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6일(월)
* 시작 기도
(히 11:1-2)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주님...
주님이 말씀하시는 믿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신념과는 전혀 다른 줄 믿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는 신념이 아니라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입니다.
약속은 받았으나 아직 오시지 않은 아들을 오신 것처럼 믿은 믿음의 선진들을 그 예로 들어 기록한 것이 히브리서 11장 곧 믿음장입니다.
또한 ‘우리가 이들처럼 살자’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되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음을 알고 오직 은혜로 살 것을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오직 은혜를 구하는 삶은 나 자신을 부인하는 삶이요 그것이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임을 주께서 천명하신 것입니다.
나의 연약함을 인정하오니 오늘도 주신 새 날에 나의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나의 힘이 아니라 주님과 연합한 생명으로 이 하루를 살게 하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십자가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워주소서.
거룩한 불구자가 되어 영적 하루살이의 삶을 살기 원합니다.
날 불쌍히 여기사 긍휼을 베풀어 주소서.
오늘도 줌으로 복음을 전합니다.
나의 말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 증거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왕상 13:25-34
제목 : 여호와의 말씀으로 외쳐 말한 것이 반드시 이룰 것임이니라.
25 지나가는 사람들이 길에 버린 시체와 그 시체 곁에 선 사자를 보고 그 늙은 선지자가 사는 성읍에 가서 말한지라.
26 그 사람을 길에서 데리고 돌아간 선지자가 듣고 말하되 이는 여호와의 말씀을 어긴 하나님의 사람이로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를 사자에게 넘기시매 사자가 그를 찢어죽였도다 하고
27 이에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를 위하여 나귀에 안장을 지우라. 그들이 안장을 지우매
28 그가 가서 본즉 그의 시체가 길에 버린 바 되었고 나귀와 사자는 그 시체 곁에 서 있는데 사자가 시체를 먹지도 아니하였고 나귀를 찢지도 아니하였더라.
29 늙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람의 시체를 들어 나귀에 실어가지고 돌아와 자기 성읍으로 들어가서 슬피 울며 장사하되
30 곧 그의 시체를 자기의 묘실에 두고 오호라 내 형제여 하며 그를 위하여 슬피 우니라.
32 그 사람을 장사한 후에 그가 그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죽거든 하나님의 사람을 장사한 묘실에 나를 장사하되 내 뼈를 그의 뼈 곁에 두라.
32 그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벧엘에 있는 제단을 향하고 또 사마리아 성읍들에 있는 모든 산당을 향하여 외쳐 말한 것이 반드시 이룰 것임이니라.
33 여로보암이 이 일 후에도 그의 악한 길에서 떠나 돌이키지 아니하고 다시 일반 백성을 산당의 제사장으로 삼되 누구든지 자원하면 그 사람을 산당의 제사장으로 삼았으므로
34 이 일이 여로보암 집에 죄가 되어 그 집이 땅 위에서 끊어져 멸망하게 되니라.
* 나의 묵상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은 벧엘의 늙은 선지자의 거짓말에 속아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르고 말았다.
하나님은 이에 대하여 벧엘 선지자를 통하여 유다 선지자에 대한 심판을 경고하시고 그의 귀환길에서 사자로 하여금 그를 찢게 하셨다.
그의 시체는 길에 그대로 버려져 있었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 시체와 함께 서 있는 사자를 보고 벧엘의 선지자가 사는 성읍에 가서 말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벧엘의 늙은 선지자는 하나님의 사람의 주검이 있는 곳으로 가서 그 시체를 수습한다.
그리고 집으로 와서 자기의 묘실에 그를 장사하고 자기가 죽으면 자기의 뼈를 그의 뼈 곁에 두도록 아들들에게 유언한다.
그리고 벧엘의 제단과 북이스라엘을 향해서는 하나님의 사람의 예언이 확실하게 성취될 것임을 예언하였다.
이런 사건이 있은 후에도 여로보암은 계속해서 악을 행한 것과 그로 말미암아 여로보암의 집이 파멸에 이른 사실을 밝힘으로써 여로보암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한다.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은 벧엘의 늙은 선지자의 거짓말에 속아 결국 그도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 돌아가는 길에 사자에게 찢겨 죽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홀히 여긴 하나님의 심판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은 이 땅에서 육신의 삶과 죽음에 있지 않다.
그가 비록 하나님의 말씀을 경홀히 여겨 심판을 받아 죽었을지라도 그의 결국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갔음을 믿는다.
그 근거는 32절에서 벧엘의 늙은 선지자의 예언이 300년 후에 요시야 왕에 의해서 그대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왕하 23:16-18) 요시야가 몸을 돌이켜 산에 있는 무덤들을 보고 보내어 그 무덤에서 해골을 가져다가 제단 위에서 불살라 그 제단을 더럽게 하니라. 이 일을 하나님의 사람이 전하였더니 그 전한 여호와의 말씀대로 되었더라. 요시야가 이르되 내게 보이는 저것은 무슨 비석이냐 하니 성읍 사람들이 그에게 말하되 왕께서 벧엘의 제단에 대하여 행하신 이 일을 전하러 유다에서 왔던 하나님의 사람의 묘실이니이다 하니라. 이르되 그대로 두고 그의 뼈를 옮기지 말라 하며 무리가 그의 뼈와 사마리아에서 온 선지자의 뼈는 그대로 두었더라.
하나님께서는 요시야 왕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람의 묘실 주위에 있는 모든 무덤이 파헤쳐지고 그 해골조차 단에 불살라지는 지경에 처하는 심판하셨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택하신 하나님의 사람의 뼈는 보존게 하심으로 그가 안식에 들어갔음을 암묵적으로 계시한다.
또한 그에게 거짓을 말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게 했던 벧엘의 늙은 선지자(사마리아의 선지자) 역시 하나님의 사람의 뼈와 함께 보존한 것은 그 또한 안식에 들어갔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결코 우리가 구원 받는 근거가 우리의 행동 여부에 있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의 경우는 처음에는 잘 순종하였지만 그의 마지막은 거짓말에 속아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자가 되었다.
이는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에 잘 순종했을지라도 마지막 한 가지만 어기게 되면 그것은 전부를 어긴 것이 된다.
그런 자는 구약의 율법에 의하면 당연히 죽음이다.
나아가 벧엘의 늙은 선지자 역시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합한 자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작심하고 그를 속일 요량으로 거짓으로 그를 이끈다.
이런 사람은 선지자라기보다 거짓 선지자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요시야 왕을 통하여 그의 뼈 역시 잘 보존하게 하신 것은 그 또한 안식에 들어갔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물론 구원의 문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이다.
하지만 이 땅에서 선악의 개념으로 판단하여 이렇게 선한 사람은 마땅히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고, 또한 이렇게 악한 사람은 당연히 지옥에 갔을 것이라는 선악 판단은 금물이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런 구원의 근거는 절대로(Never) 우리의 행위에 있지 않다.
오직 하나님의 창세전 언약에 근거한다.
(딛 1:2) 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전(창세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엡 1:3-6)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나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하여 크게 오해하였던 자이다.
내가 마음대로 선악판단의 구조를 가지고 사람들을 판단하곤 하였다.
이는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 때에 사람인 아담과 하와를 만드실 때 선악을 판단하지 못하게 만드셨음을 알지 못하였다.
선악을 판단하는 주체는 오직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뱀의 유혹을 받은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고 선악을 판단하여 자기가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였다.
이는 진짜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이 되어 선악의 판단을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했던 것이다.
나는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선하게 만드셨으니 당연히 선악을 판단할 줄 아는 자로 만드셨을 것이라고 지레 짐작 하였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되어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내 마음의 잣대 즉 선악 판단을 하여 그들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였던가?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창세전 언약은 아예 알지 못하고 인간의 선악에 대한 행동이 구원의 근거가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죽기 직전에 예수님 우편 강도가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해 달라고 하자 주님께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신 말씀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야고보서에 보면 100개의 율법 중에 99개를 다 지키고 그 중 마지막 하나를 어기면 다 어긴 것이 된다는 말씀이 있다.
(약 2:10)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이 말씀에 의하면 이 세상에서 구원을 얻을 자가 어디 있겠는가?
이 세상에 의인이 하나도 없다고 하였는데 말이다(롬 3:10).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이나 벧엘의 늙은 선지자 그리고 예수님의 우편 강도를 보면 그들이 모든 죄를 다 회개했기 때문에 영원한 안식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때문임을 부인할 수 없다.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는 아브라함조차 그의 부인을 두 번씩이나 팔아먹지 않았는가?
다윗은 6, 7계명을 범하여 밧세바를 자기 아내로 삼고 그의 남편 우리야를 죽여 완전범죄를 꾀하기도 하였다.
물론 다윗은 침상이 적시도록 회개하였지만 그 회개가 완전한 회개이겠는가?
그가 지은 죄가 이것 하나라면 그럴 수 있다.
하지만 크고 작은 죄가 강을 넘치도록 많은 텐데 그 때마다 이 모든 죄를 다 회개했다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 역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영원한 안식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죄를 밥 먹듯이 짓던 자이다.
후에 목사가 되었지만 여전히 그 죄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래서 나의 행실에 늘 부담과 답답함 그리고 주눅이 들어 있었다.
물론 죄를 지으면 주님 앞에서 즉각 회개를 한다.
그렇다고 내가 지은 모든 죄를 다 회개했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이런 나에게 창세전 언약은 큰 자유함을 주었다.
나의 행실에 상관없이 택한 자는 주께서 이끌어 주신다.
비록 이 땅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길로 계속 갈 때는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이 임하기도 한다.
하지만 예전에는 그런 고난이 닥치면 기도로 돌파해야 된다는 이상한 믿음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을 많이도 아프게 했었다.
하지만 내게 임한 고난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복음을 통하여 깨달은 후에는 더 이상 상황해결에 대한 기도는 하지 않는다.
다만 내가 구하는 것은 없습니다, 오직 주님이 주기 원하시는 것을 주소서, 라고 기도할 뿐이다.
오늘도 하늘의 평화가 내 마음속에 임한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넘치나이다.
복음을 알지 못하고 내 마음대로 선악판단의 구조를 가지고 사람들을 판단했던 나를 불쌍히 여기사 주님이 기뻐하시는 자로 온전히 서게 하옵소서.
나 비록 연약하지만 약할 때 강함 되시는 우리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오니 주님의 은혜로 이 하루도 살게 하옵소서.
창세전 언약에 근거하여 감사함과 자유함을 누리게 하시되 내 마음대로 자행자지 하지 않도록 늘 하나님과 깊은 교제와 사귐을 갖게 하소서.
나를 십자가에 못 박고 오직 예수로 부요한 자로 살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