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는 프리젠테이션 그림으로 보겠습니다.
그냥 참고로 보십시오.
키라바지오(1571-1610)
이태리 북부의 작은 농장주 아들로 태어나서, 그림을 배웠다. 삼촌이 카톨릭 사제로 밀라노에 있어서 밀라노와 고향을 왔다리 갔다리 했다.
6세 때 아버지가 18세 때 어머니가 죽었다. 작은 포도밭은 상속받았으나, 재산을 탕진했다. 로마로 갔으나, 자리 잡지 못하고, 뒷골목 생활을 했다. 이때 그린 그림들이 초기 작품이다.(카드 사기꾼, 점쟁이 등)
델몬트 추기경을 만나, 후원을 받으면서, 생활이 조금 풀린다.그러나 분노 조절이 잘 안 되는 성품이어서, 고소고발을 자주 당한다.
1600년 경에 그리 ‘마태의 소명’과 ‘마태의 순교’로 무명의 설움을 조금 탈피하고, 생활에 조금 여유가 생겼다. 그러나 1606년까지 고소를 11번이나 당한다. 운동 경기에서 시비가 붙어 상대로 칼로 찔러 살해하면서, 로마를 야반도주하여 벗어난다. 나폴리에 갔다.
이후로 나폴리로 도망가서 그의 말년 작품을 남긴다. 떠돌이 생활에서 죄도 사면받고 로마로 돌아가고자 했으나, 1610년에 나폴리에서 사망했다.
그의 작품은
섬세하고, 사실주의 양식의 그림을 그렸다.
빛을 이용하고, 화려한 표현을 최대로 이용했다.
카라바지오 작품은 감상자가 그림 속으로 들어가 그림의 부분이 되는 느낌
그림
과일 바구니 1598
극도로 사실적이다.
2. 바쿠스 1. 2 — 아주 사실적이다 라고 평한다 1594, 98
3. 카드 놀이 사기꾼(cardsharp) 1594
로마에 와서 떠돌이 생활을 할 때 뒷골목 풍경을 그렸다.
4. 병든 자화상 —22세 때 자신의 처지를 그렸다.
5. 점쟁이 1593
로마 뒷골목의 집시 여인 모습이다.
6. 이집트 피신 중의 휴식 1598
7. 마태의 소명 1602
8. 마태의 순교 1602
동물적 잔인함을 표현하여 극적 효과를 노렸다.
7, 8의 작품으로 명성을 얻고, 무명에서 벗어났다.
9. 그리스도 체포 1602
10. 베드로 순교 1601
11. 예수의 매장 1603
12. 이삭의 희생 1603
13. 유디트 1599
전설적 이야기에서 극적인 장면을 그렸다.
14. 알렉산드리아의 성녀 카트리느 1599
15.엠바고의 저녁 식사 1601
16. 로사리의 마돈자 1607
나폴리 시대의 그림이다.
17; 로테르의 마돈나(1605)와 묵주의 마돈나(1607)
18. 마태와 천사 1602
19. 성모 마리아의 죽음 1607
20. 채찍질 1607
21. 세례 요한의 참수 1608
22. 다비드
23. 예수
2. 아버지(오라지오 젠틸리스키 1563-1639)
이태리 바로크 화가이다.
24. 다이아나 1623 (스캔 파일 5.4)
26. 수태고지 1623
3. 아르테미스 젠틸리스키(1593-1652)
카라바지오의 화풍을 가장 충실하게 따른 이태리 바로크 화가로,
카라바지오 화풍을 후대에 전했다. 여성화가이다.
화가인 아버지 젠틸리스키로부터 그림을 배웠다. 17세 때 아버지의 지인이면서 화가인 사람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법정에서 — 아주 깊은 심적 상처를 받았다고 한다. 그가 그린 그림, 유디트는 아주 유명하다. 흔히 카라바지오가 그린 유디트와 많이 비교한다.
서양미술사에서 최초의 여성 화가로 꼽히며
오늘날의 여성주의자들이 아주 높이 평가하는 화가이다.
(이 화가도 여자이어서, 수 백 년을 거의 잊혀지다시피 하였으나
여성주의 운동이 불 붙은 현대에 와서 재조명 받았다.)
27. 유디트(스캔 파일 5.3에 있다)
28. 유디트와 적장의 머리를 가지고 있는 하녀
29. 자화상
4. Annabale carraci (1560-1609)
안니발리 카라치 -- 고전주의에 입각한
활동시기는 카라바지오보다 조금 앞이다.
a) 1620년 경이 되면 미술 사조가 카라바지오의 영향력이 감소하고,
카라치의 르네상스로 회귀하는 고전주의 미술이 펼쳐진다.
b) 미술학교(아카데미)를 설립하여 고전주의 양식을 가르쳤다.
고전주의 양식이 아카데미즘이 되어서 서양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c) 푸생과 같이 외국 생활을 하였다.
d) 그리스-로마 신화를 주제로 그렸다.
1) 후기 르네상스 및 매너리즘에서 초기 바로크로 연결하는 역할을 하였다.
2) 처음으로 잘 조직된 예술학교를 설립하여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순수 예술 아카데미의 근거가 되고 있다.
회귀하였다.
4) 티치아노와 코렛지오 기법을 열심히 공부하였다.
--> 그림의 선이 우아해지고, 부드러워졌다.
5) 1590년에 로마로 가서 귀도 레니에게 영향을 주었다.
6) 1595년 파로네세 추기경의 주문으로 페로네세 천정화를 그렸다.
30. 페로네세 천정화
--> 르네상스의 전성기에 그리던 고전적인 기법으로 그렸지만 다양한 환상적 요소들이 조화를 이루어서 비로크 미술의 시작을 알려주고 있다. 그의 그림은 푸생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페르네세 천정화를 두고 최후의 이태리 르네상스 천정화인 동시에 고전적(신화적) 주제를 도입하여 새로운 장(바로크 미술)을 열었다는 평도 듣느다.
따라서 카라치는 최후의 르네상스 화가이면서, 바로크 회화에 서광을 비춘 화가라는 평을 듣는다.
31. 수태고지 1588
32. 피에타(1599-1600)
색상을 조절하여 전체적으로 유연하게 보이게 표현하였다.
매너리즘 양식(장식성이 강함)에 주제도 분명히 함으로(바로크 양식으로)
5. 귀도 레니 1575 –1642
카라치가 세운 아카데미 학생으로, 카라치를 따른 화가이다.
라파엘의 양식으로 그린 고전주의 회화의 단단함과 엄격함을 보인다.
34. 아틀란타와 히포멘스 1625
역동성(운동감-서로 대비되는 옆 모습ㅇ로)과 고전주의 양식을 보여준다.
36. 헬렌의 유괴 1631
6.코르토나(1595-1669)
코르토나는 전통 고전주의 양식과 바로크 양식을 절충하였다. 고객이 많았다. 화려한 장식성과 이야기를 담고 있다.
바르베리니 궁전의 ‘천국의 승리’는 그의 대표작이다.
37. 신국의 승리 1619
38. 사바니 여인을 강탈
39. 로무로스와 로무스 1643
7. 베르나르드 스트로지(1581-1644)
제노아에서 바로크 회화를 공부하였다. 그러나 플랑드로 화가인 루벤스의 영향을 많이 받으므로 그의 그림에는 루벤스의 화풍이 많이 들어있다.
초상화도 많이 그렸다.
40. 마돈나, 예수와 세례 요한 1620
41. 성 세실라 1625
**스페인의 바로크
16세기의 스페인은 중, 남미 대륙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금, 은으로 유럽의 최강국으로 군림하면서, 정치적인 전성기를 누린다. 그런데 하느님의 급작스런 이 선물은 준비가 안된 스페인을 당혹스럽게 하였다. 펠리네 2세는 카톨릭의 수호자로 자처하면서 신,구 종교전쟁에 간여하였고, 네델란드 독립 전쟁을 진압하기 위해서 국부를 쏟아 부었다. 1588년에는 무적함대가 영국 함대에게 패하므로 스페인은 점점 쇠퇴의 길로 접어 들었다.
17세기 스페인은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무척 어려운 처지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도 이 시기가 스페인의 문화, 예술이 꽃핀 시기이다. 정부는 프랑스처럼 절대 왕정(루이 14세처럼)을 행사할 수도 없었고, 경제력도 이미 힘을 잃고 있었다. 예술도 중앙에 집중하지 못하고, 지역마다 지역에 맞는 특성을 꽃피우고 있었다.
17세기를 지배하는 미술 사조는 바로크 미술이다. 바로크 시대에 스페인을 대표하는 3대 화가로 엘 그레코, 벨라스케스, 고야를 꼽지만 엘 그레코는 매너리즘으로, 고야는 후기 화가로 취급하면 벨라스케스가 스페인의 바로크를 대표하는 화가가 된다.
1. 벨라스케스(1599 – 1660)
*벨라스케스의 미술
극도의 사실주의적 미술로서 눈에 보이는 것은 공기의 미동까지도 그렸다는 평을 듣지만, 그림이 너무 단조롭다는 (자기 양식에 충실함) 평도 동시에 듣고 있다. 따라서 그의 그림은 열정이나, 낭만성이나, 신비성이 모자란다는 말도 듣는다. 이것은 그의 생애가 극적이지 않고, 순탄하였던 것도 원인이리라고 한다.
벨라스케스의 미술에는 무의식의 표현인 의외성, 비상식성, 은밀한 내면의 욕구를 표현하기보다는 순수 시각적 표현에 주안점을 두었다. 그의 작품은 너무 완벽하여 ‘거울에 비친 듯한 사실, ’ ‘세계를 비친 한 장의 유리’라고 평하기도 한다.
벨라스케스는 붓을 빠르게 움직이므로 봇자국이 오랜 머문 흔적이 없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라고 말한다.
초상화는 밝음과 어둠을 대비하여 조각같은 윤곽선을 없애는 대신에 회색의 공간 속에 잘 조화시키고 있다고 한다.
(위의 설명은, 뛰어난 손재주(재능)로 아주 잘 그린 그림이지만, 화가의 의식이나, 창작 의욕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벨라스케스의 년보(1599-1660)
1599 -- 세빌라에서 출생, 아버지는 소귀족 출신으로 공증인이었다.
중류의 생활로 별반 어려움 없이 어린 시절을 보냈다. 당시 세빌라는
스페인의 하나의 중심도시였다.
1611 -- 세빌라의 화가 파체코와 6년간 도제생활의 계약을 맺고
파체코의 화실은 세빌랴의 지식인이 모여든 곳이어서 여기서 인문학과
문학의 지식을 많이 습득하였다. 화가 수르바란도 여기서 만났다.
1618 -- 스승인 파체코의 딸 후아나와 결혼.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에 온 그리스도’ ‘식탁에 앉아있는 세 남자’
‘달결 프라이를 하는 노파‘를 그렸다.
술집이나, 부엌, 일상적인 생활 모습, 음식물, 조리 기구 등을 함께 그림의
소재로 다루 었다. 이런 양식의 그림을 “보데고네스(=선술집이라는 뜻) 회화” 라고 한다. 이런 양식은 벨라스케스의 초기 회화에 많이 나타난다.
1620 -- 세비야의 물장수를 그렸다.
아주 사실적인 그림이다. 물병 안에 넣어둔 무화과 잎도 선명히 보이도록 그렸다. 이 그림을 자신이 아주 자랑스러워하면서 로마에 갈 때 같이 가지고 갔다. 자신의 그림 실력을 선전할 때 이 그림을 보였고, 실제로 이 그림은 그의 명성을 높여 주었다.
이 그림은 카바라지오의 빛과 사실주의적 기법을 잘 응용하여 그림이란 단순히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고, 자연을 눈으로 읽고 화폭 속에 자신의 형상으로 그려내는 것이다, 라고 말한다.
1621 -- 펠리페 4세가 16세에 왕위에 올랐다. 이때부터 세비야 출신의
올리바데스 백작이 대권을 쥐고 권력행사를 한다. 세비야 출신의 벨라스케스 를 후원하여 앞으로 벨라스케스를 탄탄 대로로 나아가게 했다. 벨라스케스를 궁정으로 불렀다.
1623 -- 올리바데스 백작에 의해 궁정으로 들어와서 펠리페 4세이 초상을
그렸다. 다른 화가의 견제가 심했다.(이때 6명의 궁정화가가 있었다.)
이때 그린 펠리페 4세의 초상화는 이후 왕의 초상화의 모델이 되었다고
한다.
1628 -- ‘바쿠스의 축제’ --외교 사절로 스페인에 온 루벤스를 만나서
그의 영향이 보이는 그림이라고 한다. 벨라스케스가 신화를 소재로 그린
최초의 그림이라고 한다. 고전적인 누드 양식이 나타난다. 다른 인물은
세파에 시달리는 민중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이태리 여행을 하였다.
1634 -- 말을 타고 있는 왕실 가족,
1635 -- 브레다의 항복
1631년 로마에서 스페인으로 돌아온 이해 이후의 시기가 가장 왕성한
활동을 한다.
브레다 함락 -- 1625년 일 년이나 저항하던 네델란드의 브레다가 함락하자 패배한 장군이 무릎을 꿇으려 하자, 승리한 스페인 장군이 같이 말에 내려서 꿇어앉지 않게 한다.
승자의 아량, 패자의 자존심을 지켜준다는 --- 신사도 정신을 표현한 것이다. ===> 이후 벨라스케스의 지위가 계속 높아져 간다. --시종관으로
1640 -- 카탈류 지방의 반란, 네델란드 독립운동의 격화 등으로 스페인
궁정은 어려움에 빠지고 올리바데스 백작도 1643년에 실권한다.
1649 -- 이태리 방문
1650 -- 48-49 50, 어느 해인지는 모르지만 “후안 데 파레하” 초상화 그림 후안은 무어인의 피가 섞인 벨라스케스 화실의 조수겸 노예였다.
서민의 티가 베여있는 얼굴과, 약간은 깔보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는 모습, 오젤로의 눈빛을 닮았다고 한다. 후안도 화가였다. 노예신분과 화가로서의 예술적 감성이 어울린 내면이 어울린 그 눈빛이 너무 잘 표현하였다고 한다. 비평가는 같이 전시한 다른 작품을 그냥 단순히 작품이라고 부른 반면에 이 작품은 ‘예술적 진실’이라고 불렀다.
벨라스케스는 곧 후안을 자유인으로 풀어주었다. 후안은 그냥 미미한 화가로 살았다고 한다.
교황 “인노켄타우스 10세”의 초상
로마에 온 벨라스케스에게 교황이 직접 부탁하여 그렸다. 인노켄타우스 10세는 평범한 교황이나 이 그림의 모델이 되므로 유명해진 교황이 되었다고 한다. 후안과 마찬가지로 색을 거칠게 칠하여 질감을 나타낸 작품이다. 정면이 아닌 약간의 측면으로 그려서 위엄 있는 모습이 되도록 하였다.
그러나 표정에는 약간 얼굴을 찌푸리고 자의식이 어린 눈빛(신분이 높은 사람이 하위의 사람이 못마땅할 때 바라보는 눈빛)을 띄므로 그도 인간임을 잘 나타낸 작품이라고 한다.
프란시스 베이컨은 고통에 찬 인간으로서 교황이다 라고 읽고 그의 작품에 모델로 응용하엿다고 한다. 그러면서 역사상 가장 유명한 초상화 중의 하나이다 라는 평을 하였다.
거울을 보는 비너스 = 로크비 비너스 (1648-9)
이 시대의 스페인은 엄격한 카톨릭주의가 충만한 시기였으므로 섣불리 누드를 그릴 수가 없었다. 벨라스케스는 왕의 신임을 믿고 가장 요염하다는 이 그림을 그렸다. 티치아노의 영향이 많이 나타난 그림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