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 박철홍의 지금도 흐른다! 749
ㅡ '고종'부부와 '윤석열'부부 ㅡ
이 두 부부 공통점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가장 큰 특징은 두 부부 다 남편이 마눌에게 휘둘리는 <바보, 모지리>라는 소리를 듣는 것 입니다.
구한말 조선망국 역사 뒤에는 '고종부부'의 애틋한 부부애가 있었습니다.
현 우리나라를 극도의 혼란에 빠뜨리는 이 상황은 '윤석열 부부'의 남다른 사랑에 있다고들 합니다.
한 때 "나는 조선의 국모다!"
'이미연' 배우의 한 맺힌 외침과 열연, 일본자객 역을 한 '허준호'의 냉혹함 그리고
"슬퍼도 살아야 하네 나 슬퍼서 살아야 하네 이 삶이 다하고 나야 알텐데 내가 이 세상..."
'조수미' 애절한 노래와 가사 그리고 뮤직비디오로 우리에게 처절한 아픔으로 각인된 비극의 여인 '명성황후'가 새롭게 재조명 되어 우리에게 다가 온 적이 있습니다.
나라를 그토록 사랑한 조선국모 이자 가장 비극적인 여인으로 말입니다.
명성황후는 조선왕비로서 비극적 최후를 마친 여인임에는 분명 합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살펴 봤을 때 우리가 그토록 슬퍼하며 그리워 해야 할 여인은 전혀 아닙니다. 아니 그 반대로 조선을 망국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수 십 만 농민들을 외세에 학살 당하게 만든 원흉 중 원흉입니다
사실, 명성황후는 죽고나서 붙은 호칭이고 '민비'로 불리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민비'로 호칭합니다.
이 '민비'가 조선이나 우리 민족 에게 긍정적인 역할을 한 적은 내 역사지식 속에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조선이라는 나라 운명을 말아먹은 부정적 역할을 주도한 것은 너무 많습니다.
그 중 '세 가지'만 말합니다.
이 세 가지 공통점은 외세군인 (청나라 병력)을 우리나라에 불러 들였다는 것입니다
그 첫 번째는 1882년 '임오군란' 때 본인을 죽이려하는 구식군대를 피해 도망간 상태에서 청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자 청나라 군인들이 들어와 흥선대원군을 청나라로 납치해 가고 청나라 군대에 의해 임오군란은 진압되고, 조선은 명시적으로도 완전 청의 속국이 되고 맙니다.
두 번째는 1884년 갑신정변 때 급진개화파들이 들어서자 또 다시 청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여 갑신정변을 3일만에 실패하게 만들고, 어제 올린 글처럼 <조선에 모처럼 찾아왔던 황금 같았던 절호의 10년>이라는 기회를 민씨척족 탐관오리들 천국으로만 만들어 버립니다.
이 세 번째는 너무나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고 맙니다.
1894 '동학농민혁명'이 승승장구 해 전주까지 점령합니다. 그러나 '전봉준'의 '존왕양이'라는 유교적 한계때문에 한양까지 가지도 않고 조선조정과 평화롭게 합의하고 맙니다. 그 덕에 전라도 지방에는 '집강소'까지 설치하여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민중에의한 자치가 실행되고 있을 때 였습니다.
이럴 때 너무나도 뜬금없이 민비 일당은 또 다시 청나라에 앞 뒤 생각없이 막가파식 구원병을 요청합니다.
청나라는 얼씨구나하고 또 조선에 병력을 보냈습니다. 청나라도 제 정신이 아니였을 때 였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청이 조선에 진입한 것은 1884년 갑신정변 때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10년동안 일본은 근대화를 더 성공시켜 군대도 더욱 강력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복잡해진 일본 국내상황 때문에 강력해진 군대를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명분만 찾고 있었습니다.
조선에서 민씨일당이 동학농민군 을 진압하기위해 청나라에 구원병 을 요청한 것은 <일본이 울고 싶을 때 뺨 때려준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당시 일본총리는 조선이 청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했다는 소리늘 듣고 너무 기뻐서 외쳤다 합니다.
"하늘이 일본을 버리지 않았다."
일본은 갑신정변 때는 일본 국내사정등으로 청을 아직은 전쟁불사까지는 해볼만하지 않다 여기고 조선에서 물러갑니다. 그러나 순순히 물러난 것은 아니였습니다. 조선에는 막대한 배상금을 요구 했고, 청과는 '한성조약'을 맺었습니다.
'한성조약'에 따르면 청ㆍ일 중 어느 한 나라가 조선에 병력을 출동하면 다른 한나라는 자동으로 병력을 출동시킬 수 있다는 내용 이 있었습니다.
청이 조선에 병력을 출동시켰다는 말을 듣자마자 일본도 그 즉시 조선에 병력을 출동시킵니다.
이로인해 청ㆍ일은 조선 땅에서 전쟁을 일으키고 마는데 그게 바로 '청일전쟁'입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제일 먼저 했던 일이 동학농민군 진압이었습니다. 일본군 최신식 무기에 동학농민군 수 십만명이 속절없이 풀입처럼 쓰러져 갔습니다
민씨일당의 앞 뒤 생각없는 막가파식 청나라 구원병요청이 '청일전쟁'이라는 엄청난 전쟁도 만들어 내고, 조선동학농민군 수 십만명을 몰살시켰습니다.
조선은 이때부터 일본식민지에 들어간 것이나 다름없게 됩니다.
참말로, 이 얼마나 기가막힌 일 입니까?
자기들 권력유지를 위해 청에 구원병 요청하는데만 눈이 멀어
'한성조약' 내용하나 챙겨보지 못 한 것입니다.
앞 뒤 안 보고 자기들 권력유지 에만 눈이 먼 것은 2024.12.3 윤석열이 터무니없이 뜬금없고 끔찍한 비상계엄선포와 너무나 닯아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세 번의 청나라 구원병 요청이 민비가 주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 모든 게 오롯히 민비 개인 탓으로 돌려야 할까요?
저는 우유부단하고 확고한 신념도 없이 이리저리 흔들리기만 했던 무능한 '고종'이 더 큰 책임이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우리 역사 속에서 '고종'은 '민비' 치마 폭에 가려져 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 정치적 혼란은 윤석열부인 김건희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 대부분입니다.
이 모든 게 김건희만 탓 이겠습니까? 김건희 치마 폭에 휘둘리고 있는 무능한 윤석열에게 더 큰 책임이 있지 않겠습니까?
오죽하면 이번 뜬금없는 윤석열 비상계엄선포도 부인 김건희를 감옥에 안 보내려 했던 것이 주된 목적이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돌고 있습니다.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참말 눈물겨운 부부애가 안타갑습니다.
고종이나 윤석열이 그냥 일반적 평범한 사람들이었다면 이 눈물겨운 부부애는 칭송받아야 마땅하겠지만, 그 둘은 한 나라를 책임지는 '국가최고통수권자' 였습니다.
이 둘에게는 부부애를 뛰어넘어야 하는 국민과 국가에 대한 막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정말 진심으로 아니기 바라지만, 윤석열이 부인을 위한 비상계엄을 선포했다는 것이 사실로 밝혀 진다면 우리 역사 속에 또 하나의 치욕스럽고 참담한 사건으로 기록되어 질 것입니다.
ㅡ 초롱박철홍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