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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23-28
롯이 소알에 들어갈 때에
본문은 소돔과 고모라에 가감이 없는 심판을 그분께서 예고하신 대로 집행하셨다는 사실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반역하는 자들에 대한 심판의 본보기입니다. 그리고 최후 심판의 본보기이기도 합니다. 롯의 아내의 경우도 하나님을 믿는 일에 대하여 어정쩡한 자들에 대한 본보기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선지자이신 아브라함 앞에 이 사실을 공개하셔서 대대로 그의 후손들에게 공표 하게 하셨습니다.
1. 본문 23-25절은
“(23) 롯이 소알에 들어갈 때에 해가 돋았더라
(24)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에게로서 유황과 불을 비같이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사
(25)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 입니다
모세는 여기서 아주 허식이나 과장이 없는 소박한 말로 소돔과 다른 도시들의 멸망을 간결하게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그 사건의 추악성을 비극적인 말로 표현하여 해설하자면 훨씬 더 많은 해설이 요구될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의 일상 방법대로 간단하게 하나님의 심판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심판은 말로는 그 격렬함을 충분히 표현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 제목에 대한 것을 신자들 각자의 묵상에 맡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무섭게 소름끼치는 보복에 대하여 우리의 모든 생각을 집중시키는 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적나라한 언급은 단지 우리를 떨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늘과 땅의 진동 없이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또 그것이 일어날 때는 굉장한 폭음과 진동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실의 장면이 성경에서는 상당히 빈번하게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 도시들이 단순히 지진으로 완전히 삽시간에 삼켜버리는 것이 하나님 뜻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그분의 심판의 본보기들을 보다 더 생생하고 뚜렷하게 하시려고 하늘에서 그들에게 불과 유황을 소용돌이치게 하셨습니다. 이 점에 모세가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께로서 불을 비같이 내렸다’ 고 하는 표현이 일치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반복적인 표현은 강조적인 것입니다. 그 이유는 여호와께서는 일반적인 자연과정에서 비가 내리게 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치 손을 쭉 내 뻗치고 그분이 공개적으로 지금까지 습관화되지 않은 방법으로 호통을 치고 계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게 하여 이 불과 유황비가 자연적인 원인으로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충분하게 분명히 해 두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공기가 우연히 동요된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은 정말 사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심지어는 가장 작은 소낙비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창조자의 주관이라는 것은 인정되어야 하는 것이 진실된 사실입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독적인 미묘성을 변명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것입니다. 즉 그는 그의 운석에 관한 책에서 제2의 원인에 관하여 아주 예리하게 논쟁을 하고 있으면서 깊은 침묵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을 심히 불쾌하게 하고 있는 자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모세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역사를 우리에게 분명하게 칭송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소돔이 분명한 기적이 없이는 멸망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로 하여금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하여 이 증언에서 고대인들이 뽑아내려고 노력했던 증거는 절대로 결론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의 결단으로는 그들이 까닭 없이 화를 내고 있다고 보여지는데 그들은 이런 종류의 증거를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유대인들을 신랄하게 비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시인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언제나 그분의 아들의 손을 통하여 활동하고 계시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아들이 그토록 기억에도 생생한 보복의 본보기를 주제하고 계셨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전혀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여기서 의도하고 있는 것은 신자들의 마음을 하나님의 손에 대하여 보다 생생하게 묵상하게 하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반하여 우리는 여기서 그들이 삼위의 복수성을 끌어내어 결론 없는 추리를 하고 있다고 말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이 구절에서 ‘아기들도 자기 부모들과 함께 똑같은 멸망을 당했는데 과연 그 아기들이 무슨 일을 했단 말인가?’ 하고 흔히 의문시되고 있는데 그 문제에 대한 해결은 쉽습니다. 이를테면 모든 인류가 하나님의 수중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결심하신 자는 멸망에 희생되게 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긍휼을 베풀어 주시기로 작정하신 자를 따로 모으려고 하신 것입니다. 다시 우리의 제한된 이해력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의 은밀한 판단에 맡겨야 되는 것입니다. 끝으로 그 후손의 전체가 저주를 받았습니다.그리고 저주스럽게 되어서 하나님은 가장 적은 자들이라도 부당하게 남겨 둘 수가 없으셨던 것입니다.
2. 본문 26절은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본 고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 입니다.
모세는 여기서 하나님의 놀라운 심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심판으로 롯의 아내는 소금 동상으로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이 해설을 구실로 삼고 헐뜯기 좋아하며 외곡된 자들은 모세를 조롱하고 있습니다. 이 변동은 오빗이 흉내냈던 것들 외에 더 이상 실재에 대한 현상을 지니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랑하기를 그것은 별로 신임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빗이 우화적인 장난으로 간접적인 하나님의 보복에 대한 가장 분명한 증거에 관하여 불신을 던지고 있는 것은 사단의 간교한 술책으로 일어난 일이라고 추측합니다.
이방인들이 멋대로 무엇을 조작하던 간에 그것은 사실 전혀 우리의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고려해 볼 중요한 것은 모세의 해석이 모호하거나 도저히 믿어질 수 없는 것을 포함하고 있는지 그렇지 않는지에 대해서입니다. 그리고 먼저 우리가 묻고자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무에서 창조하셨는데 그분이 적당하다고 보신다면 왜 다시 그분이 그것을 무로 돌아가게 하실 수가 없겠는가? 하는 것입니다.그리고 이 사실이 인정되면 반드시 그렇게 인정되어야 하지만 그분이 기뻐하실 때는 그 인간을 다시 돌로 되게 하실 수가 없을 것이 무엇이란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권능을 훼손시키면서 자기들의 예리함을 과시하고 있는 그런 월등한 철학가들은 날마다 자연 과정에서 놀라운 기적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수정이 그렇게 단단한 고체가 되었는가? 그리고 희귀한 예들은 언급하지 않더라도 어떻게 생명 없는 무 생명의 씨앗에서 살아있는 동물이 태동되는가? 그리고 어떻게 새들이 알에서 생산되는가? 그들은 이와 같이 수없이 많은 예들을 반드시 인정하지 않으면 안될 위치에 있으면서 이 한가지 예에서 유독히 기적이 그들 자신들에게 왜 우스꽝스럽게 보인단 말입니까? 그렇다면 그들은 부활이 생명으로 다시 회복될 것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믿을 수 있단 말입니까?
시체가 완전히 부패되어 버린 상태에서 부활이 다시 생명을 소생시켜 줄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란 말입니다. 특별히 여자의 몸이 소금 덩어리로 화했다는 것을 모순된 것으로 여기는 자들은 부활을 믿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롯에 아내가 소금 동상으로 화했다는 사실이 언급되었을 때 그의 영혼이 자연의 소금으로 변했다고는 절대로 상상하지 말아야 합니다. 비록 그녀가 특별히 다른 죽음을 당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보이게 되었지만 그녀는 우리와 함께 똑같이 부활에 참여하게 된다는 사실은 전혀 의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모세가 그 동상이 소금 맛을 지닌 것을 의미한다고는 추측하지 않습니다.
그는 오직 그곳을 지나가는 자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하여 무언가 유별한 것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곳에 어떤 표시 같은 것이 박혀 있어서 그것으로 모든 사람이 그것이 유별난 것으로 기억할 수 있게 해야 되는 것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또 다른 자들은 또 소금 동상을 도저히 부패되지 않은 것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영원히 지탱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자의 주해가 보다 참신합니다. 그러면 이제는 다음의 문제가 대두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그녀가 다시 소돔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그렇게 돌아본 것이 아닌 것을 아시면 왜 그 불행한 여자의 경망스런 행동을 그토록 가혹하게 벌하셨는가 입니다.
그것은 아직까지도 의문시되고 있긴 하지만 그녀가 자기 눈에서 전개되는 확실한 증거를 더 원했기 때문에서 일 것입니다. 또는 멸망당하는 사람들이 가없어서 그들이 있는 방향으로 다시 한번 눈을 돌려 봤을 것이라는 해석도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그러나 모세는 분명하게 그녀가 의도적으로 하나님 뜻을 거역하여 그렇게 분투했다고는 주장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와 그녀의 남편의 구원이 도저히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긍휼에 대한 본보기입니다.
그러므로 그녀의 그런 배은망덕한 행위는 그렇게 벌을 받아야 했던 것이 옳았습니다. 이제 만약 우리가 그 모든 상황들을 헤아려 보면 그녀의 잘못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분명합니다. 첫째로 뒤를 돌아보고자 하는 욕망이 믿지 않고 의심하는 상태에서 야기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할 때보다 그분을 불쾌하게 하는 일은 없는 것입니다. 둘째로 그녀가 악한 욕망으로 동요되었다는 사실입니다(눅17:22).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녀를 부르신 곳으로 서둘러서 가기 위하여 소돔을 기쁜 마음으로 떠나지 않았다는 것을 그리스도의 말씀 가운데 찾아보게 됩니다.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 정말로 세상의 유혹들이 우리를 하늘 나라의 생활을 생각하는 일로부터 떠나게 하려는 것에 말려들지 말라고 명령하고 계신 것을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허락하신 호의를 만족하지 않고 그녀는 거룩하지 않은 욕망으로 점점 기울어졌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입증해 주는 것이 또한 떠나기를 망설이고 주저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모세가 암시하기를 그 남편 뒤에서 뒤를 돌아봤다고 말할 때 벌서 자기 남편을 따라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자기 남편 쪽을 향하여 뒤를 돌아본 것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그녀의 발걸음이 너무 느리기 때문에 빨리 가지 못하고 그 남편 뒤에 처져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남편을 보려고 뒤를 돌아볼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녀의 영원한 구원에 관하여 어떤 단정을 내리는 것은 부당한 일이지만 그러나 이것만은 그럴듯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으니, 즉 하나님이 일시적인 형벌을 내리심으로 그녀의 영혼을 구출해 주셨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육신 가운데서 그분의 백성들을 가끔 징계하시므로 그렇게 하셨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분이 그런 방법으로 하신 것은 그들의 영혼이 영원한 멸망에서 구원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에 대한 지식이 그다지 별로 유익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가 위험이 없이 알지 못한 채로 그냥 있으려면 하나님이 모든 세대에 공통적인 유익을 위하여 주신 그 본보기에 관심을 갖는 것이 더 낳을 것입니다. 만약 그 형벌의 가혹성이 우리를 소름끼치게 한다면 그리고 두려움을 초래시킨다면 우리는 이것을 잊지 말아야 될 것입니다. 오늘날도 소돔에서가 아니라 지옥에서 구원받은 자들이 그들을 부르신 하늘나라의 소명에 대하여 제안된 상(賞)에 관심을 두는 것보다는 오히려 다른 목적에 그들의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는 그들의 죄는 절대로 롯의 아내의 죄보다 부족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3. 본문 27-28절은
“(27)아브라함이 그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여호와의 앞에 섰던 곳에 이르러
(28) 소돔과 고모라와 그 온 들을 향하여 눈을 들어 연기가 옹기점 연기같이 치밀음을 보았더라” 입니다.
모세는 이제 아브라함에게로 화제를 돌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절대로 천사의 입에서 직접 들었던 것을 소홀하게 받아 넘기지 않았던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세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심판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왔다고 기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조금 전에 롯의 아내에 관해서 언급하였지만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자기의 눈을 더 신뢰했다고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가 의심했기 때문에 직접 탐사해서 확인하려고 왔다고도 회의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 대신 본분에서 천사들이 헛되이 말한 것이 아니라는 것으로 심중을 굳히고 있는 가가 그 사건의 실제 상황을 직접 목격함으로 확증을 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렇게 한 것은 얻어진 확증은 그 자신과 자손들에게 유용한 것이 되게 하려는 의도에서였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날 밤을 온전히 자기 조카의 안전에 관하여 걱정을 하면서 뜬눈으로 지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점에서 그가 만족하였는지는 우리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브라함이 그를 걱정하는 것이 계속되었다고 추측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소망과 두려움 사이에서 망설이면서 결국 롯에게로 가서 그가 정말로 구원되었는지를 확인하였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또한 비록 그가 다른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큰 불이 난 후에 남아있는 연기만 보았지만 이것은 여호와께서 아주 기억에 생생하게 사라지지 않은 형벌에 대하여 그의 자손들에게 줄 증거로 주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곳의 표면에 그분의 기념비를 영원히 있게 하시려고 계획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세상이 쉽사리 의심을 던지는고로 그것으로 말미암아 그런 흔적이 태초부터 존재해 왔던 그곳의 자연적인 현상이라고 쉽게 믿게 되거나 또는 그곳의 변화가 우연히 되어진 것이라고 믿게 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의 목전에다 복수에 찬 그분의 활동을 공개시키는 것을 기뻐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셔서 그 자손들에게 그것을 선포하는 임무를 수행하게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