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면 한 그릇에 깍뚜기 한 종지
박찬미
대구 교동시장
안에 물냉면이 맛있기로 소문난 집이 있었다. 교동시장의 대부분의 가게가 그랬던 것 처럼 허름한 기와지붕과 앞부분에 머리 쳐든 양철간판에 붓글씨로
"교동냉면"이라고 씌인 가게였다. 이런 건물은 텔레비젼에서 일제시대 후의 근대시대 드라마 거리배경으로 자주 볼 수 있다.
분지(墳地) 특유의 고온다습한 대구 여름날씨에도 그 냉면집에는 손님이 북적거렸다. 요즘처럼 에어컨이 있을리 없고, 쇳소리가 더
시끄러운 낡아빠진 선풍기 두어대 벽에 매달린게 전부였다.
가게터가 좁아서 서서 기다리는 장소 조차 여의치 않았다. 어떤 때는 가게 밖
뙤약볕에서 기다려야 하기도 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동행해 간 사람끼리 한자리에 앉아 먹는 일은 포기해야 할 지경이었다. 어디라도 자리가 나면
얼른 의자를 차지하고 앉아야 했다. 애인이라도 다른 테이블에 앉아서 먹고 나간다고 했다.
이렇게 장사가 잘 되면 가게를 좀 넓혀도 될 텐데 그 가게는 처음 생길 때 부터 장사를 걷는 날 까지 그대로 였다. 가게는 아주
좁았다. 손님이 줄을 서서 기다린다고는 하나 겨우 테이블 여섯 일곱을 간신히 놓을 수 있는 아주 작은 가게였다.
뙤약볕에 서서
기다려야 하고, 천정 낮은 가게의 뜨거운 열기가 그대로 훅훅 묻어나는 열악한 환경을 마다않고 이 가게를 찾아오게 하는 매력은 빼어난 냉면맛
때문일 것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지금 나는 빼어난 그 맛을 다 기억 못한다. 냉면맛을 제대로 알기도 전, 어릴 적에 그 곳에 드나들었기
때문이다.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아버지 손을 잡고 두어번, 그리고 대부분은 큰 언니와 갔었다. 맛은 잘 몰랐지만 새 옷 입고 시내에 가는 것이
마냥 좋아서 그 냉면집의 북새통도 감수(?)했던 것 같다.
아버지께서는 어린 내가, 머리통의 두배가 넘는 냉면기를 양손으로 들고 국물을 죽 들이키며 "캬아~~"하는 것이 기특해서 자주 데리고
다니셨다고 한다. 정말 그랬다. 호흡을 참을대로 참으면서 국물을 양껏 마신 다음, 탁자에 그릇을 "탁!" 내려놓으면 땀방울이 등줄기를 타고
주르르 선득하게 흘러 내렸다. 어느새 체온이 한거풀 식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국물만 연거푸 마시고 면은 질겨서 잘 안 먹었다. 대신
깍뚜기를 아작아작 씹어 먹었는데, 그 맛이 일품이었다.
깍뚜기는 골패쪽으로 썰어서 길숨한데 냉면 한 그㈎?딱 한 종지를 주었다. 한 종지에 깍뚜기 서너 쪽이었을 것이다. 집에서 먹는
무우김치나 깍뚜기와는 다른 유별난 맛에 나는 언제나 그 깍뚜기에 더 욕심을 부렸다. 그러나 얼굴은 후덕하게 생긴 주인 할머니였지만 깍뚜기를 더
준 적은 없었다. 아무에게도 더 주지는 않았다고 한다. 부끄럼을 무릅쓰고 언니가 부탁을 드렸더니 겨우 한 조각을 더 준 것이 생각난다. 왜
그렇게도 깍뚜기 인심이 숭악했는지 모를 일이다.
내가 중학생 때 친구와 간 적이 있다. 돈가스같은 먹거리가 인기있던 때에 친구에게
온갖 설득을 다 해 데리고 갔건만 실망만 했다. 주인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대를 물려받은 며느리가 제 맛을 못 내고 있던 터라 손님도 거의
없었다. 그러다가 나중엔 가게문을 영 닫고 말았다.
요즘 입맛이 없다가 그 냉면과 깍뚜기 생각에 오랜만에 침이 고인다.
할머니의 손맛을 전수받지 못한 며느리한테 좀 서운하다. 하지만 며느리가 손재간이 없어서 도저히 못 배운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할머니께서 왜 장인정신을 갖고 좀더 열심히 가르치지 않으셨는지 모르겠다. 가게 주방엔 매번 할머니만 계셨고, 깍뚜기도 넉넉하게 주시지
않는 것을 봐서는 인색하신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며느리 뿐 아니라, 누구에게라도 깍뚜기비법도 가르쳐 주시고 육수 내는 법 등 요것조것 후하게 가르쳤더라면 가게가 지금까지 있었을
텐데.
더위를 식히던 감칠맛 나는 짜릿한 그 집 냉면맛을 이제는 맛 볼 수 없어 아쉽다.
요즘 봄타느라 입맛이 없는데 지금 그
냉면국물에 깍뚜기 서너쪽이면 입맛이 대번에 돌아올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