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고장 대전(大田)은 산성이 국내에서 가장 많은 것으로 알려져 그 만큼 이곳에서전쟁이 많았다는 증거다. 체계적으로 국가가 성립된 삼국시대 대전은 대체로 백제에 속했지만 고구려, 신라와도 맞닿아 서로 뺏고 뺏기는 전쟁이 자주 일어났다. 따라서 대전지역은 48개나 되는 산성이 있어 학계는 대전을 ‘산성(山城)의 도시’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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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족산 정상부에 둘레 1,037m의 테뫼식 계족산성의 모습이다) |
대전광역시 대덕구 장동 계족산성(사적 제355호)은 높이 399m의 계족산 위에 둘레 1,037m의 테뫼식 산성으로 대전의 산성중에 최대 산성이다. 1997년부터 2002년까지 3차례 발굴조사를 통해 성벽과 문지, 건물지, 봉수대, 집수지 등이 확인됐으며, 성벽과 남문지, 집수지 등에서 백제 유물과 신라 유물을 함께 볼 수 있었다.
삼국시대 대전지역은 신라와 국경을 이룬 전략적 요충지였다. 옥천에서 신탄진으로 이어지는 천연 지형지물을 이용해 왕도 공주 웅진성과 부여 사비성의 위성 역할을 했다. 아직도 곳곳에 옛 백제의 전술적 가치를 말해주는 지명과 장소들이 단서로 남아 있다.
한반도 남반부 중심에 위치해 영남권이나 호남권에서 서울을 향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했고, 반대로 서울지역을 장악한 세력이 남하하려면 먼저 차지해야 할 곳이 바로 대전지역이다. 이런 교통과 군사적 전략요충지인 대전을 사수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산성의 도시로 자리매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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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문산성에서 바라보면 대전 시가지가 한눈에 보인다-대전시 홍보관 자료) |
중구 대사동 보문산성(시 기념물 제10호)은 표고 457.2m 보문산 정상에 둘레 280m의 테뫼식(산 정상을 둘러쌓은 성)이다. 발굴조사를 통해 성벽과 문지가 조사됐고 백제 유물도 다수 확인됐다. 성벽은 자연 지형에 따라 간단하게 가공한 4각의 돌을 사용해 축성됐는데, 동북 벽 급경사면은 자연 지형을 이용했다.
테미란 산의 능선을 따라 둥근 테 모양으로 수평 되게 한 바퀴 둘러 축성한 성을 일컫는 백제식 지명이다. 테미고개 부근 테미공원 정상부에 백제의 테미식 토성 흔적이 남아있다. 백제 말기 신라와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보문산성의 전초기지였던 것이다. 보문산성과 계족산성, 월평동산성이 산 정상부에 테를 두른 듯 흙과 돌을 쌓아 만든 ‘퇴뫼식 산성’이다.
대덕구 연축동산성(우술성), 유성구 구성동산성(노사지현성) 등의 유적들은 백제의 전술적 가치를 보여준다. 특히 백제 23대 동성왕(479~501)은 신라 소지왕 때 이벌찬 비지(比智)의 딸과 혼인하고 나제 동맹을 맺었으나, 신라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고, 대전 동쪽 부근에 많은 성을 쌓아 동성왕(東城王)이라는 칭호를 얻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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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평동산성은 둘레 710m의 포곡식 산성이다) |
서구 월평동산성(대전시 기념물 제7호)은 표고 137.8m 산 위에 쌓은 둘레 약 710m의 포곡식(계곡과 산정을 함께 두른 산성)이다. 백제 유물이 출토됐지만, 산성과 관련된 월평동 유적지에는 고구려 유물이 확인돼 눈길을 끈다.
백남우(문화관광해설사) 씨는 “대전 시가지를 둘러싸고 있는 고대 산성을 잇는 둘레 산길은 바로 고대 산성을 잇는 길로 시민들이 역사와 자연을 체험하며 걷는 최고의 산길이죠. 지킴의 역사인 고대 산성들을 잇는 이 길을 고대 백제어 ‘테미’의 의미를 살려 백제 산성 테미길이라고 부르자”고 제안한다. 대전지역에 산재한 산성에 대한 역사와 스토리텔링의 발굴 노력이 어느때 보다 절실하다. <구항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