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장 없는 제헌절 고민하는 국회
장기화 우려 커지는 ‘입법부 공백’
참패에도 말로만 반성하는 민주당
국회 사무처는 한 달 후로 다가온 다음 달 17일 제헌절까지 국회의장이 선출되지 않을 경우 경축사를 누가 할지에 대해 최근 내부 검토를 했다. 국회법에 명확한 규정이 없기 때문이다. 박병석 전 의장 또는 최다선 의원 중 한 명이 할 수도 있다고 한다. 사무처 관계자는 조심스럽게 “과거 사례를 일단 살펴본 것”이라고 했다.
의장단도 상임위원장단도 상임위원도 없는 국회가 오늘로 벌써 19일째를 맞고 있다. 사실상 대화마저 단절된 여야의 힘겨루기 속에 국회 안에선 제헌절 기념식을 제대로 치르지 못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감돌고 있다.
국회의장 없이 제헌절 행사가 진행된 사례는 헌정사상 딱 한 차례 있었다. 김대중 정부 출범 직후 김종필 국무총리 서리 인준 문제 등으로 여야 간 냉전이 이어졌던 1998년 15대 국회 후반기 때다. 당시엔 직전 국회의장인 김수한 한나라당 의원이 대신 경축사를 했다. 15대 후반기 박준규 의장은 그해 8월 3일에야 선출됐다.
윤석열 정부 출범과 비슷한 시점에 시작한 21대 후반기 국회 역시 시작부터 ‘입법부 공백’ 상태가 이어지고 있다. 원내 제1당인 더불어민주당이 차기 의장으로 김진표 의원을 낙점했지만, 의장 선출이 원 구성 협상과 결부되면서 좀처럼 돌파구가 열리지 않고 있다. 상임위가 배정되지 않은 의원들은 역할이 없는 무임소(無任所) 상태다.
국회 정상화의 시급성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복합위기에 빠진 경제는 거의 모든 지표에서 빨간불이 켜졌다. 대통령실과 정부는 비상경제대응체제로 전환했다. 하지만 각종 대응책을 입법으로 현실화시켜야 할 여야는 주요 현안을 논의하기 위한 일정조차 잡지 못하고 있다. 물가 안정과 경제 활성화를 위한 법인세 인하, 고유가 수습 방안인 유류세 인하, 화물연대 파업 종결에 따른 후속 조치인 안전운임제 관련법 개정 등은 국회의 입법 조치가 뒤따라야 한다. 하지만 이를 논의하고 처리할 상임위 자체가 없는 상황이다. 여기에 북한이 7차 핵실험을 강행해도 이를 보고하고 논의할 국방위, 정보위도 없다.
지금의 갈등 상황은 민주당이 자초한 측면이 크다. 20대 국회까지 ‘원내 1당 국회의장, 2당 법사위원장’이란 관례가 이어져 오며 자연스레 교통정리가 이뤄졌다. 다수당의 입법 폭주를 막고, 협치를 통해 입법부를 운영하기 위한 안전장치인 셈이다. 중요한 것은 이전엔 의장과 법사위원장을 같은 당 출신이 맡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민주당은 21대 총선에서 176석을 차지한 뒤 국회의장과 18개 상임위원장을 독식해 버렸다. 이후 국회의장과 법사위원장을 모두 쥔 민주당은 검수완박 등 이른바 강성 지지층이 원하는 법들을 힘으로 통과시켰다. 돌이켜보면 민주당은 거대 의석만 믿고 지난 2년간 입법 독주를 했기 때문에 3월 대선에서 지고, 6월 지방선거에서도 연이어 참패했다고 불 수 있다.
대선 때 민주당은 1600만 명이 넘는 유권자의 선택을 받았지만 이번 지방선거에선 지지자의 40%가 투표를 포기하거나 다른 후보를 지지했다. 강성 지지층만 바라본 정치로 인해 지지 기반이 줄어들고 있다는 뜻이다. 선거 패배 이후 달라진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느냐에 따라 민주당의 운명이 바뀔 것이다. 말로만 하는 반성이 아닌 행동을 보여줄 때가 됐다.
길진균 정치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