을 세웠다.
절기 역시 하나님이 정한 절기가 아니라 그와 비슷하게 정해서 지키도록 하였다.
예를 들면 초막절은 유대력으로 7월15일인데 이와 비슷하게 8월15일로 정한 것이다.
이렇게 행한 여로보암의 신앙 행위를 가리켜 유사 신앙이라 한다.
여로보암이나 그의 통치를 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 행위는 신앙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지극히 종교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행위적인 일의 대부분이었다.
제물을 잡아서 바치고 괴로울 때에는 옷을 찢는 등의 행위가 신앙을 나타내는 여부가 되었다.
여로보암은 하나님께서 북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주셨다.
그리고 그가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게 주의 율례와 계명을 지키면 그에게 견고한 집을 세울 것이며 이스라엘을 주겠다고 말씀하셨다(왕상 11:38).
그런데 이런 약속을 받았으면서도 그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온 데 간 데 없이 저버리고 자기 마음대로 행한 것이다.
분명한 것은 그가 행한 행동들은 하나님의 법을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행동의 기준은 율법이었다.
이를 완전히 벗어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정하신 그 율법의 기준에 비슷하게 짜 맞추었다.
초막절 절기도 7월15일이 아닌 8월15일로, 산당을 짓고 이를 섬기는 제사장들도 세우는데 레위 지파가 아닌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일반 지파 사람들을 세웠다.
오늘날 기독교에 유독 이단이 많다.
그것은 진품에 유사품이 많은 이치이다.
이단이란 다 같은데 끝이 다른 것을 말한다.
따라서 기독교의 교리를 비슷하게 해서 자기들도 기독교의 범주 안에 있다고 주장하는 논리이다.
이들은 비단 여호와의증인이나 통일교 신천지 같은 단체만 이단이 아니다.
복음을 바르게 알지 못하고 그저 세상의 여타 종교들처럼 따라가는 것이야 말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이단에 다름 아닌 것이다.
문제는 내가 바로 이런 유사 신앙을 조장하고 믿어왔던 자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주일을 성수한다고 하면서 마음은 딴 데 두고 몸만 일요일에 교회에 가서 앉아 있으면 된다는 식의 신앙의 모습을 행했던 자가 바로 나였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나의 목양을 받는 성도들이 그들의 신앙은 어떠하든지 상관없이 주일에 예배당에 와서 앉아 있으면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다고 판단하는 식이었다.
나는 목사이기에 종교적인 명분은 유지하면서 성도들의 편의를 도모하는 식의 종교행위를 행했던 자이다.
주후 313년에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로마와 그 지배를 받는 속국에 기독교를 공인하였다.
이 일로 그는 세계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나는 학생 때 기독교인으로서 이런 일을 행한 콘스탄틴 대제를 굉장히 존경하였다.
그런데 나중에 그가 행한 일이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본받을 일이 아님을 알게 되었을 때는 그 행위가 바로 여로보암의 유사 신앙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았을 때이다.
콘스탄틴 대제는 그의 어머니 헬레나가 예수를 믿는 기독교인이었다.
그 어머니가 하나님을 믿는 모습을 보니 절대 순종의 모습이었다.
이를 지켜본 황제는 기독교 신앙을 로마를 통치하는데 사용하고자 한 것이다.
그래서 카타콤과 같은 음지에 있던 기독교를 공인하여 양지로 나오게 하였다.
이러한 공인이 있기 전에는 기독교인의 비율이 전체의 4%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음지에서 양지로 나온 기독교인들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에게 예배당도 지어주고 신부나 주교 그리고 추기경 등 교회의 직분을 허락하였다.
이렇게 하면서 교회의 직제를 체계화시켰다.
이런 것들이 교인들을 관리해 나가도록 한 것이다.
교인은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여 예수를 바르게 믿도록 하는 것이 그 본분일진대 관리형으로 바꾼 것이 바로 콘스탄틴이 행한 유사 신앙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관리형 교회가 오늘날에도 얼마나 많은가?
내가 바로 이런 관리형 교회를 인도했던 장본인이다.
복음을 알지 못할 때는 이렇게 관리를 잘 해서 그 숫자를 늘리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어찌 되었든 교인 숫자를 늘리는 것이 최고의 목표였기 때문이다.
이런 나를 하나님께서는 그냥 두고 보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공의로 심판하셨고 그 심판을 통하여 몸에는 암이 찾아왔고 목회 또한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결국 몸도 그렇고 목회 역시 무덤 속으로 들어갔다.
그 무덤 안에서 주님의 생명을 얻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내가 아무리 관리를 잘하여 숫자가 엄청나게 불어난다 한들 그것이 과연 하나님께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그것은 오직 나의 이름을 세상에 드러내는 유익만 있을 뿐이다.
하여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나에게 그대로 드러내신 것이다.
그 심판은 나를 살리는 심판이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은 언제나 옳다.
나는 오늘도 주님의 심판이 언제나 옳으심을 인정하며 주님과 함께 영생을 누리는 하루가 되길 소망하며 말씀으로 교제와 사귐 안으로 들어간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내가 누구를 탓할 수 있겠습니까?
여로보암도 아니고 콘스탄틴도 아닙니다.
죄인 중에 괴수는 바로 저인데 말입니다.
이런 나를 주님의 공의로 심판하여 주신 것이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내 육신이 죽기 전에 먼저 창세전 언약을 통하여 주님의 뜻을 알게 하심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일인지 모릅니다.
주님의 신실하심으로 창세전에 나를 택하신 그 은혜 앞에 머리를 조아립니다.
면목 없음과 송구함으로 머리를 조아리며 주님께 나아가오니 이 종을 불쌍히 여기사 주의 긍휼의 옷으로 나를 덮으소서.
복음을 알기 전에는 내 마음대로 행하였을지라도 이제는 내 뜻이 아닌 오직 주님의 뜻을 알고 날마다 영생을 누리는 자로 살게 하옵소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주의 복음을 증거하는 삶을 살기 원합니다.
나를 주의 강한 손으로 붙들어 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