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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3. 묵상글 ( 사순 제1주간 금요일. - 하느님 사랑에 압도되어. 등 )
* 06:52. 김찬선 신부님 글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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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3. 사순 제1주간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02.23 05:55
- 하느님 사랑에 압도되어
오늘은 부끄러운 제 얘기를 해야겠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너희의 의로움이 바리사이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는데 그 말씀을 묵상하다가
부끄러운 저를 보게 된 것입니다.
저에게 의로움이 얼마나 있는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의 불의를 자주 많이 보는데,
얼마 전엔 어느 나라 대통령이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그 사람이 정권을 잡으면서 종교 탄압이 점점 심해지고 요즘은 극에 달했습니다.
이 인간이 사라져야 종교 자유가 올 거라는 생각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한 겁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비단 한 번이 아닙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간의 그리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간의 전쟁이 났을 때도.
그런데 오늘 에제키엘서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 주 하느님의 말이다.
악인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
저는 그들이 죽었으면 좋겠다고 하는데
주님은 그들의 죽음이 당신의 기쁨이겠냐고 저에게 물으십니다.
저의 의로움은 악인이라고 생각하는 인간들을 단죄하는 의로움입니다.
저의 의로움에는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의로움이 의로움이기는 한 것입니까?
자기 불의를 보지 못하는 의로움을 어떻게 의로움이라고 하고,
사랑이 없는 의로움을 어떻게 의로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까지가 악하면서 더 악한 사람을 단죄하려는 저의 의로움,
사랑이 없는 저의 의로움에 대한 반성이었습니다.
이제 악인도 죽기를 바라지 않고 살기를 바라는 하느님의 사랑을 보겠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의 의도도 고작 저와 인간의 죄와 악을 들추는 것이 아니고
악인도 살게 되길 바라시는 하느님의 압도적인 사랑을 돋보이게 하고자 함이지요.
그런데 하느님의 사랑을 왜 압도적인 사랑이라고 합니까?
어떤 거대한 힘들도 어쩔 수 없을 정도일 때 우리는 압도적이라고 하지요.
그렇다면 하느님의 압도적인 사랑이란 어떤 거대한 악도 하느님의 사랑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어떻게 하지 못하는 그런 사랑입니다.
우리 인간의 이해는 자주 능력의 하느님이 왜 극악한 사람을 내버려 두시는지,
당신을 믿는 이들을 박해하는 사람까지 살려 두시는지 이해하기에 버겁습니다.
그 한 사람의 악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통을 당하는데,
그러니 그 한 사람을 척살하면 많은 사람이 고통을 당하지 않는데,
그러니 많은 이를 위해 한 사람을 죽이는 것이 의일 텐데 왜 그러지 않으시는지.
그러나 어쨌거나 오늘 독서와 복음은 의보다 사랑을 선택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당신 의로움 때문에 악한 인간을 죽이시면 살아남을 자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불의한 내가 나보다 더 불의하다고 하여 그를 죽여야 한다고 하면
의로우신 하느님 앞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나를 포함해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튼 하느님은 아무리 악해도 그가 죽길 바라지 않고 살길 바라십니다.
아무튼 하느님 사랑은 한 사람도 죽기를 바라지 않고 살기를 바라십니다.
물론 하느님도 의를 선택하여 벌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벌도 사랑입니다.
그 벌은 불의에서 의로 돌아서게 하는 사랑의 벌이고,
돌아설 기회마저 없애버리는 마지막 징벌이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는 벌 때문에 의로 돌아서는 그런 미성숙한 자가 아니라
우리의 모든 악을 압도하는 그 사랑에 감동하여 돌아서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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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3. 사순 제1주간 금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어렸을 때부터 많이 들은 이야기는 ‘결과보다 과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이가 결과를 가지고 과정을 말합니다. “A 학점을 맞지 못한 것을 보니, 공부 안 했구나.”라는 식입니다. 그러나 열심히 공부해도 A 학점을 맞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산수’를 강조하셨습니다. 지금 ‘산수’를 잘해야 중학교 올라가서 수학을 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매시간 시험을 봤고, 그 결과를 보시고는 몽둥이로 때리셨습니다. 특히 성적이 떨어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지난번에 다 맞았는데, 이번에 1개 틀렸으면 성적이 떨어졌다고 맞아야 했습니다. 항상 긴장의 연속이었고, 이때 많은 친구가 수학 자체를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열심히 공부했는데 성적이 잘 나오지 못할 수 있습니다. 이를 가지고 실패의 삶이라고 단정 지어서도 안 됩니다. 완벽주의는 직관적이고 익숙한 문제 해결에는 탁월하지만, 이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익숙한 문제만 찾아오는 것도 아니고, 눈에 보이는 직관적 형태의 문제만 찾아오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결과 중심의 삶은 오히려 잘못된 길로 갈 수 있습니다.
아직도 결과만을 바라보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과정 중심의 삶이 이 세상을 사는데 훨씬 더 현명하고 지혜롭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결과보다 과정의 삶이 중요함을 명령하십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만 진정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안에서 우리는 구원이라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결과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결과를 위해 우리가 실천해야 할 과정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바로 사랑의 삶이었습니다.
사랑은 마음 깊은 데서부터 실천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계명을 새롭게 해석해 주십니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는 계명에는 험담이나 멸시도 금지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하시지요. 그래서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재판에 넘겨지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랑과 화해 없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음을 분명히 하십니다. 그리고 형제와 화해하지 못한 사람이 바친 예물을 기뻐하시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결과만을 위한 삶보다 과정을 더욱더 깊이 있게 실천해야 한다면서,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사랑하고 화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절대로 사랑할 수 없고 화해할 수 없다고 하는 순간, 하늘 나라는 우리에게서 멀어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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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무엇을 하지 않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무엇을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스티브 잡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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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3. 사순 제1주간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마태 5,24)
우리는 지금 ‘사순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이 시기의 큰 주제 중의 하나는 “의로움”입니다. 곧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맺음”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회개와 화해를 요구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참된 의로움”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오늘 <복음>은 그 여섯 가지 의로움 중에서, 첫 번째의 의로움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살인하지 말라”는 구약의 율법에 대해서 충분하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곧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거나, 형제를 ‘바보’ 혹은 ‘멍청이’라고 모욕하고 멸시하는 것까지도 ‘살인’에 포함시키십니다. 곧 형제에게 ‘성’내고 ‘바보’ ‘멍청이’라고 말하는 언어폭력도 ‘살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참으로 혀를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집회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많은 이들이 칼날에 쓰러졌지만, 혀 때문에 스러진 이들보다는 적다.”(집회 28,18)
또한 이는 “혀”의 살인뿐만 아니라, 죄의 뿌리인 내면적인 면도 살인에 포함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사도 요한은 그의 편지에서 말합니다.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모두 살인자이다.”(1요한 3,15)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단지 ‘살인하지 말라’고 하시지 않으시고, 더 나아가 ‘화해하라’고 하십니다. 곧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의 근본적인 정신이 “화해”에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살인하지 않는 것이 본질인 것이 아니라, 화해하는 것이 본질입니다. 화해하면 살인하지 않게 되지만, 살인하지 않는다고 화해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무엇보다 우선하는 일이 화해하는 일입니다. 먼저 화해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예물을 바칠 때, ‘먼저 화해하라’ 고 하십니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마태 5,23-24)
이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예물은 결국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깨우쳐줍니다. 그러니 예물을 바치는 ‘우리 자신’이 곧 예물입니다. 마치, “야훼께서 아벨과 그가 바친 예물은 반기시고 카인과 그가 바친 예물은 반기지 않으시고”(창세 4,4) 예물과 예물을 바치는 이를 하나로 간주하셨듯이, 예물을 바치는 이를 바로 ‘예물’로 삼으십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제단의 예물보다 예물을 바치는 사람의 ‘의로움’을 바라십니다. 우리가 바치는 예물이 아니라, 우리가 당신 앞에 나서기에 합당한 사람이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형제와 화해하라.”(마태 6,24)
그러니, 불목한 형제가 있는지 살펴보고, ‘얼른’ 화해해야 할 일입니다. 늦기 전에 기회가 있을 때 지체치 말고 화해해야 할 일입니다. 시비를 가리고 따지기 전에, ‘먼저’ 화해해야 할 일입니다. 시시비비를 가리고 것이 의로움인 것이 아니라, ‘화해’를 이루는 것이 ‘의로움’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마태 5, 24)
주님!
먼저 화해하게 하소서.
늦기 전에 얼른하게 하소서.
지체치 말고 서둘러 하게 하소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화해를 이룸이 의로움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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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3. 사순 제1주간 금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뿌리를 다스려라
저는 지옥을 갔어도 벌써 몇 번은 갔어야 할 사람입니다. 짧은 생을 살아 오면서 차마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더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 행위를 보거나 접하면서 ‘바보, 멍청이 같은 이라고!’ 할 때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말이 이렇게 무서운 말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않았는데 예수님께서는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 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마태5,22). 하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살아있는 것은 분명 주님의 자비 덕분입니다. 덕을 입었으니 이제 정신을 바짝 차려 깨어있어야 하겠습니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도 갚는다.’고 하였지만, 오히려 말로 상처를 주고 일을 어렵게 만드는 사람이 있고, “다재다능하지만, 혀를 다스리지 못하여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제 혀를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은 복됩니다. 말이 많으면 진실과는 거리가 멀어지기 쉽습니다”(알베리오네). 그러니 “여럿이 있는 가운데 말을 적게 하십시오! 말 많은 사람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말이 많은 사람일수록 소리만 요란한 꽹과리입니다”(성녀 데레사). “누구의 감정도 상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말을 골라서 하고 모든 이에게 후회되지 않을 말을 찾으십시오”(십자가의 성 요한). “여러분의 입에서는 어떠한 나쁜 말도 나와서는 안 됩니다. 필요할 때에 다른 이의 성장에 좋은 말을 하여, 그 말이 듣는 이들에게 은총을 가져다줄 수 있도록 하십시오”(에페4,29). 다른 사람을 욕하고 미워하면 욕과 미움은 독이 묻은 화살이 되어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혹시라도 뜻하지 않은 말로 상처를 주고 서먹해진 관계가 있다면 상대가 다가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서둘러 화해하시길 바랍니다.
마음을 살펴봤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마음에 담긴 것이 밖으로 나오게 됩니다. 선하고 거룩한 마음을 지녔으면 선한 것이 나오고, 그렇지 못한 미움과 분노를 담고 있으면 화가 나옵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이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호감을 사지만 어리석은 자의 입술은 자신을 삼켜 버립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의 시작은 어리석음이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의 끝은 불행을 초래하는 우둔함입니다”(코헬10,13). 아무리 조심해도 마음 한번 흔들리면 안에 있는 것이 쏟아져 나오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우선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에 초점을 두지 않고 ‘성 내지 말고’, ‘바보’, ‘멍청이’라고 하지 말라고 당부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것을 치료하기보다 뿌리를 다스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상기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제 입이 맺는 열매로 배를 채우고 제 입술이 내는 소출로 배부르게 된다. 혀에 죽음과 삶이 달려 있으니, 혀를 사랑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는다”(잠언18,20-21). 귀가 둘이고, 눈이 둘인데 입은 하나일까요?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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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3. 사순 제1주간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학교에 다닐 때 ‘외유내강(外柔內剛)’이라는 말을 배웠습니다. 군자는 자신에게는 엄격하지만 타인에게는 부드럽다는 의미였습니다. 반대로 ‘외강내유(外剛內柔)’라는 말은 소인배들의 행동이라고 배웠습니다. 소인배는 자신에게는 부드럽지만 타인에게는 엄격하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외강내강(外剛內剛)’하는 분을 본 적이 있습니다. 본인에게 엄격할 뿐 아니라, 타인에게도 엄격한 사람입니다. 군대와 같은 조직에서는 필요한 덕목입니다. 생명을 구하는 소방대원들에게도 필요한 덕목 같습니다. ‘외유내유(外柔內柔)’하는 사람도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흔히 ‘술에 술 타고, 물에 물 타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평상시에는 큰 무리가 없겠지만 위기의 순간에는 본인은 물론, 조직에도 혼란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본당 사목자에게는 어떤 덕목이 필요한지 생각해 봅니다. 저를 신학교에 보내 주신 아버지 신부님은 ‘외강내강’의 사목자였습니다. 고향이 황해도셨고, 실향민이었습니다. 북한군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탈출하셨습니다. 그리고 사제가 되었습니다. 혈혈단신으로 사시면서 외강내강의 삶을 살게 된 것 같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최 씨에, 옥니에, 곱슬머리 면 고집이 엄청 세다.’ 아버지 신부님은 삼박자를 모두 갖추었습니다. 최 씨였고, 옥니였고, 곱슬머리였습니다. 그런 성품이셨기에 교구의 재정 담당을 하였고, 본당 신축을 3번이나 하였습니다. 은퇴하여서도 식복사 없이 모든 것을 혼자 하였습니다.
33년 사제생활을 하는 저를 돌아봅니다. 저는 아버지 신부님처럼 ‘외강내강’의 사목은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저를 떠올리면 ‘잘 했네, 잘 될 거야’라는 말이라고 합니다. 저는 시편의 이런 말도 좋아합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기어 제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아 그가 하는 일마다 잘되리라.” 햇님과 바람의 이야기도 좋아했습니다. 결국 길 가는 나그네의 옷을 벗게 하는 것은 강한 바람이 아니었습니다. 따듯한 햇빛이 나그네의 옷을 벗게 하였습니다. 저는 제가 무엇인가를 잘 할 것이라는 자신감이 별로 없었습니다. 계절은 어김없이 찾아오듯이 그렇게 흘러가는 시간에 저 자신을 맡기는 것이 좋았습니다. 그럼에도 큰 어려움 없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무슨 일이든 미리 준비하는 습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도 읽었습니다. “당신이 미래를 결정할 수는 없다. 당신은 습관을 결정할 수는 있다. 그 습관이 당신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다.”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외유내유하는 제게 한 가지 흠이 있다면 ‘욱’하는 성격입니다. 제가 부족한 부분이 자꾸 드러나면 참지 못하고 자리를 피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지나고 나면 늘 후회합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외유내강’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제1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 악인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러나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그는 자기 목숨을 살릴 것이다. 주님, 당신이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주님, 감당할 자 누구이리까? 당신은 용서하는 분이시니, 사람들이 당신을 경외하리이다.” 하느님께서는 자비롭고 온유하셔서 우리가 잘못을 뉘우치면 용서해 주신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용서에 대한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이웃이 잘못을 했을 때라도 일곱 번씩 일흔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지만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선한 사람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를 더 기뻐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도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한 없이 넓은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는 것이 신앙인의 삶이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스스로의 삶에는 엄격해야 합니다.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이야기에서 그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생의 전부입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고 있습니다. 나는 수고도 더 많이 하였고 옥살이도 더 많이 하였으며, 매질도 더 지독하게 당하였고 죽을 고비도 자주 넘겼습니다. 마흔에서 하나를 뺀 매를 유다인들에게 다섯 차례나 맞았습니다. 수고와 고생, 잦은 밤샘, 굶주림과 목마름, 잦은 결식, 추위와 헐벗음에 시달렸습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 의로운 심판관이신 주님께서 그날에 그것을 나에게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유형의 성격이신지요? 어떤 성격이든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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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3. 사순 제1주간 금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유대민족은 안식일에 일을 하면 안 된다는 조항 때문에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지 않습니다. 층마다 다 서게 만들어 놓거나, 아니면 이방인을 고용하여 눌러주게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자기 머리 위에 올려놓고 기도하는 모습에서도 하느님의 말씀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는지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아는 것과 같이 바리사이를 비롯한 유대 민족은 하느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시간에 맞추어 하느님께 예를 올리고, 그 말씀을 어기지 않으려고 별의별 노력을 다하곤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계명을, 그분의 말씀을 얼마나 충실히 따르고 있습니까? 내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긴다고 생각하시는 분 혹시 있으십니까?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리사이의 의로움은 여기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충실히 지키는 것에 그들의 의로움이 있습니다. 그들의 겉모습은 하느님이 사랑하시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나 속이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그 의로움을 넘어서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의로움을 넘어서는 방법을 예수님은 우리에게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니 이제부터 희망을 품읍시다.
그것은 겉과 속이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으로라도 ‘바보’라고 부르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마음으로 화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는 겉모습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속이 더 중요합니다. 마음으로 사랑하고, 이해하고 용서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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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습제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
찬 바람 불면 입술이 자주 터버립니다.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
찬 바람 불면 몸이 따끔거립니다.
보습이 필요하다 합니다.
이제는 스스로 보습할 수 없다고 합니다.
영원한 것은 없다는 말로 들립니다.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보습제를 샀습니다.
그동안 써보지 않았던 신문물입니다.
우리 마음도 시간이 지나면
말랑했던 마음이 굳어집니다.
그래서 슬퍼 눈물 흘렸던 것도 전혀 슬프지 않게 됩니다.
마음에도 보습제가 필요한가 봅니다.
그리스도 보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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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3. 사순 제1주간 금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으로 정의롭고 지혜로운 의인(義人)의 삶
“회개하라, 그러면 살리라”
-구원은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주께서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주여 감당할 자 누구이리까?”(시편130,3)
오늘 화답송 후렴이 반갑고 은혜롭습니다. 이런 깨달음에 투철한 이들이 진정 겸손하고 지혜로운 자들입니다. 자기를 모르는 이들이 남을 판단하지 참으로 자기를 아는 겸손하고 지혜로운, 너그럽고 자비로운 이들은 결코 남을 판단하지도 단죄하지도 않습니다.
일찍이 공자께서는 온고지신(溫故知新), ‘옛것을 익히어 새로운 것을 온전히 앎으로’ 다른 사람의 스승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난 과거의 것을 새로운 깨달음의 계기로 삼는 일이 참으로 겸손하고 지혜로운 삶이겠습니다. 면담고백성사를 통해서, 또 지난 옛 스승을 책에서 다시 만나면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습니다. 새삼 반복되는 역사임을 깨닫습니다.
20년전에 수도원을 찾은 어느 자매가 참 반가워했습니다. 당시는 결혼한지 얼마 안된 30대 초반이였는데 아르헨티나에 이민중 잠시 20년만에 귀국했고, 그 사이에 세 자녀를 둔 50대 초반의 나이라 했습니다.
“20년후에 귀국할 때 그때 다시 뵈어요.”
“20년후에라, 하루하루 살다보면 되겠지요.”
대답을 하고 나이를 헤아려 보니 96세! 자신할 수 없었고, 하루하루 살아야겠다는 자각을 새로이 했습니다. 지난 20년이 순간이듯 앞으로의 20년도 순간일 것입니다.
70대말의 노부부와의 만남도 잊지 못합니다. 비슷한 연배의 형제자매들을 만나면 세월의 무게와 더불어 저절로 동질감과 더불어 친밀감을 느낍니다. 어느 자매의 고백도 잊지 못합니다.
“몇년전 시어머니는 93세에 돌아가셨습니다. 6.25 사변시 남편을 잃고 26세 홀로 되어 유복자 아들 하나만 키웠고 제가 며느리로 들어왔을 때 시어머니는 46세 참 젊었습니다. 독실한 신자분으로 믿음으로 사셨지만 무서운 분이셨습니다. 결혼후 평생을 모시고 살았고 임종전 몇 년 동안은 대소변을 받아내고 목욕을 시켜드리며 온갖 시중을 다 들었습니다. 임종전 마지막 말씀이 모든 앙금을 말끔히 씻어냈습니다.
‘무서워하지 마라. 나도 에미다. 네 아픈 것들은 내 모두 가지고 가서 요단강에 버리고 가마. 아프지 마라.’
마지막 유언후 아무 말씀도 못하시고 일주동안 누워 계시다가 임종했습니다.”
믿음으로 살아 온 시어머니의 한평생 삶이 얼마나 기구했는지 마음이 아렸습니다. 6.25사변 전후로 얼마나 많은 분들이 참혹한 불행과 시련을 견뎌냈는지, 정말 무죄한 이들의 피를 흘리는 전쟁이 한반도에서 다시 있어선 안될 것입니다.
1970년대 제 20대 시절은 군부독재의 엄혹한 시대였지만 사회 곳곳에는 어른도 많았고 의인도 스승도 큰 스님도 많았고, 찾아 읽고 또 들으면서 많은 가르침을 받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현실이 잡목(雜木) 우거진 야산(野山)같다면, 그때는 곳곳에 큰 산에 푸르른 정신의 우람한 아름드리 거목의 스승들도 많았습니다. 그 한 예가 김수환 추기경입니다.
어른도 스승도 예언자도 찾아보기 힘든 천박한 자본주의 세상이요, 지식인은 많아도 지성인은 찾아보기 힘든 세상입니다. 삶의 희망을, 길을, 중심을, 의미를, 목표를, 방향을, 가치관을 잃어 정신들도 많이 사악(邪惡)하고 쇠약(衰弱)하고 왜소(矮小)하고 변질(變質)되어 있습니다. 도대체 서사가 사라진, 스토리와 컨텐츠가 너무 빈약한 세상이요 개인들입니다. 뜻밖에 찾아 읽게 된 “리영희(1929-2010) 평전”을 어제는 뜨거운 마음으로 틈틈이 많이 읽었습니다. 시인 고은은 화갑 기념문집에서 그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사상의 은사
시대의 선구자
60년대 70년대 80년대 대표적 지성
아 이 한반도의 살아 있는 정신
불
얼음
우리들의 전위와 후방”
그가 항상 웃어른으로 모신 무위당, 일속자 장일순(세례자 요한1928-1994)에 대한 그의 고백도 감동적이었습니다.
“사회에 매몰되지도 않고, 인간속에 있으면서 영향을 미치고, 변화를 시키면서도 본인은 항상 그밖에 있는 것 같고, 안에 있으면서 밖에 있고, 밖에 있으면서 인간의 무리들 속에 있고, 구슬이 진흙탕에 버무려 있으면서도 나오면 빛을 발하고 하는 그런 사람은 이제 없겠죠.”
이런 분들이 저에게는 지금도 빛을 발하는 스승들이요 평전도 늘 가까이 두고 읽습니다. 답은, 진리는, 구원은, 빛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하늘길도 하늘문도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입니다.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자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빛나는 깨우침을 주는 분이 복음의 예수님이요 제1독서의 에제키엘 예언자입니다. 이분들의 존재가 그대로 살아 있는 하느님 증명입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정말 신자들이라면 늘 깨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할 수 있는 정신(精神)으로, 결의(決意)로, 기개(氣槪)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주님은 직설적으로 문제의 핵심을 지적합니다. 무시와 멸시로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것, 형제를 바보라고 멍청이라고 하는 것, 말하는 자체가 살인이라는 것입니다. 마음으로부터의 근본적 변화를, 마음의 순수를 촉구하는 주님입니다.
순수한 마음에서 샘솟는 자비와 지혜요 바로 하느님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이런 사람이라면 주저함 없이 예물을 바치기전 원망을 품고 있는 형제가 있다면 이들을 찾아 용서를 청해 화해할 것이며,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더라도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는 참으로 겸손하고 지혜로운 자들이겠습니다. 은총의 사순시기 우리 모두 근본적인 마음의 혁명인 회개를 명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다시 생각하는 참행복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회개한 이들의 과거를 묻지 않는 주님이십니다. 과거에 아무리 잘 살았어도 지금 못살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느님이 보시는 바 어제가 아닌 오늘이요 과거가 아닌 현재입니다. 용두사미가 아닌 유종의 미가, 끝이 좋도록 살아 있는 그날까지 한결같은, 끊임없는 노력과 훈련이 중요합니다. 변절, 배신의 부패한 삶이라면 정말 희망이 없습니다. 역시 하느님 마음에 정통한 제1독서의 에제키엘 예언자의 말씀입니다.
“의인이 자기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면, 그것 때문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를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그는 목숨을 살릴 것이다.”
새삼 삶은 선택임을 깨닫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용기와 지혜로 의인의 삶을 선택해 공정하고 정의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정의롭고 지혜로운 의인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회개하여라. 너희의 모든 죄악에서 돌아서라.
너희가 지은 모든 죄악을 떨쳐 버리고,
새 마음과 새 영을 갖추어라.”(에제18,30-3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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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3. 사순 제1주간 금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 있음에>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9)
나 있음에
하늘이 땅으로
내려올 수 있기를
나 있음에
땅이 하늘로
오를 수 있기를
나 있음에
하늘과 땅이
땅과 하늘이
하나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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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3. 사순 제1주간 금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마태 5,21)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담고 계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는 이는 누구나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율법의 계명을 완수합니다. 성내지 않는 사람이 살인을 저지를 리는 더욱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율법이 명하는 것을 지킨다고 해서 그리스도께서 명하시는 것을 지키는 것은 아닙니다. 보복이 두려워 살인을 저지르지는 않지만 성내는 사람은 많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폐지되는 것보다 완성되는 것이 더 이롭다는 사실을 이제 아시겠습니까? 따라서 그리스도의 계명들이 없다면 율법의 계명들은 서 있을 수 없습니다. 성내는 자유가 허용된다면, 살인을 저지를 바탕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살인은 분노 때문에 생겨나니까요. 분노가 없다면 살인도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유 없이 성내는 사람은 누구든지. 보복이 두려워 실제로 살인을 저지르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의지로는 살인을 저지릅니다. 실제로 살인을 한 것만큼 양심의 가책을 받지는 않겠지만, 그런 죄는 성낸 사람의 죄와 맞먹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정경으로 인정된 그의 서간에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모두 살인자입니다”(1요한 3,15)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지혜를 눈여겨보십시오. 당신께서 옛날에는 율법 안에서 말씀하셨고 지금은 은총으로 명령하시는 하느님이심을 알리시고자,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의 어떤 계명보다 이 계명을 앞에 두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것을 당신의 계명들 맨 앞에 두셨습니다. 율법은 맨 먼저 “살인해서는 안 된다” (탈출 20,13)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계명들 간의 조화를 통하여 당신께서 율법과 은총의 창조자이심이 드러나도록, 살인에 관한 계명부터 말씀을 시작하십니다. “자기 형제에게 이유 없이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마태 5,22). 그러므로 이유가 있어서 성을 내는 자는 재판에 넘겨지지 않을 것입니다. 분노가 없다면, 가르침은 쓸모가 없을 것이며, 재판도 필요 없을 것이고, 죄가 되는 행동도 억누를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즉 합당한 분노는 단련의 어머니입니다. 이유가 있어서 성을 내는 이는 죄를 짓는 것이 아닐뿐더러, 성을 내지 않으면 오히려 죄가 됩니다. 뿐만 아니라, 분별없는 인내는 악의 씨를 뿌리며 게으름을 키우고, 사악한 자들만 아니라 선한 이들도 악을 저지르도록 부추깁니다. 사악한 사람은 꾸지람을 들어도 태도를 바꾸지 않지만, 선한 사람은 꾸지람을 듣지 않으면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 그의 육신 안에서 선보다 악의 힘이 더 커지기 때문입니다. 이유있는 분노는 분노가 아니라 심판입니다.
-마태오복음 미완성 작품-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3 피조물은 하느님이다
피조물이 하느님을 드러내는 곳에서 하느님은 하느님이 되신다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이 뜻해서 흘러 나온 것이다. … 모든 선은 넘쳐흐르는 하느님의 선에서 흘러 나온다." 피조물을 바람직하게 사랑하려면, 그들의 아름다움과 선함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절대로 놓치지 말아야 한다. 하느님이야말로 피조물의 아름다움과 선함의 원천이다. ”피조물 안에 있는 선, 피조물의 꿀 같은 달콤함은 모두 하느님 안에서 모아진다." 엑카르트의 심리학은 억압의 심리학이 아니라 기쁨을 지향하는 심리학이다. 그는 우리를 다그친다. 창조계를 등지지 말고, 창조계를 비난하지 말고, 창조계의 선함과 꿀 같은 달콤함을 흡수하라고. 그는 이러한 선의 원천, 곧 하느님에게 이르기 위해서는 창조계의 아름다움 속으로 충분히 들어가고, 깊이 뛰어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창조계, 곧 하느님의 모든 작품은 완전하다”고 선언한다. 신명기 32장에서 말하는 것처럼. “하느님은 하는 일마다 완전하다.” 창조계에는 우리가 두려워할 만한 것이 없다. 우리가 두려움을 가지는 이유는 창조주가 창조했고 지금도 끊임없이 창조하고 있는 창조계 속으로 우리가 깊이 뛰어들지 않기 때문이다. 엑카르트의 영성은 자연을 기뻐하고, 창조계를 기뻐하는 영성이다. 실로 만물의 선함과 꿀 같은 달콤함 속에는 하느님이 있다. 우리는 기쁨을 경험하는 가운데 그러한 선물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하느님이 자신의 녹아드는 것을 사랑하고, 창조계 안에서 자신의 녹아듦을 음미하고, 스스로 녹아들면서 창조계를 음미하는데, 하물며 하느님의 형상인 우리가 그러한 기쁨을 맛보지 못할 까닭이 어디에 있으랴.(125)
✝️ 금요일 성인의 날✝️
영적 삶의 샘(디다케에서 아우구스티노까지), 요한 봐이스마이어 외 지음
요한 크리소스토모
새로 세례받은 사람들에 대한 교회의 기쁨
어제까지만 해도 이들은 아직 죄의 노예로서 악마의 권세 아래에 놓여 마치 아무런 의지도 발휘할 수 없는 죄인처럼 이리저리 끌려다녔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오늘 이들은 이들의 대열에 받아들여졌습니다. 이들은 죄의 사슬을 벗어 버리고 임금이 입는 옷을 입었습니다. 이들은 하늘과 밝기를 시합할 정도로 빛나고, 별들보다 더 밝은 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이들을 비춥니다. 별들은 밤에만 빛나지 낮에는 결코 빛을 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밤이고 낮이고 차이 없이 언제나 빛을 냅니다. 이들은 영적 별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햇빛과도 밝기를 경쟁할 정도이고 어떤 존재들보다 더 뛰어납니다. 미래에 의인들이 빛을 발하는 것에 대해 우리의 주님께서 이와 같은 표상을 사용하셔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때에 의인들은 그들의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날 것이다”(마태 13,43) (해보다 더 빛날 것이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았다).
주님은 이 말씀으로 이들이 오직 해와 같이 빛나리라고만 말씀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의로운 사람들을 표현하는 데에 햇빛보다 더 나은 표상이 없기 때문에 이 비유를 동원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별보다 더 밝게 빛나고 햇빛보다 더 밝은 얼굴을 가진 이들을 두 팔로 안읍시다. 단순히 우리의 육체적인 두 팔로 이들을 안기만 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친절하고 섬세한 사랑과 영적 친밀감을 보여줍시다. 우리는 이들이 우리 주님의 크신 자비를 고찰하도록 하고, 이들이 입고 있는 밝은 옷의 품위에 맞는 생활을 해 나가도록 고무합시다. 성서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세례를 받아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었습니다”(갈라 3,27).(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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