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의 민권론
맹자는 ‘거듭 간언해도 듣지 않으면 왕을 바꾼다’라고 했고, 또 ‘백성이 가장 중요하고 사직이 그 다음이고 임금은 가볍다’라고 했으며, ‘나라의 사람들이 모두 죽이라고 한 뒤에 그를 죽이고, 나라의 사람들이 모두 현명하다고 한 뒤에 그를 거용한다’고 했다.
내가(전병훈) 삼가 생각하건대 맹자의 이 말은 인군(人君)을 지극히 경계하고 반성하게 해 준다. 그러나 전제정치 이래로 맹자의 이 말을 믿고 행한 이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니, 천하를 사가(私家)로 소유했던 때문이다. 하물며 백성은 중요하고 임금은 가볍다는 주장은 상고 민주주의의 천의(天意)와 깊이 합치된다. ‘나라의 사람들이 모두 죽이라고 한 뒤에 그를 죽이라’라고 한 것은 민권을 신장하고 공론을 따른 정의이니, 참으로 하늘의 뜻에 따른 천리(天理)를 미리 알았다 할 것이요, 마침내 민주헌법으로 다스리는 날이라 하겠다. 참으로 탁월한 정치학의 견해가 주공(周公) 이후 유일한 분이라고 할 만하도다!
[原本]
第十八章 孟子論民權哲理
孟子曰 反復之而不聽 則易之 又曰 民僞重 社稷次之 君爲輕 又曰 國人皆曰 可殺 然後殺之 國人皆曰賢 然後擧之
秉薰謹按 孟子此言 所以儆省人君者至矣 然專制以來 未聞有信用其說者 以天下爲家私故已 况民重君輕之旨 深合乎上古民主之天意者乎! 至曰 一國皆曰可殺 然後殺之者 卽申張民權 而順從民公之正義也 誠可爲先見天意之公理 終有民主憲法之治日者也 嗚呼! 政治學之卓識 可謂周公後一人哉!
[출처] 완역 정신철학통편
전병훈 저, 임채우 역
◎ 천부경이 칼융에게 전해진 경로
1920년대에 인류 최초의 계시록인 천부경이 세계화되는 놀라운 사건이 벌어진다.
의금부도사, 중추원 의관을 지낸 당대의 대학자인 전병훈은 나라가 망하고 일본이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는 걸 보면서 50세에 중국으로 망명한다(1907년). 이때 중국의 관리 세 사람이 나와서 융성하게 대접해줬다고 한다. 원세개, 여원홍이라는 중화민국의 총통들도 전병훈을 대성인으로 추앙했다. 원세개의 아들 원극정은 조선의 대유(大儒), 거유(巨儒)로 극찬했다.
1910년대 전병훈은 중국 도교의 명산 나부산羅浮山에서 스승 구쿵찬을 만나 수년간 가르침을 받았다. 1919년에는 도교 경전 도장道藏 2천 권을 공부하여 『도진수언道眞粹言』 10권을 편찬했다.
이분이 자기가 공부한 것을 『정신철학통편』이란 책으로 써서 인쇄에 들어가려고 할 때, 천부경을 전수하였다. 너무 놀라서 이 책 서두에 천부경 주해를 단다. 그리고 이 책이 1920년 중국 북경에서 간행됐다. 그때 중국은 서양에 많은 이들이 와서 전도할 때이다. 그 유명한 독일의 리하르트 빌헬름도 왔는데 이 사람은 대학자였다. 중국어를 완벽하게 통해서 주역도 번역하고 여동빈의 신선이 되는 책인 『태을금화종지』를 번역해서 독일어판으로 나왔다.
빌헬름이 독일로 돌아갔다가 다시 와서(1920년대) 전병훈의 이 책을 보고 충격을 받아서 이걸 가지고 갔다.
이 책이 전 세계 29개국 150여 개 대학교 도서관에 보내졌다.
천부경의 세계화는 이미 백 년 전(1920년)부터 시작된 것이다.
빌헬름과 아주 친했던 세계적인 심리학자 카를 구스타프 융이 『태을금화종지』 주석을 달았다.
[출처] 천부경 전병훈 리하르트 빌헬름 카를 구스타프 융 태을금화종지 방탄소년단
◎ 위안스카이 [ 袁世凱(원세개) ]
요약
중국의 군인 ·정치가이며 총리교섭통상대신으로 조선에 부임하여 국정을 간섭하고 일본, 러시아를 견제했다. 청일전쟁에 패한 뒤 서양식 군대를 훈련시켜 북양군벌의 기초를 마련하고 탄쓰퉁 등 개혁파를 배반하고 변법운동을 좌절시켰다. 이후 의화단의 난을 진압했으며 신해혁명 때 청나라 조정의 실권을 잡고 임시총통이 되었고, 이어 스스로 황제라 칭하였다.
1859년 9월 16일 중국 허난성[河南省] 샹청[項城]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부친은 원보중이었으나 삼촌인 원보경이 아들이 없어 양자가 되었다. 그의 가문은 정2품의 고관을 지낸 명문가 였으며 샹청[項城]현에서는 제일가는 권세가였다. 1876년 하남 향시에 낙방하고 1879년에도 응시하였으나 또 낙방했다. 과거에 실패한 뒤 경군통령(慶軍統領)인 우창칭[吳長慶:오장경]의 휘하에 들어가 군사적 재능을 인정받고 영무처(營務處)의 일을 맡았다.
1882년 조선에서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조선의 정세를 안정시킨다는 빌미로 오장경을 따라 조선에 부임하였다. 임오군란의 주동자로 지목된 흥선대원군을 납치하여 청나라로 압송, 연금하였고 임오군란을 일으킨 군사들과의 전투에도 참전하였다. 1884년 조선에서 개화파 김옥균이 주도하는 갑신정변이 일어나 고종이 납치되자 원세개는 일본군과 전투에서 승리하여 고종을 구출하였다. 그는 중국으로 돌아갔다가 1885년 8월 연금에서 석방된 흥선대원군과 함께 다시 조선으로 건너왔다. 위안스카이는 그동안 조선에서의 공적을 인정받아 1885년 11월 21일 이홍장(李鴻章)의 명을 받아 조선 주재 총리교섭통상대신(總理交涉通商大臣)에 취임하여 서울에 주재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위안스카이는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는데, 그는 조선의 내정·외교를 조정·간섭하고 청나라 세력을 부식(扶植)하면서 일본, 러시아와 경쟁하였다. 1894년 청일전쟁에 패퇴한 뒤 직례안찰사(直隷按察使)가 되었고, 톈진[天津] 부근에서 서양식 군대를 훈련시켜 돤치루이[段祺瑞] ·펑궈장[馮國璋] 등의 부하를 양성하여 북양군벌(北洋軍閥)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이것이 훗날 위안스카이의 정계 진출의 초석이 되었으며 이곳에서 양성된 부장(部將)이 민국(民國) 성립 후의 북양군벌의 수뇌가 되었다.
1898년 무술변법(戊戌變法:百日改革) 때에는 탄쓰퉁[譚嗣同] 등 개혁파의 부탁을 받았으나 그들을 배반하여 변법을 좌절시키고, 서태후(西太后)의 신임을 얻어 산둥순무[山東巡撫]로 승진하였다. 1900년의 의화단(義和團)의 난 때에는 산둥성에 있으면서 난을 진압하고 외국인을 보호함으로써 열강의 신임을 얻었다. 1901년 이홍장이 죽은 뒤 그의 뒤를 이어 직례총독(直隷總督) ·북양대신이 되어 자기 세력을 확대시켜 나갔고, 직속의 신식군대, 즉 신건(新建) 육군을 증강시켜 일종의 독립된 정권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청나라 귀족들의 시기를 받아 외무부 상서(尙書), 군기(軍機) 대신으로 전보되었고, 1908년 선통제(宣統帝)가 즉위한 뒤 섭정이던 순친왕(醇親王)의 명령으로 정계에서 물러나 있어야만 했다. 1911년 신해혁명 발발로 다시 군사의 전권을 장악하게 되었고, 11월 내각 총리대신이 되어 청나라 조정의 실권을 잡았다. 그는 청나라의 무력(無力)과 혁명군의 약체를 간파하고 혁명군과 연락하는 한편, 황제를 퇴위시켰다.
마침내 그는 혁명파의 임시 대총통 쑨원[孫文]을 사임시키고 1912년 3월 임시총통에 취임함으로써 중국을 정식으로 조직하였고 수도를 난징[南京]에서 베이징[北京]으로 옮겼다. 그 뒤 1913년 3월 국민당 당수 쑹자오런[宋敎仁]을 암살하고 다수파인 국민당을 탄압하였으며, 열강과 차관협정을 맺어 그 힘으로 리례쥔[李烈鈞] ·보원위[柏文蔚] 등의 토원군(討袁軍)을 진압하였다. 이것을 제2혁명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 해 10월에 정식으로 초대 대총통에 취임, 국민당을 해산시키고 대총통선거법을 개정하여 독재체제를 확립하였다.
황제가 되려는 야심을 품고 1915년 5월 일본의 21개조 요구를 받아들였으며, 황제추대운동을 전개시켜 1916년 1월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연호를 홍헌(洪憲)으로 개원(改元)한다고 선언하였다. 1915년 윈난[雲南]봉기를 계기로 도처에서 일어난 반원(反袁)운동의 확대(제3혁명)로 인하여 영국·러시아·일본 등 주변 강대국도 황제제도 취소를 권고, 1916년 3월 황제제도 취소를 선언하였다. 그 후 계속되는 반원운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죽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위안스카이 [袁世凱(원세개)]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 리위안훙 [ 黎元洪(려원홍) ]
요약
중화민국 전기의 군인 ·정치가. 신해혁명 때 악(鄂: 湖北省)의 군도독(軍都督)으로 취임하였고, 난징[南京] 임시정부의 부총통을 지냈다. 위안스카이[袁世凱] 이후 대총통이 되었으나 복벽사건으로 쫓겨났다.
자 송경(宋卿). 후베이성[湖北省] 황피[黃陂] 출생. 톈진[天津] 수사학당(水師學堂)을 졸업하고 청 ·일전쟁 때에는 군함 정원(定遠)의 포술장(砲術長)으로 복무하였다. 후에 육군으로 옮겨 장즈둥[張之洞] 밑에서 신군(新軍)의 건설과 훈련에 임하였다. 신해혁명 때는 혁명군의 강요로 악(鄂: 湖北省)의 군도독(軍都督)으로 취임하였고, 이어서 난징[南京] 임시정부의 부총통이 되었으나, 실력과 견식이 부족하여 군벌(軍閥)의 괴뢰적 소임을 다했을 뿐이다. 1916년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죽자 대총통(大總統)이 되었으나 이듬해 장쉰[張勳]의 복벽사건(復辟事件)으로 쫓겨났다. 1922년 직례군벌(直隷軍閥)의 추대로 재차 대총통이 되었으나, 다음해 다시 쫓겨나 톈진에 은퇴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리위안훙 [黎元洪(려원홍)]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