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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6월 척주 정기산행지인 "지리산 남부능선"산행은
아래의 제 산행기를 한번 참조하시고 걷는다면 의미있는 산행길에 참조가 되리라 믿습니다.
이글은 2년전 가을에 울 산방의 날들님, 물빛님, 푸울님 그리고 몇몇 지인이 함께 다녀왔던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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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남부능선길...
어머니의 산으로 비유되는 따뜻하고 포근한 산, 거대한 사랑이 골짜기마다 가득한 산,
지리산으로 지리산으로 지리산으로 간다.
이번 주 산행은 지리산 100리 주능선길을 한 곳에서 조망이 가능한 삼신봉(三神峰)을 거쳐 주능선과 만나는 영신봉 아래의 세석고원을 거쳐 거림골로 내려서는 16km, 40리의 만만찮은 도상거리를 가진 산길을 걷는다.
또한 이 산행은 세가지의 주제와 함께 걷는 산길 즉, 청학동, 빨치산 그리고 지리산이다.
산행의 시작은 아무래도 청학동 매표소에서 부터지만 청학동 어귀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청학동 코스의 산행은 시작된다. 그 이유는 삼신봉터널을 통과하면서 왜 청학동인가에 의문부호 하나쯤 간직하고 산을 올라야 하기 때문이다.
청학동으로 가는 길은 대진고속도로에서 단성으로 빠져나와 중산리 방향 20번 국도를 달리다 왼편의 시천면 내대리 방향으로 머리를 돌리면 예치터널을 지나 거림골의 거림지구로 향하게 된다. 거림골은 이번 산행의 하산지점이다. 산행기점인 청학동으로 가기 위해 내대마을에서 왼쪽의 낙남정맥 능선에 있는 묵계치 아래로 지난해 뚫린 삼신봉터널을 지난다. 약 2.2km길이의 터널, 반대편에서 오는 차량이나 같은 방향의 차량도 보이지 않는 조용하고도 이상한 터널이다.
이 터널의 가치는 터널을 벗어나면서 발견된다. 터널을 벗어나면 의례 탁 트인 벌판이나 넓은 도로를 연상하기 쉬우나 오히려 더 좁아 보이는 골짜기 속의 산촌마을을 황토먼지를 흩뿌리며 가로질러 버린다. 그리고는 청학동 첩첩산중의 마을로 접어들게 된다.
삼신봉터널의 시작과 끝은 이렇게 허무해져 버린다.
삼신봉터널로 인해 절해고도의 청학동, 이 피안(彼岸)같은 세계가 환속한 것 처럼 속세에 알려지면서 청학동을 찾는 사람들이 하동을 거쳐 구비구비 돌아 들어야 하는 불편함이 싹 사라졌다는 것. 그런 이점 아닌 이점이 있는 반면에 그 엄청난 공사비를 들여 신선의 땅의 신비로움을 굳이 걷어버려야 하는 속사정이 궁금해 진다.
이젠 인터넷에도 청학동은 이전의 청학동이 아니다. 청학동에 생겨난 전통예절서당이나 학당이 부지기수로 늘어나고 그곳의 사람들은 누구나 도인처럼 혹은 훈장같은 이미지를 상품으로 내놓는다. 전기는 커녕 문화의 수혜를 아예 받기를 거부해 왔던 과거의 청학동 1세대들도 현대문명세계의 유혹에 구한말 상투 자르듯 그렇게 쉽게 용해되어 버린 것인가? 유림이 한때는 케케묵은 문화라며 일부 진보적인 사상가들에게 무참히 짓밟히기도 했지만 그래도 유교의 훌륭한 덕목이 지니는 현실 유지력만큼은 감수성 예민한 요즘의 젊은이에게도 잔잔히 배여들 정도이고 우리 사회가 아직도 따뜻한 훈정이 남은 것도 결코 버릴 수 없는 우리의 문화, 유교의 잔재가 아닌가.
아무튼 삼신봉터널 덕분에 청학동을 산행기점으로 하는 삼신봉에서 세석고원까지의 남부능선에 쉽게 접근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국민관광지로 이젠 거듭나길 바랄 뿐이다. 더 이상의 속된 것이 아니라 청학동 스스로가 그 가치를 빛낼 수 있고 그 문화를 전승할 수 있게끔 더욱 절제된 사고가 필요할 지도 모른다. 그런 한편으로 비싼 공사비가 헛되지 않으려면 많은 사람이 이용하여 청학동의 고고한 문화전통이 이젠 폐쇄된 그들만의 영토란 개념을 벗어나 우리 사회 깊숙이 참된 민족얼을 일깨우길 바랄 뿐이다.
청학동매표소에 도착한 시간은 9시 정각이다. 여러 산행안내서에서 참고하기를 삼신봉 정상까지는 1시간반이 소요된다고 한다. 1시간 반이면 산행시간 중 몸이 산의 경사에 적응될 시간이다. 적응될 시간만에 2.5km 거리의 정상에 오르게 되면 나머지 구간인 13.5km는 유연한 산행, 즐기면서 걷는 산행이 되는 것이다.
삼신봉이라지만 지리산이다. 지리산의 많고 많은 지능선 중에서 삼신봉이 포함된 남부능선은 비교적 잔뼈가 굵은 능선이다. 평균 고도가 1,100m는 족히 넘는 봉우리들이 엮여 평균 1,500m의 지리산 주능선으로 밀고 가는 능선길이다. 그 만큼 다른 근교산을 오를 때와는 사뭇 다른 마음가짐을 가지게 된다. 자칫 길을 잃으면 근교산과 달리 그야말로 산에 갖혀 버릴 수도 있는 그런 산이기 때문이다. 그 만큼 넓은 산이나 때로는 어머니의 품같은 산이 아니라 세상으로 부터 버림받는 신세가 될 수도 있는 두 얼굴의 산인 것이다.
10월의 마지막 일요일, 단풍이 10월 28일경 지리산에 절정을 이룬다고 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청학동계곡의 단풍은 생각과는 달리 단풍홍엽의 계곡길이 아니어서 다소 섭섭한 길을 처음부터 걷게 된다. 단풍이 청학동의 정기와는 무관하겠지만 오르는 도중 매표소에서부터 줄곧 우리의 산행을 따르는 동네의 열살이나 됨직한 코흘리개 꼬마 조차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것도 청학동에서 피어 올리는 도인촌의 정기 때문이리라. 구름에 앉아 칠선계곡에서 천왕봉에 올랐다는 고운 최치원이 신선이 되었다는 산이 지리산이니, 세속에서 온갖 풍상에 쩔어 도피하는 곳도 청학(靑鶴)이 사는 신선의 나라라니, 결국 세파의 무거운 짐을 벗고자 하는 이의 피난처가 곧 청학의 나라, 신선의 나라라는 등식도 성립한 것 처럼 들린다.
지리산의 산세나 지질은 거의가 바위산이다. 몇몇 계곡길을 제외하고는 계곡길이 죄다 바위 투성이여서 무릎이 부실한 사람들의 산행을 방해하기 일쑤다. 하지만 청학동계곡길은 그야말로 유유자적하게 산을 오를 수 있을 만큼 편한 길이다. 이따끔씩 나타나는 계곡의 바위길이 오히려 반가울 정도였으니...그런 저런 단상 속에서 40여분 오르니 벌써 갓걸이재라 흔히 부르는 안부 삼거리다. 영신봉에서 뻗어나온 남부능선이 낙남정맥이란 한반도 지형속의 이름으로 바뀌면서 낙동강 하류까지 뻗어 가는 능선길의 초입에 해당하는 곳이다. 이정표대로 걸어오르면 10분이면 삼신봉 정상이고 직진하면 낙남정맥길.
안부에 올라서자 마자 맞은 편에는 천왕봉이 우람한 어깨근욱을 드러내며 지리산 100리 주능선길의 지친 나그네들의 환희의 종착점으로 지키고 섰다. 하지만 안부에서의 조망은 이쯤에서 잠깐 접어두고 삼신봉으로 마저 남은 길을 오른다. 생각보다 거리가 가까워 보이는 삼신봉이다.
삼신봉(三神峰, 1,284m). 엄밀히 말해 외삼신봉이다. 20분 거리의 서쪽 능선에 있는 내삼신봉은 이 보다 높은 1,355m의 고봉이지만 외삼신봉을 삼신봉으로 통칭하여 부른다. 흔히 남부능선이라고 하면 영신봉에서 발원해 삼신봉을 둘러 광양 백운산을 마주 보는 섬진강 나루의 악양, 고소성을 낀 신선봉, 형제봉까지 망라한 20km의 긴 능선을 광의의 남부능선이라 부르지만 이번 산행지는 삼신봉에서 세석고원까지의 협의의 남부능선 20리길이다. 그 긴 남부능선중 이번에 제외된 내삼신봉 코스는 일반인들에게도 잘알려진 남부능선길이다. 흔히 쌍계사를 거쳐 불일폭포, 상불재, 쇠통바위를 거쳐 내삼신봉, 외삼신봉(삼신봉)을 돌아 세석으로 가는 길, 세석을 거쳐 천왕봉 또는 다른 코스로 연결되는 1박2일 코스로 유명한 코스이다.
지리산에는 '신(神)'이 들어가는 봉우리가 세개가 있는데 주능선의 영신봉, 내삼신봉과 여기의 외삼신봉이다. 그 만큼 신과 밀접한 산이 지리산이다. 지리산의 신화적인 이야기 또한 우리나라의 건국신화와 맞물려 있어 더욱 흥미로울 수 밖에 없고 실제로 지리산의 모든 지명들이 그 신화에 기인하고 하고 있다. 그러한 신화를 지키고 민족의 얼을 불지피고 있는 곳, 역시 청학동의 삼성궁이 아닌가. 이 신화와 관련된 지리산을 어찌 다 이 지면에서 얘기할 수 있을까.
삼신봉에 올라선다. 한마디로 일망무제(一望無際), 거칠 것 없는 조망의 자유로움이 삼신봉 정상의 파노라마 사진 안내판과 똑같이 펼쳐져 있어 몸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돌려야만 지리산 100리 주능선을 다 조망할 수가 있을 정도다. 엄청난 감동이다. 이런 감동이 있기에 삼신봉을 지리산 주능선 조망에 있어 최고의 전망대라고 모두가 한결같이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거기에다가 영신봉과 세석고원까지 이어지는 남부능선의 끊임없는 말등마루가 명쾌한 능선길을 열어놓고 있지 않은가. 걷고 싶도록, 지칠 때까지 달리고 싶도록 남부능선이 한 많은 역사의 배앓이를 막 끝낸 것 처럼 포근한 단잠에 빠져있는 것 같다.
주능선 왼쪽 끝 노고단에서 출발한 능선은 파노라마 사진 안내판의 연봉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그 실체를 볼 수 가 있는 것이다. 여신 마고(麻姑)의 사랑을 뿌리치고 멀리 앉은 둥그스름한 남신의 산인 반야봉, 뱀사골 산장이 있는 삼도봉,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이 사살된 빗점골을 안고 있는 토끼봉, 연하천 산장이 있는 명선봉, 형제봉을 거쳐 구비구비 임도를 끼고 북쪽의 삼정리로 넘어가는 벽소령, 덕평봉, 가야국 허황옥의 일곱아들이 성불하여 부처가 되었다는 칠불사과 연관된 칠선봉, 세석고원의 전설을 간직한 영신봉, 촛대봉, 연화봉, 장터목, 고사목지대의 제석봉, 주봉이자 마고산신의 산인 천왕봉까지 거침없이 뻗어가는 영산의 모습, 이 감동의 능선에 모든 한국인이 걷고 있었다. 장쾌하다.
이번 산행의 종점이 삼신봉이 아니기에 우리는 남부능선으로 발을 옮긴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지리산 산행인 것이다. 내려서자 마자 제석봉 아래의 키가 큰 고사목이 아니라 왜소해 보이는 나무의 주검, 목시(木屍)들이 줄을 잇는다. 제석봉에서 느끼는 인간과 신과의 관계를 연상시키는 큰 키의 고사목이 아니라 남부능선의 고사목은 신화와는 달리 살아있는 역사의 초상화를 고사목으로 재현해 놓은 것이었다. 50여년전 이 능선길에서 토벌대와 추위와 기아와 명분없는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차례로 숨져간 사람들의 영혼이 그대로 이 능선의 곳곳에서 승천하지 못한 채 이승에 남아 제각각 목마른 형상들을 하고 있다.
고사목 주변은 어른 키높이의 산죽들이 능선길 거의 절반을 함께 걷는다. 능선길 특유의 좌우 풍광을 가리며 빼곡히 들어찬 산죽들이 다소 답답할 정도이긴 하지만 호쾌한 경관을 아무렇게나 드러내 놓지 않는 이 능선이 더 나아보이는 것이 이따금씩 나타나는 바위 전망대에 서면 가슴에 와닿는다. 오르락 내리락, 20리 남부능선길이 아마도 크고 작은 기복을 합치면 몇십군데의 오르내림이 있는지 모른다. 완만하게 큰 봉우리를 넘는 것도 아니요 모든 것이 숨가쁘게 넘고 또 내리고 오르고...능선이 포근한 잠속에서 아팠던 역사를 꿈꾸며 가위눌림을 당한 것처럼 요동치고 있다. 50년 전의 사람들이 숨가쁘게 뛰어 다니는 바로 그곳이었다.
아침의 맑고 푸르렀던 하늘이 서서히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전날 일기예보는 전국적으로 '구름조금'. 지리산 역시 구름조금의 평범한 기상예보였으나 지리산은 일상의 예보와는 별유천지(別有天地)의 나라이다. 신(神)들의 나라이기도 하고 50년을 마음대로 왔다갔다 하는 4차원의 산이기에 기상예보는 산밑 세상에나 적용되는 용어일 뿐이다. 집안 3대가 덕을 쌓아야만 볼 수 있다는 지리산 100리 주능선이 아닌가. 삼신봉에서는 별볼 일 없는 집안내력까지도 자랑스러웠다가 일순간 집안내력의 불순함까지 들키고 마는 심정이다.
24년전 대성리에서 세석으로 오르던 길이 오버랩되면서 덜컥 겁이 나기도 한다. 갓 20대에 들어 겁없이 지리산을 올라 그 창창하던 하늘이 먹구름에 뒤덮히면서 손가락 굵기의 비를 뿌려대며 한여름임에도 동상이 염려되거나 오한에 심장이 마비될 것 같았던 한시간 동안의 공포가 다시 몰려왔음을. 그리고는 지리산이니 뭐니 살아야겠다는 본능으로 대성리 산촌(散村)의 외딴 민박집으로 도망치듯 하산했던 곳. 그 기억이 되살아나기도 한다. 그 만큼 어두운 구름이 몰고오는 찬바람이 손과 얼굴에 맞닥드리면서 20대의 무모함에 실소가 나오기도 한다. 그 만큼 산에 대해 무지와 오만을 감출 정도의 감정절제는 가능하다는 생각이 아주 조금은 드는 요즘이다.
삼신봉에서 출발한 지 거의 한시간이 다 되어서야 뒤덮힌 산죽길 왼편에 바위전망대 하나가 왼쪽의 단천골 골짜기 위에 불거져 나와 있다. 댓잎들의 서걱이는 소리와 발걸음, 숨소리 만이 들리던 산길에서 일순간 단천골의 단풍나무를 새빨갛게 물들일 정도의 비수 품은 한풍(寒風)이란 무사의 소름돋는 소리가 골짜기 아래에서 올라온다. 넓은 골짜기 전체가 그야말로 만산홍엽(滿山紅葉), 단풍의 계절에 제대로 찾은 산이란 생각도 든다. 단풍철 내장산에서도 단풍을 절실히 느끼지 못했던 내가 왜 지리산에서 그 단풍에 음풍(吟風)할 생각을 하는지 나 자신에 대해서도 이해못할 구석이 많은 것이다.
그런 한편으로 다시 50년전으로 되돌아 간다. 종군기자였던 이태(이우태)의 소설 남부군은 잘알려진 대로 80년대 말 발표된 자전적 소설이고 90년에 영화화 되어 우리 사회에 남부군의 실체에 대해 관심을 갖게끔 했다. 소설 남부군에서는 이들의 남한내 투쟁의 소소한 면까지 그리고 있지만 빨치산들의 생활까지도 들여다 볼 수 있게끔 빨치산에 대한 관념에서 실상의 무대로 옮겨 놓았다는데 의의도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더욱 관심을 끌게 하는 대목이 이들의 이성교제였다. 그리고 이들의 감성만큼은 이데올로기도 막지 못한다는 얘기기도 하다. 철저한 사상검증을 거친 여자 간부도 이의 유혹에서 벗어나질 못할 정도였으니 그 아래의 하급 병사들의 그것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곳에서 소설 남부군이 이야기하려는 것은 사상은 이성과 감성을 지배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사상은 이성과 감성의 하위개념이란 것이다. 춥고 배고프고 언제 개죽음을 당할지 모르는 절박한 현실에서 이데올로기는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들은 이 남부능선의 산죽길을 뛰어다녔다. 산죽에 스치는 댓잎소리에 조차도 스스로 놀라기도 할 정도의 스산한 산죽길을. 그들에게도 가을 단풍철이 찾아오기도 했다. 왜 단풍의 새빨간 종말에 그들의 인생을 한번쯤 대입시키고 싶은 감정이 일지 않았겠는가. 소설에서는 그런 숲길을 거니는 비밀스런 연인이 나오기도 한다. 봄이면 진달래꽃에 취하기도 하고 가을 단풍철에 보고싶다는 감정 한구절 담은 편지라도 쓰고 싶은 그런 욕망. 그리고 겨울이면 숨죽이며 토벌군을 피해다녀야 했던 그런 생활의 연속들.
바위전망대에서 그들은 몸조차 바위 위에 제대로 서서 풍광을 음미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전망대는 그들에게는 초소였고 그곳에서 토벌대나 산아래의 움직임을 정찰하는 망바위였던 것이다. 영화 속의 낭만적인 한 장면은 분명 그들의 본능에서 나온 실상이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그 아름다운 지리산 골짜기의 단풍을 마치 정복자처럼 내려다 보는 우리는 그들의 무엇인가.
지리산 천왕봉으로 오르는 중산리길에서도 과거 문창대(지금은 법계사 위쪽의 바위를 문창대라 정정되었음)라 불리는 바위 아래의 석간수 샘터에서도 느꼈지만 샘터는 동물의 세계와 흡사하다. 물가는 야생동물의 세계에서도 위험하기 짝이 없는 함정일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물가 주변에 잠복한 포식자들은 목마른 초식동물을 기다렸다가 덮치듯이 토벌대와 빨치산의 관계가 그랬을 것이다. 물 한모금 마시기 위해 목숨을 걸고 살금살금 기어들어와 사살되거나 체포되는 일, 그 것이 샘터에서 흔히 자행되었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 문창대 아래의 석간수터나 이 능선길의 한벗샘터에서 말이다.
'자빠진골'이라 불리는 골짜기. 한벗샘터로 이어지는 계곡길, 지금은 폐쇄된 등산로이지만 한벗샘이정표 근처에서 거림골이 내려다 보이는 나무사이로 억지로 보면 거림골까지 엎어지면 코닿을 만큼 직선거리의 짧은 산길로 보인다. 이 자빠진골 지명의 근원이 바로 자빠지면 배꼽닿을 길이란데서 연유된 것 아닐까. 분명 그럴 것이다. 그런 만큼 거림골은 남부능선과 지척의 거리여서 빨치산의 출현이나 토벌대의 이동이 많았던 곳이라 하지 않은가.
한벗샘터 이정표를 지나면 서서히 고도를 높여간다. 삼신봉 1,284m에서 내리락 오르락 하였으나 삼신봉의 높이를 넘지 못하다가 이제부터 삼신봉의 높이를 넘어 지리산 주능선의 고도로 차츰 맞추어 가는 길이다. 시각은 오후 1시에 가까운 시간이건만 어두워진 하늘은 쉬이 그 불편한 심기를 풀지 못한다. 산봉우리를 몇개를 넘었는지 알수는 없지만 어느덧 지계는 대성골로 접어든다. 1,329m의 높이의 바위 전망대에 서니 이제는 오른쪽의 거림골이 훤하게 보인다. 이날 산행의 최종 종착지인 거림골이다. 조금전의 한벗샘터에서 이어지는 자빠진골이 이 산자락과 저 산자락이 유사분열을 하듯 가운데 계곡이 어두운 하늘의 명암속에서 가리마를 타고 있다.
천왕봉을 덮었던 구름이 이제는 촛대봉까지 집어 삼키고 있다. 단군신화의 풍백, 우사, 운사가 강신하듯 바람 또한 거세지고 비인지, 눈인지, 우박인지 간간히 눈앞을 스치기도 한다. 멀리서 보면 독립된 봉우리처럼 보이던 천구만별(千龜萬鼈)의 형상을 한 시루봉이 촛대봉의 그늘에 가리워져 촛대봉 능선 아래의 도장골로 흘러든다. 왼쪽의 영신봉 아래의 세석평원까지 드문드문 널린 소나무까지 조망되고 산장의 건물이 아스라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 시간이면 점심을 해결해야 할 시간이지만 중간 회귀점인 세석고원까지는 아직 한시간은 더 걸어야 한다. 전망대를 지나자 마자 앞서간 일행들이 선다. 아! 이제서야 푸를 청(靑), 청학의 세상, 신선의 나라로 들어가는 입구인 석문(石門)이다. 높이 10여m에 길이 10여m의 석문이다. 석문에 대해 고서가 증명하는 이야기는 허다하다.
조선조 명재상인 유성룡의 형인 유운룡의 <겸허일기>에서 '하동 화개현에서 유숙하고 아침먹고 점심나절에 등촌에 들러 사흘 동안 먹을 양식을 구해 노숙을 사흘 동안 하면 커다란 돌문이 나오고 돌문을 지나 40리를 가면 1천섬을 거둘 수 논과 밭이 있는데 넓이가 1천호에 이른다'라고 했다.
또 고려 때 문인 이인로의 파한집에도 “길이 협착하여 사람이 겨우 다닐 수 있고 몸을 구부리고 수 십 리를 가면 넓은 땅이 나타난다. 푸른 학이 살며, 옥토가 가시덤불에 덮혀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여기서 언급된 돌문은 불일폭포 위쪽의 쇠통바위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람에 따라 달리 말할 수 있지만 지금의 청학동 자리가 진정한 청학동이라 보는 사람은 이 돌문, 즉 쇠통바위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유운룡이나 이인로 모두 40리니 수십리를 이야기 한 것을 보면 쇠통바위에서 세석까지의 거리를 일컫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러므로 청학동 사람들이 말하기를 쇠통바위를 열면 청학의 나라로 가는 길이 보인다고 생각해왔고 이 석문은 바로 입구가 아니었을까. 선인들의 두류산(頭流山, 지리산의 옛이름) 여행기에는 그 밖에도 석문을 지나면 석천(石泉)에서 노숙을 하고 아침에 세석의 광활한 고원을 보고 이곳이 청학이라 했다는 얘기가 많다. 여기서 석천이란 음양수터를 말하는 것일게다. 정감록에서도 '석문을 지나고 석천을 만나는 곳이 불로장생하는 청학동이다'라고 했다.
이 뿐만이 아니라 조선조때 김종직, 김일손, 송병선등의 두류산기 등에서 진정한 청학동을 찾아 헤맸던 기록들은 많이 나와 있다. 그러면 청학동은 어디인가? 현재까지 알려진 후보지는 남부능선 주변의 여러 고을들이 그 후보지로 많이 거론 되기도 했고, 가장 그러려니 하는 곳이 악양이란 곳, 소설 토지의 주무대가 바로 청학동이란 이야기가 강하게 뿜어져 나온다고 한다. 하지만 심심찮게 거론되는 곳이 세석고원이다. 세석(細石)이 많아 아무래도 바위투성이의 지리산과는 달리 농사에도 어느 정도 적합했을 것이고 높고 넓어 세속의 사람들이 쉽게 범접하기 어려운 곳이고 낙원처럼 세석고원에서 자급자족할 만큼의 농토. 촛대봉 아래의 옛날에 조성한 인공의 '청학연못'이 이를 뒷받침하듯 사철 마르지 않고 있으며 연못을 막고 있는 비탈진 바위에는 선인이 이 세석지역을 청학동이라 믿고 바위에 '靑鶴'이라 각자를 해놓은 것 만으로도 이곳에 옛날 사람들이 거주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푸를 청(靑). 박목월의 시, 이육사의 시에도 이 푸를 청은 등장한다. 선계의 나라, 신비로운 이상향의 고향은 이렇게 푸른 색을 띠는 모양이다. 석문을 지나면 어딘지 모르게 석문바위의 암회색과 찌푸린 하늘색 그리고 소나무의 녹림이 색조합을 하여 푸르게 보이게 하는 것, 이 것이 상상 가능한 청학의 세상으로 들어가는 건 아닐까. 아마 옛 선인들도 그러한 상상을 이 석문에 서서 이제서야 도달한 자신들만의 이상향에 경탄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방문자들은 진정한 청학을 찾았다는 얘기는 없었던 것이 석문을 지나면서 애석한 부분들이었음을... 이인로(李仁老·1152~1220)도 이 꼴같지 않은 세상을 단칼에 끊어버리기로 하고, 소 두어 마리에 짐을 싣고 청학동을 찾아나섰다가 화개 골짜기까지 와서도 청학동을 찾지는 못하고 “신선은 없고 원숭이만 운다”라고 바위에 써놓고 돌아왔다고 전해진다.(파한집)
얼마나 걸었을까. 삼신봉에서 부터의 발품이래야 이제 5.3km 남짓 걸은 길이다. 시간은 이제 오후2시를 넘어 가고 있다. 배낭에 든 냉동 햅쌀밥과 라면, 물 끓이는 시간 등을 감안할 때 10분의 시간도 아껴 써야 하므로 일행중 몇명은 서둘러 세석으로 떠난다. 그 뿐 아니라 나머지 인원도 그 10분이란 시간에 늦지 않으려 발걸음을 서둘지만 바로 앞의 암봉 전망대가 그 바쁜 걸음을 붙잡고 만다.
처음에 나타난 서쪽의 전망대, 다음엔 나타난 동쪽의 전망대...지금은 다시 서쪽의 대성골을 굽어보는 전망대 바위다. 조금전 까지의 모든 전망대와는 달리 동서남북이 거칠 것 없이 터진 전망대이다. 특히 서쪽으로 난 전망대이기 때문에 대성골 자락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24년전의 기억이 다시 떠오르기도 하고 50년전의 전설같은 이야기도 아스라한 기억처럼 찬기운 속에서 산자락을 타고 오르기도 한다.
52년 연초의 겨울 빨치산 대토벌 작전이 전개된 곳이 대성골이다. 그 당시 이 넓은 대성골 골짜기에는 추위와 토벌대의 토벌작전에 주눅이 든 1만여명의 빨치산이 모여 있었고 당시 토벌대장인 백선엽은 대대적인 토벌 혹은 고사작전으로 빨치산의 세력을 초토화시키기에 이른다. 소총만으로 무장한 빨치산과 유엔군에서 지원 받은 대포와 항공지원으로 지리산은 한순간 붉은 피와 붉은 화마와 붉은 절규가 어울어져 붉은 산이 되고 마는 비극을 맞기도 했다. 1만여명의 빨치산. 이들은 빨갱이로 분류되는 이념의 희생자가 아니라 참되게 살고자 하는 양민의 신바람난 청학의 꿈을 지리산에서 날려 버리는 허무주의자로 이승을 저버린 사람들이다.
이들의 투쟁은 전쟁이 끝나고도 10년을 버티다 63년 마지막 빨치산이라 불리는 남장(男裝) 빨치산인 정순덕의 생포로 그들의 투쟁역사는 종말을 고하게 된다. 그런 시련과 과정을 밟고 다닌 골짜기가 바로 대성골이다. 그 만큼 지리산 골짜기 중에서 깊고 깊은 골짜기란 증거인 것이다. 그 곳을 24년전 겁도 없이 올랐던 능선이었고 어디가 어딘지 모르고 올랐던 산등성이였다. 대성골이 바로 지리산이고 그 역사였던 것을 당시의 이념을 목메인 상태에서 무엇에 대한 상념이 큰 가치였을까? 대성골의 단풍은 점점 짙어져 가고 있었다.
대성골의 단풍이 짙어진 만큼, 가야할 길 조차도 가팔라 지고 세석으로 가는 길이 이렇게도 힘들었었나 싶을 만큼 지친 발거음이다. 옛 선인들이 거쳐간 음양수 샘터에 들어니 스산한 바람이 돈다. 청학동을 찾아 지리산인 두류산을 찾아 헤매었던 선인들도 석문을 돌아 이 음양수 샘터에서 비박을 하며 이 샘물에서 청학동이 머지 않은 곳에 있음을 직감했다지만 청학동은 결국 이상향일 뿐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더란 기억을 여러 문서에 남겨 놓았다. 세석고원이 유일한 희망이었지만 화개의 악양과 지금의 청학동을 그 이상향으로 꼽은 이유 역시 넓은 논과 밭이 배불리 먹을 수 있는 환경으로 제시할 수가 있었던게 큰 이유가 되지만 아무래도 세석고원은 책읽는 선비들의 가슴에는 영원한 이상향의 나라, 이 땅의 무릉원이었음을 그 누가 부인하랴.
그렇게 발걸음은 세석고원 그리고 세석산장으로 옮겨가고 있다. 40리 산행길 중의 대부분을 능선에서 보낸 25리길, 남은 시오릿길은 하산길이다. 촛대봉에 얽매여 있는 구름이 좀처럼 물러날 생각을 않는다.
이 구름은 가까이서 보면 흰구름처럼 보인다. 어두운 하늘이 흰구름을 회색으로 채색해놓은 구름이다.
여신 마고(麻姑)는 아름다운 거인신이었다. 손톱은 길고 새의 부리처럼 날카로웠다. 인간화된 이야기속의 여신 역시 질투를 하는 평범한 여인으로 둔갑되어 있기도 하다. 그리고 자기도취에 빠진 여신이었다. 그 오만한 여신이 한눈에 반해 버린 이가 반야(般若)였다고 한다. 하지만 짝사랑이었고 마고는 반야를 수만년을 기다려 보지만 반야는 결국 돌아오질 않았다. 오만한 여신은 신경질적인 여신이되어 손톱으로 지리산의 나무들을 마구 긁어 나무의 흰 나무껍질로 그리운 반야의 흰옷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 흰옷이 세석고원에 걸쳐져 있는 흰구름인 것이다.
반야는 항상 마고의 주변을 맴돌기는 하지만 마고의 마음을 결코 받아주진 않았던 모양이다. 반야를 기다리다 지친 마고는 천왕봉을 지키고 있다가 불현듯 반야의 옷자락을 좇아 세석까지 오게 되지만 또 반야는 멀아진다. 이제서야 후회를 한 마고는 반야의 흰옷을 갈기갈기 찢어 능선에 흩뿌려 놓고는 천왕봉의 여신이 되었다는 신화 속 이야기가 있다. 그렇게 갈기갈기 찢어진 흰옷이 지리산의 고사목이 되었다는 이야기.
유치할 수도 있는 이야기이나 이런 신화 이야기가 지리산을 더욱 신비롭고 가치를 지닐 수 있게끔 하는 이유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바로 이 이야기가 세석에 펼쳐져 있는 것이다.
늦은 점심을 먹고 하산하기 직전의 평원과 촛대봉은 더욱 짙은 구름에 휩싸여 있다. 남아있는 산행구간인 6km의 하산길, 거림골로 가는 길이다. 일제때 일본인들이 세석고원 구경을 위해 거림골 사람들의 지게에 앉아 계곡을 올랐다고 할 정도의 완만하고 세석으로 가는 가장 짧은 길이 거림골이다. 요즘은 그렇지 않지만 한때는 지리산 산천경계를 구경온 나들이객들도 거림골에서 술이 곤드레 된 채로 거림골 사람들의 지게에 얹혀 올랐다는 계곡이다.
거림갈림길에서 본격적으로 하산을 한다. 세석교를 지나 또 다시 전망대에 서니 지나온 여정길, 남부능선길이 한눈에 조망되는 곳이다. 멀리 삼신봉에 등산지팡이로 가리켜보며 파노라마사진 안내판의 삼신봉을 동시에 짚어본다. 똑같이 생긴 지형, 똑같은 산봉우리의 형태가 실제로 거쳐왔음을 반증한다. 보이지는 않지만 삼신봉 너머로 섬진강가의 악양 평사리와 신선봉까지 흘러간 능선, 소설 토지 속의 별당아씨와 구천이가 눈이 맞아 야반도주했던 능선상의 형제봉까지 보이지 않는 사물과 이야기가 삼신봉 너머에서 꾸역꾸역 밀고 오고 있다. 하산이 하기 싫어지는 것인가. 등산복 어깨로 '투덜투덜' 떨어지는 진눈깨비 아닌 우박을 맞으며 거림골로 '빼딱빼딱' 걸어내려가는 이 땅의 흔들리는 군상들...그리고 그 화두들,,,빨치산, 청학동,...지리산.
첫댓글 스퀴드님 공부 많이 하고갑니다 그런데 이번코스는 거림에서 시작해서 청학동으로 내려옵니다.올끼가
지난주에 넘 무리해서리...이번주는 도봉산이나 뺑빼이 돌랍니더~~~ 용서구다사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