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들이에 나셨다. 작년 이맘때 스틱을 짚고 나온 동기들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 거동에 더 불편한가 보다. 제시간에 나온 모습들이 보기엔 탱탱하지만 오랜만에 만나는 동기도 외면하고 신문에 코를 박고 앉는 품새는 옹졸함이 덕지덕지 묻어, 보기엔 좀은 그렇다.
대구에서 대전, 공주를 거쳐 예산으로 갈 모양이다. 예산부터 태안에 이르는 비산비야非山非野 지형이라 깡이 센지역이라 최영, 성삼문, 이순신, 윤봉길, 김옥균, 김좌진, 유관순이 여기 태생이다.
수덕사는 우리나라 대표적인 목조건축물로 국보이지만 그보다 ‘청춘을 불사르고’의 저자 일엽 스님이나 송춘희의 ‘수덕사의 여승’으로 알려진 수덕사다. 수덕사로 이르는 길 좌편에 수덕여관에 얽힌 사연들로 더 생생하다.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 때, 당대의 신여성 세 분은 윤덕심 나혜석 일엽 스님이다. 유덕심은 1926년 처음으로 대중가요 ‘死의 讚美’를 불렸던 가수이다. 그는 현해탄을 건너면서 사랑에 매몰되어 투신하였고, 또 한명은 여류화가이며 문장가인 나혜석이고, 나머지 한 명은 시인으로 유명한 일엽이다. 모두가 사랑에 버림받고 외면당한 여인들이다 .
일엽 스님은 20살 때 목사였던 부친이 죽었고 모친은 14살 때 돌아가셨다. 27살 때 큐슈 제국대학 대학생인 太田淸藏(오다세이즈) 사이에 아들이 있었지만, 일엽은 모질게 뿌리치고 불가로 귀의하였다. 그의 아들이 ‘어머니’하고 부르려면 오지 말라고 다그치자 그 후로는 일엽의 친구인 나 혜심이 보살펴주었다
이들 세 여성보다 수덕여관 안주인, 박귀옥 여사도 그들 못지않은 시련의 여인이다. 박 여사의 남편 이응로는 부인에게 수덕여관을 맡겨두고 대학에서 가르치던 제자 박인경과 프랑스로 떠난다. 1969년 세계 미술계의 거목 이응로는 동베르린 간첩 사건에 연루되어 본국으로 압송돼 교도소로 전전하자 부인 박 여사는 대전으로, 전주로 다니며 옥바라지에 전념하였지만, 출옥 후 이응로는 이혼하고 프랑스로 갔다. 물에 빠진 놈 건져놓으니 내 보따리 한다더니 흡사 그 짝이다. 그래서 수덕여관은 박 여사의 한 많은 삶이 담긴 여관이다
이응로는 수도여관 바깥 뜰 너럭바위에다 삼라만상과 영고성쇠를 문자 추상화로 암각 해 놓았다. 문자 추상화는 문자로 그림을 형상화한 것이다. 작가만이 숨긴 작품세계에 노루도 놀고 사슴도 뛴다. 산도 있고 나무도 자란다. 황새가 날고 뱁새가 운다. 맨드라미랑 예쁜 꽃봉오리가 피고 동산엔 아이들이 놀고… 문자추상화는 전기드릴로 깎았는지 새겼는지 매끈하고 말쑥하다. 이 암각화를 탁본해 상품화 하면 좋을 텐데… 그런 발상을 안 하는 것일까 못하는 것인지 기념 상품 가게는 늘 한산하다,
작품의 솜씨에 취하고 싶었지만 아쉬움을 두고 수덕사로 올랐다.
수덕사의 압권은 목조건축 대웅전이다. 국보 49호다. 한때 국보 순위를 두고 말들이 많았다.
1,2,3,4… 순서에 매몰되어 난리를 피웠지만 다들 무식한 소치다. [
대웅전은 맞배지붕이다. 건물의 특징은 측면에서 봐야 그 정갈함과 아름다움을 완상할 수 있다.
대칭 구조가 뚜렷하다. 황토 색깔은 우리네 정서를 품고,
법당엔 많은 불화들이 있다는데 퇴색되어 분간하기 어렵다.
기다리던 점심밥이 설익었다. 주인을 탓하기보다 혼자 손에 그 많은 사람을 대접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을꼬! 노임을 올리고 노동시간을 줄이면 일자리가 미어지는 줄 아는 돌대가리들 때문에 설익은 밥을 먹게 되었다.
점심을 먹고, 곧장, ‘장부출가생불환’의 다짐으로 독립운동을 나선 윤봉길 의사를 모신 충의사에서 묵념을 드렸다. 의사의 모습보다 앉은 의자가 어울리지 않았다. 어느 사이트에 윤 의사는 무슨 과의 전문의인지 하고 물었다는 우스개는 한글세대를 빗대고 있지만, 그것 또한 우리의 잘못이 아닌가. 윤 의사는 외과도 내과도 아닌 독립운동을 한 의사일 뿐이다. 의사義士는 무력으로 목숨을 바쳐 독립운동을 펼친 분이고, 열사烈士는 정신적인 저항으로 독립운동을 펼친 분들이다.
광장은 태극기 물결로 장관이다. 태극기가 제 신명에 춤추는 데가 여기만 한 데가 있을까. 백여 개의 깃발은 신선하고 산뜻하고 정갈하다. 국운이 펄럭이고 기상은 높았다. 느릿느릿 따라오던 차령산맥조차 옹골찬 바람으로 태극기 물결에 동참한 듯 평화롭다.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입니다.
하늘 높이 아름답게 펄럭입니다.
태극기가 힘차게 펄럭입니다.
마을마다 집집마다 펄럭입니다.
이 동요는 국민학교 음악교과서에 실린 동요이다. 마을마다 집집마다 펄럭이던 태극기는 이제는 잊어 원아도 초등생도 부르지도 않은 노래가 된 지 오래다
윤봉길의사기념관에서 맨 먼저 맞이한 글이다.
1928년 열아홉이 되던 해, 윤봉길이 길을 가는데 한 젊은이가‘글을 아느냐’고 물었다.
그러고는 한 아름 안고 가던 무덤 푯말을 길에다 내려놓고
‘이 중에 김선득이라는 이름이 적힌 푯말을 찾아달란다.
윤봉길이 김선득 푯말을 찾아 주며 이 푯말이 뽑은 곳에 무슨 표시라도 해 놓았는가 하고 묻자
젊은이는 “아이고! 우리 아버지 산소를 아주 잃어버렸네!”하고 통곡해
윤 의사는 그날로 문맹 퇴치 운동을 시작하였다 한다.
기념관에 걸린 시골 장터 풍경은 조상들의 모습이요
충청도 양반네들의 생활상이라 사진기를 들어댔다.
우리는 지금 얼마나 잘 사는지, 감사하며
충의사와 광장, 기념관을 들락거리며 쪼여들 온 시어들은
촛불도 없고 미움도 없이 오직 독립만 있었다.
차령산맥은 사당을 감싸 굽어보고 있었다.
사당과 기념관의 차분한 운영이 인상적이라 국고가 지원되느냐고 물었더니
예산군 자체예산만으로 운영한다는 파견된 사무원 말이 종일 떠나지 않았다.
‘동사무소’를 ‘주민 센터’로, 다시 ‘주민행복복지센터’로 변경했다.
이름을 바꾸면 간판도 문서도 고쳐야 한다.
행복도, 복지도, 글자만 바꾸면 저절로 굴러오는 줄 아는 모양이다.
이는 고급공무원들이 해외연수를 마치면 그 분야에서 특별한 아이디어를 강요해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흡사 공금 도둑놈들처럼
일본은 명치 때 쓰던 ‘동사무소’ ‘파출소’를 아직도 쓰고 있다.
그들은 그래도 선진국 반열에 있지 않은 가.
수덕사, 수덕여관, 충의사, 김선득이 지워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