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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2월 1일 (연중 제4주일 ) 마르 1, 21-28
자료 보다 더 가까이 / 회당에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다)
예수가 누구냐
오늘 복음은 어느 안식일에 카파르나움의 회당에서 일어난 일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이 회당에서 가르쳤고,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놀랐습니다.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그가 소리를 질렀습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더러운 영이 예수님의 신원(身元)에 대해 고백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함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더러운 영을 내어 쫓아서 그 사람을 치유하셨습니다. 그 사실을 본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라고 경탄하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일어난 사실을 그대로 보도하는 오늘의 신문 기사와 같은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은 정신 질환자를 지칭합니다. 복음서들이 기록된 시대에는 자기 사상을 전하고자 하는 사람은 이야기를 만들어 그 안에 자기가 전하고 싶은 사상을 담았습니다.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듣고, 또 다른 이들에게 옮기면서, 그 이야기 안에 있는 저자의 사상에 공감하고 자기 것으로 삼기도 하고, 거부하기도 하였습니다. 오늘의 이야기도 마르코 복음서를 기록한 공동체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그리스도 신앙을 담아서 각색한 것입니다. 마르코 복음서는 그 시작에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초기 신앙인들이 믿고 있는 복음을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이 복음서는 예수님의 생애를 끝내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자, “예수님을 마주 보고 서 있던 백인대장”이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마르 15,39)고 신앙고백을 한 것으로 기록하였습니다. 이 복음서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말하는 신앙고백을 그 시작과 그 마지막에 두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복음서를 기록한 사람들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고백하는 신앙이 어떤 것인지를 기록하겠다는 의도로 저술한 복음서입니다.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문제들을 흔히 생로병사(生老病死)라는 단어로 요약합니다. 사는 것, 늙는 것, 병고 그리고 죽음, 인생의 네 가지 현실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대단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일들이지만, 불가사의(不可思議)하여, 인간 번뇌의 원인이기도 합니다. 불교에서 석가세존(釋迦世尊)으로 추앙받는 고타마 싯다르타 태자가 일찍이 왕위를 버리고 출가하여 수도를 시작한 것도 이 네 가지 번뇌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인류 역사가 있으면서 각양각색의 종교들이 발생하고 번창한 것도 바로 이 네 가지에 대한 해답을 인류는 꾸준히 찾았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해를 보고, 혹은 달을 보고 빌기도 하였고, 정화수를 떠 놓고 정성을 바치기도 하였습니다. 모두가 이 불가사의한 주제들에 대한 해결 혹은 극복을 원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 이야기의 무대는 유대인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이는 회당입니다. 그곳에서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예수님을 보자 소리를 지르며 고백합니다. ‘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함구령을 내리면서 그 더러운 영을 그 사람에게서 쫓아내셨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나았습니다. 이 복음서는 이 이야기로 더러운 영이 지배하던 세상에 하느님이 보내신 거룩하신 분, 곧 예수님이 오셨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지만, 더러운 영은 벌써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는 사람들이 더러운 영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이 믿음이 근거가 되어 오늘의 세례 성사 의례 중 마귀를 끊어 버린다는 신앙고백을 하는 관습이 생겼습니다. 하느님이 아니면서 사람을 지배하는 모든 것을 세례에서 끊어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겠다는 고백입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은 더러운 영에게 함구령을 내렸습니다. 마르코 복음서는 함구령을 자주 언급합니다. 더러운 영들에게, 혹은 기적적으로 치유된 이들에게, 또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함구령을 내리십니다. 이 복음서는 사람이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 혹은 거룩하신 분 등, 신앙고백의 성격을 지닌 말을 할 때마다, 예수님이 함구령을 내리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자 이 복음서는 백인대장으로 하여금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고백하게 합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모르면서, 예수님에 대해 올바른 신앙고백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올바른 인식은 십자가의 죽음을 시야에서 잃지 않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 복음서는 십자가를 포함하여 예수님을 인식해야 하고, 그 인식을 기반으로 그분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고백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생애를 요약하는 상징입니다. 사람들을 보살피는 일에 당신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으신 결말이 십자가였습니다. 마르코 복음서는 그 사실을 모르면, 예수님에 대해 말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십자가에서 끝을 맺은 그분의 삶이 하느님의 생명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전능하시고, 지극히 높으시다는 우리의 통념에서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예수님 혹은 하느님을 믿어서 인간이 더 잘 살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신앙은 더 많은 재물과 더 존경스런 지위를 얻도록 해 주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류 역사가 하느님을 생각하며, 계속 품었던 염원입니다. 그 염원은 인간을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더러운 영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런 염원을 성취해 주는 것이 신앙이라고 망상하는 것은 예수 귀신의 힘으로 팔자 한 번 고쳐 보겠다는 인간의 염원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고백합니다. 생로병사의 인간 현실을 살면서 이웃을 보살피는 섬김을 위해 당신 스스로를 내어 주고 쏟은 예수님입니다. 그분의 실천에서 참다운 인간의 자유를 읽어 내고, 그것을 배우는 그리스도 신앙입니다. 그것이 재물이든, 지위든, 자기 한 사람 잘 될 것을 약속하는 더러운 영이 물러나는 곳에, 예수님이 가르친 하느님의 생명을 사는 신앙의 길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회당에 모인 사람들은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라고 말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을 실천하며 살아, 그분의 자녀 되게 하는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라는 고백입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이유는 꽃의 아름다움을 지킬 수 있기 때문
포장된 길을 걷다가 멈췄습니다. 푸른색이 보입니다. 갈색의 빛으로 채워진 산과 밭 사이, 조그만 둔덕에 푸른색이 보입니다. 둔덕에 낮게 엎드린 푸른색 생명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 생명의 움직임에 감탄합니다. 연료비를 아끼기 위해서 방에 화목 난로를 놓았습니다. 이른바 적정 기술로 만들어진 난로입니다. 그런데 나무를 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산에 올라갑니다. 작업복을 입고 장갑을 끼고 산에 오릅니다. 작년 여름에 비바람에 쓰러진 나무를 찾습니다. 적당한 나무를 발견하면 톱으로 자르고 잔가지를 모아서 내려옵니다. 이번에는 본당 신자들께서 도와 주셨습니다. 적당한 크기로 자르고 자른 나무를 산 아래로 굴리거나 던집니다. 그리고 마당에서 도끼질을 합니다. 땀이 온몸에 흐릅니다. 그런데 기분은 좋습니다. 뿌리를 깊게 뻗고 굳건하게 서 있는 나무를 느껴 봅니다. 손으로 만지고 몸을 기대 봅니다. 거칠지만 차갑지 않습니다. 저보다 먼저 이 자리에서 터 잡고 살아가는 생명, 지금 이곳에서는 제가 이방인입니다. 이방인이 주인인 척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그냥 나무가 아닙니다. 땅의 주인입니다. 다른 생명에게 열려 있는 주인입니다. 다른 생명에게 보금자리가 되어 주기도 하고 피신처가 되어 주기도 하는 주인입니다. 닫혀 있지 않은 생명, 그래서 자연은 아름답습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합니다. 사실일 수 있습니다. 사람은 꽃보다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울 수 있는 이유는 꽃을 꺾을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꽃의 아름다움을 지킬 수 있어서입니다. 아름다운 꽃을 꺾어 버리는 사람은 꽃보다 아름답지 않습니다. 사람이 아름다운 이유는 존재하는 피조물의 보존과 지속을 위하여 부여된 창조성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카파르나움에 가신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십니다. 예수께서 회당에 가신 이유는 가르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권위가 있는 가르침, 저는 아직 이런 가르침이 어떤 상태를 의미하는지 모릅니다. 권위 있는 가르침을 받아 본 적이 없어서가 첫 번째 이유일 것입니다. 제가 경험한 대부분의 권위는 폭력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힘이 있는 자가 권위를 지닌 자가 되었던 상황을 견뎌내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어렵습니다. 다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권위는 세상이 행사했던 권위와 다르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권위는 사람의 자유와 해방을 위한 힘이라는 사실입니다. 온전함의 회복을 위한 힘, 그래서 예수의 권위는 사람들에게 위력(force)이 아니라 땅을 굳건히 딛고 설 수 있는 힘(power)을 줍니다. 그래서 저는 예수 안에서 아름다움을 봅니다.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느낍니다. 마르코에게 예수의 권위 있는 가르침과 더러운 악령을 몰아내신 것은 동일한 의미를 지닙니다. 사람들은 그 일을 목격하고 놀랍니다. 권위 있는 가르침과 악령을 몰아내신 것은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표지를 드러냅니다. 이제 이전과는 다른, 새로움의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사람들은 느끼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악령들은 저항합니다. 그런데 저항하는 방법이 좀 특이합니다. 악령들은 예수의 이름을 부르고 예수께서 누구인지를 폭로합니다. 악령들은 반항적인 질문들 안에 예수라는 이름과 그분의 신원을 드러냄으로써, 자신들을 거처에서 쫓아내려는 예수를 조종할 수 있는 힘을 얻으려고 시도합니다. 누군가 나의 이름을 부르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어머니 자궁 속에서 듣고 있었던 자비와 사랑의 파동을 지닌 소리가 들리면 나의 온 존재가 깨어나는 것을 느낍니다. 아름다움의 회복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 소리 속에서 나의 존재가 변형되고 있음을 느낍니다. 그러나 누군가 적의를 지닌 상태에서 나의 이름을 부르면 온몸이 굳어집니다. 긴장 그리고 싸움을 준비합니다. 몸과 마음의 조화가 깨집니다. 존재의 아름다움이 파괴됩니다. 어둠의 세력은 타인에 대한 앎을 위력의 자원으로 사용합니다. 조종과 억압 그리고 창조성의 파괴가 발생합니다. 불법 사찰이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개인의 일상이 아무런 이유 없이 모르는 사람이나 기관의 컴퓨터 속에 저장됩니다. 개인정보가 동의 없이 다른 사람들 손으로 넘어갑니다. 타인에 대한 앎을 위력으로 사용하고자 하는 시도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성경의 악령들이 예수께 시도했던 것과 동일합니다. 아름다움의 파괴, 온전성의 파괴를 통해서 더 많은 이익을 얻는 것이 그들의 목적입니다. 그들은 아름답지 않습니다. 그들은 힘(power)을 바탕으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그들은 힘이 아니라 파괴를 위한 위력(force)으로 살아갑니다. 하느님 나라는 가까이 와 있습니다. 완성된 상태가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어떤 체제나 구조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구체적 사건들 속에서 존재합니다. 하느님의 다스림이라는, 궁극적인 하느님 나라는 위력이 아니라 힘을 바탕으로 이루어집니다. ‘내’가 ‘나답게’ 그리고 ‘그’가 ‘그답게’ 살아가는 것이 힘입니다. 자유와 속박에서 벗어나 해방된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 힘입니다. 그래서 참된 힘은 지키고 보존하고 지속시킵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듭니다. 사람이 꽃만큼만 아름다웠으면 좋겠습니다. 혓바닥에 창과 칼을 숨기지나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생활 속의 복음] 더러운 영과 ‘갑을관계’
변덕스러운 날씨 때문인지 미사를 봉헌할 때 교우들 표정이 썩 좋지 않습니다. “왜 인상을 쓰고 계세요?”라고 물으면 억지로 웃으면서 “감기 때문이지요. 신부님이 옮기신 듯합니다” 하고 답합니다. 이번 겨울에는 제가 신자들에게 ‘더러운 영’을 전파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죄송하고 창피하기도 했습니다. △괴성을 지른다(마르 9,26) △사납다(마태 8,26) △고통스러워한다(마태 12 45) △실신 상태나 경련을 일으킨다(마르 9,18) 등으로 표현합니다. 모든 특성을 종합해서 살펴보면 결국 타인과 올바른 관계를 형성하기 힘든 사람이며, 주변인들에게 외면당하는 부류입니다. 아무 일도 아닌 것에 버럭 소리를 지르거나, 너그럽게 이해하고 넘길 수 있는 사소한 일인데도 지나친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입니다. 언론에 보도되는 것은 대부분 식당을 비롯한 상점에서 손님(갑)과 종업원(을) 사이에 일어나는 문제들입니다. 시골에서 곡물이나 과일을 도시에 판매할 때도 이런 문제가 부지기수로 발생합니다. 배나 곶감 등을 보내면 “색상이나 빛깔이 동일하지 않다”며 일정 기간이 지났는데도 반품을 요구하는 소비자가 있고, 과일을 먹다 보니 썩은 것이 있다며 바꿔 달라고 합니다. 그러면 농민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변상을 해야 합니다. ‘What would you do?’(어떻게 할 생각이세요?)에서 자주 봅니다. 연기자들이 다양한 상황에서 사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현상(모욕당하는 노숙인,인종차별 등)을 연기하고 몰래카메라로 시민들의 반응을 살펴봅니다. 반응을 보인 시민들에게는 그렇게 행동한 이유를 묻습니다. ‘What would you do?’ 는 우리가 타인의 상황이나 사회 현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을 치유하십니다. 그것도 권위를 지니시고 말입니다. 권위의 사전적 의미는 ‘남을 지휘하거나 통솔하여 따르게 하는 힘’입니다. 증가하다’라는 의미이므로 ‘autor’는 ‘자라게 하는 사람’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성서에 나오는 참된 권위는 ‘하느님의 힘으로 누군가를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도록 초대하는 것’ 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두려움을 주고 서로 대화와 소통을 어렵게 하며 개개인의 삶을 축소시키거나 단절시키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릇된 권위는 독재정권에서 볼 수 있습니다. 공자는 군자가 ‘덕’과 ‘예’에 의한 교화를 통한 정치로 질서를 회복하고 태평한 세상을 이루는 것이 참된 정치적 권위라고 봤습니다. 서로 만남과 대화를 통해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인간으로서 완성을 향해 살아가도록 도와주는 참 권위를 보여주십니다. 교우 여러분! 저도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는 등 타인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말과 행동을 삼가고 존경과 배려를 통해 참다운 권위가 흘러넘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여러분도 함께해 주시길 바랍니다. 토요일 저녁 주일 미사를 마치고 교육관 마당에 나오니 본당 어르신들과 손님들이 어우러져서 노래를 부르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계셨습니다. 목청이 터져라 노래를 부르며 웃으시는 어르신들 옆에서 장단을 맞추면서 추임새를 넣고 흥을 돋우는 손님들 모습은 기쁨과 환희 그리고 존경이라는 단어가 현실로 드러나는 느낌이었습니다. 더러운 영이 함께할 수 없는 멋진 축제였습니다. 참 기쁨의 인간 관계를 보았습니다. 오늘부터 우리도 예수님처럼 참 권위를 가지고 더러운 영을 추방해 힘차고 신명 나는 공동체를 만들어 갑시다. 아멘. -박재식 토마스신부님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
제가 가장 힘이 솟고 팔팔할 때는 고등학교 때였던 것 같습니다. 운동을 좋아하는 남자라면 이 때 누구와 싸워도 이길 것 같은 자신감이 생깁니다. 저도 싸움은 하지 않았지만 운동은 열심히 하는 학생이었습니다.
제가 다니던 고등학교에도 싸움 잘하는 아이들의 패거리가 있었습니다. 그 중 한 명이 저의 친구에게 이것저것 시키더니 결국엔 발로 등을 찼습니다. 저는 참을 수 없어서 그 아이 중간에 막아섰습니다. 그런데 그 때리던 아이는 놀랐는지 뒤로 자빠졌습니다. 창피해서 그랬는지 내가 자기를 때렸다고 하며 마구 흥분하였습니다.
저는 싸울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있는데 그 아이가 갑자기 제 얼굴을 때렸습니다. 그러나 마치 솜으로 맞은 것처럼 아무런 느낌이 없었습니다. 그 아이는 회심의 일타를 때렸다고 생각했는데 꿈쩍도 하지 않는 저를 보더니 움찔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교실 뒤로 가더니 마대자루를 들었습니다. 아이들이 말려서 결국 원치 않았던 싸움은 그렇게 끝나버렸습니다. 그 아이가 무기를 든 이유는 맨 손으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심리적으로 보면 이미 그 아이가 싸움에서 진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그 아이들은 떼거리로 다니기 때문에 그냥 조용히 있는 편을 택했습니다.
아주 어린 아이들부터 국회에 계시는 어른들까지 서로 더 자기가 세다고 난리법석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가 강해지고자 하는 욕구이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것도 하느님처럼 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높아지고자 하는 권력의 욕구는 정치판에서뿐만 아니라 사람이 사는 모든 곳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 위에 서기 위해서는 상대방보다 더 뛰어난 것이 있어야 하는데 그 뛰어난 것을 권력을 위해 사용할 때 그 모든 것들은 ‘폭력’이 됩니다.
전 세계 역사에서 권력을 쥐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지 않은 경우는 없습니다. 힘이든 돈이든 지식이든 무엇을 이용해서라도 다른 사람 위에 있기를 원하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폭력이 됩니다.
얼마 전엔 어떤 자매님이 딸이 결혼하겠다고 하는 바람에 딸을 실내화를 벗어서 때리다가 결국 눈이 붓고 충혈 되어 겁을 잔뜩 집어먹었었다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어머니로서 자녀를 복종시키고 싶은데 그래서 결국 사용하는 것이 폭력인 것입니다. 자녀들이 부모님께 폭력을 쓰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자녀들은 부모님이 자신들을 사랑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것을 이용합니다.
예를 들면 부모가 뭐라 해도 침묵하는 것입니다. 상대를 무시하는 이 침묵의 행위는 어쩌면 말대꾸 안 하는 것처럼 위장되어 있을지라도 결국 부모의 화를 더욱 돋우는 무기가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서로 높아지려고 할 때 서로간의 사랑이 깨지고 있음을 좀처럼 느끼지 못합니다. 남편의 의견에 사사건건 반대하는 아내가 사랑스러울 사람이 누가 있으며 대드는 자녀들이 사랑스러울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폭력으로 얻은 권력은 오히려 그 사람의 참다운 권위를 떨어뜨립니다. 아이들이 당장 때리는 부모의 말을 듣기는 하겠지만 커서 독립하면 그래서 더 이상 부모의 도움이 필요 없게 되었을 때에도 그 권위를 유지할 수 있을까요? 오히려 다 성장한 자녀들이 부모의 그런 폭력성을 기억하며 부모에 대한 존경심이 줄어들 것입니다.
로마의 위대한 시저도 온 세상을 정복했지만 결국 동료들에 의해 살해당했고 세기의 정복자 나폴레옹도 쓸쓸한 유배로 생을 마감해야 했습니다. 그런 순간적으로 지나가는 허무한 권력을 위해서 세상엔 얼마나 많은 폭력이 난무하고 있습니까?
단순한 예로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이 자주 서로 주먹질과 욕설을 퍼붓는 것을 보면 알 것입니다. 인간의 죄의 뿌리는 바로 이 권력욕, 성욕, 재물욕인데 그 중 마지막까지 남는 것이 권력욕이라합니다. 그래서 재벌들이 정치판에 뛰어드는 것이고 이태리만 보아도 최고 거부인 사람이 오랜 시간 수상을 몇 번이나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본성을 거슬러 새로운 권위가 있음을 보여주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회당에서 가르치시는데 가진 것도 없고 힘도 없었지만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고 계셨다고 합니다.
율법학자들은 지금으로 말하면 신학박사들입니다. 예수님은 초등학교도 안 나왔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권위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 영을 한 마디로 내쫓으십니다. 사람들은 모두 놀라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맞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권위를 보았습니다. 이스라엘의 헤로데도 로마의 황제도 더러운 영을 쫓아낼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들에게 조정당할 수도 있는 약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더러운 영까지도 한 마디로 누를 수 있는 권위를 지니신 분이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혼란에 빠집니다. 이런 권위를 지닌 예수님이 로마로부터 자신의 나라를 독립시키고 부강한 나라로 만들어 줄 줄 알았는데 결국 사람들에게 잡혀 매 맞고 비참한 죽음을 맞습니다.
더러운 영까지도 제압하고 죽은 사람까지도 살리던 그 힘은 어디로 가고 실제로는 양처럼 온순하게 도살장에 끌려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사람들은 그분의 힘과 권위를 보게 됩니다. 죽었던 사람이 영원히 죽지 않는 몸으로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로 올라가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람들은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권위는 이 세상의 권위와는 전혀 다름을 알게 됩니다.
이 세상은 폭력으로 힘을 얻으려고 하지만 예수님은 순종과 비폭력으로 힘을 얻습니다. 왜냐하면 결국 참다운 권위와 힘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세상에 있는 권위들조차도 하느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았다면 누구도 가질 수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권위와 힘은 바로 성령님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올 때에도 계속 누가 서로 높은지에 대해 다투는데 정신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아직도 세상의 권위에만 눈이 멀어 있는 제자들을 앉혀놓고 이렇게 말씀해 주십니다.
“예수께서는 자리에 앉아 열 두 제자를 곁으로 부르셨다. 그리고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마르 9,35)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의 의미를 깨닫지 못합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낮아지는 사람만이 그 안에 성령님을 충만히 받아 참다운 권위를 지니게 된다는 의미였습니다.
성모님의 경우 사도 중에 들지 않았어도 그 겸손하심으로 성령님으로 충만하셨고 그래서 참다운 권위로 따지자면 성모님이 사도들 위에 서실 수 있는 것입니다. 성모님을 사도들의 모후라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겸손해진 사도들도 급기야 성령강림으로 참다운 권위를 입고 수많은 기적을 행하고 베드로는 그 날 한 번의 설교로 삼천 명에게 세례를 줍니다.
막시밀리아노 꼴베 신부님은 죽기를 원하지 않는 한 사람을 위해 대신 죽기로 자청합니다. 그냥 죽는 것도 아닌 굶어 죽어야 하는 고통스러운 것이었음에도 가족이 있는 사람보다는 자신이 죽는 편이 낫다고 간수를 설득합니다.
세상 어떤 권력가도 죽음을 이길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은 죽음도 이기는 위대한 권력가들입니다. 성령 충만으로 이 세상 참다운 권위와 힘을 누리며 살아갑시다. -전삼용 요셉
[성녀 데레사의 가르침에 따른 영성생활] 44. 기도의 단계 ⑨ - 변모적 합일의 기도 하느님과 충만한 합일 이룬 ‘영적 약혼’ 단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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