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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전쟁 당시 전장에서의 링컨
1865년 4월 15일에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암살된 사건. 미국 역사상 최초로 일어난 대통령 암살 사건이다.
존 윌크스 부스는 남부 출신의 인기 배우였고 링
컨에게 극렬한 분노를 가진 사람이었다. 당초 부스의 목표는 링컨을 납치해 남군 포로와 맞교환하는 것이었다. 1865년 3월 4일에 열린 링컨 대통령의 제2기 취임식에 부스는 애인 루스 헤일의 도움으로 참석할 수 있었다. 후에 부스는 "이 날에 링컨을 죽일 수도 있었다"라고 말했다. 링컨은 인기배우인 부스를 취임식 파티에 초청했지만 부스는 "링컨하고 같이 식사하느니 돼지랑 식사하는게 낫다"라면서 거절했다고 한다.
이후 3월 17일, 부스는 링컨 대통령이 캠벨 육군병원에서 연극 공연을 볼 예정이란 정보를 입수하고 워싱턴 털락에 있던 식당에 있다가 돌아오는 링컨을 납치하려고 했다. 그러나 링컨은 공연 관람을 하지 않고 내셔널 호텔에서 140 인디애나 연대가 탈취한 남군 군기의 송정식에 참여해서 부스의 납치 시도는 실패했다. 얄궂게도 부스가 내셔널 호텔로 돌아왔을 때 링컨과 대면했다.
4월 10일, 남군 총사령관 리 장군이 북군에 항복하면서 사실상 남북전쟁은 끝났다. 링컨을 납치해 남군 포로를 구해내고 남군의 위기를 해소하겠다던 부스의 계획도 허사가 되고 말았다. 이런 가운데 링컨 대통령은 연설에서 흑인의 참정권을 보장할 생각이 있다는 발언을 했고 부스는 이를 듣고 링컨과 몇몇 사람들을 죽이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4월 14일, 부스는 조지 아트제로트와 데이비드 헤롤드등의 몇몇 공모자들과 모여 링컨이 포드 극장을 방문한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그 날 링컨 대통령과 그랜트 장군, 그리고 국무장관 윌리엄 슈어드 등을 죽이기로 결정한다.
이 건물이 당시 링컨이 암살당한 극장이며 이후 약 100 여년을 버려져 창고처럼 방치되다가 새로이 역사 유적지로 증축이 되어 지금은 역사박물관으로 사용되는 곳이다.
대통령은 무대옆 2층에서 공연을 관람했다.
사건 직후의 관람석
존 윌크스 부스(John Wilkers Booth)
존 윌크스 부스(John Wilkers Booth)는 당대의 일류 연극배우였다. 자료를 살펴보니 그는 링컨의 북부군에게 반감을 갖고 있었고 남부군이 전쟁을 패해 항복한 것을 복수하려고 암살계획을 세웠으며 특별관람석 방으로 잠입하여 총을 쏘아 링컨을 절명시키고 탈출했다.
이때 좌석 출입구를 지키던 경찰관이 자리를 비운게 당시로서도 의문점. 후술할 슈어드 음모론에서 핵심적인 논제가 되었다. 링컨은 전쟁 중에는 연방보안관이나 육군 기병대의 호위를 받았지만 이 날은 호위가 워싱턴 시에서 파견된 경찰관 1명이었다.
그랜트 장군은 아이들 졸업식을 핑계로 여기에 빠지게 된다. 그런데 사실 이건 변명이고 실제는 그랜트 부인이 영부인인 메리 토드 링컨을 아주 싫어해서 빠졌다는게 정설이다.
60만명이 넘는 군인이 전사하고 전체적으로 수백만이 사상당한 어마어마한 전쟁이 끝난지 이제 5일이 되었을 뿐인데 대통령은 연극을 보러 마차를 타고 갔으며, 일류 무대배우 존 윌크스 부스(John Wilkers Booth)와 그 일당의 사전에 계획된 범죄로 그는 경계가 삼엄한 대통령 특별석에 침입해 구식 단발권총으로 뒷머리를 쏘고 이층서 뛰어내려 말을 타고 도망쳤다.
근처 주점에 숨어있던 부스는 몰래 링컨의 뒤쪽으로 숨어들어가 총성이 들리지 않게끔 사람들이 웃는 장면에서 저격한다.
관람석에 몰래 잠입한 존 부스에 의해 링컨이 암살당하는 장면
저격 후 부스는 칼을 든 채 무대로 올라가 라틴어로 다음과 같이 외쳤다고 전해진다.
"Sic semper tyrannis!"
(폭군은 언제나 이렇게 될 것이다!)
부스가 외친 이 말은 버지니아 주의 표어이기도 하며 라틴어로 외친 이유는 그가 연극배우였기 때문에 셰익스피어 극의 한 장면을 재연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후 그는 헤롤드의 도움으로 버지니아로 도망쳤고 4월 26일 한 헛간에서 연방군에게 포위된다. 헤롤드는 항복했지만 부스는 항복을 거부하여 결국 총격전이 벌어지게 되었고 그 결과 부스는 죽게 된다.
그 후 그는 헤롤드의 도움으로 버지니아로 도망쳤고 4월 26일 한 헛간에서 연방군에게 포위된다. 헤롤드는 항복했지만 부스는 항복을 거부하여 결국 총격전이 벌어지게 되었고 그 결과 부스는 죽게 된다.
한편 링컨은 총격을 받은 다음날인 4월 15일 아침,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링컨을 쏜 후 이층에서 뛰어내리다 다리를 심하게 다쳤으며 밖으로 도망쳐 미리 준비해둔 말을 타고 추격대를 피해 탈출에 성공했다.
그를 잡으러 뛰쳐나온 한 인물을 피하고 이렇게 그는 도망을 쳤다는 것이며 그가 도망칠 때까지 경호원의 액션이 없었다.
전쟁의 심각한 상황이 아직도 끝나지 않은 불과 5일 된 날에 대통령이 극장에 간것도 문제지만 당시의 상황을 그린 그림에 보듯이 어디에도 경호원이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그 많은 경찰도 없었고 대규모 경호대도 없고 대통령 근처를 지킨 경호원도 없는 이상한 상황에서 대통령이 연극을 같이 보러 가자고 한 측근들 조차도 대통령의 청을 거절하고 링컨은 부부동반과 각료 하나를 대동하고 관람하게 되었다는 기록이다.
이때 사용된 데린저 권총은 회수되어 정부가 보관하고 있다가 포드 극장을 당시와 같이 복원하면서 전시하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 1997년 한 교도소의 제소자를 통해 전시된 권총이 오리지널이 아닌 복제품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FBI는 조사를 시작하였고 1960년대에 도난당했다는 이야기가 있어 여러가지 추적과 총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진다.
여러 조사와 비교를 해본 결과 총은 진품으로 나왔고 재소자의 말은 거짓말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나폴레옹 시대에 쓰였을 구식의 단발권총으로 링컨을 저격한 것이다. 사진의 총은 박물관에 진열되어 있으며 이것이 링컨을 사망에 이르게 한 문제의 권총이다.
그 많고 많은 서부의 사나이들이 갖고 다니는 6연발 권총은 어디가고 시대에 뒤떨어져 한갖 장식용으로 쓰이는 화승총 비슷한 권총, 그것도 단 한발 장전만 되는 것으로 시도했다.
일차 도피처는 공범으로 지목되어 교수형을 당한 여성 (메어리 써렛)의 술집이었으며 그곳에서 새롭게 무기를 갖추었는데 도착시간은 링컨 총격 후 1시간 45분이 지나서였다.
이 집이 첫번 째 도망쳤던 메리 써렛의 주막집이며 메리에게 부탁하여 다른사람에게 맡겨놓은 무기를 가져다 달라고 요청했고 메리는 자신의 아들 친구와 같이가서 총을 찾아다 주었다.
죤 윌커는 다음날 의사 머드에게로 갔으며 그곳서 부러진 다리에 부목을 대고 머드가 준 목발에 의지해 떠났다. (이 사건으로 의사 머드는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4년 후 다른 사람들과 석방되었다.)
16일엔 사무엘 콕스 집으로 가서 도움을 받고 다시 사무엘 집을 떠나 21일 까지 5일간 숲속에서 지냈으며, 실수하여 강을 거슬러 올라가 휴우스 집으로 갔으며 곧 그곳을 떠나 22일 포토맥 강을 건너 버지니아로 건너갔다. 루카스 농장에 도착하여 통나무 집에서 잠을 잔 후 가렛의 농장으로 떠났고 24일 가렛농장에 도착하여 이틀을 보냈으며 그곳에서 추격해 온 기병대와 총격전으로 죽었다.
암살자 존 윌커의 행적은 지난 열흘동안 이렇게 진행됐다.
그를 추적하는 기병대 군인들이 포토맥강을 건너는 사진인데 영화속 사진으로 보인다.
부상을 입은채 열흘을 도망쳐 온 그는 29명의 기병대에 포위되어 총격전을 벌이고 이틀을 버티다 기병대가 농장에 불을 질렀으며 그의 동료 한 명은 항복을 했고 그는 끝까지 거부하다 총격에 쓰러져 다음날 숨을 거두었다는 과정이 전개되었다.
대통령을 죽였다는 범인은 심한 부상을 당했고 그를 잡으려는 기병대 약 30 여명이서 건물에 불을 지르고 총으로 저격하고 시신이 훼손되어 누군지 구별이 안될 상황으로 만들어 놓고 암살범 문제를 덮어둔 매우 묘한 사건으로 판단되는 것이다.
암살 공모자 루이스 파월(Lewis powell)
링컨 암살음모자는 대부분 공개처형되었고 그중에는 암살 음모를 알고 있었고 회합 장소 제공과 여러 도움을 준 여관집 여주인도 포함되었다. 미국 행형사에서 최초로 여자가 사형선고를 받고 집행된 케이스이다.
정확하게는 암살단의 단원의 모친이다. 로버트 래드포드 감독의 영화 '음모자'가 그녀에 대한 재판을 다루고 있다. 그녀의 혐의는 뭔일인지도 모르고 총을 찾아다 준 것뿐이다
과거 무기고로 쓰이던 감옥의 마당에서 집행감독관 (윈휠드 스캇 핸콕) 장군이 지켜보는 가운데 처형되었다.
이 사진을 찾으면서 가장 놀란 것은 이들의 죽음이 아니라 150 년 전 이들은 한국서 1960년대에도 귀하게 쓰이던 우산이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우리 나라는 강화도령 철종임금 시절에 저런 우산이 있었다는 것이 정말 놀랍다. 하긴 저시절 이미 증기기관차가 다니고 증기선이 다녔으니 우산쯤이야....
1866년 7월7일 1,500명의 증인들이 링컨 대통령의 암살 공모자들의 처형 집행을 지켜보고 있다. 이로써 처형 집행은 완료되었다.
암살 공범들은 목매이기 전 다리가 묶였는데 어차피 매달리면 죽을텐데도 발버둥 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한 것으로 보인다.
최후를 맞은 암살 공모자들의 처형 직후의 장면.
처형된 이는 사진 좌측부터 메리 슈레트(Mary Surratt), 루이스 파월(Lewis Powell),
조지 아트제로트(George Atzerodt), 데이비드 헤롤드(David Herold)
왼쪽의 첫째는 Mary Surrat라는 여성으로 공식적으로 미국 정부에서 최초로 처형된 여성이다.
링컨 대통령의 유해가 백악관 East Room에 안치되었다.
링컨은 남북 화합을 강조했기 때문에 링컨이 살아있을 때 남부는 수용소장 한 명만 빼고 관대한 대가를 치렀으나, 이 사건으로 인해 북부에서는 "남부를 박살내야 한다!"는 급진파가 힘을 얻게 되었다.
그 결과 남부는 1877년까지 군정 하에 놓였고 이곳 사람들은 연방 공직 임명에서 무조건 배제되었으며, 심지어 북부인과 달리 충성 서약을 해야 참정권 등을 행사할 수 있는 등의 유래없는 대탄압을 받았다. 이로 인해 남부 또한 링컨 암살 사건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고 한다.
이것은 총격전으로 사살당한 죤 윌커스가 도망친 후 추격해 온 기병대와 총격전을 벌일 때 사용하던 권총과 장총이다.
그는 이것을 놔두고 왜 단발권총을 사용한 것인지 의구심이 있으며 크기가 좀 작기는 하지만 어차피 대통령 방을 제지없이 잠입할 상황이면 6연발 권총을 갖췄어야 하지 않았을까.
링컨의 죽음(임종)
링컨대통령이 숨을 거두고 관속에 누워있는 기록사진이다.
링컨은 4월 14일 총격을 당하고 길건너 가옥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으나 다음날 절명을 했으며 그의 애완견이 링컨의 관위에서 슬퍼하는 모습이다.
그의 장례식이 성대히 거행되고 여섯마리 말이 끄는 마차에 실려 수많은 시민의 애도속에 그는 워싱톤 DC를 떠나는 중이다.
그가 저격당한지 일주일 되는 날 4월 21일 점심때, 북부의 각주를 돌아 1654 마일 (2662 km) 를 달려서 일리노이주로 가기 위해 기차로 떠나게 되었으며 5월 3일 스프링휠드 일리노이주에 도착했다는 기록이다.
링컨의 사진이 기관차 앞에 붙어 있고 기차는 떠날 준비가 되었다
관을 실은 객차
노제행렬은 매우 거창하였고 거쳐가는 곳마다 그곳에서 성대한 장례식을 치뤘는데 이는 남북전쟁이 끝난 직후 살해당한 대통령의 장례를 하면서 수백만 사상자와 전쟁으로 피폐해진 사회의 책임론을 불쌍하게 죽어간 대통령에게 덤태기 씌우는 절차에 불과한 것이라는 의견이다.
시신을 실은 기관차가 지나간 코스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매릴랜드 주 (볼티모어 시티)
펜실베니아 주 (휠라델피아)
펜실베니아 주 (해리스버그)
뉴저지주를 지나서,
뉴욕시 맨하탄.
뉴욕주 알바니. (지금 뉴욕주 수도)
뉴욕주 버팔로 시티 (나이아가라 폭포 옆)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 시티.
오하이오 주 컬럼버스 시티.
인디애나 주 인디애나폴리스 시티.
일리노이 주 시카고 시티.
일리노이 주 스프링휠드 시티.
이렇게 7개 주를 경유해서 스프링휠드에 도착했고 그곳에 묻혔다.
곳곳에서 멈추어 장례식을 치룬 장면이다
맨하탄 브로드웨이와 5번가 만나는 23 St 선상 브로드웨이이며 오른편 사진은 클로스업시킨 것이다.
또 하나의 절반의 사진으로 장례행렬은 브로드웨이에서 치러진 것을 알 수 있다.
하관식. (링컨 사진 중에서 나온 것이니 맞을 것 같다.)
링컨은 사망하기 5달 전 재선되었고 이후 취임식을 하는 사진이다.
당시 암살범과 공모자에게 걸린 현상금은 십만달러였다.
암살자 가족묘지이며 그의 시신은 1900 년대 초 이곳으로 옮겨져 매장을 했으며 기록에는 시신이 말라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건조된 상태로 보관되었던 듯하다.
2013 년과 오래전 두번에 걸쳐 그의 혈육에 의해 시신에 대한 유전자 검사 소송이 있었으나 법원은 그의 시신을 파헤치는 것을 허가하지 않았으며 존 윌커스 묘지는 비석이 없다는 기록이다.
링컨을 저격한 범인이 이곳 가렛농장서 북부군에 의해 사살당했다는 표지판이고 당시 주택은 표지가 있는 이곳서 조금 떨어진 곳이었다는 표시다.
즉, 지금은 그 집이 남아있지 않다는 뜻으로 보면 되겠다.
버려졌던 포드극장을 개축해서 문화유산으로 오픈하여 관람객들이 줄을 잇는 근래의 사진이다.
현재의 포드 극장.
새로 단장되어 일반에게 개방이 되었고 이곳서 남북전쟁에 관한 연극을 하는 듯하고 13개주 별표시 깃발이 걸려있다. 오른편 이층 커튼으로 꾸며진 곳 오른편 대통령 특별석에서 링컨은 뒷머리에 총격을 당했다.
범인들은 이집으로 링컨을 납치하고 살해하기로 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왜 그럴 계획이었는지는 모르겠다.
당시 상황
4년 간의 전쟁은 매우 참혹했으며 남북전쟁으로 인해 사망한 군인의 숫자는 60만명이 넘고 부상과 전쟁이 원인이 되어 사상당한 인구는 수백만에 이른다. 이들이 무슨 죽을죄를 진 것도 아니고 북부군과 남부군의 경제갈등과 정치적 갈등으로 남의 집안 수십만명 자식이 처참하게 죽어간 것이다.
물론 이들에게는 아프리카에서 흑인을 납치해 노예로 삼아 농사를 짓는 사악한 죄는 기정사실이며 그 죄는 하늘이 용서하지 않을 범죄지만 당시는 이미 노예의 수입이 금지되었다.
북부는 남부에 비해 노동집약적인 대규모 농경지가 아니었으므로 북부의 주들은 노예반대법이 시행 된 것이고 남부는 목화농사 등 인력으로 하는 대규모 농경지역 이어서 노예를 존속시키는 정책을 고수했던 것이다.
도덕과 윤리의 잣대로 보면 당연히 남부의 잘못이지만 문제는 북부에서는 순수한 도덕과 윤리의 기준으로 노예반대법을 시행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들이 그렇게 인도주의자 였다면 불과 100 여년 전 서부로 밀려가며 그렇게 많은 원주민 인디언을 죽였을 것이며 그들을 동북부 각지역에서 몰아내어 황량한 불모지 중부지방 오클라호마로 쫓아버렸냐는 것이다.
의문인 것은 북부의 산업발전의 속도가 급속히 상승하는 때에 그들 자본가들이 음모를 꾸며서 남부지역에 300 만명이 넘는 흑인노예를 해방시킨다는 명분으로 거저 가져다 쓰려고 했다는 것에 있다.
역사자료에 북부는 남북전쟁 시기에 유럽이주자들이 밀려들어 노동력이 충분했다는 의견도 보이지만 그 당시는 유럽 이주자들이 넓은 땅과 금을 차지하기 위해 서부로 밀려가던 시절이다.
서부에서 금광이 발견되어 골드러시가 붐을 이룬 1849년은 미국이 멕시코와 전쟁에서 리오그란데 강 이북의 막대한 지역을 점령한 다음해가 된다. 1849년부터 약 5년간 금으로 인해 이삼십만 명의 백인이 밀려든 시기였으며 1차 골드러시가 끝나고 연이어 1858년 콜로라도에서 금광이 발견되어 백인들이 마구 몰려드는 시기였는데 북부에서 무슨 노동력이 충분했다는 것인지 이해가 불가능하다.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부터 서부에는 캘리포니아, 콜로라도, 몬타나 등에서 금을 비롯한 대규모 광물이 발견되어 더욱 많은 백인들이 중부와 서부로 행렬을 지어 몰려갈 때였다.
포병대 군인들이며 이들은 나름의 권력도 있지만 조선시대로 말하면 사또와 현감에 붙어서 기생충처럼 먹고 살아가는 (이방) 정도로 보면 되고 정책을 움직여 세상을 변화시키는 큰 힘은 없고 전투의 앞에 선 사람들이다.
정책을 세우는 자가 금력과 권세로 이들을 이용해 싸우라면 싸우고 죽으라면 죽고 말을 잘 들으면 쇠붙이로 만든 훈장을 주면서 칭찬을 하면 공명심에 목숨도 버리는 좀 아둔한 부류로 보면 되겠다.
당시 링컨이 앉았던 의자.
링컨의 혈액이 그대로 묻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