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의 과거 인구가 100만인지 확실한 근거 자료가 없는관계로
몇가지 근거를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제가 추정해본 결과로는... 불가능 입니다....
경주가 과거 상당한 규모의 도시였던것은 사실입니다.
일단 수도라고 하는 곳을 보면 대게가 도성을 중심으로
도성내에 취락이 위치하고 그 주위로 발달한 일정한 규모..
즉 도성의 크기에 의해 비례하여 도시의 규모를 가늠할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경주는 조금 예외인 도시입니다.
경주는 이러한 나성이나 성곽이 없습니다.
대신에 주변에 산성을 여러게쌓아서 유사시엔 산성으로 대피하는
방식의 방어시설을 가지 있었습니다.
이때문에 경주의 취락은 이러한 성곽의 경계에 얼매이지 않고
효과적으로 확장 발달할수 있었던 것이지요.
이러한 방식의 도시확장을 취할만큼 경주는 큰도시였습니다.
하지만 이곳에 사람들이 과연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것이
100만이 상주했다 안했다의 정답이 될것입니다.
제가 사는 곳은 경주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라 어릴적부터 경주를
쉽사리 드나들어 경주지리와 주변 환경에 대해 토박이 만큼 잘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일단 경주의 입지조건은 분지의 형태입니다.
경주 시가지와 문화재가 위치한 부분은 낮은 언덕과 평야로 사람이 살기
적당한 지형입니다. 북으로는 대구쪽으로 길이나있는데 역시 산지이며
남쪽으로는 영남알프스의 길목으로 울산으로 갈수 있는데 그리 낮지 않은
산들이 구릉지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서쪽으로는 높은 산들.. 영남알프스의
시작이며 백두대간 태백산맥의 끝자락인만큼 보기에도 제법 높은 산들이 있습니다.
동쪽으로는 바닷가로 향하는 여러 길이 나있으며 나지막한 바위산이나 동산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것은 100만이라는 사람을 먹여살리기 위해선 그만큼의 농업생산력
을 가져야 하는데... 전 솔직히 좀 회의적인 입장입니다.
물론 지금의 경주모습과 그당시의 경주를 비교하는것은 무리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농사지을만한 땅을 본다면.. 경주는 그리 넉넉한 평지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더구나 대구경북지방에 사시는 분들이라면 잘아시겠지만 이지방에는
그리 눈에 띌만큼 넓은 평야는 없습니다.. 남쪽으로도 울산이 위치해있는데
잘알려 져있진 않지만 언양지방이 농사짓기에 적합하고 예로부터 제법 넓은
분지라서 이일대에는 지금도 쌀농사가 많이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 100만이라는 인구를 감당할만큼 넉넉하다는 생각은 안듭니다..
그렇다면 자체 생산력이 낮다면 외부에서 유입되는 경로를 알아봐야 하는데
경주로 들어오는 길목은 그리 호락호락한 지형이 아닙니다. 100만이 1년을
버틸 양식을 실어날라야 한다는 소린데.. 신라가 초기 토착세력이 강했던것은
이러한 외부와의 접촉이용이 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제가 앞서 설명하였듯... 지형을 언급햇듯... 육로의 수송이 그리 유리한곳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수운??? 울산지방이 항구로 쓰였다고는 하나 경주와 울산사이에도
낮은 산들이 많은데다가 경주의 강은 얕아서 강으로 도시 내부까지의 수송이
불가능 합니다..즉.. 서울과 다른점입니다.
수운에도 그리 용이치 않은 조건 입니다..
게다가.. 또하나... 연료입니다..
앞에서어떤분께서 경주인들은 숯을 연료로 사용했다고 하는데..
이숯은 그리 쉽게 만들어 지는 물건이 아닙니다.. 숯가마가 아무리 많다고해도
100만이라는 인구를 부양 할만큼 숯을 만들려면 경주일대대부분의 숲을 베어내야
했을 겁니다.. 가까운 과거에 우리 어른들이 땔깜을 산에서 끌어만 써도 산이
민둥산이 되어버릴 지경이었는데... 숯이라..
그리고
물입니다..
경주는 물이 풍부한 지형이 아니니다. 작은 개울이나 지류들이 여러곳 흐르기는 하나
식량보다도 더 중요도가 높은 물인데... 경주는 최근 발굴에 따르면 경주가옥들은
하수시설을 갖추었다고 하는데.. 경주인들이 물관리를 어떻게 했는 지는 모르나
자체적인 수량이 워낙 적기 때문에.. 100만이 상시 상주 했다고 보기는 더 어려워집니다.
쓰다보니 참 긴글이 되었는데...;;;
경주에 100만이사는것은 불가능하다고 보여집니다...
카페 게시글
동양사
Re:현재의 경주에 인구 백만이 거주 가능합니까?
카탁프락트
추천 0
조회 488
04.08.03 15:01
댓글 24
북마크
번역하기
공유하기
기능 더보기
다음검색
첫댓글 세번째 말하는 것이지만 고대에는 세금을 쌀과 베로 납부했습니다. 그리고 이 세금은 수도인 경주로 올라가지요. 대동강부터 원산만까지의 국토에서 납부하는 세금이 경주로 모일텐데 그렇다면 충분히 경주의 인구를 부양할수 있습니다.(대략50만~7,80만가량)
숯으로 밥을 지어 먹었다는 이야기는 기록에서 나온것이고 요즘은 이로인해서 신라가 망하는데 한몫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어쩌면 서라벌의 지나친 인구 과잉이 신라 멸망의 한 원인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아마 숯불 얘기가 사실이라면 산림파괴도 심각했을 것으로 생각 되어집니다.
현재의 분지터와 고대의 수도터는 다릅니다. 아무리 토박이라고 하더래도 그땅의 모든것을 알수는 없는 일입니다.
음 . . 숲의 서사시라는 책을 읽어보셨는지요. 아마 신라시대 말기에도 로마 말기와 같은 일이 일어났을겁니다. 정치적 혼란을 배경으로 인구부양을 위한 대규모 벌체를 통한 산림자원의 고갈이 경제기반을 완전히 붕괴시켜 버리고 . . 잦은 가뭄과 홍수를 부르는 . . . 신라도 아마 그런일을 겪지 않았을까 추측해봅니다.
무엇보다도 숯의 단례에서도 볼수있는 경주의 번영상에 대한 기록과 신라말기의 연속적인 천재지변들에 대한 기록은 그런 가정에 대한 매우 튼튼한 증거로 작용될수 있을듯 합니다.
통일신라시대 금성은 오늘날 경주보다 2~3배 컸습니다. 지금도 우리나라 남한 인구의 1/4이 서울에 살고 1/2이 수도권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현재 급속한 산업화의 영향으로 서울,수도권내에 많은 인구가 밀집해 있습니다. 허나, 이걸 그당시 경주의 인구문제를 뒷바침하는덴 문제가 있지 않을까요?
.......원래 조선시대 서울은 지금의 4대분 안이었지만 서울이 점차 커지면서 지금에 이르렀고 수도권이라는 위성도시들이 즐비할 정도로 커졌습니다. 마찬가지로 통일신라시대 금성도 지금의 서울과 같이 점점 비대해졌다는 말입니다.
지금의 경주가 예전 금성이 아니라는 뜻이며 당시의 금성은 지금 경주보다 2~3 배 이상 크다는 뜻입니다.
제가 이야기한건 전체인구대 수도의 인구비율에 대해서입니다.
초딩사냥꾼 님은 오즘 들어 그런 식의 말꼬리 잡기를 많이 하시는군요. 별로 유쾌하지 않습니다. 이 앞 글의 리플을 읽은 사람이라면 무슨 뜻인지 알 겁니다. 다시 한번 자세히 읽어 보시지요. 심히 거북하군요.
윗부분에서 이혁수님이 현재의 서울과 수도권의 인구비율(전체인구에 대한)에 대해서 말씀하셨고 저는 이에대해서 산업화의 인구집중화현상으로 그런인구비가 나타난것이므로 그것을 신라에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있겠다고 한것입니다.
여기 리플말고 원래 본 글에 쓴 리플을 읽어 보십시요. 인구 집중화의 원인은 꼭 산업화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고대에서도 상업이 발달한 곳에는 의례 인구들이 모입니다.
제가 앞글에서 얼마나 말꼬리 잡기를 했는지를 모르겠군요. 아무리 상업이 발달했다고 해도 현재의 서울처럼 인구 4/1 수도권 지역의 2/1이 모인것처럼의 인구비율이 나타날 가능성이 굉장히 희박하다고 생각합니다.
논점을 자꾸 흐리지 마시길. 현재의 경주보다 과거의 금성이 2~3배 이상 컸다고 분명히 말했고 지금의 서울처럼 고대 금성도 인구 밀집 현상에 의해 점점 비대해졌다고 언급했습니다. 제가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 뜬금없는 이야기를 했나요?
예전 글에서도 분명히 북경에는 [고려영]이라는 지명이 남아있고 고구려의 전형적인 판축기법으로 지어진 성의 흔적도 남아있다라는 제 글에 대해 님께서는 지나에도 판축기법은 있습니다로 답변했습니다. 그래서 고구려 판축기법이 어떻게 다른지를 제가 설명하자
님은 그것은 판축기법이 아닌 축성술이 아니냐고 물었죠? 그런 식으로 다른 사람 글 말꼬리 잡는 행위는 그만 하시기 바랍니다. 말장난 하는 겁니까?
한번 더 묻겠습니다. 님의 상식과 역사적 지식이라는 것이 삼국사기나 신당서, 혹은 KBS 역사 스폐셜에서 고증한 금성 인구 100만의 사실을 부인할 수 있을 정도라고 생각하십니까? 현재의 입장에서 과거를 단정하려는 생각은 지극히 위험합니다.
ㅡ.ㅡ;헛, 윗글답변에서도 제가 분명히 현재의 쇠락한 경주의 모습으로 옛날의 찬란했던 경주를 비교하기에는 무리라고 다른분게 답변을 달았습니다. 또한 신라가 아무리 상업이 발달했다 하더라도 현재처럼 수도에 인구가 1/4,수도권에인구가1/2식이라는건 무리고 있고 이것에 대한 답변을 한것이지 제가 언제 경주의
범위에 대해서 말했습니까? 그리고 위에 판축기법에 대한 것인데 판축이란 용어의 뜻이 뭡니까? 흙을 다져서 단단하게 만드는겁니다. 이과정에서 중국과 다른뭔가가 있습니까? 이혁수님께서 저번에 올리신 글에선 "포물선 모양으로 밑에는 큰 바위, 위에는 작은 바위식으로 토성을 보호하도록 2중 구조로 "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당연히 판축기법이 다른것이 아니라 축성술이 다른것이지요. 제말이 틀렸습니까? 토론을 하는 과정에서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고 의문이 생기는 점이 있으면 서로간에 대화를 통해서 풀어가는게 아닙니까? 그런데 단순히 말꼬리잡기식이라니요... 조금 실망했습니다.
자 이제 그만.........^^;; 제가 던진 조양돌 하나가 이렇게 많은 물결을 일으킬 줄이야........... 이 토론은 이쯤해서 끝맺음을 하는 것이 서라벌에 몇명이 살았던 결국은 학자들의 몫입니다.
신라시대의 경주는 아마 지금의 월성군지역까지 포함하는 영역이어을 것입니다.