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난지도(小蘭芝島)
소재지 : 충청남도 당진시 석문면 난지도리
목차
1. 정의
2. 개설
3. 명칭 유래
4. 자연환경
5. 현황
정의
충청남도 당진시 석문면 난지도리에 속하는 유인도.
개설
소난지도는 당진시의 최북단 석문면 난지도리에 속하는 섬으로, 대난지도 동남쪽에 있다. 구한말 국권 회복을 위하여 싸우다 전사한 홍원식 의병장 휘하 150여 의병들의 무덤인 의병총(義兵塚)이 있고 절벽에 난초가 자라고 있다.
조선 시대 조운선의 유명한 피박지(避泊地)였다. 전라도와 충청도 등지에서 세금으로 낸 조곡미를 실어서 운반하던 조운선이 서해안을 따라 서울 경창(京倉)으로 갈 때 풍랑을 피해서 쉬어가거나 한강이 결빙하면 조운선이 상륙할 수 없어 얼음이 녹고 바람이 잘 때까지 정박하던 좋은 피항 포구이었다. 식수를 구할 수 있는 곳도 대난지도에는 1개소, 소난지도에는 4개소가 있어서 매우 유리했다. 소난지도에는 민호가 50호에 약 170~180명 정도가 거주했다. 대난지도, 소난지도 공히 경지가 좁아서 식량이 부족하여, 출가업(出稼業)이나 어업 (漁業)을 행했는데, 특히 소난지도에는 상범선(商帆船) 9척이 있어서 회조(回漕)[배로 물건을 실어 나름]를 업으로 해서 매년 각지를 왕래하였다. 당진, 서산, 해미 3개 군과 인천 간을 왕래하면서 신탄, 곡물, 화물을 실어 날랐다. 소난지도에는 회조업(回漕業)으로 생계를 꾸려 나갈 수 있어서, 일종의 사숙(私塾)을 두고 구식으로 한문을 초보적인 수준으로 가르치기도 했다. 어업은 수조망(手操網), 일본조(一本釣) 등이 행해지고, 멀리 외해까지 출어했다. 어선은 대난지도, 소난지도 각각 2척씩 총 4척이 있었고, 조기, 갈치, 뱅어, 새우, 농어, 숭어 등을 잡았다.
1989년에 발행된 『풍도리지(風島里誌)』에는 난지도와 관계 있는 민요 한 편이 실려 있다. 전라도 곡창 지대로 조세곡을 실러 나갔던 남편이 몇 달 만에 와도 폭풍우를 대피하는 포구가 풍도(風島)에는 없고 난지도(蘭芝島)에만 있어서, 기항하지 못해 얼굴도 못보고 다시 난지도로 들어가는 광경을 본 풍도 아낙들의 안타까운 심정을 민요로 부르던 노래이다.
명칭 유래
옹진군 대부면 풍도와 석문면 난지도 사이의 한여울 물살이 아주 세어서 전라도, 충청도 조운선이 다니기 어렵기에 원래 이름을 ‘난지도(難知島)’라고 하였다. 후에 섬의 바위 절벽에 난초와 지초가 많이 나는 섬이라 하여 ‘난지도(蘭芝島)’라 하고, 큰섬은 대난지도(大蘭芝島), 작은 섬은 소난지도(小蘭芝島)라고 부른다. 1760년에 『여지도서』가 편찬될 당시에는 당진현 내맹곶면 소난지도리였는데, 『여지도서』 당진 편의 남단에 ‘대난지’와 함께 ‘소난지’가 묘사되어 있다. 『조선 지형도』 풍도 편에는 석문면 북쪽 바다에 소난지도가 확인된다.
자연환경
조선 총독부 발행 『한국수산지(韓國水産誌)』에 보면, 섬 주변은 이토나 사빈으로 되어 있고 암초가 적고, 남측의 전면에는 우안도 외에 하나의 작은 섬이 떠 있어 파도를 막아서 자연의 박지(泊地)로 풍랑을 피할 수 있는 안전 지대이다. 『한국 연안 수로지』-서해안 편(대한민국 수로국, 1983)에 의하면, "소난지도는 높이 89m로, 대난지도 남측에 있으며 부락 동쪽에 간출이퇴(干出泥堆)로 연결되는 우비암(牛鼻岩)이라는 수도(水島)가 있으며, 우비암의 북동쪽에는 같은 이퇴 상에 2개의 바위가 있다."라고 기록되어있다. 조선 총독부 발행 『조선 지지』(1918)에는 해안선이 3300m, 면적 0.031방리, 최고 지점의 진고(眞高)는 73m로 나타나 있다.
소난지도 남쪽에는 높이 64m의 우무도(牛舞島)가 위치하고 있다. 소난지도 앞에는 우무도가 있어서 천연 방파제 역할을 해 주었다.
현황
『당진시 통계 연보』(2014)에 의하면, 면적은 2.645㎢이고, 가구수는 53세대, 인구는 총87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참고문헌
· 『한국 수산지(韓國水産誌)』(조선 총독부, 1910)
· 『한국 연안 수로지』제3권-서해안 편(대한민국 수로국, 1983)
· 차석기, 『풍도리지(風島里誌)』(재경인 풍도 향친회, 1989)
· 김추윤, 『당진의 지명 유래』(당진 문화원, 2012)
소난지도 의병항쟁
1908년 3월 15일 처절한 항일의병전쟁이 일어난 장소였던 소난지도의 의병활동은 크게 두 번으로 나눠지는데, 1906년 당진 면천 출신인 최구현 의병장을 중심으로 면천성을 공격했던 사건과 1907년 정미조약에 의한 군대 강제해산 이후 홍원식 의병장이 활약했던 시기로 구분된다.
특히 1908년 3월 15일 당진지역 의병운동의 근거지를 소난지도로 판단한 홍성경찰분서가 이곳에 기습공격을 감행했고, 이들에 맞서 싸운 홍원식 의병대는 격렬한 전투 끝에 41명이 전사하고 50여명이 행방불명됐다. 이들의 항거는 이후 구전으로만 전해오다가 1970년대 석문중학교 교사와 학생들의 힘으로 고증작업이 이뤄졌으며, 이후 2003년 당진시가 소난지도 의병 항쟁 학술고증에 나서면서 비로소 그 실체가 확인됐다.
당진시 [대난지도&소난지도] 지도
당진시 [대난지도&소난지도] 위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