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이 발달한 사회일수록 이야깃거리가 많다. 한때 열강으로 군림했던 고대 그리
스와 인도, 북중미를 두텁게 수놓은 신화는 문화의 깊이뿐만 아니라 자본의 무게도
보여준다. 돈이 흐르는 길로 말도 드나든다. 반면 가난한 옛 마을엔 단 하나의 전설
만이 존재한다. 덕주사도 그렇다. 더구나 슬픈 전설이다. 슬프니까 절이 생겼을 것
이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에 천년고찰이 손발을 모으고 앉아 있다. 흡사
하늘에서 떨어뜨린 낙원이다. 숨어서 울기에 좋은 절이다.
뜻 모를 말 되뇌며 ‘말 되는 삶’을 꿈꾸다
신라 덕주공주의 亡國之恨 서린 천년고찰 덕주사
현존 유일의 능엄주 비문 불구 마멸 심해 안보여
이해 힘든 범어지만 독송하면 마음의 평화 올 것
<사진설명> 덕주사 대웅보전은 돌계단을 한참 올라야 만날 수 있다. 오전10시의 겨
울 햇살과 극명한 대비를 이뤘다.
월악산이 걸친 충주와 제천은 38선 이남을 기준으로 국토의 정중앙이다. 이화령 조
령산 문경새재 부봉 하늘재 … 고개와 고개가 꼬리를 무는 험난한 지형은 만주를
잃어버린 통일신라 이후 격전의 공간으로 자주 이용됐다. 북진을 원하는 쪽이든 남
하를 원하는 쪽이든 반드시 짓밟아야 할 관문이었다.
덕주사 초입에 축조된 덕주산성은 고려시대 몽골 침략군을 격퇴시키기도 한 요충
지였다. 사찰을 산성이 둘러치고 있다는 게 이채롭다. 더 이물스러운 건 성돌 옆의
남근석이다. 음기가 세다는 이유로 과거의 누군가가 가져다 놓은 솟대바위다. 덕주
사는 임오군란 당시 잠깐 권력을 회복한 흥선대원군을 피해 명성황후가 은거하며
와신상담한 곳이기도 하다. 서기 587년에 창건된 덕주사의 본래 명칭은 월악사(月
岳寺)였다.
덕주사란 이름은 덕주(德周)공주에게서 유래한다. 그녀는 신라 마지막 임금 경순왕
의 딸이다. 경순왕은 고려 태조 왕건에게 투항함으로써 천년의 사직을 단숨에 마셔
없앴다. 피를 흘리지 않아도 됐던 민초들에겐 그런 대로 견딜 만한 망국의 형식이
다. 그러나 왕의 자녀들은 아버지의 무책임을 용서하지 않았다. 덕주공주는 월악산
으로, 남동생인 마의태자는 금강산으로 망명에 나섰다. 덕주사 동쪽 암벽의 마애불
(보물 406호)은 신라의 재건을 발원하며 덕주공주가 조성한 것이다. 마의태자의 모
습을 형상화했다고 전한다.
하늘재 너머 중원미륵사지엔 석불입상(보물 제96호)을 세웠다. 한눈에 봐도 여성스
러운 외모다. 잃어버린 천년과 기다림의 천년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남매는 서로를
마주보고 있다. 덕주산성은 덕주공주를 평생토록 감금하기 위해 고려군이 쌓은 감
옥이라는 이야기도 돈다. 1000년이면 강산이 100번 바뀔 시간이다. 여인의 비원도
끝내 풍화됐는지 아니면 원래 음기가 그런 것인지 덕주사는 기가 맑기로 유명하다.
때때로 선방의 납자들이 들르면 무릎을 치는 청정도량이다.
철야정진을 해도 다음날 아침 애써 이부자리를 찾지 않을 만큼 기력이 성성하다.
굳이 경순왕의 실정이 아니었어도 신라는 건드리면 터질 국력이었다. 한낱 돌에 그
린 부처님이 전세를 역전시킬 리 만무하다. 13m 높이의 덕주사 마애불은 얼굴 부
분이 유난히 튀어나왔다. 발은 지나치게 크고 발가락도 굵고 길다. 그녀에겐 현실
에 대한 앙상한 이해가 아니라 화려한 착각이 필요했다. 모국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가 죽었어도 마애불은 아름다웠다.
대불정주범자비(大佛頂呪梵字碑)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31호다. 1988년 2월
월광사지입구의 논둑에서 발견됐다. 이후 월악산국립공원 관리사무소 한편에 거의
방치되다시피 한 것을 덕주사 전 주지 성일스님이 모셔 왔다. 가로 163cm 세로
161cm의 화강암 덩어리에 총 11행 105자의 능엄주(楞嚴呪) 일부가 음각으로 새겨
졌다. 국내에 유일하게 현존하는 능엄주 비문이다.
‘大佛頂呪’라는 한자어를 빼고는 마멸이 심해 알아보기 어렵다. 하긴 글자가 닳지
않았다손 극소수의 식자들이나 해독할 수 있는 산스크리트어(梵語)다. 능엄주 기도
와 <금강경> 등 여타 간경(看經)기도 수행법과의 극명한 차이는 글자의 불가독성에
있다. 한역(韓譯), 최소한 한역(漢譯)경전은 입으로 외는 것을 넘어 부처님의 가르
침을 ‘이성적으로’ 음미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반면 범어로 된 불경은 입에서
뇌로 가는 길을 봉쇄했다. 능엄주의 서두다.
<사진설명> 능엄주 비문 뒤에 적힌 전각 시주자들의 명단. 화강암의 흰 빛깔에 더
욱 선명하다. 제천 덕주사의 능엄주.
‘스타타가토스니삼 시타타파트람 아파라지탐 프라튱기람다라니 나맣 사르바 붇다
보디 사트베타남 사 삼붇다 코티남 사스라바카 삼가남 로케아르 한타남 ….’
신화의 기원에 관한 여러 주장 가운데 하나는 이해할 수 없는 자연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설이다. 벼락과 홍수가 부족의 생존을 위협하면서 불과 물은
종교적 숭배의 대상으로 등극했다. 상대를 도저히 이길 수 없을 때 선택할 수 있는
건 죽음 혹은 굴복뿐이다. 인류는 기후의 급격한 변화에 의한 각종 재해들을 절대
자의 분노로 읽었다. 일부러 그랬고 그래야 마음이 편했다. 이상한 것은 재앙의 결
과는 손쉽게 의인화로 처리하면서도 재앙의 이유는 철저히 불가해의 영역에 봉인
했다는 점이다.
피붙이를 떼죽음으로 모는 끔찍한 변덕에 대해 신의 섭리 이상의 토를 달지 않았
다. 다만 주술을 매개로 신과 인간의 교감을 시도했다. 주문은 인간이 만들었지만
인간이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다. 과학에 무지했던 옛사람들은 손에 잡힐 듯 분명
한데도 도무지 만져지지 않는 고통을 말은 말인데 말 같지 않은 말이 치유할 수 있
으리라 믿었다. 능엄주(surangama-samadhi-dharani)는 ‘용맹스럽게 정진하여 정
(定)을 닦는데 힘을 돕는 주문’이라는 뜻이다. <수능엄경> 제7권에 수록됐다. 대표
적인 주력(呪力)수행법으로 정착해 간혹 어린아이마저 ‘개인기’ 삼아 암기하는 형
편이다.
인터넷상에선 능엄주의 영험에 관한 네티즌들의 증언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능
엄주를 매일 꾸준히 외우다가 중간에 멈춘 적이 있었는데, 삶의 환경이 척박해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 때는 주위가 모두 나의 편이 아닌 듯했습니다. 다시 능엄주
를 시작했고 중간에 놓아버렸던 것을 참회하며 매일 외우고 있습니다. 어쨌든 요즈
음은 마음 편합니다.’ 능엄주 수행을 한 후로 오래지 않아 같이 점심을 먹었던 일행
들의 앉은 순서와 옷차림까지 똑똑히 기억할 수 있게 됐다는 작은 기적도 거론했
다.
낯설었지만 행복해 보였다. 능엄주에 천지가 개벽할 만한 문자적 의미가 숨어 있다
고는 생각지 않는다. 부처님의 말씀이니 적어도 금강경 이상의 의미를 넘지 않을
것은 자명하다. 능엄주의 결과보다 능엄주의 이유가 눈에 더 밟힌다. 하루라도 모
두가 내 편이 아닐 때 찾아오는 절망감. ‘모든 사람들이 미끼를 걸고 낚싯대를 드리
운다. 드리운 낚싯대에 무언가 걸리면 그걸로 희희낙락하며 한 길도 안 되는 낚싯
대를 이리저리 휘둘러 댄다. 서로의 재주를 미끼에 걸고 온 정신을 집중하여 상대
의 기대감을 낚으려 한다. 네가 나의 낚시에 걸리고 내가 너의 미끼에 채인다.
하루를 계획하는 사람은 한 길도 안 되는 낚싯줄을, 일년을 계획하는 이는 열 길도
안 되는 낚싯줄을 드리우며 걸리고 걸리어지는 것이 우리들의 삶이다.’ 덕주사 주
지 원경스님의 법문이다. 덕주사의 능엄주 비문은 1994년에 세워진 전각 안에 봉
안돼 있다. 비석의 희미한 글씨보다 전각 시주자들의 쌀알 같은 명단이 열배는 더
선명하다. 그들의 이름은 능엄주 곁에 있지만 일상이 언제나 복될 것 같지는 않다.
이런저런 논리로 버티고 버티다 안 되면, 결국 말이 되지 않는 말을 되뇌며 말이 되
는 삶을 꿈꿀 것이다.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삶, 말이다.
제천=장영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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