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년 월일: 1942년 1월 25일 출생지: Mozambique 국가 대표팀: 포르투갈 포지션: 포워드 국제경기 데뷔: 1961 대 룩셈부르크 국제경기와 득점: 74/46
에우제비오는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은 첫번째 아프리카 선수다. 에우제비오는 모잠비크의 로렌코 마르퀴즈에서 1942년에 태어났다. 에우제비오가 태어날 당시 모잠비크는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다. 포르투갈의 명문 클럽인 벤피카, 스포르팅, 포르투 같은 팀들은 식민지였던 모잠비크나 앙골라에 축구 학교를 세워 유망주를 육성 한 뒤 본국의 팀에서 뛰게 하는 ‘팜 시스템’을 활용하고 있었다. 에우제비오가 축구선수길로 접어든 것도 예외는 아니었다. 에우제비오는 10세 때 스포르팅 클럽의 유소년 팀에 입단해 활약했다. 에우제비오의 뛰어난 실력은 포루투칼의 모든 팀들의 주목을 받았고, 19세가 되던 해 스포르팅 클럽이 에우제비오와 정식 계약을 하기 위해 에우제비오를 포르투갈로 부를 때, 스포르팅의 라이벌 벤피카 팀은 에우제비오의 재능을 탐낸 나머지 에우제비오를 납치, 입단시켰다.
에우제비오를 비롯한 아프리카 선수들이 주축이 된 벤피카 팀은 포르투갈 리그 뿐 아니라 유로피언컵에서도 맹활약했다. 에우제비오는 1962년 벤피카가 유럽 챔피언스 컵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5-3으로 이길 때 2골을 기록하며 맹활약했다. 또 벤피카에서 뛰던 13년동안 벤피카가 7차례의 리그 우승을 하는데도 큰 기여를 했다. 이러한 활약으로 1965년엔 프랑스의 축구잡지 ‘프랑스 풋볼’이 선정하는 '유럽 최우수 선수상’을 받았다.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에우제비오는 예선전에서 브라질은 3-1로 격파하는 데 일등공신이 되었다. 이 활약으로 에우제비오는 ‘새로운 펠레’라는 극찬을 들었다. 북한과의 8강전에서 에우제비오는 0-3으로 뒤지고 있던 상황에서 4골을 몰아치며 5-3의 대역전극을 일궈냈다.
에우제비오는 벤피카 팀과의 장기 계약 때문에 벤피카 팀에서 오랫동안 뛰었다. 그가 풀려난 것은 북미프로리그가 시작되면서였다. 보스턴과 토론토 등에서 활약한 에우제비오는 결국 32세때 무릎 부상으로 축구화를 벗었다.
에우제비오는 46차례의 A매치에서 38골을 넣었고 프로 경기에선 624경기에 출장해 405골을 기록했다. 그는 선수 은퇴 후 포루투칼의 TV해설자로 명성을 높였고 벤피카 팀의 코치로도 활약했다. 1992년 벤피카 팀은 에우제비오의 업적을 기리고자 홈구장 정문에 에우제비오의 동상을 세웠다.
[루이스 피구]
피구는 아버지 안토니오, 어머니 마리아 호안나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외동아들이다. 금지옥엽처럼 귀하게 자라난 그는 축구도, 공부도 모두 잘하는 만능 소년이었으며 특히 수학에 재능이 있었다고 한다. 만약 축구 선수가 되지 않았다면 심리학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만큼 그는 여러가지 분야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사회 문제에 대해서도 항상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으며 마약과 전쟁은 가장 혐오하는 것들로 꼽힌다.
포르투갈어, 영어, 스페인어를 완벽하게 구사할 줄 알며 얼마전부터는 스웨덴어도 조금씩 익히게 되었다. 이는 스웨덴 출신의 아내 헬렌의 영향이 크다. 음식은 후라이드 치킨, 그리고 오리고기를 곁들인 밥을 좋아한다. 음주를 즐기지는 않는다. 그는 술보다 우유나 콜라를 더 선호하는 편이다. 영화는 가장 좋아하는 것 중 하나에 속한다. 코미디 또는 액션물을 좋아하며 마이클 더글러스와 미셸 파이퍼의 열렬한 팬이기도 하다. 책은 주로 베스트셀러를 골라 읽으며, 음악은 락을 즐겨듣는다. 전설적인 '퀸'을 매우 사랑한다.
육상 선수 출신이기도 한 그는 주력이 중요시되는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에서 뛰어보고 싶은 소망을 갖고 있다.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유럽 최고의 선수는 대표팀 동료이자 절친한 친구인 마누엘 루이 코스타이다. 그러나 함께 플레이했던 선수들을 통틀어서 얘기한다면 호나우두를 최고로 꼽는다.
얼마전부터 골프 실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F1 레이스는 오래전부터 좋아했고, 슈마허는 존경의 대상이다. 선수 생활의 마지막은 조국 포르투갈에서 보내고 싶다는 포부를 밝힌 바 있으며, 은퇴 이후에는 호텔이나 각종 상점을 세우는 사업을 계획중에 있다고 한다.
In Sporting Lisbon
포르투갈 알마다의 작은 가정에서 태어난 피구는 에우제비우를 존경하는 평범한 소년이었다. 오스 파스틸라스(Os Pastilhas)라는 지역팀에서 길거리 축구 선수로 활약하던 시절에 두각을 나타냈고, 스포르팅 리스본 팀에 입문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축구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급속도의 발전을 거듭한 그는 16세때 1부리그에 데뷔했고, U-16 세계 유소년 선수권 대회 엔트리에 발탁되면서 포르투갈을 정상의 자리에 올려놓기도 했다.
91' 세계 청소년 대회의 우승은 피구, 루이 코스타, 조앙 핀투등 이른 바 '골든 제너레이션'으로 불리우는 젊은이들의 작품이었다. 수많은 축구 스타들이 거쳐간 이 대회에서 최고의 활약을 선보인 피구의 다음 과제는 소속팀 스포르팅 리스본의 주전 자리를 꿰차는 것이었다.
92/93 시즌부터 핵심적인 선수로 자리매김 한 그는 지금과 다르게 중앙 공격형 미드필더, 또는 세컨드 스트라이커로 기용되며 적지 않은 득점을 올리기도 했다. 94/95 시즌부터는 23세의 젊은 나이에 주장 자리를 책임질 정도로 탁월한 리더쉽을 자랑했고, 항상 이성적인 행동으로 주위의 찬사를 받았다. 이제 포르투갈 최고의 스타로 떠오른 피구는 보다 큰 선수가 되기 위해 해외 진출을 고려해야 할 시점에 놓여있었다.
세리에A의 유벤투스와 파르마는 가장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던 팀들이었다. 둘 중 하나가 새로운 행선지로 결정될것처럼 보였지만, 에이전트와 선수가 양 팀과 이중 계약을 맺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게 되면서 '2년간 이탈리아 클럽으로의 이적 금지'라는 중징계를 받아야만 했다. 최고의 스타들이 즐비한 이탈리아 무대를 꿈꿔오던 피구에게는 커다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이것은 운명이었다. 스페인의 명문 바르셀로나 팀으로 '고려하지 않았던 이적'을 감행한 그는 결과적으로 당시의 선택이 최선의 방안이었음이 분명했다. 만약 그가 별다른 문제없이 유벤투스나 파르마로 이적했다면 혹시 지금의 피구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를일이 아닌가? 95년 여름, 210만 달러의 예상보다 저렴한 이적료를 기록하며 요한 크라이프 감독이 이끄는 바르셀로나에 입성하게 된 그의 앞에는 더할나위없이 화려한 미래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In Barcelona
희대의 명장 요한 크라이프는 육상 선수 경력이 있는 피구에게 오른쪽 날개의 임무를 부여했다. 이때부터 날카로운 크로스와 타고난 주력으로 수비수들을 괴롭히는 그의 숨겨진 재능이 유감없이 발휘되기 시작했다. 뒤이어 지휘봉을 잡은 바비 롭슨, 루이스 반 할도 변함없는 지지를 보냄으로써 피구는 누 캄프의 새로운 영웅으로 떠오를 수 있었다. 사람들은 화려했던 과거의 스타 미카엘 라우드럽과 스토이치코프를 서서히 기억속에서 지워가고 있었다.
유로 96에서 8강에 올랐던 포르투갈 대표팀의 월드컵 본선 진출 실패는 그에게 커다란 상처가 되었다. 팀 동료들이 뛰는 모습을 TV를 통해 지켜보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월드컵을 전후로 해서 피구는 더욱 성숙해지고 있었다. 홈에서 펼쳐졌던 레알 마드리드와의 'Super Classico'에서 선보인 그의 기량은 분명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호베르투 카를로스는 유연하게, 그리고 폭발적으로 오른쪽을 공략하는 피구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다. 바르셀로나는 3:0으로 승리했고, 98/99 시즌 챔피언에 오르며 리그 2연패의 위업을 달성하는 영예를 누렸다.
이듬해에도 그는 최고의 활약을 펼쳤다. 히바우두가 반 할 감독과 갈등을 일으키며 벤치로 물러나 있던 사이, 피구는 매경기마다 최고의 활약을 펼치며 팀을 고비에서 구해내는 영웅으로 떠올랐다. 바르셀로나의 써포터들은 연일 '피구, 피구'를 연호했다. 오죽하면 써포터즈의 이름이 '피구(Figo)'였을까!
유로 2000 대회가 다가오면서 전성기를 맞이한 피구는 자연스럽게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지네딘 지단, 데이빗 베컴등과 함께 최고의 스타로 각광받았고, '골든 제너레이션'이 전성기로 접어든 포르투갈은 과거의 영광을 재현시킬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맞이하고 있었다. 루이 코스타, 세르지우 콘세이상, 조앙 핀투, 그리고 루이스 피구가 주축이 되는 포르투갈의 공격력은 화려하다못해 사치스러움이 느껴질 정도였으니 말이다.
Euro 2000
유로 2000에서의 피구는 결코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다. 2:0으로 뒤지던 잉글랜드와의 첫경기에서 환상적인 중거리 슈팅으로 추격의 발판을 마련하며 포르투갈의 역전승에 일조했던 그는 루마니아와의 2차전에서도 종료 직전에 터진 코스팅야의 헤딩골을 어시스트하며 결정적인 순간마다 힘을 발휘하는 저력을 선보였다.
하이라이트는 터키와의 8강전이었다. 마치 컴퓨터처럼 단 한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피구의 거리 계산은 누노 고메스라는 새로운 스타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고메스는 두 골을 넣었고, 이는 모두 피구의 어시스트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왼쪽과 오른쪽을 가리지 않고 선보였던 번개같은 돌파력, 수비수들을 농락시키는 유연한 발놀림, 지체없이 골문을 위협하는 위력적인 중거리 슈팅까지. 경기장에 모여든 축구팬들의 탄성이 터져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포르투갈을 우승 후보로 점찍었고, 피구는 대회 최고의 스타로 떠오르는 듯 했다.
지네딘 지단이 이끄는 프랑스와 맞붙은 포르투갈의 전사들은 용감했다. 왼쪽 날개로 출전한 루이스 피구는 세계 최고의 수비수 중 한명으로 손꼽히는 릴리앙 튀랑을 상대로 훌륭한 기량을 선보이고 있었다. 고메스의 선취골이 터져나올때만 하더라도 '이변아닌 이변'이 터져나올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추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던 프랑스는 앙리의 동점골로 승부를 원점으로 되돌려놓았고, 경기는 점점 흥미진진한 양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최소한 연장전에서만큼은 지네딘 지단의 독무대였다. 그는 지칠 줄 모르는 사나이였고, 체력이 소진한 여러 수비수들을 상대로 종횡무진 자신의 솜씨를 과시하고 있었다. 피구 또한 루이 코스타가 교체되어 나간 시점에서 팀을 리딩하기 위해 플레이 메이커 역할을 수행해 나갔고, '지단 vs 피구'의 대결구도는 경기의 흥미를 더욱 배가시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승리의 여신은 프랑스에게 미소를 짓고 말았다. 샤비에르의 핸들링 반칙으로 얻어낸 페널티킥을 지단이 침착하게 성공시킨 것이다. '아트 사커'의 레 블뢰 군단은 포효했고, 포르투갈의 용감한 전사들은 힘없이 주저앉고 말았다. 피구를 비롯한 많은 선수들이 심판의 미심찍은 판정에 항의했지만, 이는 수개월간 대표팀 경기 출전금지라는 처참한 중징계만을 불러 일으켰을 뿐이었다. 조국을 위해 처음으로 메이저 대회 우승컵을 바치고자 했던 루이스 피구는 아쉬움을 뒤로한채 쓸쓸히 퇴장해야만 했다.
In Real Madrid
매시즌마다 최고의 활약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바르셀로나는 피구에게 푸대접으로 일관하며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그의 연봉은 200만 달러를 웃도는 수준으로, 이는 세계 최고의 스타 중 한명의 몸값이라고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었다. 중요한 것은 돈의 액수보다는 구단의 태도였다. 프로 선수로서 자신의 활약에 걸맞는 대우를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구단측은 냉담한 반응만을 보였으니.. 결국 현대 축구사를 크게 장식할만한 피구의 이적 사건은 바르셀로나가 자초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인내심의 한계에 도달한 피구는 바르셀로나와의 이별을 결심했고, 마침내 자신을 원하는 클럽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의 새로운 팀이 바르셀로나의 영원한 라이벌 레알 마드리드였다는 점이었다. 마드리드의 새로운 구단주로 취임한 플로렌티노 페레스는 피구의 바이-아웃 조항으로 걸려있는 약 5600만불의 천문학적인 금액을 이적료로 지불하겠다는 의향을 밝혔고, 바르셀로나는 울며 겨자먹기로 팀내 최고의 스타를 철천지 원수에게 내줄 수 밖에 없었다.
피구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Luis Figo - "전 제가 펼친 활약만큼의 정당한 대우를 받길 원했죠. 하지만 바르셀로나는 항상 이 문제에 관해 무성의한 태도를 보였어요. 이러한 모습들이 반복되면서부터 제 마음은 이미 팀과 멀어져 있었습니다."
"굳이 레알 마드리드가 아니었더라도 어디로든 이적했을거에요. 아마도 예전부터 마음에 두어왔던 이탈리아가 유력했겠죠. 하지만 마침 레알 마드리드가 제게 접근했고, 이상적인 조건을 제시해왔습니다. 그래서 이곳을 선택하게 된거죠."
"제 선택에 후회는 없습니다. 저는 마드리드를 위해 되도록이면 많은 승리를 거두고 싶은 사람이니까요."
하지만 마드리드에서의 생활에 적응하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을 소요해야 했다. 특히 00/01 시즌 6라운드 경기였던 바르셀로나 원정 경기에는 그에게 커다란 아픔으로 다가왔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자신에게 아낌없는 성원을 보내주던 누 캄프 스타디움의 팬들이 야유를 퍼붓는 것은 물론, 온갖 오물을 그라운드에 던져대며 그를 배신자 취급한 것이다. 레알 마드리드는 2:0으로 패배했고, 피구는 무기력한 플레이로 일관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시즌 중반으로 접어들면서부터 점차 제 기량을 찾아나가는 모습을 보였다. 14라운드 셀타 비고와의 경기에서 절정의 개인기에 의한 결승골을 터뜨린 그는 라울 곤살레스라는 유능한 파트너와 함께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하기 시작했다. 결국 레알 마드리드는 00/01 시즌 스페인 챔피언에 등극했고, 라울과 피구는 환상적인 컴비 플레이로서 제 몫을 톡톡히 해내는 모습을 보였다. 축구 선수에게 최고의 영예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올해의 유럽 선수상'도 루이스 피구의 차지였다. 비록 FIFA가 주관하는 '올해의 선수상'은 지네딘 지단에게 내줬지만, 전통과 유서가 깊은 골든볼의 수상도 그에 버금가는 의미를 갖는다는 점에서 위안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01/02 시즌에는 이 두 선수가 한 팀에서 뛰게 되는 꿈같은 일이 벌어졌다. 레알 마드리드가 피구의 5600만불을 넘어서는 6400만불의 거액을 투자하며 유벤투스로부터 지단을 영입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두 선수는 2001년 여름내내 언론들의 집중적인 주목을 받았고, 많은 축구팬들이 화려한 마법쇼가 펼쳐지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시즌 초반의 피구와 지단은 사실상 불협화음에 가까웠다. 팀의 확실한 구심점 역할을 함으로써 철저하게 경기를 지배하는 스타일의 지단과 일정한 범위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로운 활동 영역을 보여주는 피구 고유의 특성은 적지 않은 충돌을 일으키고 있었다. 레알 마드리드는 오히려 두 선수 중 한명만을 기용할때에 더 나은 경기력을 선보였고, 피구와 지단의 호흡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부정적인 견해를 내놓았다. 하지만 FIFA는 2001년의 피구를 높이 평가했고, 그에게 '올해의 선수상'을 수여했다. 그는 축구선수로서 최고의 영예라 할 수 있는 유럽 골든볼과 FIFA 올해의 선수상을 모두 수상함으로써 진정한 최고로 거듭날 수 있었다. (위의 두가지 상을 모두 수상한 경험이 있는 선수는 로타 마테우스, 마르코 반 바스텐, 로베르토 바지오, 조지 웨아, 호나우두, 지네딘 지단, 히바우두, 그리고 루이스 피구까지 총 8명뿐이다.)
FC 포르투와의 챔피언스 리그 경기에서 발목이 접질리는 부상을 당한 피구는 이때부터 거듭되는 불운을 겪어야만 했다. 그는 레알 마드리드의 100주년을 맞이해 펼쳐진 데포르티보와의 코파 델 레이 결승전에 무리하게 출전했다가 부상이 악화되었고, 좀처럼 회복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며 주위의 우려를 자아냈다. 특히 2002 월드컵이 다가오는 시점에서 당한 부상이었던지라 많은 사람들이 예민하게 반응할 수 밖에 없었다.
시즌이 끝나갈때쯤에 복귀한 피구는 이미 예전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무딘 경기 감각과 눈에 띄게 떨어진 순간 스피드는 그를 평범한 선수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이러한 부상 후유증은 애석하게도 2002 월드컵까지 이어졌다.
2002 Korea/Japan Worldcup
포르투갈 국민들은 에우제비우를 비롯한 선배들이 이루지 못했던 월드컵 우승의 꿈을 '골든 제너레이션'이 해내기를 바랬다. 월드컵 지역 예선에서 강호 네덜란드와 아일랜드를 제치고 조 1위로 본선에 진출했던 대표팀이었기에 그 기대감은 더욱 컸다. 하지만 미국과의 첫경기에서 당한 3:2 패배는 대회 최고의 이변 중 하나로 떠올랐고, 많은 사람들이 충격속에서 헤어나오지를 못했다. 기대 이하의 플레이를 선보인 피구는 당연히 비난의 도마위에 오르게 되었다.
폴란드를 4:0으로 대파한 포르투갈은 개최국 한국과의 최종 승부를 앞두고 있었다. 골든 제너레이션의 정상 등극을 원하는 많은 사람들이 최고의 스타 피구가 무언가를 해주길 기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부상 이후, 좀처럼 기량을 회복하지 못한 그는 예전처럼 날카로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고, 한국의 송종국 선수에게 철저하게 봉쇄당하면서 믿을 수 없는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질책당해야 했다. 레알 마드리드에 재임하던 시절, 바르셀로나 원정 경기에서 3:0 참패를 당하며 감독직을 내놓아야만 했던 히딩크 감독은 자신의 해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과거의 적장' 루이스 피구를 따뜻하게 포옹해주는 미덕을 보였고, 더없이 화려하기만 했던 포르투갈의 영웅은 이렇게 월드컵 무대의 뒷편으로 사라져갔다.
이제 골든 제너레이션에게는 마지막 기회가 남아있다. 그들은 자국에서 개최되는 2004 유럽 선수권 대회에서 정상에 오르기 위해 앞으로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때쯤이면 32세가 되는 피구에게도 마지막 메이저 대회가 될 가능성이 크다. 최고의 재능을 보유하고 있지만 세계 축구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던 피구, 루이 코스타 등이 축구 인생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할 수 있을지 여부에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피구를 말하는 사람들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선수는 바로 피구다." - 미셸 플라티니(현 프랑스 축구협회 부회장)
"피구는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재능을 보유하고 있다." - 요한 크라이프(전 바르셀로나 감독)
"피구는 너무나도 훌륭한 선수이며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인물 중 하나이다." - 호나우두(현 브라질 대표팀 스트라이커)
"피구는 최고의 선수다. 그는 올해의 선수상을 받을만한 자격이 있다." - 지네딘 지단(현 레알 마드리드 동료)
"그에게 행운을 빈다. 단, 포르투갈의 붉은 유니폼을 입고 있을때에만.." - 아벨라르도(전 바르셀로나 중앙 수비수. 루이스 피구의 레알 마드리드행에 대한 소감을 묻자)
"하얀 유니폼을 입은 피구의 모습이 익숙해지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 과르디올라(전 바르셀로나 주장)
P.R.O.F.I.L.E
성명 : 루이스 피구(Luis Filipe Madeira Caeiro Figo) 생년월일 : 1972년 11월 4일 국적 : 포르투갈 신장 : 180cm 체중 : 75kg 주포지션 : 오른쪽 윙 클럽 : 스포르팅 리스본(1989~1995/포르투갈), FC 바르셀로나(1995~2000/스페인), 레알 마드리드(2000~/스페인) 주요경력 : 2000' 올해의 유럽선수상, 2001' FIFA 올해의 선수상, 2000' 유럽 선수권 대회 4강, 91' 세계 청소년 선수권 대회 우승, 포르투갈컵 1회 우승, 스페니쉬 수퍼컵 2회 우승, 코파 델 레이 2회 우승, 프리메라 리가 3회 우승, 컵 위너스 컵 1회 우승, 유럽 챔피언스 리그 1회 우승
[마누엘 루이 코스타]
루이스 피고와 더불어 포르투갈의 축구 역사상 가장 뛰어난 미드필더로 일컬어지는 마누엘 루이 코스타(Manuel Rui Costa). 그는 비단 포르투갈뿐만 아니라 유럽이 자랑하는 플레이메이커의 교본이다.
축구팬을 황홀하게 하는 드리블러 루이 코스타는 중앙 미드필더로서는 이상적인 스피드와 화려한 발재간으로 상대 미드필더를 압도하고, 그의 예측불가능한 날카로운 패스감각은 보는이의 혀를 내두르게 한다. 지네딘 지단과 더불어 불세출의 플레이메이커 루이 코스타를 동시대에 볼 수 있다는 사실은 축구팬들로서는 지극히 다행하고 기쁜일이 아닐 수 없다.
루이 코스타는 90년대 중반부터 그의 천부적인 재능과 팀에 대한 공헌도로 인하여 포르투갈 대표팀의 부동의 플레이메이커로 군림해왔다. 그가 포르투갈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너무도 각별하여 혹자는 그를 팀동료 루이스 피고보다 더욱 가치있는 존재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수비로부터 공격에 이르기까지 게임의 흐름을 조율하는 루이 코스타의 역할이 포르투갈 대표팀의 경기력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탁월한 경기 전환 능력과 패싱능력이 루이 코스타를 더욱 특별한 존재로 만들었고 어느때나 득점을 만들어낼 수 있는 그의 오른발은 모든 수비수를 곤혹스럽게 한다.
1972년 3월 리스본에서 출생한 루이 코스타처럼 축구선수로서 화려한 데뷔를 하게된 선수는 찾아보기 힘들다. 9살의 나이에 포르투갈의 축구 전설 에우제비오(Eusebio)의 눈에 띄어 벤피카 유스팀에 입문하게된 것은 루이 코스타에게 주어진 최고의 행운으로 볼 수 있다.
19세에 루이 코스타는 이미 포르투갈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이름을 날리게 되는데 리스본에서 개최된 1991년 세계청소년대회의 결승전에서 10만명이 넘는 관중앞에 홀로 섰기 때문이다. 포르투갈이 브라질과 무득점으로 경기를 마친후 승부차기에서 최후의 키커로 나서 침착하게 득점을 기록한 루이 코스타는 포르투갈의 새로운 축구 영웅으로 거듭난다. 더구나 포르투갈 클럽 중 가장 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는 벤피카의 홈구장 '다 루즈'에서 새로운 스타 루이 코스타의 출현은 국제대회에서 오랜 부진을 겪고있던 포르투갈에게 활력소가 되기에 충분했다.
루이 코스타는 그해 가을 리스본의 거대 클럽 벤피카(SL Benfica)를 통해 성인 무대에 데뷔한다. 루이 코스타는 라이트백으로 선수생활을 시작하였지만, 벤피카 데뷔를 통해 중앙 미드필더로 변신을 시도한다. 90-91 시즌 잠시 파페(Fafe)에서 임대생활을 통해 경험을 쌓은 루이 코스타는 이후 3년간 벤피카의 주전 미드필더로 활약하며 1993년 포르투갈컵과 93-94 시즌 포르투갈 리그 우승을 거머쥔다. 이때의 우승이 벤피카에게는 서른번째 우승이며 현재까지 마지막 우승으로 기록되고 있다. 1993년 3월은 루이 코스타는 스위스와의 경기를 통해 포르투갈의 성인대표로 데뷔하여 "No.10"의 유니폼을 물려받게 되는 뜻깊은 해이기도 했다.
1994년 여름 재정난에 허덕이는 벤피카를 뒤로한채 이태리로 건너간 루이 코스타는 당시 600만파운드라는 천문학적인 이적료를 기록하며 아르헨티나의 스트라이커 가브리엘 바티스투타가 홀로 분전하던 AC피오렌티나에 합류한다.
94년 여름 피오렌티나로 이적한 루이 코스타는 이후 "비올라(Viola)"의 공격을 이끌며 피렌체에서 가장 사랑받는 선수로 성장한다. "No.10"의 모델로 가장 이상적인 플레이메이커로서 루이 코스타는 두명의 스트라이커 뒤에서 천부적인 재능을 쏟아낸다. 피오렌티나 생활을 통해 월드클래스 미드필더로 진입한 루이 코스타는 이적 첫해 9골을 기록하며 '바티골'과 더불어 중소클럽을 일약 메이저클럽으로 도약하는데 구심점이 된다.
1998-99 시즌은 그의 커리어에서 가장 빛나는 시즌이었다. 처음으로 두자리수 득점(10골)을 기록하는 한편 바티스투타에게는 셀 수 없이 많은 어시스트를 제공함으로 피오렌티나의 중흥을 선도한다. 그가 만나는 네명의 감독들인 라니에리(Ranieri), 말레사니(Malesani), 트라파토니(Trapattoni), 테림(Terim) 감독은 모두 그의 팀을 루이 코스타를 중심으로 조직할만큼 루이 코스타가 비올라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압도적이었다.
일곱 시즌 동안 피렌체에 머물면서 루이 코스타는 200회 이상의 정규리그 경기에 출장하여 38골을 기록하였고, 1996년과 2001년에는 코파 이탈리아 우승의 일등공신이 된다. 특히 2001년 5월 AC밀란을 상대로한 코파 이탈리아 준결승전과 파르마를 상대로한 결승전에서의 활약은 두고두고 루이 코스타를 소개할 때 빠질 수 없는 최고의 순간이기도 했다.
피오렌티나는 유럽 빅클럽들의 유혹으로부터 루이 코스타를 지켜내기 위해 사력을 다했지만, 막대한 채무에 찌들린 비토리오 체키 고리 구단주는 어쩔 수 없이 팀내 간판 스타를 팔기로 결심했다. 2001년 여름 이탈리아의 거대 클럽 AC 밀란은 이탈리아 총리이자 구단주인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의 설득으로 3000만 파운드(약 540억원)라는 기록적인 이적료로 레알 마드리드, 파르마, 라치오와 같은 명문 클럽들의 구애를 뿌리치고 영원한 비올라 에이스로 남을 것만 같았던 루이 코스타를 낚아챈다. 루이 코스타의 클럽커리어에 있어 새로운 기회와 도전이 동시에 시작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한편 포르투갈 대표팀에서 루이 코스타는 1993년 데뷔이래 부동의 선발자리를 고수하고 있다. 포르투갈이 아깝게 1994년 미국월드컵에 참가하지 못했기에 루이 코스타에게 가장 큰 첫무대는 잉글랜드에서 개최된 유로96이었다. 24세의 루이 코스타는 안정된 기량으로 네 게임에 출장하며 포르투갈을 8강에 진출시켰다. 그로부터 2년후 포르투갈은 98년 프랑스월드컵 본선진출에 아쉽게 탈락하지만 벨기에, 네덜란드에서 공동개최된 유로2000에서는 화려하게 국제무대에 등장한다. 포르투갈 축구를 한 단어로 설명하던 "골든제너레이션"이 20대 후반의 완숙기에 접어드는 때이기도 했다.
5경기에 출장한 루이 코스타는 숨막히는 잉글랜드전 3:2 역전승을 비롯해 루마니아전 1:0 신승에 일조하여 포르투갈을 유로2000 4강에 당당히 올려놓는다. 특히 잉글랜드에 2:0으로 끌려가던 포르투갈을 구해준 누노 고메스의 역전골에 환상적인 어시스트를 제공하여 많은 축구팬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루이 코스타는 준결승에서 프랑스에게 석연찮은 패배를 당하며 심리적으로 충격을 받았지만, 2000년 루이스 피고에 이어 "올해의 포르투갈 선수" 2위를 차지한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한편 2001-02 시즌 밀라노에 입성한 루이 코스타는 축구선수 경력에 있어 가장 힘든 시즌을 보내야 했다. 개막전에 입은 오른팔 골절은 그를 한동안 그라운드를 떠나게 했고, 부상회복 이후 연이은 부상의 악재는 루이 코스타를 시즌내내 괴롭혔다. 클럽 역사상 최고 이적료의 주인공이라는 부담과 로쏘네리의 열광적인 팬들의 기대에 조급해진 루이 코스타는 그답지 않게 허둥대며 피오렌티나 시절의 기량을 밀란에서는 선보이지 못했고, 잦은 부상으로 경기감각은 최악의 수준으로 떨어졌다.
2002년은 다행히 루이 코스타에게 재기를 위한 발판이 마련되어 있었다. 한국과 일본에서 개최되는 2002년 월드컵은 클럽에서의 부진을 단번에 만회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기대를 한껏 안고 리그 막판 경기에서 불참한채 대표팀에 몰두한 루이 코스타는 대표팀에서 해결하기 어려운 과제에 직면한다. 안토니오 올리베이라 감독이 구상하는 4-5-1 포메이션의 특성상 핀투, 피고, 콘세이상, 루이 코스타 중 한명의 공격수가 선발에서 제외되어야 함을 의미했다. 무리수를 두며 미국전에서 네명의 공격형 미드필더를 모두 선발출장시킨 올리베이라 감독의 전술은 치욕적인 3:2 패배를 안겨주었다. 보수적 성향의 올리베이라 감독은 핀투를 제외하고 수비형 미드필더를 보강하기를 원했지만, 당시 최고의 컨디션을 자랑하던 주앙 핀투는 이에 대해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했다. 결국 미국전에서 부진했던 루이 코스타는 폴란드전 선발출장을 포기하고 스스로 팀을 위해 헌신할 수 있음을 내비쳤다. 개인적 욕심을 자제하고 팀을 위해 헌신한 루이 코스타는 폴란드전 4:0 대승의 주역이 된다. 루이 코스타의 자리에 투입된 핀투는 기대되로 돋보이는 플레이로 파울레타의 득점에 일조했고 후반전에 교체 투입된 루이 코스타는 그동안의 부진을 만회하듯 활발한 움직임을 보여주며 공격의 중심이 되었다. 파울레타에게는 두번째 골을 어시스트한 루이 코스타는 경기 종료직전 카푸초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 득점에 성공하며 대표팀에서의 오랜 침묵에 마침표를 찍었다.
루이 코스타는 폴란드전에서 분명 자신의 기량을 유감없이 보여주었지만 올리베이라 감독은 폴란드전 상승세를 이어가길 원했다. 16강 진출의 기로에서 만난 한국전에서 올리베이라는 팀의 에이스 루이 코스타를 벤치에 남겨두고 핀투를 선발 출장시키는 모험을 선택한다. 이는 체력적으로 지쳐있는 한국팀을 후반전 테크니션 루이 코스타를 통해 공략하고자하는 올리베이라 감독의 전술적 의도가 담겨 있었다. 그러나 생각 이상으로 강인한 조직력과 투지를 보인 한국팀의 선전에 포르투갈은 그들의 유려한 개인전술과 조직력을 완벽히 선보이지 못했고, 급기야 주앙 핀투의 무리한 태클에 이은 퇴장은 포르투갈의 숫적 열세를 초래했다. 핀투의 공백은 수세에 몰리는 포르투갈을 위해 루이 코스타를 투입시킬 여지를 차단했고 결과적으로 루이 코스타는 더이상 경기에 투입되지 못한채 포르투갈행 비행기에 몸을 실어야 했다. 2002년 월드컵은 루이 코스타 개인에게는 너무나도 아쉬운 월드컵이었다. 월드컵 개막 직전 부상을 떨치고 체력적으로 정상궤도에 올라 많은 기대를 받고 있던 루이 코스타는 경기외적인 요소들로 인해 자신의 진가를 발휘할 기회를 제한받게된 것이다.
01-02 시즌이 루이 코스타 개인에게 최악의 한해였다면, 02-03 시즌은 루이 코스타에게는 화려한 부활의 해로 기록될 것이다. 히바우두, 욘 달 토마손, 클라렌세 시도로프 등 양질의 공격수와 미드필더들을 영입한 AC 밀란은 지난 시즌 부진의 주인공 루이 코스타를 다른 팀으로 임대 혹은 이적시킬 것이라는 예측이 다분히 존재했지만, 루이 코스타는 이러한 우려를 실력으로 당당히 불식시켰다. 더구나 플레이메이커와 세컨드 어태커로서 세계 최고의 선수로 추앙받는 히바우두의 존재는 루이 코스타에게 가장 큰 부담이 되었으나, 루이 코스타는 당당히 주전경쟁에서 승리하며, 진정한 'No.10'의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시즌 초반 리그에서는 필리포 인자기와 절묘한 호흡으로 밀란의 상승세를 이끌었고, 안드레이 셰브첸코-인자기와 호흡을 맞춘 챔피언스리그에서는 실로 월드클래스 미드필더다운 플레이로 로쏘네리팬들을 열광시켰다. 더구나 챔피언스리그 본선 1라운드에서 바이에른 뮌헨,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 랑스 등과 같은 강팀들과 한조를 이룬 AC밀란은 루이 코스타-필리포 인자기 콤비가 절묘한 하모니를 연출하며 '죽음의 조' 탈출을 이끌었다. 특히 리아조르에서 벌어진 데포르티보 원정에서 루이 코스타는 팀의 득점인 네 골 모두에 직간접적인 도움을 제공하며 4:0 승리를 견인하기도 했다. 뿐만아니라 본선2라운드에서 만난 우승후보 레알 마드리드를 홈으로 불러들인 밀란은 루이 코스타 전매특허의 장거리 쓰루패스와 셰브첸코의 마무리로 팀의 귀중한 승리를 일구어내며 새로운 밀란제너레이션을 예고하기도 했다.
02-03 시즌은 말디니-네스타가 버티는 든든한 수비진을 바탕으로 루이 코스타, 시도로프의 완전한 부활과 필리포 인자기의 꾸준한 득점력으로 인해 AC밀란은 9년만에 챔피언스리그 타이틀을 획득하였고, 루이 코스타 개인으로서도 최초로 메이저대회 우승컵을 안게되는 의미있는 시즌이었다. 더구나 챔피언스리그 경기를 통해 20여회가 넘는 키패스와 5개의 어시스트로 유럽대륙 최고의 도우미로 우뚝 선 루이 코스타에게는 선수생활의 황혼을 앞두고 최고의 영광으로 기록될 것이다.
다가오는 03-04 시즌이 루이 코스타에게 주는 의미는 전시즌 못지 않게 각별하다. 피오렌티나, AC밀란을 거치며 루이 코스타가 만져보지 못한 유일한 타이틀인 '스쿠뎃토'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루이 코스타 개인으로서도 머지않은 선수생활을 감안할때 다가오는 시즌은 라이벌 유벤투스, 인테르 밀란을 따돌리고 AC밀란이 '스쿠뎃토'를 들어올릴 가장 절호의 기회인 것이다. 뿐만아니라 2004년 6월에는 유럽대륙을 들썩이게 할 2004 유럽선수권대회(약칭 '유로2004')가 루이 코스타의 모국 포르투갈에서 개최된다는 사실은 루이 코스타 개인에게 적지않은 의미로 다가올 것이다. 유로2004는 포르투갈 대표팀의 유니폼을 입고 루이 코스타가 도전할 수 있는 마지막 메이저대회이기에 루이 코스타의 각오가 남다르지 않을 수 없다.
천부적인 재능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01-02 시즌 밀란에서 시작된 하향세로 인해 루이 코스타의 플레이에 다소간의 비판이 제기되기도 한다. 챔피언스리그와 같이 큰 경기에서는 이름값을 하고 있지만, 정작 중요한 리그 경기에서는 그다지 두드러지지않는 '기복'이라는 꼬리표가 일각에서 제기되기도한다. 또한 밀란 이적 이후 많은 어시스트를 기록하고는 있지만 코파 이탈리아를 제외하고는 정작 중요한 경기들에서 득점력이 빈약해졌다는 비판 역시 루이 코스타가 극복해야 할 과제이다. 물론 비올라 시절의 활약과 기록을 살펴본다면 이러한 비판이 꼬리를 감추겠지만, 밀란 이적 직후 드러낸 부진과 조급함에 대해 루이 코스타 스스로 고백하듯, 지나친 부담감이 그를 어려운 상황으로 몰아넣은듯 보인다.
루이 코스타는 스스로를 어시스터로서 표현한 바 있다. 자신이 득점을 기록하여 팀의 승리를 견인하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지만, 동료들에게 정확한 어시스트를 통해 팀의 승리에 일조하는 것 또한 의미있는 일이기도 하다. 루이 코스타는 오래전부터 체득된 팀을 위한 '도우미'로서의 면모가 그의 가치를 더욱 빛나게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P.R.O.F.I.L.E.
본명: Manuel Cesar Rui Costa 생년월일: 1972년 3월29일 리스본 출생 포지션: 중앙 공격형 미드필더(CAM) 신체조건: 180cm, 74kg 소속팀: AC 밀란(이탈리아) 등번호:10 A매치 출전회수: 79경기 22득점 이전 소속팀: 파페, SL벤피카(포), 피오렌티나, AC 밀란(이)
에우제비오. 북한하고 할때... 정말 에우제비오는 제가 초딩때 축구에 미쳤을때 친구들에게 대단한 선수라고 떠벌리고 다녔던 기억이... 프랑스의 퐁텐(월드컵 한 대회 최다골인 13골 기록)과 함께 조금 덜 알려졌지만 최고라고... 거기에 데포(프랑스 골키퍼)까지 나오면서 친구들에게 자랑을...
첫댓글 자주 가는 축구카펜데 한축게가 참 괜찮져.
스포르팅의 라이벌 벤피카 팀은 에우제비오의 재능을 탐낸 나머지 에우제비오를 납치, 입단시켰다-> 아무리 잘해도 그렇지 납치까지... 이거 진짜입니까? 그리고 피오렌티나 팬으로써 예전 루이코스타가 있던 시절이 너무 그립네요. 그 때 진짜 최고였는데...
루이코스타와 바티스투타....ㅡㅜ
에우제비오. 북한하고 할때... 정말 에우제비오는 제가 초딩때 축구에 미쳤을때 친구들에게 대단한 선수라고 떠벌리고 다녔던 기억이... 프랑스의 퐁텐(월드컵 한 대회 최다골인 13골 기록)과 함께 조금 덜 알려졌지만 최고라고... 거기에 데포(프랑스 골키퍼)까지 나오면서 친구들에게 자랑을...
근데 궁금한게 월드컵 최초의 헤트트릭을 달성한 아르헨티나 선수 이름이 뭐였죠???
네 바로 접니다..덜덜덜;;
모두극강... 4번째 후보는 호나우도랑 콰레스마?
최초 해트트릭이면 스타빌레 아닌가염..기억이 가물가물-_-;;
저는 외국 국대중에 가장 좋아하는 나라가 포르투갈인데..피구와 루이코스타 우승하는거 한번 보고 싶었는데...-0- 유로2004 결승 끝나고 진짜 미치는줄 알았습니다...근데 잡설이지만 포르투갈이 우리나라에서 참 인기가 없는듯 싶네요.. 잉글이나 네덜등에 비해
아르헨티나 스타빌레,,,이름헷갈리는,ㅋㅋ 첫대회였죠 그선수에대한 일화를 책에서 읽었는데 도무지 생각이,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