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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주님 경외할 줄 모르며, 약소국들을 우습게 여기는 나라들의 회개가 절실합니다!
요나가 살던 시대, 아시리아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강한 제국이었습니다. 아시리아는 동서로는 인도에서 시작해서 이집트까지, 남북으로는 아라비아에서 시작해서 러시아까지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따라 요나가 찾아간 니네베는 당시 아시리아의 수도였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뉴욕이나 도쿄, 북경이나 런던 정도 되는 대도시였습니다.
웅장한 궁전과 사원들을 둘러싼 성벽은 그 위로 마차 3대가 동시에 달릴 수 있을 정도로 폭이 넓었습니다. 성벽의 높이는 23미터였는데,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벽 앞에는 너비가 24미터인 방어용 연못까지 건설할 정도였습니다.
요나 예언서도 니네베라는 도시의 규모와 위용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니네베는 가로지르는 데에만 사흘이 걸리는 아주 큰 성읍이었다.”(요나 3,3)
예언자로 불림 받은 요나가 요리 조리 도망다니다가, 마침내 주님의 손아귀에 잡혀 최초로 파견된 도시가 바로 그 잘나가던 도시, 당시 최강대국의 수도 니네베였던 것입니다. 공포와 두려움에 부들부들 떨면서 니네베 성안으로 들어가는 요나 예언자의 모습이 참 딱해 보입니다.
성안으로 들어가 하룻길을 걸은 요나 예언자가 마침내 이렇게 외칩니다.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요나 예언서 3장 4절)
니네베 사람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요나 예언자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내가 아무리 외쳐본 들 뭐하겠어? 귀여겨 듣지도 않을 니네베 사람들인데...그래도 주님께서 외치라 하시니, 일단 한번 외쳐나 봐야겠다. 안 그러면 주님께서 내게 또 어떤 끔찍한 조치를 취하실지 모르니...’
그런데 정말이지 뜻밖의 일이 발생했습니다. 니네베 사람들이 요나 예언자의 말을 귀담아 들은 것입니다. 그들은 단식을 선포했습니다. 높은 사람 낮은 사람 할 것 없이 자루옷을 입었습니다. 왕도 왕좌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자루옷을 걸친 다음 잿더미 위에 앉았습니다.
그런 니네베 사람들의 모습을 주님께서 보셨습니다.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그들의 모습에 마음을 돌리시고 재앙을 거두셨습니다.
니네베 사람들의 집단적 회개 사건을 묵상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날 주님께서는 또 다른 잘 나가는 우리들의 대도시를 향해서도 강력한 회개를 촉구하고 계실 것이라는 생각 말입니다. 돈과 명예, 소비주의와 향락주의에 물든 거대 도시민들의 집단적인 회개를 기다리고 계실 것이라는 생각 말입니다.
그렇게 번창했고 잘 나갔던 대도시 니느베는 기원 전 612년, 자취도 없이 이 지상에서 사라졌습니다. 멸망의 이유는 아시리아 제왕들의 잔혹함 때문이었습니다. 후에 발굴된 오벨리스크나 벽화에는 저마다 새겨놓은 무용담이나 왕에 대한 두려움을 자아내는 내용들로 가득합니다.
“짐은 잔인하고…전쟁에서는 앞장서 달리는 온 천하의 왕이며…무릎 꿇지 않는 적들을 짓밟고 온 세상을 손아귀에 넣었노라. 나는 들판을 피로 물들이는 무시무시한 태풍이로다.”(아슈르바니팔 왕).
교만과 사악함, 사치와 게으름에 빠져 있던 아슈르바니팔 왕은 연합군이 바빌로니아를 앞세우고 쳐들어오자 궁에 불을 질렀습니다. 궁녀와 시종들 그리고 자신까지 불길 속으로 내던지며 그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갔습니다..
지상에서 가장 눈부시고 거대했던 도시 니네베는 폐허로 바뀌었습니다. 수천년간 사막 바람이 뜨거운 모래와 먼지 구름을 몰고 와 폐허를 덮자, 왕성은 큰 둔덕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끝도 없이 군사력을 증강시키면서 지상의 평화를 위협하는 몇몇 강대국들, 아시리아와 니네베의 멸망을 눈여겨봐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 두려워할 줄 모르며, 약소국들을 우습게 여기는 나라들의 회개가 절실합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2024년 나해 연중 제28주간 월요일
<사이비: 거짓말이 만드는 인간>
복음: 루카 11,29-32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표징을 요구하는 이 세대를 악하다고 하십니다. 왜 표징만 요구하는 이들이 악할까요? 저도 사제가 되라고 불러주실 때 예수님이 나타나시든가 하는 표징을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때 새벽에 성당에 올라갔을 때 성모상에서 이전까지 느낄 수 없었던 표징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냥 술 취해서 헛것을 본 거야!’라고 생각하며 내려왔습니다. 이때 느꼈던 게 있습니다. 저는 신학교에 들어가기 싫었습니다. 그 이유를 표징이 없는 것으로 합리화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것을 하느님 탓으로 돌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표징까지도 필요가 없었습니다. 저는 할머니께서 돌아가실 때 ‘행복’이라는 모토로 죽음의 공포를 이기려 하였습니다. 그리고 행복을 위해 결혼을 생각했다가 이제 ‘하.사.시.’를 읽고는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 더 큰 행복으로 보이게 된 것입니다. 이것 자체가 표징이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행복으로 부르고 계셨던 것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더 행복해져야 한다는 마음에 저절로 지적인 호기심이 누구보다 컸다고 생각합니다. 행복해지려는 이는 그 방법을 찾게 마련입니다. 그러던 중 ‘하.사.시.’를 만나게 되었고 참 행복의 지혜를 얻었습니다. 참 행복의 지혜가 표징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결혼하고 싶은 마음을 포기하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제가 되기로 완벽히 결심하게 만든 책은 트리나 폴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이었습니다. 주님은 표징보다는 참 행복의 길로 이끄는 방법으로 지혜를 사용하십니다. 그러나 그 지혜를 찾으려고 하지는 않으면서 표징만 요구한다면 그 마음 안에는 믿지 않는 합리화만 하는 것과 같습니다. 표징으로는 마음을 바꿀 수 없습니다. 지혜가 오히려 마음을 바꿉니다. 사실 표징은 내가 지혜로 마음의 결단을 내리게 되었을 때 나중에 보여주십니다.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
예수님 시대에 하느님을 믿던 이들도 다 신앙이 있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다가오기는 주저하였습니다. 그들은 표징을 요구합니다. 사실 지혜가 예수님께로 이끄는데 말입니다.
이런 까닭에 예수님은 니네베 사람과 남방 여왕의 예를 듭니다. 니네베 사람들은 요나의 표징이 아닌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고 남방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그 먼 길을 온 사람이었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지혜의 말씀이 주님께 있는데 그분에게 표징을 요구한다는 말 자체가 그분을 믿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런 이들을 ‘사이비’라 합니다. 같은 것 같지만 실제로는 다르다는 뜻입니다. 신앙인 같지만, 실제로는 주님 뜻을 따를 마음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사이비를 만드는 이들이나 사이비에 빠지는 이들은 지혜를 원치 않는 이들입니다. 이들의 특징은 ‘거짓말’에 있습니다. 피노키오가 거짓말할 때는 제페토 할아버지의 지혜는 그에게 아무 의미가 없었습니다.
신천지는 어떻습니까? 포교를 하는데 거짓말을 정당화합니다. 열매가 방법을 정당화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TV 뉴스도 보지 못하도록 합니다. 정보의 유입이 얼마나 큰 해를 입히는지 알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르치는 것에만 집중하도록 합니다. 거기에는 마치 표징과 같은 놀라움이 있습니다. 사실 성경의 필요한 부분만을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짜 맞춰서 가르치는 것인데도 사람들이 속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진짜 지혜를 찾기를 원치 않는 사이비에 적합 화 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예는 모든 사이비들에게 적용됩니다. 광주 대교구 최창무 주교님이 나주 율리아의 모든 것들이 거짓된 것임을 교령으로 반포하셨습니다. 나주 율리아를 제가 처음 접했을 땐 저도 매우 신기했었습니다. 성체가 입 안에서 피로 변하였다가 다시 성체로 변하는 모습 등을 비디오를 통해 보았을 땐 정말 믿음이 더 깊어지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차차 하늘에서 성체가 떨어진 것은 자신이 쥐고 있던 제병을 던진 것이라는 증언과 자료를 보고 또 입에서 성체가 피로 변하는 것은 입 안에 나 있는 상처를 터뜨려 피가 나오게 했다는 것을 들었고, 몸에서 향기가 났다는 것도 그녀가 묵고 간 곳에서 향수병이 발견됨으로써 거짓이었다는 것 등을 듣고 나서는 그녀에 대한 믿음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특히나 그녀가 미장원을 할 때부터 많은 거짓말을 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또 그녀의 오줌을 사람들이 나누어 마시는 것 등을 보았을 때는 그런 것들에 광신적으로 빠져있는 신자들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사이비에는 항상 거짓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거짓말하는 사람들이 들어갑니다.
수원 교구에서도 최덕기 주교님께서 미리내 상주 데레사의 모든 것들도 거짓임을 교령으로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본당에 있을 때도 수녀님들에 의해 그 계시 받아 그린 그림들을 보고 글을 읽어보며 신기해했었습니다. 역시나 그런 것들로 믿음이 커지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신학을 배우며 그때 보았던 많은 것들이 신학적으로 오류가 크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그것들이 마귀에게 속았거나 거짓으로 꾸며 낸 것임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미리내 중앙에 있는 삼위일체상도 계시를 통해 보고 만든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간단히만 말하면 예수님은 인성을 취하셨기 때문에 인간의 모양을 하는 것은 있을 수 있지만 아버지께서 사람의 모양으로 보인다는 것은 신학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시간과 공간을 지으신 분이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은 시간과 공간에 제약받고 있다는 뜻인데 하느님께서 무엇에 제약받으신다면 더 이상 하느님이 아닙니다. 또 성경에서도 하느님은 영(靈)이시고 (요한 4,24) 아들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본 이가 없다고 하고 (요한 1,18: 6,46) 교회의 가르침도 아버지는 볼 수 없는 분이라고 가르치는데 아버지를 보았다고 한다면 스스로 그리스도와 동급이 되려는 것이고 하느님을 사람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현대는 사이비가 점점 강하게 판을 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제 지혜가 아닌 표징만 요구하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표징만 요구하는 세대가 된 이유는 거짓말을 허용하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넷플릭스 드라마 ‘지옥’도 바로 그러한 세계관을 가집니다. 사이비 새진리회는 표징을 통해 사람들을 모으고 그들에 맞서는 이들은 지혜로 하나하나 설명하려 듭니다. 둘은 적대관계가 되어 서로 싸웁니다.
제가 오랜만에 본당에 왔을 때 정말 놀랐던 것은 성경, 그리고 기도서나 성가책을 제외하고는 성물방에 책이 한 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하.사.시.’를 읽게 된 이유는 당시 성물방 책장에는 엄청난 책이 진열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책을 읽지 않게 되고 지혜를 찾지 않게 된 이 세상은 이제 사이비가 만연할 수 있는 환경이 되었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말합니다.
“독서와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새로운 일을 도모하십시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루카 11,29-32: 이 세대가 왜 이렇게도 악할까!
유대인들은 예수님 자신이 하느님께로부터 파견된 참 메시아임을 입증할 수 있는 표징을 요구한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요나라는 표징밖에는 받지 못할 것이라 하신다. 요나의 표징은 니네베 사람들에게 두 가지 면에서 도움이 되었다. 그들이 요나의 말을 듣지 않았더라면 요나처럼 산 채로 저승으로 갔겠지만, 요나의 예언을 믿고 회개했기 때문에 요나처럼 죽음으로부터 되살아날 수 있었다. 예수님도 사람들은 그분의 돌아가심을 통해 살거나 그분의 돌아가심을 통해 멸망하기도 한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 사람들과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 사람들을 단죄할 것이다.”(31절) 솔로몬보다 더 위대한 지혜, 요나보다도 더 큰 하느님의 표징을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베푸셨는데도, 다른 어느 세대, 어느 백성에게도 베풀지 않은 특전을 베풀었는데도 그들은 하느님의 뜻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자기 고집에만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볼 수가 없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지 2000년이나 지난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이 지혜와 삶을 통해서 체험하고 소화해 전해준 신앙과 교회의 가르침, 성경 등 우리는 하고자 하면 더더욱 하느님을 가까이 모시고 더욱 의욕적인 믿음의 생활을 할 수 있다. 지금 우리에게는 더 큰 특전이 내린 때다. 잘 안된다면 우리도 성경 말씀대로 더 큰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을 마음에 새기면서 나태하기 쉬운 우리 자신을 채찍질해야 할 것이다. 유다인들이 하느님을 알면서도 자신들의 현세적인 이익만을 위해 기적을 요구하듯이 우리 자신이 하느님을 부르면서도 세상의 이익만을 찾음으로써 하느님의 뜻과는 먼 생활을 하고 있지나 않은지 경계하고 깨어있어야 하겠다. 가장 큰 기적은 바로 나 자신이 변화되는 것이다. 내가 변화되지 않으면 아무리 큰 기적도 나의 눈에는 기적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눈이 변화될 때 참으로 하느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생명을 얻을 수 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집무실에서 글을 쓰고 있는데 누군가가 집무실 문을 두드립니다. “네, 들어오세요.”라고 말하자, 어떤 자매님께서 “신부님! 사무실 컴퓨터가 이상해요. 직원이 없어서 신부님께 물어보러 왔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컴퓨터를 켜니 익숙한 윈도우 화면이 아닌 파란색 화면에 알 수 없는 영어가 가득 채워 있다는 것입니다. 얼른 가서 보니 CMOS 설정이 켜져 있습니다. 이 설정은 주로 컴퓨터의 시스템 시간, 날짜, 하드웨어 구성 정보를 저장하는 데 사용되며, 시스템 부팅 시 하드웨어를 인식하고 초기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아마도 컴퓨터 전원 버튼을 누른 뒤에 키보드를 꺼내면서 실수로 CMOS 설정으로 들어가는 F2 키를 누르신 것 같습니다.
간단히 ESC 키를 누르고 yes 버튼을 누르면 해결되는 것이지만, 이 자매님께서는 처음 보는 화면이라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저를 찾아오셨던 것입니다. 1983년부터 컴퓨터를 만져본 저로서는 이 CMOS 설정이 너무나 익숙했고, 그래서 쉽게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익숙하면 아무런 걱정이 없습니다. 그러나 익숙하지 않으면 두려움부터 몰려옵니다. 온갖 부정적 생각이 함께하게 됩니다. 주님과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잘 알아서 익숙한 사람은 자기 삶 안에서 편안해집니다. 그러나 주님을 잘 모르고 그래서 익숙하지 않으면 불안과 걱정 등이 떠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을 잘 알도록 만드는 기도가 중요하고, 더불어 주님을 알기 위해 성경 읽기를 비롯한 신앙생활이 중요합니다.
삶 안에서 특별한 상황은 너무 자주 일어납니다. 그때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그냥 포기하고 좌절하는 무기력한 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이 계시기에 힘차게 그리고 감사하면서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잘 알아야 하고, 익숙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고향 사람들에게 구원을 보여 주시지만 그들은 알아보지 못합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자기들 기준으로 판단하면서 구원의 길과 멀리 떨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구원의 표징보다는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표징만을 추구할 뿐이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요나의 표징은 이방인인 니네베 사람들을 구원하려는 하느님의 자비였습니다. 그 자비를 알아들었기에 이방인이었던 니네베 사람들이 요나의 말에 모두 회개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구원은 계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표징을 보고 회개하고 하느님의 뜻에 맞춰서 살고 있나요?
알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주님께 익숙하지 않는다면 구원의 표징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오늘의 명언: 만약 누군가를 당신의 편으로 만들고 싶다면, 먼저 당신이 그의 진정한 친구임을 확신시켜라(에이브러햄 링컨).
“그러니 굳건히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갈라 5,1)
하느님의 눈동자 아래
굳건히 서서
그분과
눈 맞춤하고 있지 않으면
영혼의 종살이는
끝나지 않고
우리는
한 없이 어딘가를
해매이며 방황하게 된다네.
인간의 지혜는
우리에게
죄의 멍에를 씌우지만
하느님의 지혜는
우리에게
자유를 준다네.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묵상글 단톡방)
아집과 탐욕과 분노로
자신의 내면을 스스로 황폐하게 만들고,
이웃과 진정한 친교를 나누기보다는
눈앞의 이익을 따라가고,
시기심과 질투로 대하기 일쑤고,
애덕으로 대하기보다는 무시하고
때로는 잔인하게 탄압하고 폭행을 일삼으며
불의에 맞서기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챙기고 지키려는 이 세대가
더 이상 기적을 바랄 수 없는 세대입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의 권력과 능력이 아니라
당신과의 오롯한 만남을 통하여
우리가 새롭게 바뀌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을 얻도록 초대하십니다.
세상의 논리에 눈먼 우리의 불신앙을
다시금 변화와 성장을 촉구하는
희망으로 바뀔 수 있도록
나부터가 노력을 해야겠습니다.
먼저 나 자신의 ‘회심’ 없이는
세상의 변화가 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복음말씀
제1독서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라 자유의 몸인 부인의 자녀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갈라티아서 말씀입니다.4,22-24.26-27.31─5,1
형제 여러분, 22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하나는 여종에게서 났고
하나는 자유의 몸인 부인에게서 났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23 그런데 여종에게서 난 아들은 육에 따라 태어났고,
자유의 몸인 부인에게서 난 아들은 약속의 결과로 태어났습니다.
24 여기에는 우의적인 뜻이 있습니다.
이 여자들은 두 계약을 가리킵니다.
하나는 시나이 산에서 나온 여자로 종살이할 자식을 낳는데,
바로 하가르입니다.
26 그러나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의 몸으로서
우리의 어머니입니다.
27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즐거워하여라,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아!
기뻐 소리쳐라, 환성을 올려라, 산고를 겪어 보지 못한 여인아!
버림받은 여인의 자녀가 남편 가진 여인의 자녀보다 더 많기 때문이다.”
31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라
자유의 몸인 부인의 자녀입니다.
5,1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니 굳건히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이 세대는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1,29-32
그때에 29 군중이 점점 더 모여들자
예수님께서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30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
31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 사람들과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 사람들을 단죄할 것이다.
그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끝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32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