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올해로 중앙대학교 의과대학에 근무한지가 32년 째 되는 최고참이 되어 우리병원에서 내과뿐 아니라 무슨 과이던지 간에 최장 근무자이다. 더구나 금년이 내과 창립 40주년이라니 여기는 나의 반평생 이상을 보낸 곳이라 감회가 클 수밖에 없다.
내가 의국에 들어 온 연대별로 나누어보면 80년대는 필동병원 시대이었고, 옹색한 공간과 적은 인원이었으나 오붓한 환경이었다. 90년대는 도약을 준비하는 시대이었고, 2000년대는 흑석동의료원이 문을 열면서 또 한번 도약을 맞게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2010년대에 들어와 흑석동 의료원의 증축 완료로 2011년 3월 말로 철도병원과의 인연은 끝나고 새로운 의료원의 시대로 들어가게 되었다.
먼저 의국원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나와 같이 교수로 근무하다 의국을 나가신 분들도 적지 않다. 정년으로 떠나신 분들을 제외하고 아마 이 상용교수가 제일 먼저이고, 다음이 이 기환교수, 강 창순, 권 기익, 박 중원, 유 병철, 정 철원, 강 응택, 이 정희, 오 연상, 최근에는 류 왕성교수까지. 대부분 나가서 더 좋은 자리로 갔었고 개업을 한 분들은 돈도 많이 벌었으니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동안 내과의국을 나갔다가 돌아가신 분들도 많다. 김 종숙 초대과장이자 주임교수님의 별세는 내가 주임교수로 있을 적 용산병원 영안실에 빈소를 차렸고, 유 언호교수의 긴 투병 후 별세, 사실 이 보다 먼저 허 성호교수가 뉴 밀레니엄도 보지 못하고 1999년 12월 31일 연구실에서 세상을 떠나 다행히 순직으로 처리는 되었지만 아무도 임종을 못하였다. 마지막으로 이 기환교수도 최근에 별세하셨는데 내과에서 잊고 있어서 서운하였다. 전공의로는 정혁선생이 사망하였다. 의국생활을 하다 그만 둔 전공의들도 있었고 의국생활은 같이 하였으나 수련기간 동안 험악한 의국분위기와 상처 받았던 일과 좋지 않았던 감정이 있었던 분도 적지 않아 이런 분들은 홈페이지 주소록에도 빠져 있고 의국에서 연락도 잘 되지 않는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뿌리가 없는 나무가 어디 있으며 고향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이 번 내과 창립 40주년 기념행사를 통하여 구원을 툴툴 털고 앞으로는 같이 나아가기를 희망한다.
이들의 진로는 학계로 본교출신들의 내과 교수직 진출과 타교에 교수직으로도 나간 의국원들도 적지 않았고, 공직에, 봉직에, 개업으로 전국방방곡곡 어디서나 활약을 하는 내과동문들을 만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그래도 내가 주임교수 4년을 하면서 자랑을 좀 하자면 내과 연수강좌를 처음으로 시작하였고, 집담회를 활성화를 시켰으며, 음주문화는 개선하였으나 폭력은 내가 보지 않은 곳에서 일어나는 일이므로 근절시키지는 못하였다. 류마티스학과 감염학을 신설하려고 애를 썼으나 아쉽게도 내가 주임교수를 그만 두고 난 후에 이는 성사가 되었다.
내과의국에는 어째 영광만 있었을까? 좌절의 시절도 함께 하였다. 의약분업 파동 때의 힘들었던 일 들, 전공의로 수련기간을 마치고 불운하게 자격시험에서 낙방한 분들 등 지나간 세월을 돌이켜 보면 좋았던 일들보다 나빴던 일들이, 잘 하였던 일들보다는 잘못하였던 일들이, 즐거웠던 일들보다는 슬펐던 일들이, 기억하고 싶었던 일들보다는 기억하지 않았으면 하는 일들이 남는 것은 나의 놀부 심보인가.
그러나 이제는 우리 내과의국도 내과학 각 분야의 우수한 인재와 훌륭한 시설 및 최신장비로 더욱더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 아울러 우리내과의국을 위하여 열심히 도와준 병실 및 외래간호사들, 그리고 내과계 검사실 직원들의 도움을 감사드린다.
우리 내과의국은 우리나라의 헌법 전문인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 대신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내과의국”으로 바꾸어 져야 할 것이다. 역사는 시간이 만들고 전통은 사람이 만드므로 앞으로 우리 내과의국은 새로운 좋은 전통을 많이 이루기를 바라며 이 글을 맺는다.
첫댓글 유교수는 중앙대 의과대학의 역사인 셈이네요... 그 동안 수고 많이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